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75)화 (74/89)

75화 그게 누군데?

‘파이톤스, 위대한 별이야?’

[맞아. 꽤 멀리 떨어진 것 같은데 느껴질 정도면, 그 녀석들 중 하나밖에 없지.]

히켄카일까. 만나봐야 해.

아니어도 가봐야 했다. 히켄카가 아니라면 유리병에 사념체로 봉인된 별들 중 하나라는 소리이니.

느껴지는 힘이 사라지기 전에 누군지 확인해야 해.

“모건!”

리체는 이안을 힘껏 껴안았다.

비록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모건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

“……!”

“나는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리체는 다시금 모건을 껴안은 팔에 힘을 준 뒤, 팔을 놓고 뛰어갔다.

“리체! 하지만……!”

“미안, 바쁜 일이 생겨서! 다음에 봐!”

모건은 멀어져가는 리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리체가 힘껏 껴안을 때 겹친 팔.

쿵, 쿵. 맥박이 크고 빠르게 뛰었다. 붉어진 팔과 붉어진 얼굴. 모건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 * *

[대회장 방향이잖아?]

파이톤스는 달리는 리체의 주머니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응.’

리체는 대답하면서도 마음이 급해졌다.

대회장이라니. 데온이 있는 방향이다.

혹시 지금 느껴지는 별이 로드윅에게 힘을 준 별이라면.

“…….” 

리체는 6년 전에 봤던 싸늘한 눈빛의 데온을 떠올렸다.

만약 그 별이라면, 데온을 그릇으로 사용하게 두지 않을 거야.

옴으로 전신이 뒤덮였던 데온. 데온을 19살의 제가 봤던 그 상태로 만들 수 없었다.

[아, 저번의 꽉 막힌 경비병이네.]

파이톤스는 대회장 입구 앞을 지키는 경비병을 보고 말했다.

리체가 그 옆을 지나쳐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경비병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꼿꼿이 서서 입구를 지켰다.

인지 조작 능력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아직 기운이 느껴져!’

이대로라면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점점 힘이 느껴지는 게 커졌다. 데온의 숙소 방향이었다.

[지진이라도 난 거야?]

파이톤스가 중얼거렸다. 불연속적으로 계속 진동하는 땅 때문이었다.

쿠우우웅.

대회장의 건물들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물의 포효, 검날이 긁히는 소리, 무언가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검 소리가 불길했다.

제발, 데온은 안 돼.

달리는 리체의 시야에 익숙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이거 뭐야? 나도 끼어들어서 싸워도 돼?”

“안 돼.”

구경하듯 선 케이슬리의 흥분한 음성, 말리는 그녀의 부교관.

리체가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오자, 대회장의 넓은 중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서진 분수대 위에 데온이 서 있었다. 상대는 옆에 있는 3층짜리 건물만 한 짐승형 마물.

데온은 제 몸보다 크고, 날카로운 발톱을 검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었다.

검이 슬쩍 떨릴 정도로 힘을 주는 것을 보아하니, 데온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인듯했다.

[뭐야.]

그리고 상대를 확인한 파이톤스와 리체가 당황한 소리를 냈다.

마물의 가슴께에 일렁이는 기운.

‘……지크가 왜 여기에 있어?’

위대한 별의 힘이 마물화를 한 지크베르트한테서 느껴지고 있었다.

* * *

“그만!”

두 사람의 싸움은 리체의 개입으로 끝이 났다.

인지 조작을 푼 리체의 모습에 데온이 먼저 검을 치웠고.

“사냥하고 싶게 생긴 다람쥐 모습은 여전하네.”

파이톤스를 발견한 카이샨이 마물화 상태로 중정을 벗어났고, 케이슬리가 카이샨의 뒤를 쫓았다.

그 직전에 크셀폰의 회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중에는 필립도 있었다.

현장에 남은 건 데온과 리체뿐이었다. 다시 인지 조작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기에도 늦었다.

리체는 크셀폰의 회장에게 급히 변명했다.

“저, 저는 주 1회 예선 보고를 위해 들렀다가 우연히 끼어들었어요!”

