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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73)화 (72/89)

73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바로 어제.

황립 아카데미를 떠난 지크베르트가 크셀폰의 도시 근처 평야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

머리를 강하게 울리는 두통.

지크베르트는 늑대화를 한 상태로 반나절 동안 기절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머릿속에 다른 생명체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네가 이번 대의 세르디야인가?]

“누구야?”

[네 오래된 선조에게 힘을 준 별. 내 이름은 카이샨. 귀한 이름을 들은 걸 영광으로 알거라. 작은 늑대여.]

그게 뭔데.

지크베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보다는 크셀폰에 있는 리체에게 찾아가야 하니.

늑대화를 한 지크베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잠깐!]

다시 달리려는 지크베르트에게, 카이샨이 소리쳤다.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하지? 네가 짐승으로 변하는 힘, 그게 내가 준 거라는데.]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머릿속에 소리를 울리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싫다. 주변에 내 그릇으로 쓸 만한 게 없잖아.]

“리체가 위험해.”

[리체가 누군데.]

“……르티옴.”

[오호, 르티옴?]

카이샨이 잘 됐다고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

[르티옴이 위험한 거면, 내가 말하는 데로 가.]

“내가 왜?”

[거기에 르티옴을 노리는 놈들이 있으니까.]

“…….”

그렇게 카이샨이 안내하는 곳이 지금 이곳.

롬 사막과 인접한 지하 신전이었다.

“결전의 날에 티타 님의 피조물이…….”

하얀 사제복을 입은 사제의 설교가 이어졌다.

지크베르트는 거미로 변한 몸을 움직여 신전을 빠져나왔다.

* * *

흑색 별 조각의 고유 특성을 이용하니 케이슬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리체는 반지를 낀 채, 길가의 벽을 짚고 케이슬리를 상상하며 걸어다녔다.

[야옹.]

케이슬리의 형상이 나오는 길을 추려내니, 그녀의 활동 경로가 나왔다.

리체는 그중 한 길목에서 잠복해 있다가 고양이로 변한 케이슬리를 붙잡았다.

“케이슬리 교관님, 찾았어요.”

케이슬리는 리체의 품에 안겨 발버둥 쳤다. 리체가 팔에 힘을 풀자, 케이슬리는 바닥에 착지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리체보다 작은 키, 회색 단발에 헤이즐 눈동자. 케이슬리가 리체에게 물었다.

“어떻게 찾았죠?” 

“교관님을 미행했어요.”

“미행?”

케이슬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미행이라니. 전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는데. 나한테 들키지 않을 정도였다고?

케이슬리는 리체에게 합격증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트아리체 로드윅. 내 예선 과제 첫 합격생이에요.”

2주 만에 잡힐 줄이야.

케이슬리는 분한 마음보다는 뿌듯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과연 내 안목. 이 정도는 돼야 내 제자로 삼을 만하지.

“예선 합격을 축하하는 의미로 제가 맛있는 걸 사줄까요?”

이제부터는 트아리체를 꾈 시간이었다.

케이슬리는 사심을 듬뿍 담아 질문했지만, 합격증을 받아든 리체의 말에 제 실수를 깨달았다.

“아니에요. 출전자랑 시험 교관은 사적으로 만나지 못하잖아요.”

맞는 소리였다.

이렇게 예선 기간을 날릴 줄 알았으면, 예선 과제를 로드윅처럼 대련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으으. 아까워.’

인사하며 자리를 뜨는 리체를 말없이 보내줄 수밖에 없는 케이슬리.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케이슬리의 부교관, 릭스가 쯧쯧 혀를 찼다.

* * *

“…….”

리체는 합격증을 들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앞으로 본선까지 남은 시간은 3개월하고도 며칠.

[그동안 뭐 하지?]

‘글쎄.’

파이톤스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했다.

아무것도 안 할 바에는 마물의 숲이라도 한 번 다녀오면 좋겠는데.

계약자가 도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무덤에 다녀오긴 글렀다.

[모건 데이얼은 나갔다 왔잖아. 우리도 그렇게 나갔다 오면 안 되나?]

‘우리는 안 돼. 모건은 예선 과제 때문이었으니까.’

