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65)화 (64/89)

65화 목격

케이슬리가 숨바꼭질을 과제로 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있으니까.

모건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담벼락 뒤로 넘어갔음에도, 한 번 시야에서 사라진 케이슬리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케이슬리를 찾아 헤매길 몇 시간.

“잠깐 쉴까?”

리체와 모건은 숨을 돌릴 겸, 도시 내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넓은 4인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지만, 둘은 찰싹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손목에 찬 수갑 때문이었다. 각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녀도 사이에 늘어난 줄이 보이니 이상했고, 그렇다고 손을 빼자니 수갑이 고스란히 보여 여러 오해를 사기에 딱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리체와 모건은 맞잡은 손을 모건의 주머니 속에 넣어 수갑을 숨겼다. 

그 어쩔 수 없는 행동이, 무척이나 사이좋은 연인처럼 보이긴 했지만. 

“우승자 후보 커플이네.”

“서로 엄청나게 좋아하나 봐. 결승 때 붙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리체가 볼을 살짝 붉혔다. 그게 아닌데. 이성적으로 엮이는 소문은 늘 민망했다.

그렇다고 제게 한 말도 아닌 걸 듣고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안해. 모건. 내 예선 과제에 널 끌어들여서.”

리체는 모건에게 귓속말로 사과했다. 모건도 아직 합격증을 받지 못했다고 했으니, 한시가 급할 텐데. 모건이 적이라는 생각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모건은 생긋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니야. 사고였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지만…….”

[그래! 신경 쓰지 마, 계약자! 피해를 본 건 우리라고! 저 재수 없는 자식!]

파이톤스가 푹신한 쿠션에 지친 기색으로 누워 성을 냈다.

모건을 향해 재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를 욕한 게 아니었다. 모건 데이얼은 정말로 재수가 없었다.

히이이잉-!

……

쩌어어억.

……

“저리 비켜!”

길을 가는데 미친 말이 달려들고, 옆에 있던 나무가 밑동이 썩어 머리 위를 덮치고, 검을 든 괴한이 달려들고.

그게 오늘 몇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건은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말을 진정시키고, 나무를 피하고, 괴한을 제압했다. 

수갑 때문에 리체와 파이톤스도 함께 그 일을 겪었다.

그뿐인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거나, 위에서 화분이나 책 같은 게 떨어지는 건 몇 번이나 일어나 말하기도 민망했다.

“모건, 너는…….”

차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불쌍한 모건 데이얼.

적이지만 리체와 파이톤스는 그의 운 없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잘나고 실력이 잘나면 뭣해?]

도대체 무슨 운명을 타고났기에 죽음이 미친 듯이 쫓아다니는 거냐며, 파이톤스는 투덜거렸다.

강하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인간이었다.

[저 자식이랑 같이 있으면 위험해. 당장 그 수갑을 끊어버려야겠어.]

파이톤스는 쿠션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접 제 능력을 사용해 수갑을 끊겠다고 모건의 주머니로 반쯤 들어갔지만, 리체에게 붙잡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참아, 파이톤스. 몇 개월 동안 호숫가로 못 가잖아.’

파이톤스가 힘을 사용하면 부담이 오는 속도가 빨라질 테니,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 6개월이나 걸리는 대회는 아직 예선 초반.

리체의 말대로였기에, 파이톤스는 고집을 꺾고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그 고양이를 다시 찾으려면 또 며칠이 걸릴 수도 있잖아.]

‘마법과 애들한테 부탁해보려고.’

케이슬리를 오늘 안에 찾는 것은 무리일 성싶었다. 그러니 수갑이라도 풀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왜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응?’

파이톤스의 말에 리체가 눈을 깜빡였다.

한편, 모건은 리체와 파이톤스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대화 중인 걸까.

‘예전 생각난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얼려진 날. 데온이 리체와 자신의 손목을 묶었었다.

