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다 봤다고?
하마드가 조용해진 모건을 향해 물었다.
“모건? 왜 그래?”
“하마드, 미안해. 잠시만 나갔다 올게.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래? 천천히 다녀와.”
모건이 바쁜 게 하루 이틀인가. 하마드는 자연스럽게 무기를 받아들고 일어나는 모건을 배웅했다.
모건은 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따라 걸어갔다.
식당 입구, 복도, 로비, 바깥…….
그러다 건물 모퉁이의 어느 한 지점에서 빵가루가 끊겼다.
‘뭐지?’
분명 아무도 없는데, 풍경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좀 더 감각을 예리하게 세워 끊긴 지점에 집중하니, 누군가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트아리체야?”
긴 은발의 뒷모습.
실루엣은 깜짝 놀란 듯 움찔하다가, 이내 또렷하게 변했다. 웬 자루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빵가루는 거기서 떨어진 듯했다.
리체는 뒤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 모건. 어떻게 알았어?”
“느낌으로? 그건 마법이야?”
파이톤스의 인지 조작 능력을 몰랐기에, 모건은 리체가 사용하는 게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으, 응. 마법이야.”
“그렇구나.”
이틀을 연달아 리체를 보다니.
모건은 반가움에 생글생글 웃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면 새벽부터 느꼈던 시선이 리체의 것이었나?
“트아리체, 혹시 오늘 아침에 날 미행했어?”
“헉.”
리체는 흠칫 놀란 얼굴로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런 뒤 옅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리체는 부탁할 게 있어서 모건을 이른 새벽부터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 인지 조작 능력을 사용해서.
훈련장에서 말을 걸 생각이었는데, 같은 아카데미의 학생이 함께 있었다.
[계속 쫓아갈 거야?]
“응.”
리체는 모건의 뒤를 쫓아다니며 혼자 있는 틈을 노렸다.
하지만 모건은 늘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어쩌다 보니 숙소까지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으앗!’
[오오, 근육이 쓸만한데?]
방심한 사이에 훌러덩 상의를 벗어버린 모건. 다행히 곧장 자리를 피한 덕에 이후의 것은 보지 못했지만.
봐서는 안 될 것을 봐버렸다.
‘흉터투성이였어.’
모건의 벗은 상체에 있는 크고 작은 흉터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검술과인 것을 감안하고 봐도 학생이 갖기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식당으로 자리를 피한 리체의 머릿속을, 모건의 흉터 가득한 상체가 가득 채웠다.
[계약자, 왔다.]
그러다 식당으로 모건이 들어왔다.
리체는 하마드와 이야기하는 모건을 보다가,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
모건의 허락도 없이 그런 상처를 봐버렸는데. 말을 걸 타이밍을 본다고 계속 옆에 있다니. 이건 모건의 사생활을 몰래 엿보는 거나 똑같잖아.
‘돌아가자.’
[엥? 모건 데이얼한테 말 안 걸고?]
마침 얼굴을 아는 하마드와 둘밖에 없으니 좋은 기회가 아니냐며, 파이톤스는 물었지만. 리체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모퉁이에 서서 데온과 대화할 다른 계획을 고민하던 중, 모건이 제게 말을 건 것이었다.
[쟤는 또 뭐야? 어렸을 때 데르케디온 생각나게 하네.]
벌써 인간 두 명한테 제 인지능력을 간파당했다며, 파이톤스는 자존심 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미안, 모건. 새벽부터 따라다닌 거 나야. 그, 옷 벗을 때도 있었어. 미안해…….”
“옷 벗을 때도 있었다고? ……설마, 트아리체.”
“응. 미안. 다 봤…….”
상체를 봐버린 것을 사과하는 거였는데, 대화의 흐름이 뭔가 이상했다.
거듭 사과하던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입을 닫은 채, 귀까지 전부 붉어진 모건.
