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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70)화 (69/89)

70화 사과가 너무 달아

본파이톤스가 물결치는 수면을 향해 소리쳤다.

“거길 왜 들어가!”

파이톤스는 어이가 없었다. 머리 좀 식히고 올게, 라던 제 계약자는 돌연 호수로 들어갔다.

저 귀여운 계약자가 수영할 줄 알았나? 다람쥐 말고 몸집 큰 무언가로 형태를 바꿔서 꺼내와야 하나? 잘 가라, 내 건강한 5개월하고 2주……!

파이톤스가 남은 대회 기간을 물먹은 솜처럼 지내길 각오하고 힘을 사용하려던 그때였다.

“리체!”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절박한 음성을 내뱉더니, 그대로 호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금발이고, 얼굴에서 잠깐 빛이 났던 것을 보아하니 모건 데이얼이었던 거 같은데.

‘내가 말하는 걸 들었나?’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들었으면 진작에 계약자와 저 앞에 나타났겠지. 말하는 다람쥐가 어디 흔한가.

들었다고 하면 계약자가 목소리 변조 연습을 했다고 하자.

‘그건 나중 일이고.’

중요한 건 이쪽이었다. 파이톤스는 두 사람이 들어가 있을 호수를 바라봤다.

한편, 복잡해진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 호수로 들어온 리체는, 저를 향해 헤엄쳐 모건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모건 데이얼?’

수면 아래에서 보는 반짝이는 햇살들. 그 햇살보다 더 반짝이는 모건 데이얼.

리체는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모건이 그 어느 위대한 별의 빛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왜 시선뿐만이 아니라 제 모든 것이 모건이 자신을 향해 오는 그 광경에 묶인 것만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리체의 가슴에서 일렁였다.

‘너는 어떤 사람이야?’

리체는 묻고 싶었다. 모건 데이얼, 너는 누구이기에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모건의 손이 리체의 손을 붙들었다. 힘이 실린 그의 손이, 리체를 끌어당겼다.

‘나가자.’

모건은 위쪽을 가리키며 리체에게 말했다.

리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건을 뒤를 따라 수면을 향해 올라가던 때였다.

‘윽!’

갑자기 헤엄치던 발을 멈춘 모건이, 괴로운 얼굴로 상체를 숙였다.

‘모건?’

그 모습에 놀란 리체가 짧은 마법 주문을 외자, 아래에서 치솟은 물기둥이 두 사람을 호숫가로 실어 날았다. 

[계약자!]

“모건!”

모건은 바닥에 쓰러졌고, 리체는 그런 모건을 다급히 불렀다. 파이톤스가 리체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얘는 왜 이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혹시 어디를 크게 다친 건 아닐까. 리체가 백색의 별 조각을 꺼내 쥐며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이어진 모건의 대답에, 리체는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다리에, 쥐가 나서…….”

큰 부상이 아니었구나. 그래도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헤엄 도중 다리에 쥐가 나다니. 

모건 혼자 물속에 있었더라면, 분명 위험했을 터였다.

“모건, 너는…….”

그 사이, 모건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모건을 물끄러미 보던 리체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행이다, 같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모건을 본 날짜로만 따지면 4일. 그동안 모건 데이얼이 방금 같은 일을 수도 없이 겪은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운이 정말 없네.”

리체의 목소리에서 진심으로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파이톤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건은 리체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칭찬도 아니고. 운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시원스레 웃는 모건 데이얼이라니.

리체와 파이톤스는 어리둥절해 모건을 바라봤다.

[쟤 진짜 괜찮은 거야?]

‘글쎄……’

물에 젖은 채 저러고 있으니 더 짠해졌다. 리체는 마법으로 모건과 자신의 물기를 말렸다.

“고마워. 트아리체.”

그동안에도 모건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다가, 급기야는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모건은 웃음 감각이 특이한 거 같아.”

“그래?”

모건의 금안이 리체를 담았다.

밝은 하늘 아래 보는, 은색의 달.

‘리체, 너는 내 삶이야.’

자신은 리체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더라도.

저에게 리체는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리체.”

모건은 미소 지으며 리체를 애칭으로 불렀다.

파이톤스가 왜 제 계약자에게 친한 척이냐며 삑삑거렸지만, 리체는 그러려니 하고 모건을 바라봤다.

‘모건은 넉살이 좋다니까.’

리체는 절 향한 금빛 눈동자가, 왜인지 다정한 빛을 띠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건을 처음 만난 날에도 그의 눈에 잠시 이런 빛이 돌았던 것도 같았다.

모건, 너는 나를 알고 있어?

리체는 목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삼켰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질문하는 자신조차도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으니까.

“나한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줄 수 있어?”

모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살아남을 거라니. 대회 얘기인가.

적이고, 경쟁하는 아카데미의 유력 우승자지만. 

‘우승할 거라는 말도 아니고.’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아니, 운 없는 모건을 생각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모건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 * *

모건과 헤어진 뒤, 리체는 숙소 건물로 돌아왔다.

계단을 올라가려는 리체에게 잭슨이 말을 걸었다.

“트아리체, 너한테 우편물 왔어.”

“나한테?”

아빠인가?

지난번 편지에 답장한 게 어제이니, 아직 블레이크에게 우편이 올 때는 안 되었다.

“응. 방문 앞에 있을걸? 배달원이 훌륭한 풀색 머리를 가졌던데.”

“누가 보냈지? 알려줘서 고마워. 잭슨.”

“뭘.”

리체는 계단을 올라가며 요사이 저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릴리, 로터스, 지크베르트랑 로벤하프……. 세르디야 공작님……. 또 안나랑 필립이랑 얀이랑………’

그렇게 걷다 보니 방문 앞에 놓인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리체는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포장이 이렇게 고급스러워?]

