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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62)화 (61/89)

62화 기권은 무슨

그로부터 3일 뒤.

열두 아카데미의 모든 지원자의 참가 자격 심사가 끝났지만, 문제가 생겼다.

검술과 예선 통과자 0명.

시험 교관, 데르케디온 로드윅에게 합격을 받은 지원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례적인 결과에 난리가 난 것은 크셀폰의 주최 측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올해 크셀폰에 검술과는 없었다. 마법과와 함께 가장 많은 우승자를 배출하는 학과임에도.

“……해서 검술과에서 과제를 통과한 지원자분들은, 오늘 오후에 대회장으로 와주십시오. 다른 시험 교관께서 재심사를 볼 예정입니다.”

결국, 크셀폰이 열리고 난 후, 처음으로 재심사 결정이 내려졌다.

“저, 로드윅 교관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같은 날, 정오.

리체는 대회장 입구를 우직하게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에게 말했다.

경비병에게서 묵묵히 다물고 있던 입만큼이나 단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죄송하지만 출전자는 교관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사흘 동안 똑같은 말씀만 하셨잖아요.”

“출전자분도 똑같은 요청을 사흘 동안 하셨습니다만.” 

“정말 안 돼요?”

“안 됩니다.”

[진짜 융통성 없는 인간이라니까.]

파이톤스가 고생하는 리체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다 리체가 결심한 듯 다른 질문을 꺼냈다.

“출전자가 아니면요? 교관님을 만날 수 있어요?”

“……대회에 참가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가능합니다. 대회장 안으로 들어가실 수는 없지만, 면회를 신청하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리체는 주먹을 쥐었다. 

대회 중에는 시험 교관과 출전자가 사적인 볼일로 만날 수 없다, 라는 규정 때문에 같은 도시에 있으면서도 데온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냥 들어가자니까. 그 녀석 방에서 죽치고 있으면 만나겠지.]

‘그걸로는 안 돼.’

사실, 리체는 이미 한차례 인지 조작으로 경비병의 눈을 속여 대회장으로 들어갔었다.

시험 교관들은 그 안에 숙소가 있어서 거기서 생활하니.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데온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데온의 숙소 책상 위에 놓여있던 메모 한 장.

내가 그 능력 사용하지 말랬지.

리체가 대회장 내에 있는 걸 알면서도 만나주지 않고 피해 다닌 거였다.

‘너무해.’

대회 규정이 그래서 만날 수 없다면, 적어도 같이 다니는 필립을 보내 상황을 설명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정식절차를 밟아서 면회를 신청하면 받아주겠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아카데미의 기대가 걸린 대회의 우승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가족인 데온이었다.

몇 주간 연락도 안 되다가, 이런 곳에 와 있는 데온이 심히 걱정됐다.

확신하건대, 데온이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닐 터였다. 데온이 시험 교관 같은 걸 본인 의지로 맡을 리가 없었으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거라면?

‘크셀폰은 내년에도 참가할 수 있어.’

지금은 데온의 사정을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리체는 굳게 결심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럼 저 기권……!”

그때, 리체의 뒤통수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익숙한 손길과 감각. 리체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오늘 아침에 헤어진 이를 대하듯, 데온은 태평한 붉은 눈으로 리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권은 무슨.”

“오빠! 여기서 뭐 하고-.”

“벌써 포기냐?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데까지는 해.”

데온은 제 말만 하고 경비병의 인사를 받으며 대회장의 열리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헤어진다고? 

“오빠! 기다려 봐!”

리체가 그런 데온의 뒤를 급히 따라가려던 그때였다.

데온이 문 바로 앞에서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야, 멍멍이.”

평소 같으면 다 컸으니 이제 그런 호칭은 사양이라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여전한 데온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마저도 반가웠다.

리체가 데온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치지 마.”

“오빠…….”

이 와중에 자신까지 걱정해주다니.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리체가 데온의 따뜻한 격려에 마음이 짠해지려던 때였다.

데온은 싸늘하게 변한 눈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다치게 한 놈 죽이기 싫으면.”

싸아아.

그 소리를 들은 리체와 경비병의 등골에 짧은 소름이 돋았다. 여전하다. 제 오빠는.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누구를 죽인 적은 없지만.

‘평소 같은 걸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네.’

리체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데온을 향해 급히 외쳤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

데온은 대충 손을 내젓고 대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문 사이로 필립이 애타게 "아, 아가씨이-!" 하며 리체를 불렀지만.

데온의 매정한 문 닫음으로 짧은 만남이 끝났다.

* * *

“어흑.”

필립은 닫힌 문 안쪽에서 좌절했다.

드디어 리체 아가씨를 만나나 했는데, 자신이 섬기는 가문의 훌륭하신 도련님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얼마나 훌륭하신지, 지금도 기사 나부랭이인 자신의 슬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계시지.

필립은 서둘러 데온의 뒤를 따라붙으며 말했다.

“도련님.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리체 아가씨와 인사도 못 나누게 하시고.”

“…….”

“……라고 아쉬운 마음에 투정을 부려보는 척을 해봤습니다. 하하, 하…… 죄송합니다.”

리체가 크셀폰 도시로 온 날, 필립은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려고 했지만. 데온에게 제지당했다.

