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69)화 (68/89)

69화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사건은 십여 분 전.

예선 과제를 보러 온 모건 데이얼이, 훈련장 건물 앞에서 다람쥐를 주웠다며 가져온 게 발단이었다.

가루인지 먼지인지 뭔지를 잔뜩 묻혀온 다람쥐.

“전에 트아리체랑 같이 있는 걸 본 적이 있는 거 같아서요. 교관님께서는 아실까 해서 데리고 와봤어요.”

낑. 불쌍한 울음이 들렸다.

데온은 모건의 양 손바닥 위에서 비실거리는 다람쥐를 살폈다.

조금 모자란 듯한 보이는 저 얼굴. 리체의 다람쥐가 맞았다.

“어디서 주웠지?”

“건물 바깥에서요.”

모건의 말을 들은 데온은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피칸이 쓰러져 있었다는 장소에는, 몸에 묻은 것과 같은 가루가 일렬로 뿌려져 있었다.

피칸의 이동 경로를 따라 가루가 떨어지면서 길을 만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바보, 너무 많이 뿌렸잖아.’

저 땅콩만 한 몸에 가루가 묻으면 얼마나 묻는다고. 이 정도면 늑대화를 한 지크베르트가 걸어왔어야 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정직하게 일렬로 뿌린 가루.

단순한 제 동생이 생각할 법한 방법이었다. 

‘이런 속이 뻔히 보이는 연기까지 도와주면서, 리체랑 사귀는 게 아니란 말이지.’

데온의 붉은 눈이 모건을 째려봤다. 모건은 그 눈빛에 흠칫하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데르케디온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그래도 속아주려는 듯, 데온은 군말 없이 빵가루로 만든 선을 따라갔다.

얼마 안 가 도착한 곳은 텅 빈 낡은 건물이었다.

그곳에 있던 건 당연히 리체. 리체는 뿌리고 남은 빵가루 자루를 품에 끌어안은 채 데온을 향해 말했다.

“오빠! 이번에야말로 나랑 얘기 좀 해!”

여기는 보는 눈이 모건밖에 없으니, 저와 대화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데온을 설득했지만.

데온은 그런 리체를 훑어보고는, 멀쩡한 걸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가자. 모건 데이얼.”

“하지만, 교관님. 트아리체가…….”

“과제 안 할 건가?”

“오빠!”

모건은 데온의 옆에서 망설였고, 리체는 달려와 데온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죽음이 모건의 뒤를 쫓아왔다.

깨진 천장 타일이 모건의 머리 위를 향해 떨어졌고, 모건과 데온이 검으로 타일을 쳐내는 순간.

“어……!”

리체가 밟은 바닥이 꺼지면서, 리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다 공중으로 던져진 자루의 빵가루가 흩날리며 떨어졌고. 그 가루를 리체가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

처참한 꼴로 바닥을 짚고 앉아, 할 말을 잃은 리체.

그런 리체를 향해 팔을 뻗은 채 굳은 데온과 모건.

끔찍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감쌌다.

“도련님, 여기 계시-. 아, 아가씨?!”

적막을 깬 것은 필립이었다.

아침을 사러 다녀왔다가, 훈련장에 없는 제 도련님을 찾아 가까운 이 건물로 와 본 것이었다.

그런데. 

“리체 아가씨!”

우리 리체 아가씨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필립은 데온의 시선도 잊고, 리체를 향해 달려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필립의 목소리에 리체는 더욱 서러워졌다.

이제껏 저와 말하지 않던 필립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게 말을 해주는데.

데온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다. 왜 피하는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저를 무시하기만 한다.

“……오빠.”

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고인 은색 눈동자에, 데온도, 모건도, 필립도, 파이톤스까지 당황했다.

다들 전투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다. 상대의 달리진 공기의 흐름을 읽는 것이 그들의 업이니.

그러니 그 자라에 있는 모두가 느낀 것이다.

