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61)화 (60/89)

61화 왜 저기에 있어?

그러다 리체를 만났다.

“…….” 

6년 만에 만난 리체는 이전보다 키가 많이 자랐고, 이전보다 아름다워졌지만. 여전히 리체였다. 계속 바라보고, 계속 옆에 있고 싶었다.

리체, 나야. 내가 이안이야.

제 정체를 고백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안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어느 것이 맞는 일이란 걸. 이안은 알고 있었다.

히켄카가 알려준 제 수명의 끝. 16살의 봄.

우딕 아카데미 총장은 이안에게 말했다.

“크셀폰에 나가거라. 거기서 우승해. 길러준 값을 해야지.”

그때부터 죽음이 이안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1살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살기 위해 강해졌고, 찾아오는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그러다 보니 정상이었다.

17살의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겉으로는 16살의 모건 데이얼.

고된 세월은 이안의 분위기마저 다른 사람처럼 만들었다. 이제 모건과 11살의 이안드웨인을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리체도 날 몰라봤으니까.’

이안은 검집의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장식의 유리는 게르웨르 공작이 산산 조각낸 거울 조각 중 하나였다.

리체와 이안이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하던 시절, 둘 사이를 이어줬던.

“게르웨르 영지 저택에 있는 모든 걸 사라지게 할 거야. 그 전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면 말해.”

“이 주 정도 기다려 줄 수 있어?”

“가능하지.”

이안은 히켄카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고용인들을 모조리 해고했다. 하녀장은 퇴직금도 마다한 채 갈 곳이 없다며 이안에게 내쫓지 말아 달라 사정했다. 과거, 어린 이안에게 매일 약을 먹으라 건네던 자였다.

이안의 금안에 비친 그녀의 속마음은 탐욕이었다. 공작이 얼어붙은 공작가의 재물을 노리는.

“그럼 저택에 있어.”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런 뒤, 이안은 삼 일 밤낮을 방에 틀어박혀 조각 난 거울을 이어 붙였다. 온전하게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추억을 기릴 정도는 되었다.

이안은 거울을 가지고 황도로 올라갔다.

얼어붙은 게르웨르 공작과 하녀장을 영지의 저택에 남겨두고. 사라질 운명을 알지 못한 채, 하녀장은 여름밤의 꿈에 취해 웃었다.

판 대륙으로 떠나는 날.

모든 것을 버린 이안의 품에는 두 개의 작은 거울 조각이 있었다. 이안은 그것을 이따금 꺼내 봤다.

고된 훈련에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어두운 밤공기에 외로움이 사무칠 때,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버티고 살아왔다. 조각들이 닳고 금이 갈 정도로.

‘앞으로 3년만 더 버티면 돼.’

거울 조각을 보는 이안의 눈에 늘 그랬듯 따스함이 깃들었다.

그는 슬쩍 미소 지었다.

나는 너를 위해 살 거야. 리체. 

* * *

그날 오후.

도시로 들어온 세 개의 아카데미가 대회장에 모였다.

참가 자격 심사는 학과별로 받은 과제를 수행한 후, 시험 교관과의 전투에서 합격점을 받으면 통과하는 방식이었다.

“트아리체 로드윅. 과제 통과입니다.”

시험 교관은 50m 떨어진 곳에 수북이 쌓인 잿더미를 보며 말했다.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였던 것이었으나, 리체의 불 마법에 형태를 잃었다. 

양옆으로 몸통 과녁 근처에 그을린 자국만 남은 허수아비들이 민망하게 서 있었다. 그것도 과제를 통과한 학생들의 것이었다.

‘천재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군.’

그 월등한 실력에 시험 교관이 속으로 감탄했다. 허수아비를 단숨에 태울만한 위력과 크기의 불 마법이라니.

한편, 리체는 남몰래 주먹을 쥐고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많이 늘었는걸? 예전이었으면 공간을 죄다 태워 먹었을 텐데. 실력이 나쁘지 않네. 계약자.]

