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74)화 (73/89)

74화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납치범들을 치러 간다.

로벤하프와 같은 생각이었던 지크베르트가 곧바로 대답했다. 

“석 달 뒤에.”

“석 달?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려?”

“교단의 우두머리가 서 대륙에서 넘어오고 있다. 르티옴이 참가하는 대회의 본선에 맞춰 온다더군. 내가 노리는 건 그 녀석이지. 잔챙이들을 잡으려다가 놈을 놓치는 건 사양이야.”

카이샨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로벤하프는 한발 물러섰다. 리체를 노리는 적의 싹을 뽑기 위해서라면 기다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래. 뭐.”

크셀폰 안에 있는 사람들과 통신은 가능했다. 안에는 데르케디온이 있으니, 이 이야기를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리체를 지키려고 하겠지. 어쨌든 믿음직스러운 놈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로벤하프는 지크베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만.”

그러고 보니 이제 시험 기간이었다.

자신은 아카데미라는 아늑한 온실에서 쫓겨난 불쌍한 사회인이지만.

지크베르트는 아직 그 따뜻한 온기 속에 머무는 학생이 아닌가. 비록 온기는 잠시 크셀폰으로 떠났지만. 그래도. 

“……너, 기말고사는 봤냐?”

로벤하프의 물음에 지크베르트가 시선을 돌렸다.

지크베르트, 이 머리 좋은 자식. 유급하게 생겼잖아.

나도 유급이나 할걸. 그러면 일 년을 더 리체와 함께 있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만 리체한테 유급당하는 걸 보여주는 건 너무 꼴사납지.’

귀족 체면도 있었다.

세르디야는 짐승이라 괜찮지만, 저는 아니었다.

로크샤 제국의 명문가인, 히베츠만 공작 가문의 가주 후계자.

비록 능력자들의 구원자인 리체 덕분에 몇십 년 뒤에나 가주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석 달 뒤란 말이지.”

머물 곳이 필요하겠네. 

로벤하프는 주점을 포함한 여관이 얼마일지 계산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 *

“리체, 오늘도 왔어?”

“안녕, 모건.”

리체는 모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아침 훈련을 다녀오는 모건을 찾아온 지도 어느새 4일째.

리체가 모건을 찾아온 결심을 한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크셀폰에 있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몇 년간 이안을 못 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리체는 모건을 찾아갔다.

“예선을 통과하고 나니까 너무 심심해서. 같이 산책할래?”

“……그래.”

다행히 모건은 리체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산책하는 장소는 늘 같았다.

모건이 리체를 따라 뛰어들었던 호수가 있는 공원.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기에, 둘이 함께 걸어도 허튼 소문이 나지 않을 터였다.

“…….”

리체는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슬쩍 모건을 바라봤다.

앞을 보고 걸어가는 얼굴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모건은 리체가 오는 것을 늘 반겨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 어린 얼굴을 떨치지 못했으니.

“모건, 내가 자주 오는 게 부담스러워?”

리체의 질문에 모건의 금안이 리체에게로 향했다. 

이안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이상한 일이야.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를 만나 벅차 이러는 거라면, 며칠이 지난 지금은 전보다는 사그라들어야 할 듯한데.

‘이안을 보기만 해도 좋아.’

손·발끝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가만히 있다가도 그냥 웃음이 나온다거나.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하지만 이안에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안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짐을 생각하면, 막 시작한 이 감정은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졌다.

‘내가 이안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리체가 멀뚱히 이안을 올려다보는 와중에도, 이안의 시선은 리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리체의 질문에 다시금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다 리체는 볼에 점점 열이 오르는 걸 깨닫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이안은 붉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부담스럽지 않아. 그런데 리체, 이제 안 와도 좋을 것 같아. 내가 운이 없으니까, 널 다치게 할까 걱정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 꽤 강해. 모건. 네 곁에 있어도 다치지 않을걸?”

리체는 상의 안에서 꺼낸 마석 목걸이를 흔들며 말했다.

“사실은 비밀인데, 나 마석 없이도 마법 할 줄 알아. 그런데 마석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연기하는 거야.”

이 정도면 충분히 강하지?

리체는 생긋 웃었다.

마력은 별의 힘. 리체는 계약한 파이톤스의 힘을 끌어다 쓰니 마석이 필요 없는 거겠지.

엄청난 비밀을 제게만 털어 놓아주는 거지만, 이안은 그게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런 걸 말해줄 정도로 리체는 모건 데이얼이 무척 좋은가 봐.’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질투하는 모습이라니.

리체에게 묻고 싶었다.

‘이안드웨인을 어떻게 생각해?’

자꾸 욕심이 난다. 과거에 관한 것은 3년 뒤에 열 것이라 가슴에 묻어놨는데도.

어렸을 적 만난 이안드웨인을 기억하냐고, 그 아이는 네게 어떤 사람이냐고.

‘정신 차려.’

이안은 안쪽 입술을 깨물었다.

리체에게 제가 무슨 존재인지 상관없다고 다짐했던 때가 고작 며칠 전이었다.

눈덩이 불어나듯 커진 욕심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동시에 불안해졌다. 제 결심이 흔들리는 이 상황이. 리체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달콤하고 포근해서, 나중에는 떨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리체, 나는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네게 날 기억해달라 무릎 꿇고 애원할까 두려워.’

외줄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기분이었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외줄의 건너편. 그 아래, 안락한 향으로 절 유혹하는 죽음의 낭떠러지.

