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66)화 (65/89)

66화 봐주지 말라고

‘지크 오빠였잖아. 괜히 놀랐네.’

릴리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지크베르트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부터 제 뒤에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크베르트였다.

늘 차분했던 녹안이 평소와 달랐다. 화가 났나, 싶을 정도로 지크베르트의 녹안은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방금 통신을 들은 거야. 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지크베르트는 자신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럼블라 교수의 통신내용을 모두 들었을지도 몰랐다.

지크베르트는 작은 동물로 변해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는 취미가 있으니까.

‘쉿.’

지크베르트는 검지를 제 입술 앞에 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거구나.

‘알겠어.’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크베르트는 붉은 여우로 변해 쏜살같이 앞쪽에 있는 수풀로 들어갔다.

럼블라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었다가, 움직이는 수풀을 발견했다.

모습을 가린 수풀 속에서 지크베르트는 점점 멀리 사라졌다. 

“…….”

럼블라는 그 수풀을 유심히 바라보다, 창문 고리를 붙잡아 당기며 통신구에 대고 말했다.

“아닙니다.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였군요.”

탁.

창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릴리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큰일 날 뻔했어.

아니, 큰일은 이제 일어나려는 지도 모른다. 릴리의 옅은 푸른 눈이 심각한 빛을 띠었다.

‘리체 언니한테 적이 있는 거 같아.’

* * *

“자, 자. 저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갈까요? 영업방해니깐요.”

다행히 필립의 필사적인 중재가 먹혔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네 사람은 자리를 이동했다.

데온이 뚫어놓은 소파가 신경 쓰였던 리체는, 나가기 전 직원에게 제 지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건네려고 했다.

“저, 소파를 뚫어놓아서요. 죄송해요. 이걸로 보상……?”

“여기.”

그런 리체의 지갑을 뺏은 데온이, 제 돈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일주일 치 매상액을 웃도는 금액에 직원이 놀라 손사래를 쳤다.

“로드윅 교관님! 이건 너무 많은데요……!”

“됐습니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더 청구하든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직원이 붙잡으려 했지만, 데온은 이미 카페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는 리체의 뒤에 선 모건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안 나오고 뭐 하는 거지?”

“나가겠습니다.”

리체는 생글생글 웃는 모건을 보며 감탄했다.

화난 데온을 앞에 두고 전혀 겁먹지 않는다니. 이래서 우승자는 다른 모양이야.

모건이 데온을 따라 나가자, 리체는 직원에게 다시 사과한 후. 먼저 나간 세 사람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건물의 담 옆에서 마주 선 데온과 모건을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데온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필립!”

“아, 아가씨!”

리체는 데온의 주변에 있는 필립을 불렀다. 필립은 리체에게 가려다, 제 앞을 가로막은 데온의 검에 눈물을 삼키며 뒷걸음질했다.

‘진짜 둘이 뭐 하는 거야…….’

리체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데온을 쳐다봤으나, 데온은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을 모건의 태평한 금안에 고정하고 있었다.

“설명해봐. 모건 데이얼. 내 동생이랑 사귀나?”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 말에 데온의 심기가 더 뒤틀렸다. 아닌데 리체와 손을 잡고 찰싹 붙어 있었단 말인가.

사귀는 것보다 더 용서가 안 되었다.

“내가 분명-.”

그런 데온의 팔을 누군가 붙들었다. 리체였다.

“시험 교관은 출전자랑 사적인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잖아……요?”

데온은 뒤늦은 존댓말을 하는 리체의 또렷한 은빛 눈을 보며 눈매를 살짝 좁혔다.

또 눈으로 잔소리. 

“모건과 사적인 대화를 할 거면! 먼저 나랑 이야기해……요!”

“…….”

데온은 절 붙잡은 리체의 손목에서 흔들거리는 수갑을 바라봤다. 

쯧. 데온은 붙들린 팔을 움직였다.