트아(리체), 리체 아가씨, 계약자가 화났다. 그것도 몹시.

“리체.”

“만지지 마.”

데온이 뒤늦게 리체에게 다가갔지만, 리체는 그런 데온의 손을 피했다.

“나 이제 오빠랑 말 안 할래.”

“…….”

쿠웅.

충격을 받은 데온이 그대로 굳었다. 그 사이, 리체가 일어나 파이톤스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지만. 아무도 화난 리체를 붙잡지 못했다.

그러고 몇십 분 뒤.

여전히 낡은 건물 안.

‘내가 저러실 줄 알았지.’

필립은 구석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제 도련님을 바라봤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데온 도련님의 과보호가 문제다. 이제 리체 아가씨도 16살. 언제까지고 도련님이 돌봐줘야 할 어린 여동생이 아니시란 말이지.

‘이번 일도 도련님이 먼저 말씀하셨으면 좀 좋아. 리체 아가씨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비밀로 하시고.’

적어도 크셀폰에 오기 전에 시험 교관으로 갈 거라는 말은 해줬어도 되지 않았는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대충 예상이 갔다. 첫째로, 리체 아가씨가 말릴까 봐. 둘째로, 리체 아가씨에게 혼날까 봐.

‘세상 뛰어나신 우리 도련님도, 리체 아가씨 일이라면 꼬아서 가는 경향이 있다니까.’

그 데르케디온 로드윅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여동생이라니.

제드였다면 벌써 여동생 바보는 어쩔 수 없다며 데온을 놀려댔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은 소중하다. 필립은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

그런 데온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 모건도 마찬가지였다.

리체가 떠난 뒤,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해 데온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이 정도 있었으면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다가도,

‘리체가 데르케디온 선배한테 화난 데에는 리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내 책임도 있으니까.’

라는 생각에 좀 더 있어 보자 싶었다.

“모건 데이얼.”

“네.”

“……내 동생이랑 친한가?”

“아주 친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친하지 않다.

데온의 눈매가 움찔했으나, 별다른 시비는 걸지 않았다. 그러다 제 흑발을 손으로 흔든 뒤, 모건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 여동생한테 말을 좀 전해줄 수 있나?”

“어? 도련님? 그거라면 제가 하면 안 될-.”

데온이 눈을 부릅뜨자 필립이 깨갱하며 뒤로 물러났다.

핏발 선 붉은 눈이 무섭다. 

“트아리체에게 말을요?”

모건은 뺨을 긁적였다. 못 해줄 것은 없었지만. 

이렇게 리체와 자꾸 엮이면 곤란했다.

로드윅 남매간의 우애보다, 운명을 비틀기 위해 자신이 죽음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리체랑 얽힌 운명 때문인지, 리체와 함께 있으면 죽음이 날 더 빨리 찾는 것 같아. 이러다 리체가 휘말릴지도.’

사소한 것들이라 다행이었지만. 벌써 몇 번이고 목숨이 위협당하는 순간에 리체와 함께 있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리체와 자꾸 마주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꺼려졌다.

제가 리체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하지만, 데르케디온의 부탁은 거절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글쎄요. 저희 아카데미 쪽에서 보는 눈도 있어서요. 이런 말씀 드리기 좀 뭐하지만, 저희 아카데미와 로크샤 제국 황립 아카데미는 경쟁 관계라. 트아리체랑은 최대한 안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필립 부교관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

하지만 변명과 설득을 열심히 섞은 모건의 거절은, 데온의 말 한마디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꼭 네가 해줬으면 좋겠군. 모건, 데이얼.”

데온은 모건을 타오르는 눈으로 응시하며, 그의 이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이름까지 바꾼 연유는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감히 리체와 선을 긋는 듯한 저 태도는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럴 거면 리체에게 접근하지도 말았어야지.

“오빠, 이안이 사라졌어…….” 

제 동생을 몇 년간 울게 만들어 놓고.

이제야 좀 잊고 밝아지나 싶었는데.