[포기하면 안식이 찾아오지.] 

밤에 찾아오는 환청이 킬킬거리며 이안을 비웃었다.

언젠가 내가 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네게 무릎 꿇고 울음을 터트리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지. 이안드웨인을 기억해달라고, 모건 데이얼은 가짜라고.

그 상황이 온다면 이안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 끊어내야 해.’

리체가 절 멀리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리체.”

“응?”

이안은 입가를 억지로 올려 미소를 지으며, 가장 하기 싫었던 말을 꺼냈다.

“내가 로크샤 황립 아카데미에 마물을 보냈어.”

리체에게 미움받을 거야.

이안은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나는 네 적이야.”

* * *

“…….”

데온은 숙소 의자에 앉아 나이프를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한 시간 전쯤, 제게 통신 예약이 걸려 있다고 연락이 왔다.

[데르케디온! 잘 지냈어? 시험 교관 생활은 좀 어때?] 

“무슨 일인데.” 

대회장 밖에 있는 통신국으로 가서 받아보니 로벤하프였다.

딱히 통신을 하면서까지 안부를 전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로벤하프가 제게 연락했다면 필시 용건이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로벤하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 할 말을 쏟아냈다.

[이게 사업 기밀이라서. 도청 같은 게 있을지 모르니까 짧게 말할게? 붉은 거미가 보이면 좀 잡아줘라. 그 지역에서만 서식한다는데, 이번에 거래하는 상단주가 그 거미를 찾고 있대. 꽤 큰 거래라. 부탁할게.] 

“뭐? 야, 로벤하프.”

그렇게 통신은 끊겼다.

내가 왜. 데온은 미간을 찌푸린 채 통신구를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지금 의자에 기대앉은 이 상태였다.

‘갑자기 웬 붉은 거미?’

도청을 굳이 언급한 점도 이상했다.

크셀폰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 데온은 돌연 천장을 향해 나이프를 던졌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붉은 게 왔다 갔다 했으니 거미겠지.

데온의 감처럼, 천장에 박힌 나이프를 타고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 거미가 내려왔다.

천천히 실을 타고 내려오던 거미는, 이내 사람의 모습으로 데온의 앞에 섰다.

“세르디야.”

“안녕, 데르케디온 선배.”

붉은 거미가 지크베르트를 말한 거였나. 

수인화가 곤충까지 범위를 미치는지는 잘 몰랐지만,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으니. 데온은 가만히 지크베르트를 바라봤다.

“…….”

“…….”

찾아온 건 저쪽이다. 그러니 용건을 말해야 할 것 아닌가.

미간을 찌푸린 데온과 멀뚱히 서 있는 지크베르트.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상황 자체가 어색한 탓도 있었다. 

6년을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두 사람은 여태껏 단둘이 대화해본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적었으니.

“무슨 일이지?”

결국 데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제야 지크베르트도 제가 온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바깥에 적이 있어.”

“적?”

세르디야의 적이 생긴 게, 로벤하프가 통신한 이유인가.

“그래서, 적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

“그런데 너 지금 시험 기간이잖아.”

“…….”

날카로운 전 학생회장의 기억력.

입을 꾹 다문 지크베르트에게, 데온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관심 없어. 내 동생 걱정이나 시키지 마.”

“……데르케디온 선배도.”

지크베르트가 지지 않고 말했다.

지난번 리체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읽은 얘기가 있었다.

“리체가 말 안 한다고 걱정했는데.”

“……그거는 해결했어.”

그 말에 데온이 슬쩍 꼬리를 내렸다.

아직 리체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못 했기에, 그 주제는 평소의 데온과 달리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크베르트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각도로 데온에게 말했다.

“나는 걱정 안 끼쳐.”

“……세르디야. 기세가 등등하네?”

“응.”

데온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세르디야가 저와 싸워보려고 온 모양이었다.

데온이 상반신을 앞으로 움직이던 그때.

“답답하네, 정말.”

“……?”

“대화가 안 되는 놈들이군.”

지크베르트 입에서 다소 오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 데온은 지크베르트를 바라봤다.

이 세르디야가 지금 대놓고 시비를 건 건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짐승하고 말하는 게 더 말이 통하겠군.”

“너-.”

“로드윅. 위대한 별이락-.”

컥.

카이샨은 갑자기 틀어막힌 숨통에 상체를 숙이고 목을 붙잡았다.

데온은 아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됐네. 해보자는 거지?”

마침 기운이 뭉치기 전에 능력을 사용하려던 참이었다.

세르디야와 겨룬다.

나중에 리체가 알면 걱정할 테니,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로드윅이랑 세르디야. 어느 쪽이 강한지 해보자고.”

카이샨은 흉흉한 붉은 눈을 보며 지크베르트 몸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 * *

다시 공원 산책로.

리체는 자신이 적이라 고백한 모건을 바라봤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 말할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적인 줄 알면서도 친하게 지냈다는 말이니.

‘이안, 울 거 같아.’

리체는 이제 이안이 어떻게 울음을 참는지 알고 있었다.

기억을 통해 봐왔으니까. 미소를 짓는 이안의 입꼬리가 떨렸다.

괜히 저마저 이안의 감정이 느껴져 가슴이 아린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할까.’

적이어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모건, 네가 어떤 사람이든지 좋아한다고.

리체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모건, 나는-.”

그때였다.

“……!” 

[계약자!]

리체는 몸을 틀어 뒤를 바라봤다.

멀리서 느껴지는 별의 힘.

‘……위대한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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