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잃어버린 거야?
“끝났군.”
다음 날.
모건은 제 목을 겨누는 검 끝을 보며 양손을 들었다.
“졌습니다.”
“내 예선 과제는 탈락이다. 다시 도전할 건가?”
데온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예선 4개월 동안 과제로 데온에게 묶여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깔끔한 결과라니. 모건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데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움직여 끄덕였다.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온은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리체, 로드윅 교관님께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모건, 우리 오빠 일은 신경 안 써줘도 괜찮아. 말 전해줘서 고마워.”
어제 호수에서 데온의 말을 전할 때만 하더라도 리체는 아직 화난 듯했는데.
그러고 보니 데온은 아직 제게 리체에게 말을 전해줬냐고 묻지도 않았다.
“교관님, 트아리체랑은 화해하셨어요?”
“봐준다더군.”
“……?”
그냥 던져본 질문에 데온의 대답이 돌아왔다.
모건은 거기에서 의아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데온이라면, 친분도 없는 이에게 순순히 제 사정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마치 6년전, 동아리 부원인 이안드웨인을 대하던 데온 같지 않은가.
‘모건 데이얼이 이안만큼 친숙해지셨나?’
하지만 모건은 이내 그 생각을 떨쳤다.
이건 데온이 리체와 화해한 게 기분 좋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데온의 행동은 리체와 연관됐을 때 늘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잘 되었네요.”
“…….”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데온.
모건은 제 생각이 맞았다고 여겼다. 잠깐 기분이 좋으셨던 거군.
과제가 끝나니 더는 서로에게 볼일이 없었다. 사적인 만남이 안 된다는 대회 규정도 있으니 빠르게 헤어지는 편이 나았다.
모건은 데온에게 인사한 뒤 훈련장을 나왔다.
아침을 먹고 두 시간 정도가 흘렀기에, 하루가 아직 꽤 남았다.
‘바로 롬 사막으로 떠나면 밤에는 돌아올 수 있겠네.’
부지런히 움직이면 오늘 안에 과제를 끝낼 수 있을성싶었다.
우선은 마물의 심장 서른 개를 실을 수레를 빌려야 하니.
모건은 대회장 안에 있는 운영회를 찾아가려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걸었을 때였다.
“모건 데이얼! 그 다람쥐 잡게!”
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모건을 다급히 불렀다.
모건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디클란 교수가 손가락질하며 제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다람쥐?’
갑자기 무슨 다람쥐, 라고 생각하는 모건의 시야 옆쪽을 작은 형체가 쌩하고 달려갔다.
“잡으라니까!”
디클란 교수의 절박하게 외쳤다. 열심히 달리는 것 같긴 한데, 저 속도로는 무리다.
‘어쩔까.’
디클란 교수의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지만, 이렇게 사소한 도움 하나를 빚으로 달아두면 나쁘지 않을 듯하니.
모건은 제 옆을 지나간 다람쥐를 빠르게 뒤쫓아 낚아챘다.
“삐-익!(놔! 이 멍청아!)”
그런데 갈색 털에 검정 무늬의 생김새와, 성질부리는 모습이 익숙했다.
리체와 함께 다니는 다람쥐. 정확히는,
‘파이톤스잖아.’
모건은 파이톤스를 바라봤다.
입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빼내 보니 검은 보석이 달린 반지였다. 지난번에 리체가 주워간 그 반지인가.
“반지 하나 보지 못했나?”
그러고 보니 반지를 잃어버린 게 디클란 교수였지.
“잘했네! 모건! 내가 갈 때까지 놓치지 말게!”
“삑! (놓으라고!) 삐익! (저게 내 별 조각을!) 삑!(노린다고!)”
다람쥐 울음소리는…… 시끄럽네.
호루라기보다 큰 소리에 모건은 눈가를 찡그렸다.
‘파이톤스면 그냥 놓아줘야겠다.’
모건이 반지를 파이톤스에게 돌려주고 붙든 손에 힘을 풀려던 때였다.
쿠웅!
