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72)화 (71/89)

72화 그냥 유리 조각이잖아

예선 활동 보고를 끝낸 뒤, 리체는 숙소로 돌아왔다.

별의 탐지로 파이톤스가 숙소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걱정 하지 않았으나.

[계약자!]

리체가 방문을 열자마자 파이톤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파이톤스?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던 리체는, 침대 위에서 낑낑거리는 파이톤스를 발견했다.

파이톤스의 몸에 가죽끈이 엉켜 있었다.

“파이톤스, 그 끈은 뭐야? 모건이랑 만났다면서.”

“뭐? 걔가 그렇게 말했어? 모건 데이얼. 날 알아보고도 붙잡았단 말이지? 그 자식…….”

리체가 곧장 다가가 가죽끈을 풀려고 했지만, 몸에 찰싹 붙어 단단히 엉킨 탓에 손으로 풀기가 쉽지 않았다.

시작점이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칭칭 둘려 꽁꽁 묶인 끈.

“잘 안되네. 마법으로 해볼까?”

“자, 잠깐!”

파이톤스가 다급히 외쳤다.

“계약자, 너 자신 있어? 내 훌륭한 털 안 상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이프로 자르자.”

아직 그 정도로 약하게 힘을 사용할 자신이 없었다. 리체는 앉았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은 생각이라며 파이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조차도 혹여 땜빵이라도 날까 걱정돼 파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근육을 보여주지 못하는 제게, 남은 거라고는 윤기 나는 털과 귀여운 외모뿐이었으니.

리체는 책상 서랍에서 나이프를 찾으며 물었다.

“어쩌다 끈에 묶였어? 아까 사라진 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오늘 오전, 외출 준비를 하던 사이에 방에 있던 파이톤스가 사라졌다.

리체는 밖으로 나와 별의 탐지로 파이톤스를 찾아갔고,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모건을 만난 것이었다.

파이톤스는 말도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햇빛에 비춰보면 뭔가 나올 줄 알고 별 조각을 들어 올렸거든? 근데 그게 창문 사이로 떨어진 거야. 그래서 내가 잽싸게 내려가서 길에 굴러가는 반지를 주웠는데.”

길 가던 디클란 교수가 반지를 잡은 파이톤스를 목격하고 말았다.

“내, 내 반지!”

반지의 전 주인인가.

대치한 파이톤스와 디켈란 교수 사이에 짧은 신경전이 펼쳐졌다.

“딱 봐도 별 조각 주인 같은 거야? 그래서 입에 넣고 냅다 튀었지.”

바로 계약자의 방으로 올라가면 리체가 반지를 갖고 있다는 말밖에 더 되는가.

차라리 동네 다람쥐인 척하며 저 인간을 따돌리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파이톤스는 디클란을 피해 도망치다, 모건 데이얼을 만난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힘을 안 쓰고 잘 버텼는데. 하필 모건 데이얼의 장식에 반지가 얽혔어.”

“장식?”

나이프를 가져온 리체는 파이톤스의 말에 배 쪽을 바라봤다.

복슬복슬한 하얀 털 속에 반지 말고도 익숙한 장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모건이 검집에 달고 다니던 장식이었다.

파이톤스를 만났을 때 잃어버린 거였구나.

‘중요한 거 같던데.’

어쩌면 아직도 찾고 있을지도.

보이지 않는 장식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고 있을 모건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가져다줘야겠다.’

리체는 나이프로 가죽끈을 잘랐다.

툭, 툭.

몇 번 엉킨 부분을 찾아 자르자, 끈이 풀리고 함께 얽혀 있던 장식과 반지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자유를 얻은 파이톤스가 몸을 부르르 털었다.

“어휴, 이제 살겠네.”

리체가 조각난 가죽끈을 정리하며,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반지는 어떻게 하지? 주인을 알았으니까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계약자. 전쟁터는 잃어버리면 끝이야. 주운 사람이 임자라고.”

파이톤스는 털을 부풀렸다.