“나도 못 만나는데 네가 왜 가.”

하긴, 요즘 심기가 꼬인 데온이 할 법한 소리이긴 했다.

대회에 나가는 여동생이 걱정된다고 성격에도 안 맞는 시험 교관을 하고 있으니, 받는 스트레스가 오죽하겠는가.

‘학생회장 때는 리체 아가씨라도 실컷 만나실 수 있었으니, 버틸 만하셨을 테지만.’

데온이 그렇게 싫어했던 학생회장직을 맡은 것도 이번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재작년, 당시의 부학생회장이 리체에게 관심을 표하고 다녔다.

리체는 부담스러워했고, 데온도 덜 떨어져 보이는 부회장이 그러는 걸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데르케디온, 들었어? 그 자식…… 아니, 부학생회장이 이번에 회장 출마한대.”

그러던 어느 날. 로벤하프가 정보를 물고 왔다.

로벤하프도 리체에게 집적거리는 부학생회장이 무척이나 거슬리던 참이었다. 매일 부회장을 얼릴지 말지 고민하다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으니.

“학생회장이 되는 꼴은 봐줄 수가 없잖아?” 

부회장은 지금도 디저트 연구회에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리체의 온실에까지 찾아가고 있는데.

데온과 로벤하프는 그 길로 본인들의 이름을 후보에 올렸다. 능력자 두 명의 학생회장 출마.

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데온과 로벤하프는 각각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했다.

전 부학생회장이 이름이 학생회 명단의 구석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데온과 로벤하프의 학생회는, 교수들에게 역대 학생회 중 가장 일을 잘한다는 평을 받았다.

‘기억난다. 데르케디온 부대.’

필립은 데온의 학생회를 회상했다.

처음에는 무서운 학생회장 앞에서 겁먹은 아기 사슴처럼 벌벌 떨기만 했던 학생회 임원들은, 한 달 만에 훈련받은 기사들처럼 움직였다.

모두 학생회의 꼭대기에 앉은, 데온의 영향이었다.

‘도련님은 칼 같으시니까. 게다가 본인 능력이 말도 안 되는 걸 모르고 타인에게도 기준치가 높으시단 말이지. 이번 일도 그렇고.’

어떻게 단 한 명의 통과자도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왜 그러셨느냐는 필립의 질문에, 

“죄다 형편없어.”

다들 첫 번째 놈보다 형편없었다는 데온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그냥 첫 번째 분을 통과시키고 뒤에 적당히 몇 분을 더 붙여주면 되실걸.

사실 필립은 데온을 따라 크셀폰에 온 뒤로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원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련님이신지라,

‘누구와 시비를 붙을-.’

어엇.

데온이 가던 길을 멈췄다. 그 뒤를 쫓아가던 필립은, 데온과 부딪힐라 급히 걸음을 세웠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누구 목숨 걱정하기도 전에 내 목숨이 위험할 뻔했네.

“도련님? 왜 그러시는…… 헙.”

필립은 데온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모건 데이얼.

며칠 전, 제 도련님이 심사를 떨어트린 그 학생이었다. 오후의 재심사를 보러 대회장 안으로 들어온 듯싶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 둘, 그것도 낮과 밤처럼 대조되는 외모의 미남들이 대치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한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데르케디온 선배.’

반가운 기색을 감춘 금안이 살짝 눈웃음 지었다. 모건은 교관에게 예의를 지키며 인사하고는 말을 건넸다.

“교관님,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모건 데이얼.”

데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 이름에, 모건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타인에게 관심 없는 데온이니 당연히 제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 모건에게, 데온이 날카롭게 물었다.

“교관이 우습게 보이나?” 

“네……?” 

‘흐억.’

모건은 데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필립은 데온의 뒤에서 속으로 경악했다.

우리 도련님은 왜 가만히 있는 학생한테 시비시람.

이대로라면 도련님은 교관 자리에서 잘릴 게 분명했다. 도련님이 교관을 관두면 저는 리체 아가씨와 맘껏 이야기할 수 있으니 그편이 좋긴 했지만.

“도, 도련님? 아까 급한 볼일이 있으시다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필립은 데온에게 황급히 없는 핑계를 만들며 말을 걸었다.

이대로 6개월을 리체와 말하지 못하는 것과, 크셀폰에서 쫓겨나 화난 데온과 함께 지내는 것.

둘 중 뭐가 더 끔찍한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알았다.

차라리 도련님이 이 자리를 뜨게 만들자. 사건이 일어날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거야.

“…….”

하지만 애타는 필립의 마음도 모르고, 데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긴 모건도 마찬가지였다.

‘데르케디온 선배는 감이 좋았지.’

12살의 데온은 이안의 기억 속에 리체만큼이나 또렷이 남아 있었다. 기억 속 데온의 감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설마 내가 누군지 알아본 걸까?’

판 대륙에도 게르웨르 공작을 아는 이들은 많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모건의 금발과 금안에 게르웨르 가문의 실종된 능력자를 떠올리더라도, 그가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의심의 싹을 거두었다.

능력자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거기에 다른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던 세월까지 더해졌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한 외형과, 달라진 인상에서 이제 더는 모건을 이안이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확신할 수 있어.’

리체마저 절 못 알아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데온을 앞에 두고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모건은 절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데온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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