‘설마, 트아리체. 내 벗은 몸을 전부 본 거야?’라는 모건의 생각이 고스란히 표정에서 드러났다.
“아, 아니야! 상체만! 상체만 봤어!”
리체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구나. 나는 또.”
모건은 부끄러움에 오른 열을 식히려 제 볼을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체를 본 걸 사과한 거야? 그쯤은 아무렇지 않은데. 신경 쓰지 마.”
리체가 뭘 보고 사과한 건지 짐작 갔다.
6년간 한니반의 개로 살면서 얻은 흉터들을 본 거겠지.
사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것이었지만.
리체가 계속 미안해하는 것보다는, 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나았다.
“그래도 미안…….”
“괜찮다니까. 빵가루는 뭐야?”
모건은 화제를 돌리려 리체가 품에 안은 자루를 가리켰다. 살짝 뚫린 구멍에서 빵가루가 솔솔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빵가루……? 아!”
리체는 그제야 모래시계처럼 떨어지고 있는 제 빵가루를 바라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이게 왜 이렇게 떨어지지.
구멍을 막으려는 리체의 손에서, 모건이 자루를 가져갔다. 그러고는 리체에게 물었다.
“나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온 거야? 트아리체가 아무런 용건 없이 날 미행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리체는 자루를 들고 선 모건을 바라봤다. 어서 말해보라는 눈빛.
염치없지만, 리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모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 * *
‘쟤들은 뭘 하는 거야?’
시계탑 광장.
고양이로 변한 케이슬리는 탑 꼭대기 층, 시계 구멍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딕 아카데미의 숙소와 거리는 좀 떨어졌지만, 멀리서도 반짝이는 은발과 금발은 존재감이 또렷했다.
‘꽃다발도 아니고, 무슨 자루를 들고 서 있네.’
어제, 자신이 두 사람에게 수갑을 채운 날.
트아리체 로드윅과 모건 데이얼이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크셀폰 도시 내에 쫙 퍼졌다.
얼마나 좋아죽는지,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길을 걸어 다닌다더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커플이더라.
내막을 아는 케이슬리는 소문을 비웃고 넘겼지만.
‘아침부터 붙어 있는 걸 보아하니 영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나?’
케이슬리는 꼬리를 낮게 살랑였다.
두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트아리체가 예선 과제를 잊은 것 같은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 있었군.”
그러다 시계탑 꼭대기 층으로 올라온 남자가 케이슬리의 뒷모습을 보고 말을 걸었다.
케이슬리의 부교관, 같은 마탑 소속인 릭스였다.
잔소리쟁이 오셨네.
“야옹.”
“고양이인 척하지 말고.”
릭스는 케이슬리의 옆으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케이슬리는 절그럭 소리를 내며 나온 물건을 보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
“마탑에서 기밀로 연구 중인 수갑이 왜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지?”
“나는 모르겠는데.”
“조심해. 출전자들이 학생이라고는 해도 각국의 고위 귀족 자제들이 널렸으니까. 시험 교관도 그렇고.”
“알겠어.”
케이슬리에게서 영혼 없는 대답이 나왔다.
저렇게 한 귀로만 들을 줄 알았다. 릭스는 자신이 충고했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고 수갑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최근 새로이 들었던 소식을 화제로 삼았다.
“들었어? 서대륙에서 활동하는 상단 주인이 말하길,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던데.”
“무슨 세력?”
“종교야. 시간을 관장하는 고대신을 섬기는.”
“강해?”
“모르지.”
“그러면 관심 없어.”
케이슬리는 곁눈질했던 시선을 다시 돌렸다. 마탑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이 아니라면 흥밋거리도 못 되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관심은 온통 한군데에 있으니.
“나도 로드윅처럼 대련하는 걸로 과제를 냈어야 했어. 트아리체랑 싸우고 싶은데. ……지금이라도 과제 변경되냐고 물어볼까?”
“아서라. 도시 날려 먹을 일 있냐.”