리체는 이불 위에 있는 반지와 장식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반지 돌려주러 가게?

파이톤스는 리체의 팔에 붙어 리체를 올려다봤다.

별 조각을 주인에게 홀랑 갖다 주기엔 그간 들였던 시간과 정성과 고민과 제 자존심이 아깝지 않은가.

계약자를 말리자. 제 귀여움으로. 파이톤스는 두 눈을 반짝였다.

“반지 돌려주러 갈 거야? 정말?”

“우선은 장식부터 모건 가져다주려고.”

“모건 데이얼?”

“응. 찾고 있을 거야.”

리체는 반지와 장식을 한 손에 든 채 모건을 떠올렸다.

그때였다.

[아직 멀었어?]

리체와 파이톤스의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방문 밖에 누가 있나? 파이톤스는 입을 다물고 리체의 어깨 위로 올라와 귀를 쫑긋 세웠다.

슬쩍 고개를 들어 리체를 돌아봤는데, 리체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떨어질 줄 몰랐다.

파이톤스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어 보인 방 한가운데에 펼쳐진 광경. 파이톤스도 리체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뭐야, 이 특성이었어?”

파이톤스가 중얼거렸다.

알고 있는 고유 특성이었다. 이래서 능력 발동이 안 됐군. 허구한 날 반지만 들고 있었으니.

사물의 기억을 형상화하는 능력.

리체의 손에 들린 별 조각에서 퍼져나온 빛이 장식의 기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기억은 아마, 방금 계약자가 떠올린 인물에 관한 기억.

“실종되기 전의 이안이야.”

리체는 깨진 거울의 조각을 맞추는 어린 이안을 바라봤다.

황도의 게르웨르 저택에서 리체가 본 그 거울이었다.

[준비는 다 됐어?]

그런 이안의 뒤에서, 열린 문에 기대선 하녀가 말을 걸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하녀의 오른쪽 눈을 본 파이톤스가 펄쩍 뛰었다.

“노랑이 자식이잖아?”

히켄카였다. 어린 이안드웨인한테 히켄카가 접근했다니.

설마, 게르웨르 공작가가 사라진 원인에 그 자식이 연관된 건가?

파이톤스는 계약자가 신경 쓰여 슬쩍 리체를 곁눈질했다.

“…….”

리체는 조용히, 그저 똑바른 눈으로 영상에 집중했다.

[내일이야. 떠나는 소감이 어때?] 

[아무렇지도 않아.] 

이안과 히켄카의 대화가 이어졌다.

[몇 년 동안 르티옴을 보지 못하는데도?]

[……. 하지만 내가 떠나야 리체가 살 수 있다며.]

이안이 떠나야 리체가 살 수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는 말에 파이톤스가 입을 열었다가 리체에게 제지당했다.

조용히.

리체는 중얼거리며 파이톤스를 안고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숨소리도 죽이며 둘의 대화를 들었다. 얽힌 운명, 16살, 19살에 맞게 될 각자의 죽음.

영상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처음 떠오른 영상을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모건에 관한 기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르티옴에게 인사는 안 해?]

[안 할 거야. 리체가 신경 쓰는 게 싫으니까.]

그렇게 이안은 판 대륙으로 넘어갔다.

이어 영상은 단편적인 상황을 보여주며 빠르게 흘러갔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이안, 그런 이안을 데려간 총장, 고된 훈련, 상처투성이, 힘듦에 우는 이안, 피를 뒤집어쓴 이안…….

[……리체, 나 너무 힘들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말들. 

말을 거는 당사자인 리체에게조차도 닿지 않을 말들.

이안은 거울 조각에 수많은 말들을 걸었다.

리체는 하염없이 그 장면들을 바라봤다.

* * *

‘……없어.’

모건은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장식을 찾으러 오늘 왔던 길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으나, 도통 보이지 않았다.

분명 훈련장에서 검집에 달린 장식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 길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텐데.

‘그게 없으면-.’

