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옆 방은 내 거야
끝내 리체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데온이 모건을 벨 거야.
하지만 그 생각과 달리, 데온의 검은 모건에게 닿지 않고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
뭐지? 영문 모를 데온의 행동을, 세 사람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저녁 시간이군.”
거기에 뜬금없는 소리.
그러고 이어진 말에 모건은 등줄기가 싸해짐을 느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뒤는 내일 이어서 하지.”
예선 종료까지 3개월하고도 20일. 그 마지막 날까지 데온과 칼부림을 하고 있을 제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데온의 훈련 상대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아는 필립이, 속으로 모건을 향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 * *
쫘악. 리체는 저녁으로 나온 흰 빵을 찢었다.
제 오빠를 찢을 수 없으니 빵이라도 찢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로드윅 교관님한테 시험 과제를 받고 싶은데요!”
몇십 분 전. 리체는 훈련장을 나가는 데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건과 대화한다며 과제를 낸 것이라면, 저와도 과제를 핑계로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데온은 리체의 이마를 툭 치고 훈련장을 나갔다.
“마법과는 상대 안 해.”
데온은 검술과 시험 교관이고, 자신은 마법과 출전자이니 맞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시험 과제를 받고 싶다고 말한 제 의도쯤 데온이 알만하지 않은가.
제발, 대화 좀 하자고.
‘도대체 왜 무시하는 거야?’
데온의 동생은 저인데, 요새 들어 식은 수프 신세인 듯했다.
“저, 트아리체……?”
맞은편에 앉은 잭슨이 조심스럽게 리체를 불렀다. 그는 리체의 식판을 가리켰다.
“혹시 예선 과제에 빵가루가 필요한 거야?”
그 말에 리체는 고개를 내렸다. 식판에 가득 쌓인 빵조각들.
데온을 생각하며 한 조각, 한 조각 뜯은 것이 이렇게나 수북이 쌓여있었다.
“필요하면 내가 주방에 말해줄까? 빵가루를 좀 얻을 수 있냐고.”
“빵가루요?”
그 소리에 주방과 이어진 배식구에서 요리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얼마 전, 마물 꼬치를 리체에게 쥐여 준 요리사였다.
빵은 먹지 않고 뜯기만 하는 리체의 모습에, 걱정돼 지켜보던 중이었다.
맛이 없으신가 했는데, 빵가루가 필요하신 거였군.
“아, 아뇨.”
리체는 눈을 빛내는 요리사를 향해 뒤늦게 손을 내저었지만.
“잠시만요!”
말릴 새도 없이 요리사는 주방으로 다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가씨, 응원합니다.”
리체는 커다란 자루에 꽉꽉 집어넣은 빵가루를 한아름 안고, 요리사의 응원을 받았다.
차마 준비해준 게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체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마워요.”
그러고 방으로 들어온 리체는, 빵가루 자루를 바닥에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여전히 데온에 관한 고민이었다.
만나는 것도 안 된다. 대회를 기권하는 것도 안 된다. 오늘 모건처럼 과제를 핑계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안 된다.
‘데온은 지금 대회 규정 때문에 나랑 안 만나주는 게 아니야.’
그래,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데르케디온 로드윅이 그럴 사람인가?
대회 규정이래도 자신이 하고 싶으면 콧방귀를 끼고 무시할 사람이었다.
‘분명 뭔가 더 있어. 그래서 나를 피하는 거야.’
데온이 그렇게 나온다면, 저도 생각이 있다.
“파이톤스.”
리체는 빵가루 자루에 들어간 파이톤스를 불렀다. 촉감이 좋다며 속에서 데굴거리던 파이톤스가 고개를 들었다.
고운 빵가루가 파이톤스의 털과 수염에 묻었다.
“내일 모건을 만나야겠어.”
“걔를? 왜?”
리체는 빵가루를 손에 쥐었다.
“오빠랑 담판을 지어야겠거든.”
“오?”
데르케디온이랑?