모건은 주머니 속에 있는 리체의 손의 온기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리체, 너는 알까. 나는 이 시간이 오히려 달가운걸.

모건 데이얼이란 이름으로도 네 곁에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 내가 너와 약속했지. 결승전까지 트아리체 로드윅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그렇지만, 모건. 너도 내게 우딕 아카데미의 우승을 약속했다. 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내가 직접 나설 거다. 그때는 내가 누구를 건드릴지, 너도 알겠지.] 

모건은 나흘 전에 받은 총장과의 통신을 떠올렸다.

우딕 아카데미의 총장, 한니반 카이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방해물을 돌아가는 것보다 치우는 것을 택하는 무서운 이였다.

그가 앉은 자리는,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 웅덩이 위에 세워졌다.

언젠가는 자신이 한니반의 목을 물어뜯을 계획이지만, 적어도 3년 뒤의 일.

아직 모건은 그의 개였다.

모건은 리체와 제 손이 있는 주머니를 바라봤다.

‘이대로 리체와 있는 건 좋지 않아.’

사실 수갑은 언제든지 자를 수 있었으나, 리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해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트아리……체?”

리체를 부르려 시선을 옮긴 모건은, 바싹 다가와 자신을 빤히 보는 두 쌍의 눈에 심장이 철렁했다. 코앞까지 온 리체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모건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졌다.

당황했지만 모건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해, 의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빤히 봐? 다람쥐도 같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야?”

“모건, 혹시 수갑만 자를 수 있어?”

리체가 눈을 반짝였다. 파이톤스와 그 얘기를 나눈 참이었다.

왜 크셀폰 작년 우승자가 옆에 있는데 마법과 학생을 찾아가는가.

모건의 봉인된 능력은 마법이지, 검 실력은 아니었는데.

[오러를 두른 검이면 이 지긋지긋한 수갑은 단번에 잘릴걸!]

재수 없는 게 좀 걱정이지만 우승은 폼으로 한 게 아닐 테니.

파이톤스의 말처럼, 모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능해.”

“진짜? 그러면 모건, 답답할 테니까 우선 줄만 좀 끊어줄 수 있어?”

“음, 답답하지는 않은데. 트아리체가 그러고 싶으면, 줄부터 자를게.”

리체는 슬그머니 모건의 주머니에서 손을 빼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테이블 아래, 짧게 늘어난 수갑의 줄이 서로의 주머니를 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줄을 끊을 생각이었다.

모건은 허리춤에 찬 검집을 슬쩍 풀어 허벅지 위로 가져왔다. 검집에 달린 장식이 리체의 시야에 잠깐 들어왔다.

‘검집에 저런 장식도 다는구나.’

무광의 흑색 유리 장식이 예뻐 보였다. 나중에 모건에게 파는 곳을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자를게.”

모건이 검 손잡이를 쥐며 리체에게 말한 그때였다.

어디서 날아온 나이프가, 정확히 수갑의 줄을 끊고 소파의 등받이에 깊숙이 박혔다.

“트아리체! 괜찮아?!”

“……나이프?”

모건은 급히 주머니에서 리체의 손을 빼서 살폈다. 다행히 늘린 줄 길이가 짧아 줄이 돌아오는 반동이 적었다.

리체가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잘린 수갑의 줄과 소파에 박힌 나이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절단면이 깔끔하고 박힌 정도가 깊었다.

분명 오러를 두르지 않은 나이프였는데, 이런 위력이라니.

“……아.”

나이프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모건이, 외마디 소리를 냈다.

이어 리체와 모건의 사람의 머리 위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리체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고 그대로 굳었다.

“헉.”

“……모건 데이얼.”

붉은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데온의 뒤에서 필립이 리체를 향해 열심히 입을 뻐끔거렸다.

‘아가씨!’

‘필립?’

‘그 도련님, 큰일 났어요!’

두 분이 손잡고 붙어 계시는 걸 데온 도련님이 다 보셨다고요!