검술과는 날려 먹어야 대회장 정도겠지만, 마법은 효력이 미치는 범위가 달랐다. 만약 케이슬리가 광역 마법이라도 사용한다면, 트아리체 로드윅도 사용할 줄 아는 광역 마법이 있다면.
크셀폰이 명목을 이어온 역사는 올해로 끝일 터였다.
“말려. 무조건.”
크셀폰의 도시로 떠나는 날까지, 케이슬리가 친 사고의 뒤처리로 시달리던 마탑주가 릭스에게 한 말이었다.
말려. 케이슬리가 하려는 거.
마탑주가 릭스를 직접 케이슬리의 부교관으로 붙인 이유기도 했다.
“녹스, 나 정했어.”
“……뭐를.”
“트아리체, 내가 키울래.”
네가 왜 키워……?
물론 제자로 키운다는 말이겠지만.
블레이크 로드윅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아끼던 딸이 마탑의 천재 망나니, 케이슬리한테 걸리다니.
* * *
약 한 달 반 전.
데온이 크셀폰에 시험 교관 자리를 맡을 의사가 있음을 밝혔을 때였다.
“영광입니다. 로드윅 가문의 후계자께서 시험 교관으로 와주신다니.”
크셀폰의 회장은 통신구에서 들려온 데온의 목소리에 반색을 표했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서신을 넣은 것이었다. 그런데 데르케디온 로드윅이 허락할 줄이야.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차분하고 냉정한 음성. 통신구로 전해져오는 목소리만으로도 데르케디온의 성격을 알만했다.
자신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하면 당장 시험 교관을 맡겠다는 의사를 철회하겠지.
회장은 냉큼 대답했다.
“말씀해보시지요.”
이어 데르케디온의 조건을 들은 회장은, 난감한 어조로 데온에게 물었다.
“출전자의 대회에 개입하시겠다고요?”
[가능합니까?]
트아리체 로드윅.
아직 지원서를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회장도 익히 알고 있는 그녀가 이번 크셀폰에 지원하는 모양이었다.
데르케디온의 조건은 대회 기간 중, 트아리체 로드윅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의 개입.
참가자들의 실력이 뛰어난 만큼, 크셀폰은 매년 사상자가 나오긴 했다.
하지만 대회는 오로지 출전자의 것. 데온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다.
“동생분을 위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저희 쪽에서 편의를 봐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통신구 너머가 조용했다.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총장은 초조했다.
한 번 손아귀에 들어온 대어를 놓치리라 생각하는 건 더욱 아쉬운 법이라. 이대로 데르케디온을 놓치는가.
“하지만 시험 교관의 판단하에, 출전자의 목숨이 위험할 때 경기 중단은 가능합니다.”
대신 경기가 중단되면 출전자는 실격된다. 후에 시험 교관 또한 그 개입이 합당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난다면, 시험 교관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곧바로 나오는 대답에, 회장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게 맞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시험 교관을 선정할 때 본 데르케디온 로드윅의 자료. 그 특이사항에 ‘여동생을 끔찍이 아낌.’이란 문구가 적혀 있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회장은 데온에게 대회 규정 하나를 더 강조했다.
“대신, 교관께서는 반드시 대회 규정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출전자와 시험 교관은 사적인 만남 혹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정도가 있겠군요. 그 규정에는 가족 관계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꼭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회 기간 중 여동생과 사적으로 만나지 말란 것이었다.
회장은 데온에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리고 규정을 어기시면, 즉시 교관직에서 사임하셔야 할 겁니다.”
* * *
그리고 지금.
데온은 제 앞에서 빵가루를 뒤집어쓰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절 보는 리체를 당황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오빠.”
리체는 제게 뻗는 데온의 손을 슬쩍 피했다.
그러고는 데온에게 말했다.
“만지지 마.”
쿠웅.
리체의 냉정한 말에 데온은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