그제, 크셀폰의 아침이 떠들썩했었다. 롬 사막에 다녀온 모건 데이얼이 끌고 오는 수레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레를 가득 채운 마물의 심장. 아니, 놀라운 건 그 뒤에 있었다.

밧줄로 꽁꽁 동여맨 거대한 심장 하나가 수레에 매달려 바닥에 끌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큰지, 멀리서 보던 사람들은 커다란 곰이 길가를 어슬렁거리는 줄 알고 건물 안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저렇게 큰 걸 잡은 거야?”

“모건 데이얼 혼자?”

그 모습을 보려고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길가에 섰다.

급기야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건을 쫓아갔고, 예선 결과를 받을 때쯤 모건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다.

“스물아홉, ……서른. 합격이다.”

합격이라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박수갈채.

나 원. 작년에도 소란스럽게 합격하더니. 인기인이군.

검술과 시험 교관은 합격증을 넘겨주며 물었다. 

“하나는 왜 이렇게 크지?”

“아, 서른 번째로 보인 마물이 컸거든요.”

그 정도로 크면 보통 도망가고 다른 마물을 잡지 않나.

시험 교관은 질린다는 얼굴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우승은 모건 데이얼이겠군.

그러고 다시 지금.

리체는 요 며칠 봤던 모건과, 장식의 기억에서 봤던 이안을 떠올렸다.

‘모건이……. 이안이었어.’

그래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걸까.

모건을 볼 때 이따금 한없이 북받치던 감정.

그건 무의식중에 이안을 향한 제 그리움이었던 걸까.

“나는 앞으로도 살 거야. 널 위해서.”

어렸을 때, 이안이 해줬던 말. 리체는 그 말이 자신이 이안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이안이 날 위해 산다면, 그것도 괜찮다. 리체가 처음 만났던 8살의 이안은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저를 이유로 삼아 살아남으면 그게 좋은 거겠지.

하지만.

[네가 살아남아야 르티옴이 살아.]

지난 6년.

자신이 이안의 짐이 되어버렸다. 이안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만들어버렸다.

게르웨르 공작이 얼려지고, 이제야 살아갈 곳을 찾은 이안에게. 그 어린 이안에게.

“그냥 유리 조각이잖아……?” 

이안, 왜 날 원망하지 않아?

장식을 돌려주던 날, 리체는 턱 밑까지 튀어나온 그 말을 꾹 참았다. 네가 지금 겪는 불행은 모두 나 때문인데. 내가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인데.

[리체, 보고 싶어.]

왜 그렇게 다정한 얼굴로 절 불렀는지.

수많은 날 동안, 유리 조각을 향해 쏟아놓은 속마음 중에, 왜 자신에 대한 원망은 단 하나도 없었는지.

리체는 이안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안 돼.’

리체는 고인 눈물을 훔쳤다.

모건 데이얼로 사는 이안의 지난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트리는 짓이니.

아직 모건을 이안이라 부를 수 없다. 히켄카가 이안에게 한 말이 있었으니.

[이름을 바꿔. 이름은 죽음이 널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3년 뒤다.

19살. 게르웨르 공작가의 지하실에서 맞은 이전 생의 제 죽음.

자신이 그 죽음을 넘기면, 이안의 죽음은 이안을 쫓아오는 것을 멈출 것이다.

‘파이톤스, 내가 19살 이후에 이안과 살아남으면 어떻게 돼?’

[새로운 운명이 생기겠지. 인간은 그런 존재잖아. 죽을 것 같은 역경을 이기고 나면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내가 한때 전쟁터에서 그런 인간들을 많이 봤다고.]

파이톤스는 일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제 계약자가 이안드웨인을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식을 돌려준 날부터 베갯잇을 어찌나 적시던지.

덕분에 별 조각을 주인에게 돌려줄까 하던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오늘 고양이를 찾는 데 별 조각을 사용한 걸 보니 돌려줄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

[모건 데이얼, 네가 언제까지고 총장의 개로 총애를 받을 것 같나? 쓸모없어진 사냥개는 식탁 위에 올라간다는 걸 명심해.]

그 디클란인지 뭔지 하는 교수가 이안드웨인한테 험한 말을 하던 장면이 나와서 다행이었지.

‘한 번 손에 들어온 별 조각을 줄 리가 있겠어?’

파이톤스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한편, 리체는 파이톤스가 한 말을 상기하며 결심했다.