그러니까 데온은 출전자와 사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다.

회장이 마물을 목격한 일로 얼떨떨한 틈을 타, 리체는 분수대를 비롯한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데온이 그런 리체를 따라오려는 듯했지만, 리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마!’ 

“…….”

그러고는 지크베르트를 찾았다.

카이샨이 지크베르트 몸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별의 탐지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싸워보겠다며 카이샨의 뒤를 쫓아간 케이슬리를, 어찌어찌 잘 따돌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카이샨이 지크베르트의 몸을 차지한 채 제 눈앞에 있으니.

‘짐승의 신?’

[맞아.]

리체의 숙소.

리체와 파이톤스는 의자에 앉아 있는 카이샨을 보고 있었다.

카이샨은 방을 한 번 훑어보고는 파이톤스에게 말했다. 

“이런 코딱지만 한 방에서 지내나? 전쟁의 신이란 이름이 영 안 사는군.”

파이톤스는 흥, 소리를 내며 카이샨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온 거야?”

“나도 몰라. 유리병 내부에 강한 충격이 일어서 잠시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밖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모르지. 아직 자고 있는지, 어떤지.”

6년 전, 별들의 무덤으로 간 히켄카는 유리병을 자신이 아는 장소에 하나씩 숨겨놓았다고 했다.

유리병 밖으로 나온 카이샨은 사념체 상태를 풀기 위해 히켄카를 찾았지만.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를 않더군. 본 놈들도 없고. 인간계로 넘어가 버렸는지. 그래서 우선은 나도 내 본체를 지켜야 하니 인간계로 넘어오려고 했는데.”

카이샨은 지크베르트의 얼굴로 히죽였다.

“그 직전에, 네가 예전에 그 녀석이랑 자주 인간계를 구경하던 호수. 거기서 내가 중요한 걸 목격했지.”

“그 녀석? 티-.”

“조용히 해.”

카이샨이 파이톤스의 입을 막았다.

짐승처럼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그 녀석이 우리 위치를 알면 어쩌려고 그래?”

카이샨은 파이톤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위대한 별의 이름을 말하면 그 별에게 위치가 노출된다.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파이톤스는 황당했다. 이 자식이 왜 이래? 

카이샨의 손에서 빠져나온 파이톤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위치가 알려져서 곤란한 건 너희들이겠지. 나랑 호구는 서로 위치를 알아도 상관없어.”

“그 녀석은 르티옴을 만든 별을 말하는 거지?”

리체가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맞아. 나랑 싸운 건 걔가 아니라 저 자식을 포함한 네 개의 위대한 별이었다고.”

“파이톤스, 그렇게 적을 단정 지어도 좋겠어? 다람쥐가 되더니 사고하는 범위도 머리통만큼 작아진 모양이군.”

“뭐?”

파이톤스가 발끈하며 카이샨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가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실룩였는데, 자신이 할 말에 파이톤스가 어떻게 대답할지에 대한 기대감인 듯했다.

“내가 호수에서 뭘 봤는지 알아?”

파이톤스는 작다는 말에 씩씩 열을 올리다, 카이샨의 질문에 멈칫했다.

저게 뭘 보고 왔길래 저렇게 거들먹거리는 거지?

“말할 거면 빨리 말해.”

“시간을 관장하는 고대 신을 모시는 신전을 봤지.”

파이톤스는 김이 샜다. 

“뭐야, 흔하잖아. 네가 짐승만 상대해서 모르나 본데, 인간은 원래 시간에 관한 신을 자주 만들어내……. 잠시만, 고대 신이라고?”

“……?”

급격하게 굳어진 파이톤스의 표정.

리체는 영문을 몰라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다니까.”

카이샨이 만족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도 수천 년을 살아온 신이었다. 카이샨이 말하는 고대 신은 대부분 별이 되어버렸다. 남은 건 무덤을 관리하는 위대한 별 여섯.

그중에서 시간을 관장하는 별은-.

“그 교단 이름이 뭔지 알아?”

카이샨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파이톤스에게 말했다.

“(티), (타), (교).”