모건은 초조해졌다.

언제 무너질지 몰랐던 삶이었다. 그때마다 자신을 지탱해준 물건.

거울 조각 없이는 남은 3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리체와는 이번 크셀폰이 마지막이었다. 모건은 이번에 대회가 끝나면 다시는 리체를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음 해, 한니반이 모건에게 크셀폰에 나가라 한다고 해도. 리체가 참가한다면 자신은 자격 심사조차 받지 않으리라.

‘찾아야 해.’

혹시 어디 틈에 들어간 건 아닐지.

허리를 숙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건의 눈에, 누군가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안녕, 모건.”

모건은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몇 시간 전에 헤어진 리체였다.

“리체?”

리체가 일부러 찾아온 건가? 무슨 용건이지?

모건은 리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거.”

리체는 모건에게 내밀었던 주먹 쥔 손을 펼쳤다. 펼쳐진 손 위에 모건이 잃어버린 장식이 들려 있었다.

“내가 주웠어. 우리 다람쥐가 달고 왔더라.”

파이톤스한테 딸려간 거였나. 모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리체의 손에 있는 장식을 가져갔다.

“고마워, 리체. 덕분에 살았어.”

“소중한 거야?”

모건은 주머니에 장식을 넣으려던 손을 멈칫했다.

리체의 은빛 눈동자가 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럴까 싶었는데, 아까 리체가 제 장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갖고 싶은 걸까.’

그렇다고 리체에게 줄 수는 없으니. 모건은 별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척 소중한 거야.”

“그냥 유리 조각이잖아……?”

“그냥 유리 조각이라도.”

리체의 말투가 평소와 다른 것도 같았다.

다른 이의 소중한 물건에 그냥, 이라는 말을 쓸 리체가 아니었는데.

“리체, 혹시 이게 많이 갖고 싶어? 그러면 하마드에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부탁해볼게. 하마드가 만들어준 거거든. 안에 유리 조각은 똑같지 않겠지만, 검은색 원석을 사용하면 모양은 비슷할 거야.”

“…….”

그런데 제 말에 리체가 입술을 꾹 눌렀다. 왜지.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야. 모건. 내가 미안해. 방금 그냥 유리라고 물은 건 실수로 한 말이었어. ……이만 가볼게.”

리체는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았다.

바쁜 일이 있나. 모건은 리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응. 다음에 봐. 장식 찾아줘서 고마워.”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뛰어갔다.

모건의 손등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깨끗한 하늘은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

그제서야 모건은 마물 심장 서른 개를 모아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저녁에 나가서 밤을 새우면 가능할지도.

아직 대회장으로 가면 수레를 빌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전에 튼튼한 가죽끈을 하나 사야 될 성싶었지만. 이번에는 목걸이로 하고 다니는 편이 낫겠어.

모건도 리체가 떠난 자리를 떴다.

* * *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소리.

지하 신전을 밝히는 횃대 아래, 수십의 사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등판에 모래시계가 수 놓인 검은 로브를 입은 사제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자신들의 앞에 있는 제단이었다. 고위 사제로 보이는, 하얀색 사제복을 입은 사제가 그 앞에 섰다.

“위대한 별께서 말씀하셨다. 과거는 되돌릴 수 있으니, 너희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사제는 제단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올려놓았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외자, 마른 나뭇가지가 부풀었다. 잎사귀가 피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앙상해진 나뭇가지에 푸릇푸릇한 싹이 맺혔다.

“보아라, 죽은 것에 과거의 영광이 다시 깃드는 순간을!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하는 순간을!”

와아아아아-.

사제들의 환호가 신전을 채웠다.

그런 신전의 벽에 붙어 있는, 붉은 거미 한 마리. 

“…….”

거미로 변한 지크베르트였다.

[내 말이 맞지?]

“…….”

[르티옴을 만든 별이 인간계와 무덤의 경계를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다니까.]

크르릉.

맹수의 만족스러운 울음소리가 지크베르트의 머릿속을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