“그러게.”

벨벳으로 감싼 상자는, 리체의 머리카락을 닮은 은색 리본과 꽃들로 장식돼 있었다.

“누가 보낸 거지?”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연 리체의 눈에 들어온 것은.

“…….”

귀여운 얼굴에 부드러운 털을 가진 강아지 인형. 그 품에 들린 광이 나는 사과 하나.

인형에서 느껴지는 강한 존재감. 이건 누가 보낸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야, 멍멍이.”

리체와 강아지를 연관시키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

[데르케디온이네. 이 사과는 뭐야?]

파이톤스가 사과를 건드렸다. 품에서 떨어지는 걸 리체가 주웠다.

그리고 뒷면에 새겨진 글씨.

미안

내가 잘못했어

얼마나 공을 들여 새겼는지, 작게 새긴 글자도 잘못된 부분 하나 없이 또렷했다.

이럴 거면 아까 뭐 하러 무시했담.

호수에 빠졌던 일로 머리가 어느 정도 개운해졌다.

서운한 감정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지만.

“…….”

리체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식감과 함께 꿀처럼 단맛이 느껴졌다.

적당히 달 줄 모르는 데온 같았다.

“바보야. 데온은.”

늘 말로는 너 때문에 하는 행동이 아니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리체 때문에 하는 행동이었다. 그것도 싫어하는 것을 참으면서까지.

작년 학생회장 일도 그랬다. 아마 이번 일도 비슷할지도 모른다.

“혼자만 알면 누가 알아줘.”

지금처럼 오해 사기 딱 좋지.

리체는 데온이 제게 하는 것처럼 검지로 강아지 인형의 이마를 살짝 쳤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 종이와 펜을 꺼냈다.

* * *

그날 저녁.

“…….”

데온은 지친 걸음을 이끌고 대회장 안의 교관 숙소로 돌아왔다.

필립을 통해 리체에게 선물을 보낸 뒤,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 온종일 검만 휘둘렀다.

“도련님, 저녁은 드실 거예요?”

“안 먹어.”

옆 숙소를 사용하는 필립이 데온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가 물었다. 

“그러면 요기하실 거라도 갖고 올까요?”

“됐어.”

“야옹.”

그런 두 사람 사이로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대회장을 자주 돌아다니기에, 누군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케이슬리. 리체의 시험 교관이었지.

‘예선 과제가 숨바꼭질이었나.’

차라리 케이슬리를 잡아서 상자에 넣어 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케이슬리는 절 보며 번뜩이는 붉은 눈에 슬쩍 창틀로 뛰어오르고 물었다.

“왜 그렇게 봐?”

“별로.”

“그보다 로드윅, 트아리체가 좋아하는 것 좀 알려줘.”

“……그건 왜 묻지?”

“친해지고 싶어서?”

케이슬리는 꼬리를 흔들었다.

데르케디온 로드윅한테 트아리체를 꾈만한 것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트아리체를 제자로 들이려면 우선 호감을 얻어야 하니까.’

처음은 좋아하는 걸로 공략해보지, 뭐.

케이슬리는 입을 다문 데온을 보며 다시 질문했다.

“넌 오빠니까 잘 알지? 여동생이랑 사이가 좋다며.”

데온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 옆에서 필립이 케이슬리를 향해 고개를 양옆으로 빠르게 저었다. 목 운동을 특이하게 하네.

“사이가 좋으면 대화도 많이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쯤-.”

“하하, 케이슬리 교관님. 저희 데르케디온 교관님께서는 가볍게 교관직을 맡으신 게 아니라서요. 대회 기간 내에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안 하실 겁니다.”

필립이 케이슬리의 말을 도중에 자르고 끼어들었다.

오전의 참혹한 사태로 민감해진 주제를 꺼내다니. 이러다 이 고양이 교관이 큰일 날지도 모른다.

마탑의 이인자라지만, 호흡을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는 제 도련님의 상대가 되겠는가 말이다.

“리체한테 직접 물어봐.”

“그렇죠. 역시 교관님께서 직접 저희 아가씨께 여쭤보시는 게…… 어라?”

하지만 필립의 걱정과 달리, 데온은 화 한 번 내지 않고 케이슬리에게 순순히 대답했다.

반사적으로 맞장구를 치던 필립이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으나, 데온은 이미 숙소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나 이제 오빠랑 말 안 할래.” 

딸깍.

데온은 문을 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리체가 단단히 화가 났다. 이런 적은 두 번째였다.

“너, 아무것도 하지 마.” 

멍청했던 12살의 자신이 리체의 손을 모질게 쳐냈던 그때 이후로 처음.

일주일 정도 리체가 자신과 닿는 것조차 피했을 때였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화가 난 거 같은데.

‘화를 푸는 게 일주일보다는 더 길겠지.’

어쩌면 대회 기간 내내, 어쩌면 대회가 끝난 후에도, 어쩌면 평생…….

“…….”

“리체, 소원이 있어.”

“…….”

“죽기 전에 너랑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까. 나 지금 많이 아픈데.”

“……오빠.”

결국 삶의 끝에 가서야, 리체가 제게 말을 걸어줄지 모른다.

제 동생은 착해빠졌으니까. 불쌍하게 보이면 죽기 전에는 말을 걸어줄지도.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데온은 의자에 앉았다.

“……?”

그러다 아침에는 아무것도 없던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침입자를 의심하며 주변을 살폈을 데온은, 아무 말 없이 팔걸이에 손끝을 간간이 두드렸다.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던 데온의 손이 천천히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 뒷면을 본 데온의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봐줄게.

그리고 사과 너무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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