리체의 말에 파이톤스가 악당처럼 웃었다.
제 계약자와 데르케디온의 싸움이라니. 어느 쪽이 더 괴물 같은지를 가릴 수 있는 기회였다.
모건 데이얼은 왜 만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파이톤스는 몸을 일으켰다.
* * *
“릴리.”
황립 아카데미. 리체의 온실.
로터스는 한가롭게 테이블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 제 누이를 바라봤다.
“내 말 들었어? 지크 형이 없어졌다니까.”
지크베르트가 사라졌다. 오후 수업을 통째로 빠지고, 기숙사실도 텅 비었다.
분명 지크베르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이런 중대사에, 저렇게 태평한 릴리 히베츠만이라니.
“릴리, 너는 리체 누나 아니면 관심도 없지?”
릴리는 대답 없이 홍차를 홀짝였다.
관심도 없을 줄 알았지. 로터스는 릴리의 반응을 포기하고 소파에 앉았다.
리체가 크셀폰의 도시로 떠난 지도 어느새 삼 주 정도.
식물과 교수들의 노력 덕분인지 리체의 온실은 주인이 없음에도 생기가 넘쳤다.
로터스는 주변 나무의 싱그럽고 커다란 잎사귀가 만든 그늘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시험은 보겠지? 안 보면 지크 형 유급당할 텐데.’
내일부터 시작되는 1학기의 마지막 시험.
8학년인 지크베르트는 반년만 있으면 졸업이지만, 이번 시험을 보지 못하면 유급이었다.
다시 한 학년을 처음부터 다닌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
“아. 혹시 리체 누나랑 같이 졸업하려고?”
그러다 로터스는 꽤 그럴듯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1년을 유급하면 리체 누나와 같은 학년으로 졸업할 테니까. 이번 시험은 아예 안 보려고 작정하고 어딘가로 숨은 것이다.
과연. 지크베르트가 할 법한 생각이다.
“역시 지크 형이라니까. 행동하는 게 남달라.”
“그럴 리가 있겠어?”
로터스가 지크베르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릴리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그러면 뭔데? 릴리, 너 아는 거 있지?”
로터스는 소파의 등받이를 한 손으로 잡고 상체를 릴리가 있는 방향으로 틀었다.
저렇게 릴리가 잘난 척을 할 때는 뭔가 아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릴리는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지, 편지지에 글씨를 적으며 대답했다.
“지크 오빠는 크셀폰으로 갔어.”
“크셀폰? 왜? 설마 리체 누나 때문에?”
로터스의 얼굴이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가, 조금 곤란한 기색이 섞였다.
‘지크 형까지 리체 누나를 사랑하면 곤란한데.’
첫사랑, 운명론, 제 심장의 주인.
로벤하프가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섞어 가며 쌍둥이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통에, 로터스는 사랑이라는 말에 익숙했다.
문제는 자신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줄줄 늘어놓으면서, 리체 누나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한다는 점이었지.
“맞아. 리체 언니 때문에 갔어.”
“헐. 그러면 우리 형 어떻게 해? 지크 형은 남자답고 멋진데. 리체 누나의 심장을 뛰게 할지도 몰라.”
로터스도 릴리처럼 일단은 로벤하프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은 사랑인데, 지크 형 같은 연적의 등장이라니.
릴리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로터스를 향해 검지를 좌우로 움직였다. 이러니 로터스보다는 제가 한 수 위다.
“로터스, 내가 다 생각이 있지.”
“무슨 생각?”
“우리 오빠를 리체 언니의 흑기사로 만들려는 생각.”
대화하는 사이, 편지를 다 적었다. 릴리는 펜을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지크 오빠만 점수 따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 오전, 우연히 듣게 된 럼블라 교수의 통신.
화단에서 도망친 릴리는 그 길로 지크베르트를 찾아가 추궁했다.
