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내가 아니었어
“모건한테 만들어 준 장식 말이야.”
“응? 아, 그 모건이 검집에 달고 다니던 거?”
“맞아. 네가 만들어 준 거라며? 혹시 그런 장식 만드는 건 따로 주문도 받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트아리체가 원한다면 만들어 줄 순 있어. 간단한 거거든. 몇 개나 필요한데?”
“10개 정도?”
“가능해.”
트아리체는 마물에게서 절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쯤을 못 해줄까.
하마드는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리체는 밝아진 얼굴로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을 말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틀에 탄생석을 넣고 싶어.”
하마드는 리체의 의뢰서를 받아적었다.
외형의 스케치를 그리던 하마드는, 머릿속에 떠오른 주제를 입에 담았다.
“그런데 트아리체, 모건이 하고 다니는 장식 말이야.”
“응?”
자신은 기계밖에 모른다지만, 저런 외모의 트아리체라면 적어도 저보다는 이런 쪽으로 잘 알지 않을까.
“연인하고의 사연이 있는 것 같지 않아? 그 유리 조각, 모건이 직접 장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갖다준 거거든. 장식을 볼 때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라고.”
하마드는 스케치하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머릿속으로는 장식을 들고 있던 모건의 모습을 떠올렸다.
모건은 연인 같은 게 아니라 말했지만. 역시 뭔가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트아리체도 모건의 눈빛을 보지 않았어? 요새 같이 다녔으니까. 그 눈빛은, 나는 연인을 보는 눈이라 생각해.”
“글쎄…….”
하지만 하마드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이런 주제는 오히려 리체가 더 곤욕이었다. 연인이라고는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데.
‘꿀 떨어지는 눈빛?’
리체는 하마드에게 대답을 망설이면서도, 저도 모르게 설레고 있었다.
연인을 생각하는 다정한 눈빛으로 유리 조각을 보고 있었다니.
설마 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껏 그렇게 좋아하는 티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내가 밤새워 만든 무기보다 십 분 만에 만든 장식을 더 좋아하니-.”
‘아.’
그러다 리체는 제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안이 장식을 보며 떠올릴 상대는 한 명 더 있었다.
‘하마드.’
하마드가 장식을 만들었잖아.
리체는 들떴던 감정이 순식간에 부끄러워졌다.
“하마드,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응? 당연히 되지.”
리체의 물음에 하마드가 펜을 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모건이랑은 언제부터 친구였어?”
“모건이랑?”
하마드는 짧은 갈색 곱슬머리를 펜 끝부분으로 긁적였다.
모건이랑 언제부터 친구였더라.
“1학년 때? 모건이 전학 온 첫날부터였나? 아, 생각났다. 내가 그때 비행 옷을 만들었었거든. 그걸 입고 2층에서 뛰어내렸다가 모건이랑 부딪혀 넘어졌어. 아, 그거 아쉬웠는데. 공기 저항을 조금만 더 줄였으면-.”
하마드는 어느새 모건의 꿀 떨어지는 눈빛은 잊고 발명품 얘기에 눈을 빛냈다.
리체는 그런 하마드에게 호응해주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1학년 때부터라니. 6년 동안 하마드와 함께 있었다.
역시 이안은 내가 아니라, 하마드를.
‘이안이 가장 힘들 때 하마드가 옆에서 있어 준 거야.’
잠시 날아갈 듯 공중에 떴던 발이, 지면을 딛고 선 기분이었다.
내 자리는 여기. 이안의 자리는 저기.
그 사이에는 6년이란 세월이 가로막고 있었다.
‘염치가 없었네.’
그저 모건이 어렸을 적 알았던 이안이라는 것만으로, 모건도 저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던 게 염치가 없었다.
이안이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곁에 있어 줬던 건 자신이 아니었는데.
“하마드.”
다행이었다.
“내 생각에도 모건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응? 아. 그 얘기 중이었지? 흐음. 역시 트아리체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모건이 절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않아서.
제 이기적인 마음을 모건에게 고백할 뻔하지 않아서.
리체는 하마드를 향해 다정히 웃음 지었다.
“고마워, 하마드.”
“뭐가? ……장식 만들어주는 거?”
“응.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하마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네가 있어서 이안이 살 수 있었나 봐.
리체는 하마드를 향해 다정히 웃음 지었다.
“뭘……. 별것도 아닌데.”
하마드는 그런 리체를 바라보며,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진짜 예쁘네.
내가 남자였으면 트아리체한테 반했겠어.
* * *
“어? 모건.”
숙소 건물로 들어오던 모건은, 절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용 휴게실에 있는 하마드였다.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도 저기서 무언가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모건은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하마드가 말을 걸었다.
“늦게 들어왔네?’
“응. 훈련하느라.”
“이 시간까지?”
하마드는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다 못해 달까지 떠 있었다.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각.
하마드의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진짜 크셀폰 우승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가뜩이나 강하면서,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그래?
이미 학생들 사이에는, 모건 데이얼이 데르케디온 로드윅 시험 교관과 실력이 엇비슷하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건이 며칠을 연달아 로드윅 시험 교관의 예선 과제를 보러 갈 리 없었을 테니까.
“승패가 나지 않는 거지. 모건이 오늘도 과제를 보러 간 거면, 어제도 무승부였나 봐.”
그러다 결국 진 모양이지만.
몇 주 전, 참가 자격 심사에서 로드윅 시험 교관의 강함을 몸소 체험했던 검술과 학생들은 그게 어디냐며 혀를 내둘렀다.
