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가만두지 않겠어
“모건 데이얼이야.”
리체가 대답했다.
“예전에 훈련 도와줄 때, 로터스랑 말한 크셀폰 전 우승자.”
리체는 일부러 거리를 둔 호칭으로 모건을 불렀다. 지크는 감이 좋으니까, 가까이하면 모건의 정체를 알아볼지도 몰라.
“지크, 창문까지 온 건 모건 때문이야? 경계하느라?”
리체의 물음에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거. 저쪽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어.”
하지만 지크베르트가 가리킨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리체는 우선 그곳을 기억해둔 뒤, 고개를 들었다.
대회장의 커다란 건물이 이곳에서도 보였다.
‘데온은 잘 해결됐나…….’
그러다 대회장에 있을 제 오빠가 생각났다.
이따 필립을 한 번 찾아가 물어봐야 할 성싶었다.
“리체, 나는 이만 가볼게.”
“벌써 가게?”
“응.”
지크베르트가 교단을 감시할 거라고 하더니. 그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려는 건가.
리체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지크베르트는 작은 멧밭쥐로 변신해 리체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파이톤스도 반대편 주머니에 들어가자, 리체는 숙소를 나섰다.
성곽 근처까지 걸어온 리체는 수인화를 푼 지크베르트의 옴을 정화해주었다.
“지크. 카이샨이 깨어나서 다시 나타나면 꼭 말해줘.”
“응.”
파이톤스는 사념체가 무덤에서 잠들어 있을 거라 했다.
카이샨의 본체가 아직 지크베르트의 몸 안에 있으니, 다시 찾아올 것은 분명했다.
‘히켄카를 찾아야 해.’
사념체를 다시 유리병에 가두든, 다시 영혼으로 돌려놓아 본체를 끄집어내든.
카이샨이 지크베르트의 몸을 사용하는 일을 막아야 했으니.
‘아까 데온과 싸운 일 때문인지, 평소보다 옴이 빠르게 쌓였어.’
카이샨이 능력을 마구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지난 과거를 떠올린 리체가 지크베르트에게 부탁했다.
“네 몸의 주도권도 넘겨주지 말고. 그 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몸의 주도권을 잡는 건 정신을 잃었을 때나 본인 의지로 몸을 내어줄 때 가능하다고 했다.
억지로 빼앗을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릇에 무리가 가서 아마 하지 않을 거라고 파이톤스가 그랬으니.
“그럴게.”
지크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다시 멧밭쥐로 변해 성벽을 타고 쪼르르 올라갔다.
‘잘 올라가네.’
성벽 너머로 지크베르트가 사라지자, 리체는 몸을 돌렸다.
그런 리체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리체가 깜짝 놀라 위를 바라봤다.
절 바라보는 반가운 붉은 눈.
“걔, 갔냐?”
데온이었다.
* * *
크셀폰 도시 내의 레스토랑.
방으로 된 자리.
“시험 교관 자격 박탈?”
리체는 맞은편에 앉은 필립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이샨과 전투로 데온이 시험 교관 자리에서 잘렸다.
“그런데 더 잘 됐어요.”
“왜?”
“운영회 간부가 되셨거든요. 시험 교관도 간부긴 한데, 산하기관 소속이라. 여기 정책대로라면 직위가 올라가신 거래요.”
“승진한 거야?”
“그렇죠. 일주일 안에 임명장이 나온대요.”
필립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셀폰에서 시험 교관의 승진이라니. 유례없는 사태라며 대회장 내가 술렁였다.
도련님과 자신이 대화장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사람들의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듯했으니.
우리 도련님이 여동생 바보에 무섭긴 해도, 실력 하나는 엄청나시다니까.
“쓸데없어. 이거나 먹어.”
리체의 옆자리에 앉은 데온이 스테이크를 썬 접시를 리체의 것과 바꿔주었다.
검 솜씨를 여기다 부렸는지, 일정한 크기로 잘린 조각들이 반듯했다.
리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데온을 바라보곤, 씩 웃었다.
“고마워.”
데온의 승진 소식도 반갑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반가운 건 데온과 대화할 수 있다는 있는 것이었다.