리체의 주머니에 숨은 파이톤스가 제 계약자를 대견스러워했다.

힘 조절도 제대로 못 해서 파괴만 하던 계약자였는데. 언제 이렇게 커가지고는.

‘도서관에서 별 조각을 발견 못 했으면 어쩔 뻔했어. 다 부수다가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지.’

이게 다 내가 대단한 덕분이라니까.

파이톤스는 흠흠, 작은 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다, 주머니에 같이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강한 별의 조각인 건 좋은데, 도대체 무슨 특성이지? 이래서 흑색은 골치라니까.’

파이톤스는 자신이 알던 별 중, 흑색의 별 조각이 되어버린 별들의 고유 특성을 떠올려 봤다.

영혼 소환, 저주, 은신, ……. 음침하기만 하고 쓸만한 건 없네.

“과제를 통과한 사람들은 심사장 건물로 가서 대기하세요.” 

파이톤스가 고민하는 사이, 리체는 안내받은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2층으로 된 낮고 넓은 건물이었다.

1층에는 전투를 위한 넓고 낮은 단이 있었고, 2층에는 3면의 가장자리를 돌출해 만든 관람석이 있었다.

“트아리체!”

출입문을 지나 1층에 선 리체를 누군가 2층에서 불렀다.

먼저 과제를 통과한 황립 아카데미의 마법과 학생이었다.

“첫 순서는 검술과라서 다른 학과 학생들은 올라와서 기다리래!”

“응.”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출입문 옆에 있었다. 그러다 막 심사장 안으로 들어오는 모건과 마주쳤다.

“아, 트아리체. 과제 끝났어?”

“…….”

모건이 살갑게 안부를 물었지만, 리체는 대답 없이 모건을 올려다봤다.

‘왜 그러지?’

눈앞에 리체가 있는 게 좋기는 했지만,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

‘약간 기분이 이상해.’

귀 뒤쪽이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리체와 계속 눈을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모건은 생긋 웃는 얼굴로 붉어진 제 속을 숨기며, 리체에게 물었다.

“내 얼굴에 혹시 뭐 묻었어?”

“아니.”

리체도 그런 모건을 따라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이안과 닮은 생김새라고 방심하지 말자.

‘모건은 적이야.’

한쪽은 경계, 한쪽은 두근거림.

다른 속을 가진 채, 같은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본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트아리체 로드윅이랑 모건 데이얼이 아는 사이였어?”

“웃으면서 얘기하는 거 보면 친한가 봐. ……둘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저 외모끼리 붙었는데 안 어울리겠어? 요즘 천재 되기 힘드네. 얼굴도 잘나야 하고.”

두 사람 사정이 각자 어떻든. 저렇게 잘 어울리니 멀리서도 볼 맛이 났다. 학생들의 시선을 느낀 리체가 모건에게 응원 인사를 건네며 걸음을 옮겼다.

“검술과가 제일 먼저 심사 본다더라. 잘해, 모건.”

“고마워.”

그리고 잠시 뒤.

과제를 통과한 참가자들이 모두 모이자, 시험 교관들과 겨루는 자격 심사가 시작됐다.

“학과마다 한 명의 시험 교관께서 나오실 겁니다. 지원자들과의 일대일 대결 후, 시험 교관님께서 여러분의 합격 여부를 알려주실 겁니다. 승패에 상관없이 시험 교관님의 기준에 도달하면 합격하실 수 있으니, 최대한 본인의 역량을 뽐내 주십시오.”

승패에 상관없이 합격할 수 있다.

그 말에 학생들 사이에서 안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시험 방식인가 봐. 달라질까 걱정했는데.”

크셀폰이 시험 교관들을 까다롭게 선발하는 것을 잘 알기에 하는 소리였다. 강한 자만이 꿰찰 수 있는 자리.

아까 리체의 과제를 심사하던 시험 교관만 하더라도, 판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용병단의 부단장이었다.