모건이 있는 곳보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충격음이 들렸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모건은 고개를 들었다.
굴뚝 청소부가 지붕 위로 떨어진 소리였다. 청소부는 부딪힌 충격에 정신을 잃은 건지, 지붕을 구르기 시작했다.
‘저대로 두면 땅으로 떨어지겠어.’
모건은 지붕 아래를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파이톤스는 자신의 힘으로 모건의 손에서 벗어났다. 황급히 도망치다, 모건의 검집에 달린 가죽끈에 반지가 엉켰다.
‘되는 일이 없네!’
엉킨 부분을 풀 새가 없었다. 파이톤스는 낑낑거리다 매듭을 향해 능력을 약하게 사용했다. 끊긴 가죽끈과 반지를 들고 도망쳤다.
한편, 모건은 그런 파이톤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지붕에 시선을 고정하며 달렸다.
“저, 저 사람 어떻게 해!”
“떨어진다!”
벌써 지붕 끝까지 굴러간 사람은, 공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늦어……!’
영창하고 있는 보호 마법을 마무리 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20초는 더 필요한 상황. 달리는 게 더 빠르다.
모건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벽을 타고 뛰어가 2층 창틀에 발을 걸치고 떨어지는 인부에게 손을 뻗었지만, 한 끗 차이로 놓쳤다.
차마 제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모건은 눈을 돌렸다.
귓가에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이어진 환호.
“……?”
모건은 바닥을 바라봤다.
청소부는 멀쩡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몸을 감싼 건 마법 보호막.
그 짧은 순간에 마법 주문을 영창해 보호막을 펼친 것이다.
‘대체 누가?’
창틀에서 뛰어내린 모건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건, 너 빠르더라.”
리체였다.
* * *
“내 다람쥐?”
리체는 모건과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주 1회마다 해야 하는 예선 진행 상황 보고를 위해 대회장으로 가던 참이었다.
수레를 빌리러 가는 모건과 마침 목적지가 같았다.
“응. 다람쥐 이름이 피칸? 맞지? 디클란 교수님한테 쫓기고 있더라.”
“디클란 교수님?”
“아까 봤던 우딕 아카데미 교수님이야. 성격이 조금 괴팍하시지.”
모건은 일부러 상황을 설명했다.
파이톤스가 쫓기던 일이었으니, 리체도 대충 알아야 할 듯싶었다.
조금 전, 디클란 교수는 달음박질의 여파로 넘어갈 듯한 숨을 내쉬며, 모건과 리체에게 다가왔다.
“다람, 다람쥐는…….”
“아, 교수님. 놓쳤어요.”
“모건 데이얼……!”
“하지만 다람쥐를 잡는 것보다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러고는 생글생글 웃는 모건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가, 다시 다람쥐를 찾으러 가겠다며 사라졌다.
“그 교수님이 찾던 다람쥐가 피칸이었어?”
“응.”
“피칸을 왜 쫓으시는 거지?”
“글쎄?”
모건은 파이톤스가 쫓기는 이유에 관해서는 시치미를 뗐다. 반지 얘기를 해봤자, 리체가 신경 쓰기만 할 테니.
대신 다른 화제를 꺼냈다.
“로드윅 교관님이랑은 화해했어?”
“음, 일단은.”
리체는 썩 개운하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전히 대화는 못 하는 상태라, 잘 모르겠어.”
데온의 숙소에 몰래 들어가 봐준다는 편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대회가 끝나야 화해한 건지 아닌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듯했다.
그때가 되면 앞으로 시험 교관은 하지 말라고 해야지.
‘아니면 내가 크셀폰에 안 나오거나.’
답답해서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리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우리 오빠랑 하는 과제는 끝났다고? 잘됐다.”
“그렇지? 로드윅 교관님 이길 자신은 없었거든. 다른 교관님들 합격증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떨어트려 주셔서 다행이야.”
“미안해. 모건. 휘말리게 해서. 사과하고 싶은데…….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아니야. 리체 때문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을 걸. 로드윅 교관님은 나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거든.”