데온도 리체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먹기나 해.”
리체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씹어 삼키고, 그사이 생긴 궁금증을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승진까지 하게 된 거야?”
“아, 그게요-.”
필립은 약 세 시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설명했다.
대회장 내에서 일어난 데온과 카이샨의 전투.
리체의 마법에 시설은 복구되긴 했지만.
“……이게 무슨.”
크셀폰의 회장이 복구되기 전의 반파된 중정과 건물, 마물화한 카디얀이 중정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게 문제였다.
도시는 성곽을 기준으로 마물의 출입을 막는 보호막이 쳐져 있었다.
그 보호막을 뚫고 마물이 들어오다니.
‘강한 마물이다. 그리고 거대해.’
회장이 소란을 알아차린 것은 대회장을 울리는 진동 때문이었다.
고작 마물 한 마리와 데르케디온의 전투로, 대회장 전체가 울렸다.
게다가 사라지는 짐승형 마물의 커다란 뒷모습. 보호막을 뚫은 것은 그렇다 치고, 저렇게 큰 마물이 대회장까지 들어오는데 아무도 몰랐다고?
‘잠시만.’
혼란스러운 회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일전에 모건 데이얼이 잡아 온 거대한 마물의 심장이었다.
그만한 크기의 심장이면 아까의 마물보다도 클 성싶었다.
설마 롬 사막에 초대형 마물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심상치 않다.’
이번 크셀폰에 큰일이 생기는 불길한 징조일지 몰랐다.
그런 회장의 불안에 확신을 준 가장 결정적인 것은.
“놓쳤어. 강하네?”
마물을 쫓아간 마탑의 이인자, 케이슬리.
그녀가 마물에게 당해 피를 철철 흘리며 돌아왔다.
‘이게 본선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면-.’
끔찍했다.
본선은 도시가 꽉 찰 정도로 참관객이 들이닥치니.
하지만 다행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마물의 습격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경비를 강화해야 해.’
그런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게, 분수대 앞에 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 데온.
바닥을 구른 티가 조금 나긴 했지만, 중상을 입은 케이슬리에 비하면 너무나도 멀쩡하지 않은가.
게다가 마물이 싸우다 도망갈 정도의 실력이라니.
“로드윅 시험 교관님.”
“?”
“운영회 간부 자리 중에 한 자리를 맡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귀찮습니다만.”
그딴 걸 왜. 지금 시험 교관을 하는 것도 귀찮은데.
흥미 없어 하는 데온에게, 회장은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데르케디온 로드윅이 책임자로 있어야 마물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다. 십수 년간 회장의 자리를 지킨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교관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셨던 권한, 운영회 간부에게도 있습니다.”
돌려 말한 것은, 주변에 있는 교관들을 의식한 것이었다.
데르케디온 로드윅이 시험 교관을 하는 이유는 경기 중단 권한을 갖기 위해서다, 라는 이야기가 퍼져봤자 좋을 게 없으니.
데온이 회장을 바라봤다. 그 외에 그 자리에 무슨 이득이 있냐는 눈빛.
“운영회 간부가 되시면, 출전자와 사적인 대화가 가능하지요.”
데온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면 오빠가 갖고 있던 합격증은?”
필립의 설명을 들은 리체는, 시험 교관인 데온이 맡았던 합격증을 떠올렸다.
아직 데온에게 합격 받은 출전자가 없어, 3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
“다른 시험 교관들이 나눠 갖는대요.”
“잘됐다. 오빠한테 있었으면 아무도 못 가졌을 텐데. 모건도 못 가져갔으니까……?”
필립의 말에 신이 나서 말하던 리체는, 돌연 정수리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옆을 돌아보자, 데온이 제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왜? 할 말 있어?”
저 불만이라고 적힌 눈.
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온이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너, 모건 데이얼, 누군지 알아?”
“……어?”
* * *
리체의 연기력은 과거보다 확연하게 발전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데온에게 통할 만큼은 못 되었다.
‘데온이 모건을 이안이라 의심하나?’
데온의 질문에 시치미를 뗄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게 문제였다. 데온은 리체의 거짓말은 하는 족족 다 알아차리니.