“우승은 작년 얘기잖아. 올해는 자격 심사도 통과 못 해서 참가도 못 할 뻔한걸. 부족하니까, 훈련해야지.”
“그래, 그래.”
그런 바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하마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핀셋을 움직여 아까 도시 내 보석상에서 산 작은 원석을 집어 들었다.
리체가 의뢰한 장식에 쓰일 탄생석들이었다.
예쁘고 씀씀이가 좋은 의뢰인 덕분에 지갑이 두둑해졌더니, 재료 상태가 무척 좋다.
하마드는 콧노래를 불렀다.
“뭐 만들고 있는 거야? 나한테 만들어 준 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
재료가 비슷했다.
모건의 것이 원형 틀이고, 지금 하마드가 만드는 게 다이아몬드형 틀이라는 게 달랐지만.
“그거랑 비슷한 거 맞아. 트아리체가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리체가?”
열중하던 하마드는 앞쪽 자리의 의자를 빼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 있던 모건이 제 앞자리에 앉았다.
“구경해도 돼?”
평소라면 바로 씻고 자러 갔을 텐데.
웬일로 구경한다고 하지?
하마드는 의아함을 갖고 물었다.
“해도 되긴 하는데, 안 피곤해? 훈련하다 왔다면서.”
“괜찮아.”
저러고 또 새벽 훈련을 가겠지.
자신이 모건을 처음 본 후부터, 모건이 새벽에 훈련을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모건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것 같다니까.
하마드는 그러려니 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작업에 집중했다.
모건이 간간이 말을 걸었다.
“리체가 다른 사람들한테 주려고 의뢰한 거야?”
“응. 선물할 거래.”
…….
“원석들이 다 다르네? 색도 다르고. 리체가 좋아하는 색은 무슨 색이야?”
“나도 모르지.”
…….
“틀이 다이아몬드 모양이구나. 여기에 은색으로 된 보석을 박아도 예쁘겠다.”
“…….”
……집중 안 돼.
하마드는 핀셋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냐는 듯, 생긋 웃는 모건 데이얼.
‘아, 모건.’
진짜 티 난다.
저렇게 들뜬 얼굴로, 거기에 다디단 목소리까지 더해지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모건.”
하마드는 살짝 질린 얼굴로 물었다.
“너 트아리체 좋아하지.”
“응.”
“좋아한다고?”
곧바로 나온 대답에 질문한 하마드가 되려 놀랐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이게 이렇게 쉽게 나올 말이야?
그와는 달리, 폭탄선언을 하고도 오히려 생글생글한 낯을 유지하고 있는 모건.
시선은 테이블 위에 두고 있었는데, 트아리체가 하마드의 수첩에 적은 글씨였다.
몇 주 전, 우딕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꿀 떨어지던 눈빛.
“장식의 유리 조각을 보고 떠올리던 사람이 트아리체였어?”
“글쎄.”
시치미 떼기는.
모건 나름대로 숨기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하마드는 자신이 다 설레는 기분이었다. 마냥 훈련만 아는듯하던 제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다니.
그것도 저렇게 순애보 같은 모습으로.
‘트아리체가 모건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 혹시 둘이 잘되고 있는 거 아니야? 얼마 전에 손잡고 걸어가고 있었다고도 하고.’
이거, 모건이 트아리체를 좋아한다고 바로 인정한 이유가 있었네.
어쩌면 둘이 사귀기 직전인지도 몰랐다.
하마드는 관람석 1열에 앉아 커플 탄생을 지켜보는 기분으로, 두근거리며 모건에게 물었다.
“모건, 너 트아리체 좋아한다고 했잖아.”
“응.”
제 마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모건은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푹 빠졌네. 모건 같은 애는 누구랑 연애하나 했는데, 트아리체 같은 애랑 하는구나.
너무 좋겠다. 하마드의 머릿속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 트아리체한테 고백할 거야? 잘 돼 가고 있는 거 같던데.”
하마드의 물음에 모건은 이번에도 즉답했다.
“안 해.”
“엥?”
잘못 들었나?
하마드가 모건에게 다시 질문했다.
“모건, 트아리체한테 고백하지 않을 거라고?”
“응.”
왜?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건의 표정은 아까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
그 결정을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놓아서, 입 밖으로 꺼내도 동요가 일지 않는 사람처럼.
하마드는 슬그머니 들었던 상상 속 팝콘을 내려놓았다.
* * *
아침 훈련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걸어가는 모건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었지만, 감각은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모건!”
이때쯤이면 절 불러 세우던 반가운 목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고 그새 일상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기분이 허전한 걸 보면.
‘차라리 잘 됐어.’
며칠도 이렇게 아쉬운데, 몇 달을 함께 붙어 다녔으면 도저히 끊어내지 못했을 거다.
리체를 보내지 못하고 붙잡아 버릴지도 몰랐다.
고작 3년을 이기적으로 살아보겠노라고. 리체를 그 외줄 아래의 낭떠러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버텨야 할 3년은 리체가 어제 해준 그 말이면 됐다.
오늘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리체의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지만.
리체가 자신을 안아준 체온과 건네준 말로 이안은 버틸 용기가 생겼다.
‘강해져야 해.’
지금보다 더.
그래서 모건은 공원에서 나온 그 길로 훈련장을 찾았다. 밤 깊어질 때까지 검을 연마하고, 제 몸을 단련했다.
죽음에도 지지 않을 수 있게. 3년 뒤에도 멀쩡한 몸으로 리체를 찾아갈 수 있게.
“모건!”
그러다 모건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아침 훈련 다녀오는 거야?”
모건은 절 향해 걸어오는 리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