리체의 손목과 수갑 사이의 공간에 엄지손가락을 껴놓고, 그 부분에 검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잘린 수갑은 리체의 손목을 벗어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역시 데르케디온이야! 모건 데이얼이 아니라 처음부터 네 오빠한테 부탁할 걸 그랬잖아?]

파이톤스가 흡족하게 낄낄거렸다.

“고, 고마워.”

하지만 역시 데르케디온이고, 제 오빠면 뭣 하는가. 여전히 제 말에는 대꾸도 없는데.

지금도.

수갑을 자르는 볼일이 끝나자마자 모건에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

방금 데온의 실력에 감탄하던 모건은 데온을 마주 바라봤다.

데온은 상냥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건 데이얼. 합격증 받았나?”

“아니요. 아직.”

“잘됐군. 그러면 따라와.”

“네?”

“예선 과제, 지금 보게 해주지.”

“……아. 그, 교관님을 이겨야 한다는……?”

“싫은가?”

“아닙니다.”

데온이 제게 능력을 쓰는 것까지 생각했는데.

생각한 것보다는 이성적인 방법이었다.

모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데온이 앞서갔다. 그리고 가는 길에 리체를 힐끔 바라봤다. 이러면 됐지, 하는 눈.

‘과제 핑계를 대면서까지 모건과 대화할 일이야? 이게?’

황당했지만, 리체는 데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근처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 곳곳에 있는, 크셀폰 출전자와 시험 교관이 사용할 수 있는 훈련장 중 하나였다.

“지금부터 예선 과제를 시작하지.”

대련을 위한 넓은 단 위. 모건과 마주 선 데온은 검을 스릉 뽑아 들며, 붉은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모건도 그처럼 자신의 검을 뽑아 섰다. 걸어오는 사이에 본인이 수갑을 베어냈기에, 모건의 손목도 매끈했다.

“날 이기면 통과다.”

“네.”

데온의 매서운 공격을 모건이 막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전투가 시작됐다.

리체와 필립은 경기장의 각각 반대편에 서서 전투를 지켜봤다.

[크게 다치지 않을까?]

‘그러면 곧바로 뛰어들어야지.’

리체는 별 조각을 손에 쥐고 말했다.

데온의 핑곗거리로 시작한 거긴 하지만, 엄연히 예선 과제였다.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두 사람의 결투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한 방, 한 방.

정확한 공격과 방어. 그리고 대화.

예선을 핑계로 대화한다는 목적에 맞게, 데온은 모건에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사귀는 게 아닌데 손을 잡았다?”

“수갑 때문에요.”

확실히 버거운 상대다.

모건은 데온의 공격을 막기 벅차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표정을 얼굴에 덧씌웠다.

[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내가 직접 나설 거다.] 

귓가에 들리는 총장과의 통신.

합격증은 다른 교관에게 가서도 받을 수 있지만, 데온에게 졌다는 이야기가 총장에게 들어가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총장의 판단은 상대적이니까. 한 번 예선 과제를 실패한 자신을 못 믿겠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이미 자격 심사에서도 탈락을 맛봤었으니.

‘어떻게 할까.’

모건은 데온의 검을 쳐내며 고민했다. 아직 진심으로 달려들지 않는 것은 데온도, 저도 마찬가지였다.

진심으로 싸우게 된다면 죽지 않을 각오로 맞붙어야 했다. 

데르케디온에게 그러는 것도, 리체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검은 말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라, 검을 맞대는 데온도 그런 이안의 고민을 느꼈다.

‘이 자식, 지금 날 봐줄지 말지 고민해?’

데온은 미간을 좁혔다.

사실 데온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제가 아는 여동생은,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어오면 부담스러워 피하기 일쑤였다.

그런 리체가, 몇 번 보지도 않은 모건 데이얼과 그렇게 붙어 다니다니.

‘리체는 능력자들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러면 모건 데이얼이 게르웨르란 걸 알아봤나?’