리체는 모건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데온의 불만 가득한 붉은 눈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내가 도울 일 생기면 말해줘. 그리고 우리 오빠는 다른 사람들도 안 좋아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나쁜 사람은 아닌데. 수갑 사건만 없었어도. 아, 맞다. 모건.”
수갑이라 하니, 며칠 전 봤던 모건의 검 장식이 떠올랐다.
예뻐 보였지. 산 건지 한번 물어볼까.
친한 사람들 대부분이 검을 사용하니, 만약 파는 거라면 기념품으로 가져가면 좋겠다 싶었다.
리체는 모건의 검 장식을 가리키려다가 손을 멈칫했다.
“……어? 오늘은 안 달았네?”
“뭐를?”
“검집에 달고 다니던 장식 있잖아. 유리로 만든.”
리체의 말에 모건은 제 검집을 내려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되더니.
“미안. 리체. 나 먼저 가볼게.”
“잃어버린 거야? 같이 찾아줄까?”
“고맙지만 괜찮아. 내가 찾을게.”
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저렇게 정신없어 보이는 모건이라니.
많이 아끼는 거였나.
리체는 그런 모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아가씨!”
대회장 입구.
리체를 기다리던 필립이 달려왔다.
오랜만에 하는 대화에 리체가 활짝 웃었다.
“잘 있었어?”
“저야 뭐, 아가씨 걱정뿐이죠.”
데온이 필립에게 리체를 보고 오라 허락한 것이었다.
마침 리체가 대회장을 찾아야 했기에,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예선 진행 상황 보고 하려고요.”
지난번 리체의 출입을 막은 경비병이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리체와 필립은 안으로 들어가며 말을 나눴다.
“도련님께서 절 부러워하시겠죠? 살다 보니 도련님보다 제 처지가 나을 때가 있네요.”
“부러워하기는.”
“정말이라니까요. 지금 아가씨와 제일 대화하고 싶으신 건 도련님이실 거라고요.”
이때다. 리체 아가씨께 도련님의 결백을 주장할 때가.
필립이 귓속말했다.
“크셀폰 회장이 도련님한테 조건을 걸었나 봐요. 아가씨랑 사적인 만남을 갖는 걸 들키는 즉시 시험 교관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그렇게까지?”
리체는 미간을 좁혔다.
정말 협박당하는 중이었잖아. 얼굴도 모르는 회장에게 적대심이 슬그머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오빠가 시험 교관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왜?”
자신과 대화하지 않는 이유는 알겠다.
그런데 데온이 남이 내건 조건을 지키면서까지 시험 교관을 하려고 한다고?
거기에는 무슨 연유가 있는 건지.
“그거야-.”
아가씨 때문이죠.
라고 말하려던 필립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뒤쪽, 실외복도 끝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
숙소에 있어야 할 제 도련님이었다.
“정말 리체 아가씨 뵙고 와도 됩니까? 도련님, 저 실컷 떠들어요?”
“마음대로 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그새를 못 참고 나오신 게 분명해.
필립이 속으로 툴툴거리는 동안, 리체도 이쪽으로 걸어오는 데온을 보고 있었다.
‘아, 데온이다. ……또 무시하겠지?’
이제는 이유를 알았기에 서운하지도 않았다.
회장이 우리 오빠를 협박한단 말이지. 거기서 오는 불만 때문에 슬쩍 나온 입은 어쩔 수 없었지만.
리체는 데온의 걷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런데 제 옆을 태연히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 데온은 돌연 리체의 옆에서 멈춰 섰다.
“트아리체 출전자.”
“어?”
데온이 제게 말을 걸 줄 몰랐던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온은 간결한 질문을 던졌다.
“밥은 먹었나?”
“……아, 네!”
리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데온은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리체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필립을 향해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필립. 그만 따라와.”
“……넵.”
보셨죠? 정말 부러워하신다니깐요.
필립은 리체에게 입 모양을 뻐끔하며, 후다닥 데온의 뒤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