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마지막 공격. 분명히 반격할 수 있었을 텐데.”
다행이다.
데온도 자신을 못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모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안도의 미소에, 데온이 눈썹을 움찔했다.
“마지막 공격이라니요?”
“시치미 떼지 말지.”
데온이 날카로운 눈으로 모건을 바라봤다.
참가 자격 획득을 위한 교관과의 전투.
데온은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참가자들을 상대할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눈앞의 모건 데이얼과의 전투에서는 반 발자국을 움직이고 말았다.
거기에, 마지막 공격으로 모건의 검을 쳐올릴 때 데온의 눈에 들어온 장면.
모건은 검 손잡이를 마치 데온의 공격으로 놓친 것처럼 연기하며 자신의 손으로 놓아버렸다.
데온은 그렇게 확신했다. 모건 데이얼의 손힘이 풀리는 것을 보았으니.
마치 데온을 봐주고 자신이 패배를 선택했다는 듯한 그 행동에, 데온은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했다.
“탈락.”
진지하지 않은 모습을 보아하니 통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서 탈락을 줬다. 뒤의 놈들은 약해서 탈락을 줬고.
“글쎄요, 시치미라고 하셔도 드릴 말씀이……. 저는 교관님한테 졌습니다.”
지금 하는 게 시치미가 아니고 뭔가.
침도 안 바른 붉은 입술에서 태연한 말이 술술 나왔다.
데온은 엇비슷한 눈높이에 있는 모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건 데이-.”
그러다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두 사람 주변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재심사 시간이 다가오자 검술과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사장으로 가는 길목.
학생들은 모건과 대화하는 데온을 보고 흠칫하다, 빠르게 인사를 건네며 그 자리를 지나쳤다.
“…….”
데온은 쏟아지는 인사 속에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절 보는 금안에 눈매를 살짝 좁히다, 뒤를 돌았다.
“다음에 얘기하지.”
“네. 들어가세요.”
자리를 뜨는 데온의 뒤를 필립이 따라가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도련님. 저분하고 싸우실까 봐 제가 다 조마조마했다니깐요.”
“시끄러워.”
원래도 능력의 잠재력이 큰 데온이었지만, 6년 전부터 이상하게 능력이 점점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데온은 그때부터 고열에 시달리지 않게, 힘을 풀어주는 정도로만 능력을 사용했다.
“오빠, 너무 능력을 안 쓰는 거 아니야? 필요할 때면 팍팍 써. 내가 다 정화해줄 테니까.”
리체의 해맑은 말에도 데온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내 힘이 너무 강해서, 혹시라도 정화하는 널 아프게 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에 데온은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리체가 르티옴이기 때문에.
힘의 변화에 따른 데온의 고충은 또 있었다. 데온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빠져나가며 생각했다.
‘사람이 늘어나서 냄새가 심해.’
능력이 강해지니 데온이 맡는 호흡의 냄새도 달라졌다.
리체에게선 여전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호흡에서는 그동안 살아왔던 경험이 냄새에 묻어나왔다.
가령, 바닷가 출신의 기사에게서는 철과 바다의 냄새. 예전에 꽃집에서 일했다던 도서관 사서에게서는 꽃과 책의 냄새.
그리고.
“안녕하세요, 데르케디온 교관님.”
한때 능력을 사용했던 학생에게서 나는, 능력자의 냄새.
“여전히…….”
“네? 도련님, 뭐라고 하셨어요?”
모건의 금발과 금안을 떠올린 데온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 * *
“자네 딸은 잘 도착했나?”
로드윅 공작성, 블레이크의 서재.
히베츠만 공작은 책상에 앉은 블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블레이크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며 대답했다.
“첫날 자격 심사를 통과했다더군.”
“그건 예상했지. 그런데 블레이크. 자네 서류를 반대로 들어서 읽고 있어.”
겉으로 열심히 읽는 듯해 보이면 뭣하나.
블레이크는 지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자식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히베츠만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며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길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을 왜 했나? 크셀폰 출전을 반대했으면 지금처럼 걱정할 일도 없을 것을.”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따라가 준다고 했었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히베츠만 공작도 리체에게 거절당해 블레이크와 같은 처지였다.
히베츠만 공작은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아들이 시험 교관으로 갔다며.”
“……데온 말이지.”
며칠 전 리체에게 걸려 온 통신.
블레이크는 귀를 의심했다. 말없이 집을 나가 걱정하고 있던 데온이 크셀폰의 시험 교관으로 있다니.
[아빠, 오빠가 협박당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리체의 걱정이 담긴 질문에 블레이크는 아닐 거라 답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쪽에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마. 너무 걱정하지 말렴. 리체.”
데온을 만나 묻는 편이 빠르겠지만, 크셀폰은 대회 기간 중 본선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외부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금했다.
성곽 안에 있을 수 있는 건, 주민들과 대회 관계자들뿐.
“몸 조심히 지내고 있거라. 본선이 시작되면 바로 찾아갈 테니.”
“예선부터 통과해야 하는걸요? 떨어져서 당장 내일 집에 갈 수도 있어요.”
“그것도 좋지.”
블레이크는 리체와의 통신을 마무리했다.
그 뒤 곧장 데온이 시험 교관이 된 연유를 조사했으나, 정상적인 절차였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리체를 따라간 모양이군.’