19살, 새로운 만들어지는 이안의 운명.

‘나도 널 위해 살아남을게. 이안.’

* * *

크셀폰 도시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마을.

그곳의 커다란 주점에서, 낡은 나무 테이블과 어울리지 않는 귀남자가 있었다.

감각적으로 차려입은 말끔한 정장과 반질거리는 구두.

단정한 하늘색 머리카락, 시원한 푸른 눈, 호감을 부르는 얼굴에, 사회성 좋아 보이는 상냥한 웃음까지.

주점 안의 사람들이 한 번씩 그를 힐끔거렸다. 말을 걸어볼까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맞은편에 앉은 일행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

로브의 후드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이 좋은 남자였다. 잘 나가는 용병이라고 해도 좋을 체격.

거기에 무뚝뚝한 태도까지 더해지니, 귀남자가 앉은 테이블에 가까이 앉기조차 어려웠다.

덕분에 테이블 주변이 휑했다.

푸른 눈의 귀남자는 맞은편의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그래, 지크베르트. 네 아들 같은 이 꼬맹이가 위대한 별인지 뭔지라는 것도 잘 알겠어.”

“꼬맹이라니!”

“아들 아니야.”

로벤하프는 지크베르트 옆에 앉은 5살 정도 외형의 꼬마를 가리켰다.

지크베르트와 같은 녹안과 붉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그게 리체를 구하러 가는 날 막을 이유가 돼?”

몇 시간 전.

로벤하프의 앞에 도착한 릴리의 편지.

오빠, 리체 언니 납치될 것 같아.

가서 활약 좀 해.

때마침 일 때문에 크셀폰과 가까운 지역에 와 있었다.

로벤하프 모든 일을 중지하고 크셀폰으로 달려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달리는 제 말 옆에 늑대로 변한 지크베르트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돼.”

그러더니 절 끌고 이 마을로 왔다.

상황을 설명해준다며 한산한 주점에 자리를 잡긴 했는데.

“반갑다. 히베츠만. 나는 위대한 별, 카이샨이다.” 

“……뭐 해? 지크베르트.”

지크베르트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몸속에 무슨 별이 들어가 있다느니, 그 별이 지크베르트의 몸을 빌려 이야기하는 거라느니.

‘솔직히 미친 줄 알았지.’

로벤하프가 계속 제 말을 믿지 않았다.

지크베르트의 모습을 한 카이샨은 답답해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어 다시 주점 안으로 들어온 건 평상시의 지크베르트와, 지금 눈앞에 있는 꼬마였다.

“잠시 사념체로 나왔다. 힘이 부족해서 이 모습으로는 짧게밖에 못 있어.” 

사념체 같은 주술사들이 할 법한 말을 하는 게 영 수상했지만. 능력자들의 시초를 만든 위대한 별이라니, 뭐.

로벤하프는 다시 질문을 이었다.

“왜 이 마을로 온 거냐니까? 리체가 납치될지도 모른다는데, 지금 당장 크셀폰으로 가서 출전자 보호 요청이라도 해야지. 데르케디온에게 알린다거나.”

“일을 꾸미는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아니까.” 

어린아이 모습을 한 카이샨이 대답했다.

로벤하프는 카이샨에게 물었다.

“확실해?”

“확실하다.”

“자들이라고 했지. 단체인가 보네?”

로벤하프의 말에 카이샨이 씩 웃었다.

“머리가 좀 돌아가는군. 히베츠만.”

“리체를 왜 납치하려고 하는데?”

“능력자들을 모아서 위대한 별들의 본체를 꺼내려고. 르티옴은 능력자들을 잡을 미끼고.”

별의 본체라.

데르케디온과 제 몸에도 그 본체가 있다고 했다.

그걸 노린다고. 별로 실감은 나지 않는데.

“다른 두 별은 무슨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있다고?”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랬지. 로드윅에게 힘을 준 녀석은 모르겠지만, 네 쪽은 아직 못 나온 것 같군. 나왔으면 나처럼 본체를 찾아왔을 테니까.”

“뭐, 됐고.”

로벤하프는 카이샨을 바라봤다.

그런 얘기는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언제 치러 갈 건데? 그 납치범.”

리체의 적을 제거하는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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