그렇다고는 해도 용서가 안 됐다. 수갑만 해도 그렇다. 분명 곧바로 끊을 수 있었을 텐데. 그걸 차고 앉아 있었다는 게 게르웨르의 개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주 로드윅을 우습게 보는군. 데온은 모건에게 물었다. 

“그 자만심 때문에 지난번에도 검을 놓았나?”

“자만심이 아니었습니다. 제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죠.”

“헛소리.”

좀 전보다 매서워진 데온의 검에 모건은 손에 힘을 주며 씁쓸한 웃음을 짧게 흘렸다.

‘정말인데.’

지난번 데온의 검을 놓은 것이 정말 제 실력이었음을.

데온은 믿어주지 않겠지만, 정말로 검을 놓친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기에.

“르티옴의 지난 생에서 너는 16살에 죽었지. 르티옴과 얽힌 운명 탓에 죽음은 널 계속 쫓아올 거야. 르티옴이 맞이할 19살의 죽음이, 널 놓친 네 죽음의 길잡이가 되어 널 찾게 만들 테니까.”

히켄카가 말한 16살의 마지막 날.

게르웨르 공작이 얼음 속에 있는 탓에 이안드웨인은 전생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부터 죽음은 이안을 끊임없이 쫓아다녔다.

아버지가 제게 건넸던 저주는 사라졌음에도, 밤은 여전히 끔찍했다.

[모건 데이얼. 네가 이안드웨인 게르웨르지?] 

악몽 속에서, 실재할 리 없는 죽음이 모건에게 속삭였다. 어디 도망가 봐. 나는 널 놓치지 않을 테니.

아슬아슬한 술래잡기. 절 붙잡으려는 죽음의 손끝을 쳐내고 달려도, 이내 죽음은 다시 절 찾아왔다.

“그렇게 자만해서는, 합격증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나?”

흉흉한 데온의 눈빛. 어차피 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새 맺힌 땀이 모건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이렇게 격하게 움직였는데도 땀 한 방울 나지 않는다니, 역시 데르케디온은 대단하다.

‘이길 수 없겠는데.’

모건이 난감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데온이 그 웃음을 목격했다. 또 절 얕잡아 보는군. 데온은 힘껏 검을 쳐올려 모건의 검을 날렸다.

“앗!”

두 사람의 대결을 숨도 못 쉬고 보고 있던 리체가 외마디 소리를 냈다. 자격 심사 때와 같은 광경. 검을 놓친 모건에게 데온의 서늘하게 빛나는 날이 향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데온의 검은 다시 위로 올라갔다. 마치 당장이라도 모건을 벨 것처럼.

[오오! 그래! 데르케디온! 봐주지 말라고! 승자와 패자를 확실하게 가려야지!]

파이톤스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데온을 응원했다. 더욱이 모건 데이얼은 마물을 보낸 적이니까. 적에게 굳이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는 것이다.

리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자신이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제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은 시험 교관인 데온의 몫이었다.

‘제발. 데온.’

이상하게 모건은 마음이 쓰였다. 모건이 황립 아카데미에 마물을 보낸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안을 떠올리게 하는 외형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모건이 크게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끝났네.’

모건은 자격 심사 때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데르케디온 선배가 절 벨까. 과제 실패는 당연하겠고.

그렇게 되면 다른 교관의 과제를 수행하러 곧장 떠나야 할 성싶었다. 

디클란 교수가 총장에게 제 실패를 보고하기 전에, 합격증을 받아야 할 테니.

우딕 아카데미 총장인 한니반. 리체가 그의 목표물이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크게 안 베면 좋겠는데.’

원래 보려고 생각했던 다른 교관의 과제는 마물 서른 마리의 심장.

부상이 크면 마물을 상대하는 데 애를 좀 먹을 터였다.

데온의 검이 아래로 내려왔다.

“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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