그런 데온을 보며 필립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도련님께서 리체 아가씨께 말로 사과하시는 편이 빠르다니깐요…….’

* * *

“트아리체에게 뭐라고 전하면 될까요?” 

“…….”

“교관님?”

“……미안하다고.”

“사과는 본인이 직접 하시는-.”

“이 사태는 네 책임도 있을 텐데.”

“알겠습니다.”

결국 모건은 데온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리체를 찾으러 떠났다.

“트아리체? 못 봤는데?”

……

“모건 데이얼 군. 이렇게 막 타 아카데미 숙소로 찾아오면 우딕 아카데미 교수님들이 걱정하지 않겠나?”

……

“아아, 그 예쁜 아가씨! 오늘은 안 왔수다.”

하지만 사라진 리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디에도 리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크셀폰의 도시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리체는 눈에 띄니 목격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야옹.”

길을 헤매는 모건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울었다.

불과 어제 봤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익숙한 회색 털과 목에 한 초크.

“케이슬리 교관님?”

“트아리체를 찾아?”

고양이 모습을 한 케이슬리의 입에서 사람음성이 튀어나왔다.

한 번 봤다고 익숙해질 광경은 아니지. 케이슬리는 모건이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안 놀라네? 재미없게.’

반짝이는 저 금발 미남은 차분하기만 했다. 

동물이 말하는 것쯤이야, 지크베르트와 파이톤스를 아는 모건에겐 익숙한 일이었으니.

모건은 케이슬리를 향해 물었다.

“트아리체를 보셨어요?”

“봤어.”

케이슬리는 꼬리를 살랑였다. 평소 같으면 이런 일, 알려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걸 해결해야 트아리체가 다시 자신의 예선 과제에 집중할 것 같으니.

그녀는 순순히 트아리체가 간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모건은 케이슬리가 말한 방향을 향해 쭉 걸어갔다.

번화가나 주택가와는 동떨어진 길이었다.

‘크셀폰에 이런 곳도 있었나.’

한참을 걷다 보니 큰 공원이 나왔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산책로의 양옆은 키가 큰 나무들로 빽빽했다.

모건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리체가 이 방향으로 걸어왔다면 갈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겠지.

그리고 모건은 리체를 발견했다.

“……”

“어휴, 그냥 로드윅을 나와버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광경.

공원의 넓은 호숫가에 리체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서 파이톤스가 성을 내며 빽빽거렸다. 꽤 목소리가 컸기에, 모건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곳인 듯했다. 하긴, 자신도 이 공원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다른 공작가로 가든지! 히베츠만이나 세르디야, 둘 다 너라면 두 팔 들고 환영할걸!”

모건은 파이톤스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6년의 세월이 실감 났기 때문이었다. 

게르웨르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구나.

리체의 기억 속에서도 이안드웨인은 그저 어린 시절을 잠시 같이 보낸 친구일 지도 몰랐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런.

“…….”

리체는 파이톤스의 말에 대답 없이, 훌쩍이며 울음을 참는 듯했다.

간간이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넣기도 했다.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야.’

모건은 자신이 숨은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았다. 리체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기다렸다 모습을 보일 생각이었다.

그래야 리체가 데온의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들지도 모를 테니. 안 받아줘도, 그게 리체의 선택이라면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3년…….’

모건은 다시금 저와 리체에게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

그때가 지나면, 우리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네 앞에 내 정체를 고백할 수 있을까. 그러면 너는 나를 반갑게 맞아줄까.

‘어쩌면 리체는 어색해할지도 몰라.’

낯선 사람을 보는 양 굴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을 거다. 그때는 모건이 아닌 이안드웨인으로 리체의 앞에 있을 테니까.

모건은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금안을 잠시 감았다.

같은 공간에 리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늘 쫓기듯 살아오던 삶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첨벙.

“끄악!”

그러다, 첨벙 하는 물소리가 들리더니 파이톤스의 비명이 들렸다.

모건은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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