리체는 2층 관람석 맨 앞자리에 앉아 1층을 내려다보았다. 

1층에서 진행자가 벽 쪽에 일렬로 선 검술과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호명하는 학생은 단 위로 올라와 주시면 됩니다. 첫 번째로, 모건 데이얼.”

그 소리에 학생들이 다시 수군거렸다.

“모건 데이얼이 맨 처음이야?”

“뒤쪽 애들 어떻게 하냐. 예선 가기 전부터 고비네.”

“왜 고비야?”

“우승자가 맨 처음이면 합격 기준이 높아질 거 아니야.”

“시험 교관은 누구지? 어, 저기 나온…….”

출입문 반대쪽에 있는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시험 교관이 들어왔다.

순간, 로크샤 제국 황립 아카데미 학생들이 앉은 자리가 크게 술렁거렸다.

“데, 데, 데…….”

“데르케디온 선배?!”

이제 선배라고 하기에도 조심스러웠다. 졸업한 그의 신분이 자신들과 달리 너무나 높았기에. 

데르케디온 로드윅. 로드윅 공작 가문의 정식 후계자.

칠흑처럼 어두운 흑발과 선명한 적안. 좌중을 압도하는 저 특유의 분위기.

경악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데온은 무표정하게 단 위로 올라와 조용히 중얼거렸다.

“……냄새.”

좁혀진 미간에 불만이 어렸다.

“트, 트아리체…….”

리체의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데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리체를 불렀지만. 이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데온을 보자마자, 리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난간으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리체는 난간에 몸을 최대한 찰싹 붙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믿기 힘들었지만, 저 얼굴과 가슴께에 일렁이는 기운을 보아하니.

“오빠?!”

데온이 분명했다. 우리 집 장남이 왜 저기에 있는 거야?

리체가 화들짝 놀라 외친 소리가 학생들의 술렁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그래도 데온이라면 분명 제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

“조용히들 하세요. 2층도 조용히 하고.”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시험 교관의 옆쪽에서, 데온은 위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뭐야, 왜 저래? 네 오빠 맞아?]

‘맞아.’

리체는 초조한 마음으로 파이톤스에게 대답했다.

당장 1층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시험이 시작된 후였다.

“모건 데이얼, 준비하세요.”

단 길이의 사 분의 일 지점에 데온이 섰다. 모건도 일정 거리를 두고 그 맞은편에 섰다.

안내자가 손에 들고 있는 피리를 불자, 모건이 발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빠른 속도의 검이 정확히 데온의 머리 위를 노렸다.

‘빠르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해.’

과연 작년 우승자의 검이다. 저 시험 교관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모건의 공격을 온전히 막기는 힘들겠지.

교관은 모건이 달려가는 그 순간에도 반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방심하다가 다칠지도.

……라고 우딕 아카데미와 플란셋 아카데미의 검술과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로크샤 제국 황립 아카데미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지만.

“……작년 우승자 여기서 죽냐……?”

“우리 목숨이나 걱정해야 할 듯. 모건 데이얼 다음은 우리야…….”

데온이 검을 든 손을 움직였다. 간결한 동작으로 모건의 검을 받아친 뒤, 곧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모건이 즉각 데온의 검을 막았다. 

전공자들조차 눈으로 좇아가기 힘든 공방이 몇 번 지난 뒤.

처음 대결을 시작한 자리에서 고작 반 발자국을 움직인 데온의 앞에, 모건이 무릎을 꿇었다.

저 멀리 날아간 모건의 검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심사장은 적막이 감돌았다. 여러 명의 심호흡 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짧은 시간, 숨도 못 쉴 정도로 두 사람의 대결에 압도당했다.

검술과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교관의 말을 기다렸다.

비록, 모건 데이얼이 지긴 했지만. 이 정도 실력이라면 합격하겠지.

아니, 그래야만 한다. 모건보다 뛰어날 자신이 없으니.

데온의 싸늘한 붉은 눈이 모건을 바라봤다.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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