그뿐이랴. 키스라도 할 듯 얼굴을 가까이 두고 있는 걸 유리창 너머로 목격했다.

그 장면에 길을 걷던 데온도 굳고, 필립도 굳었다.

“도, 도련니임? 착각! 착각이실 겁니다! 분명!” 

필립은 아무런 말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데온을 급히 따라갔다.

그러고 경악했다. 입구 근처 테이블에서 집은 나이프를 던지는 데온.

‘끄악!’ 

분명 화나셨을 거라 생각했지만, 나이프까지 던지실 줄은 몰랐지!

아마 자신이 리체 아가씨처럼 능력자들의 기운을 볼 수 있다면, 지금 제 도련님의 기운은 붉은색일 게 분명했다.

능력자들이 살기를 띨 때 보인다는 붉은색.

필립의 예상이 맞았는지, 데온을 보는 리체의 얼굴이 당혹스러웠다.

“지금 내 동생이랑 뭐 하는 거지?”

내 동생이랑 사귀면 죽는다고 했을 텐데.

그런 데온을 보며, 모건이 난감한 눈웃음을 지었다.

‘큰일이네.’

제 기억 속 데르케디온은 엄청난 여동생 바보였으니.

* * *

“…….”

릴리는 닫힌 창문 아래에서 숨을 죽인 채, 잠잠해진 수풀을 응시했다.

들킬 뻔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릴리의 옅은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큰일이야.’

조금 전.

릴리는 땡볕 속을 양산 하나에 의지한 채 리체의 온실로 가던 중이었다.

흙을 만지는 거에는 취미가 없지만, 리체가 돌아왔을 때 제가 키운 꽃을 화분에 심어서 선물해주고 싶었다. 

“리체 언니, 내 마음을 담은 우승 선물이야.”

“릴리가 직접 키웠어……? 감동이야. 역시 릴리 밖에 없어!”

“그러면 나 평생 언니 동생 해도 돼?”

“당연하지!”

그러면 감동한 리체가 자신을 꼬옥 안아줄 거고, 그렇게 리체와 제 사이는 전보다 더 끈끈해질 터였다.

‘후후후, 로벤하프 오빠한테 기대느니, 내가 직접 리체 언니 동생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빠르지.’

릴리는 사심을 듬뿍 담은 계획이 성공할 것을 상상하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었다. 

“트아리체 로드윅……을 건드리시겠다고요?”

그러다 2층의 열린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리체 언니 이름?’

릴리는 온실로 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지름길을 택했다. 학생들이 다닐 일이 없는 길이여서, 길에는 릴리밖에 없었다.

“…….”

주변을 둘러본 릴리는 조심스럽게 양산을 접고 살금살금 창문 아래로 걸어가 정원수 뒤에 자리잡았다.

자신이 말을 엿듣고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면 귀족 망신이니까.

“그렇죠. 저도 그 힘은 염려스럽습니다.”

2층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목소리. 럼블라 이즈마틱이었다.

상대편의 음성에 잡음이 섞인 것을 보아하니, 통신 중인 듯했다.

‘럼블라 교수님이 왜 리체 언니를?’

릴리는 2층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럼블라가 목소리 크기를 일정하게 내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온전히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럼블라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트아리체 로드윅을 미끼로 능력자들을 이용하시겠다니-!”

‘뭐?’

릴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창가로 다가온 럼블라의 얼굴이 창틀 너머로 보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온다면 럼블라의 시야에 자신이 비칠 터였다.

‘드, 들키면 안 되는데.’

그 모습에 당황한 릴리가 뒷걸음치다, 벽에 세운 양산을 건드렸다. 

부스럭.

양산이 넘어지면서 내는 소리가 컸다. 이어 조용해진 2층과, 천천히 창틀을 잡는 럼블라의 손.

자신을 바라볼 럼블라의 보라색 눈을 떠올린 릴리가 눈을 질끈 감은 그때였다.

탁. 누군가 릴리를 뒤에서 붙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