“오빠, 럼블라 교수님이 하는 통신 들었지?”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난 것 같았던 녹안은, 어느새 평소의 차분한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라고 했는데? 아니, 다 설명할 필요는 없고. 리체 언니를 누가, 어떻게 한다고 했어?”
“……딱히.”
지크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설명하기 귀찮은 데다가, 자신이 직접 해결할 생각밖에 없으니 제게 말해주지 않는 거다.
“지크 오빠, 말하기 전까지는 나 안 가?”
하지만 지크베르트의 고집만큼 릴리의 집요함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꺾인 것은 지크베르트의 고집.
직접 럼블라 교수를 찾아가 묻겠다는 릴리의 으름장이 먹힌 것이었다.
“리체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는대.”
“뭐? 언니를? 왜?”
“능력자들이 필요해서.”
“럼블라 교수님이?”
“통신한 상대방이.”
그러고 난 다음에 지크베르트가 사라졌으니, 크셀폰이 열리는 도시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
럼블라 교수 방에 거대한 발톱 자국을 남겨놓은 범인도 빤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마물이 다시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퍼지고 있지만, 마물은 무슨. 마물화한 지크베르트겠지.
릴리는 편지지를 반으로 접으며 생각했다.
‘솔직히 리체 언니가 납치될 거란 걱정은 안 돼.’
그 트아리체가 누군가에게 당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데르케디온 오빠도 같이 있고.’
거기에 지크베르트까지 합세한다면, 걱정해야 하는 건 납치범들의 목숨이었다.
그렇긴 해도. 데온과 지크베르트가 리체 앞에서 활약하는 장소에, 제 오빠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릴리는 편지 봉투에 편지지를 집어넣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로터스.”
“어?”
“오빠가 리체 언니랑 결혼하면, 반은 내 공이야. 그러니까 리체 언니 옆 방은 내가 사용한다?”
“오. 우리 형을 그렇게 만들 자신 있어? 릴리?”
“당연하지.”
로벤하프의 사랑이 성공하는 것. 그것은 쌍둥이가 바라 마지않는 것이기도 했다.
릴리와 로터스는 똑 닮은 얼굴을 마주 보며 소악마처럼 웃었다. 옆방과 그 옆방을 차지해서 매일 밤 쳐들어가야지.
그런 쌍둥이에게, 온실까지 찾아온 히베츠만 공작가의 수행원이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도련님. 시험공부는 하고 계신 거죠……?”
* * *
동이 트기 전.
모건은 새벽 훈련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미행하는 사람이 있네.’
시야에 모습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은신이 가능한 실력자라니.
설마, 한니반 총장이 크셀폰에 미리 심어둔 끄나풀인가?
‘우선 지켜보자.’
모건은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새벽 훈련을 다녀오고, 샤워하고, 아침을 먹고.
‘여전히 주변에 있군.’
희미한 기척은 씻을 때 잠시 사라졌으나, 다시 나타났다.
분명 주변에 있는데 왜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혜안으로 보면 보일 텐데.’
히켄카가 잠시 앗아간 제 능력이 아쉬울 정도였다.
“모건, 이건 어때?”
식사가 끝난 식당.
모건은 맞은편에 앉은 하마드가 건네는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무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모건의 말에, 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아, 모건. 잠시만. 모래가 묻었네. 줘 봐. 닦아줄게.”
“아니야. 내가 닦을게.”
모건은 검은색의 무기 위에 묻은 모래를 털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손으로 터는 모래 알갱이들이 쉽게 바스러졌다. 모건은 남은 알갱이들을 손가락 끝으로 뭉개고, 혀끝에 살짝 가져갔다.
“……빵 부스러기?”
고소한 곡물의 맛. 말린 빵을 빻은 것이었다.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부는 날이었기에, 멀리 롬 사막에서 바람을 타고 온 모래인 줄 알았는데.
모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바닥에도 같은 알갱이가 드문드문 떨어진 것을 보았고, 그게 식당 입구로 향한다는 걸 깨달았다.
“…….”
모건의 금안이 입구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