“……그 호구가, 깨어났어?”

르티옴을 만든 별이 깨어났다고?

리체가 카이샨을 바라봤다. 그는 충격받은 파이톤스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인간계와 무덤의 경계를 무너트리려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네 친구라고. 파이톤스.”

* * *

그리고 카이샨은 잠에 빠졌다.

“멍청이 아니야?”

파이톤스는 멀뚱히 앉은 지크베르트를 향해 중얼거렸다.

본인이 없으니 본체가 들어 있는 지크베르트에게라도 말해야 속이 후련할 듯했다.

“사념체로 힘을 마구 썼으니 잠들어 버리지.”

히켄카의 능력으로 변한 사념체가 좋은 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인간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아 물먹은 솜이 되지 않는다는 점.

그 외에는 단점이 수두룩했다. 

사념체로는 본체의 힘을 낼 수 없다거나.

사념체에 남은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하면 잠들어 버린다거나.

깨어나려면 잠으로 사념체에 힘을 보충해야 한다거나. 그런데 그 힘이 엄청나게 느리게 쌓인다는 거나.

본체 안에 껍데기처럼 남은 영혼과 사념체가 이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히켄카 외에 설명할 수 있는 별이 없었다. 

“파이톤스, 이번에도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거야? 지크 몸에 들어간 별 말이야.”

“아니야.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잠든 거라, 언제 또 나올지 몰라.”

그러면 안심할 수 없다는 거네.

리체는 지크베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지크베르트가 사르르 눈웃음 지었다.

“리체.”

“잘 지냈어? 지크.”

“응.”

그래도 반갑기는 했다. 리체는 지크베르트와 안부를 나누며 이야기했다.

“럼블라 교수님이?”

그러다 이번에 지크베르트가 이곳까지 찾아온 연유도 듣게 됐다.

로벤하프가 지크를 데온에게 보냈다.

도청 위험이 있으니 데온에게 직접 바깥의 상황을 설명하자는 게 로벤하프의 계획이었으나. 지크는 데온에게 미처 상황을 전하지 못했다고 했다.

“말이 안 통했어.”

어쨌든.

능력자들을 노리는 단체가 있다니. 그게 티타교라니.

‘지크가 사제들이 직접 말하는 걸 들었다니까…….’

르티옴을 만든 별이 깨어나고, 그 별이 다시 신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 것은 틀림없는 듯했다.

‘파이톤스, 경계를 무너트린다는 건 무슨 말이야?’

[별이 다시 신으로 돌아가면, 인간계와 무덤의 경계가 옅어져. 경계는 두 세계를 나누는 견고한 벽 같은 거니까. 그게 옅어지다 보면 결국엔 무너질 거고. 무너지면 이 세계도 붕괴하는 거야.]

그렇기에 몇백 년 전, 파이톤스는 티타와 함께 다른 네 위대한 별을 막는 전투를 벌인 거라고 했다. 

그들이 신으로 돌아간다면, 세계는 붕괴할 것이 빤했으니까.

‘그랬던 별이, 신이 되려는 이유는 뭐고,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건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르티옴을 만든 별의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그건 파이톤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설명을 끝내자마자 다시 입을 다물고 고민에 잠겨 있었으니.

“그래도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지크. 오는 길에 마물 안 만났어?”

“응.”

리체가 의자에 앉은 지크베르트 머리를 쓰다듬자, 지크는 리체의 손에 습관처럼 머리를 비볐다.

리체는 그런 지크베르트를 보며 뭔가를 잊은 느낌이 들었으나, 떠오르지 않아 묻는 것을 지나쳤다. 아카데미와 관련된 일 같았는데.

“그러면 로벤하프 오빠도 근처에 와 있는 거야?”

“응. 여관 사업을 한대.”

“갑자기 여관 사업……?”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크베르트는 돌연 눈을 빛내더니, 창문 근처로 걸어갔다. 수상한 걸 본 것 같은 낌새에 리체도 몸을 일으켰다.

커튼 사이로 바깥을 보는데,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띄었다.

“모건?”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인가?

“누구야?”

리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지크베르트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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