블레이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데온도 올해부터는 성인이었다. 제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행동하는 거겠지.
통과자를 한 명도 내지 않은 것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터.
……아마도.
“6년 전에.”
그 사이, 말없이 찻물을 내려다보던 히베츠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자네 딸이 날 살린 날 말이야.”
“……?”
가볍게 꺼낼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블레이크는 시선을 돌려 히베츠만 공작을 바라봤다.
히베츠만 공작은 여전히 찻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중에 누군가의 모습이 아른거렸는데, 자네 딸을 본 것이라 생각해 말을 하지 않았거든.”
“리체라 생각했다니. 어떤 이유로?”
“은발이었어. 내 주변에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자네 딸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요즘 들어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네. 어쩌면 다른 사람일 지도 모르겠어.”
“리체가 아니라면 현실이 아니라 꿈을 꾼 모양이군. 그런데 그게 이렇게 언급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최근에 떠올랐다고는 해도, 6년이나 지난 꿈을 말하는 연유가 궁금했다.
블레이크의 질문에 히베츠만 공작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그자가 했던 말이.”
“했던 말?”
히베츠만 공작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때.
그는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저 멀리, 찬란하지만 쓸쓸한 빛을 발견했다. 빛을 따라간 곳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있었다.
환한 빛 속에 서 있는 은발의 여인. 빛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자신에게 물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되돌릴래?]
“나는…….”
히베츠만 공작이 대답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강한 빛이 그를 공중으로 끌어당겼다.
멀어져가는 어둠 속에서, 여인은 작별 인사하듯 손을 흔들며 그에게 말했다.
[나는 내 과오를 되돌릴 거야.]
* * *
“검술과의 재심사 통과자는 47명입니다.”
추최측의 결과 발표를 들은 12개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검술과 학생들은 환호했다.
크셀폰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꼼짝없이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이제 짐 풀자!”
한시름 놓은 검술과 학생들은 그제야 첫날 가져온 짐을 숙소에 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내일 아침에 돌아가야 한다며 슬퍼하는 학생들도 있긴 했다. 재심사마저 떨어진 학생들이었다.
‘다행이다.’
한시름을 놓은 건 리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번 일로 떨어진 검술과 학생들이 데온에게 악감정을 가질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데온은 귓등으로 들었을 테지만.
‘두 사람,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리체는 숙소와 같은 건물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가며, 데온과 필립을 떠올렸다.
그나마 필립이 함께 있으니 안심이었다.
듣자 하니 훈련 교관이 한 명씩 임명할 수 있는 부교관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트아리체, 밥 먹으러 가?”
“응.”
“같이 가자.”
크셀폰으로 오는 동안 친해진 학생이 리체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식물과의, 리체와 같은 7학년인 잭슨이었다.
“잭슨, 예선 준비는 잘 돼가?”
“그냥 아는 거 복습하고 있지. 무슨 과제가 나올지 모르잖아.”
잭슨은 예선 이야기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크셀폰의 예선이 대회 기간인 6개월 중 4개월을 차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리체는 오후에 들은 안내를 떠올렸다.
“예선은 도시 전체에서 치러집니다. 학과마다 다섯 명의 시험 교관님께서 각기 다른 과제를 내실 겁니다. 출전자분들은 과제를 선택해 해결하시면 됩니다. 그 후, 시험 교관님께 합격증을 받으시면 본선 진출이 확정됩니다.”
4개월의 기간 동안 시험 교관이 낸 과제를 해결하는 크셀폰의 예선.
한 시험 교관이 가진 합격증은 세 개.
시험 교관은 과마다 다섯 명이니, 한 과마다 최대 15명의 본선 진출자를 뽑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합격증을 받고 싶은 시험 교관님을 찾아가 과제를 받습니다. 과제를 실패해도 다른 교관님을 찾아가서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합격증의 수는 점점 줄어들겠죠.”
데온은 시험 과제를 제일 먼저 못 박아놨다.
“날 이기는 놈한테만 준다.”
아무에게도 합격증을 주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본선 진출권 15장이 12장으로 줄었다. 검술과의 학생들은 슬퍼했지만, 누구도 그 말에 항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법과는 정해졌어?”
“내일 시계탑 광장에서 알려주신대.”
시험 교관들에 관한 사전 정보가 아무것도 없으니, 리체는 출전 자격 심사 때 대결했던 교관에게 문제를 받을 생각이었다.
회색 단발머리의, 케이슬리라는 이름을 가진 교관이었다.
그런 리체의 말에 주변 마법과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트아리체가 가는 곳은 피해야지.’
타 아카데미를 합한 마법과의 예선 진출자는 38명.
우승은 트아리체의 것이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본선 진출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잭슨은 리체가 건네는 식판을 받으며 밝게 말했다.
“트아리체는 금방 합격증을 받겠는걸? 좋겠다. 그러면 남은 예선 기간은 놀아도 되니까.”
* * *
그리고 리체는 일주일이 넘도록 합격증을 받지 못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합격증을 받고 싶다면 저를 찾아서 꽈-악 붙잡아보세요.
저는 대회장을 제외한 도시 내에 있을 거랍니다.
- 시험 교관 케이슬리
시계탑 광장 한가운데 꽂혀 있던 나무 팻말.
그게 사건의 발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