잠시 머리를 굴린 리체는 사실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으, 응. 알지. 우딕 아카데미 검술과 학생이잖아.”
“그런 거 말고.”
“그런 거 말고? 작년 대회 우승자다? 검술 실력이 좋다? 마법도 사용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다정하고, 웃는 게 예쁘고, 또…….”
점점 모건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가 주관적으로 흘러갔다. 마치 제가 모건 데이얼이 좋아 못 견디겠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점점 기어들어 가는 리체의 말을, 데온이 눈가를 좁힌 채 잘랐다.
“그것도 말고.”
왜 저렇게 볼은 붉혀.
지난번 리체에게 선을 긋던 모건 데이얼이 떠올라 짜증이 일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데온은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리체에게 물었다.
“모건 데이얼한테, 나한테 쌓인 옴 같은 거 안 보여? 너만 볼 수 있다며.”
“안 보여.”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데온은 그런 리체를 빤히 바라봤다. 제 눈을 피하지 않는 또랑또랑한 눈망울.
‘거짓말은 아닌데.’
데온이 리체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모건 데이얼이 이안드웨인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리체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고 싶었을 뿐.
리체한테 정체를 잘도 숨기고 있나 보군.
‘……그러면 얘는 게르웨르랑 모건 데이얼 중 누구를 좋아하는 거야.’
한데 얽힌 여러 감정이 울컥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그중, 가장 뚜렷한 감정은 모건 데이얼을 향한 적의였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게, 착해빠지기만 한 제 동생을 두고 장난하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어.
데온이 쥔 나이프가 종이를 접듯 앞으로 구부러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필립이 슬쩍 못 본 척하며 자신의 접시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난 도련님이랑은 엮이지 말자.
“그런데 오빠, 옴 정화할 때 된 거 같-.”
“안 보이면 됐어. 이것도 먹어.”
“응.”
리체는 데온이 건네는 관자 요리를 받아들었다.
고집불통.
‘나중에 몰래 정화해야지.’
그런 뒤, 데온은 리체에게 지크베르트가 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볼일이 생겼다며 대회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전에 리체를 데려다주겠노라고 숙소 근처까지 함께 걸어왔다.
“큰일이 날 거 같으면 마법을 사용해. 너 잘하는 거.”
“내가 잘하는 거?”
“다 부수든가. 물난리를 부리든가. 바로 찾아갈 테니까.”
“뭐야. 놀리지 마.”
“진심인데.”
데온은 간다며 두세 걸음을 걷다가, 우뚝 멈춰서서 리체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
뜬금없이 내뱉는 소리. 보아하니 아까 전부터 내내 저 말을 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다 끝내 말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헤어지기 직전에 말한 거겠지.
리체는 어깨를 으쓱했다.
“봐줄게. 나는 아량이 넓은 동생이니까.”
데온이 슬쩍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리체도 손을 흔들며 데온이 가는 것을 지켜봤다.
시야에서 데온이 사라질 때쯤.
[계약자.]
쭉 주머니에서 잠잠하던 파이톤스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말을 걸었다.
[모건 데이얼한테 가자.]
‘모건? 왜?’
[장식의 기억을 한 번 더 봐야겠어.]
* * *
짧은 갈색 곱슬머리와 얼굴의 주근깨가 매력적인, 우딕 아카데미의 기계과 7학년 여학생.
작업복을 입은 하마드는 숙소 건물 근처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기계 부품에 기름칠하는 중이었다.
해가 쨍쨍하니 아주 좋았다. 물기는 싹 날아가지, 적당한 온도 덕에 기름은 잘 먹지.
콧노래를 부르는 하마드를 누군가 불렀다.
“하마드?”
“헉.”
하마드는 고개를 들었다가 심장에 충격을 받았다.
트아리체잖아. 진짜 모건이랑 트아리체는 말 건네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볼 게 아닌가.
“트아리체, 우리 건물까지 무슨 일이야?”
“모건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어.”
“그래? 모건은 아까 나갔는데.”
아직 안 돌아온 건가? 하마드의 말에 리체는 모건의 행방을 물으려다가, 다른 용건 하나가 떠올랐다.
“있지, 하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