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런 얼굴로 살았나?
다가오는 리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모건은, 리체가 코앞까지 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 새벽 훈련이 힘들었어?”
리체가 잠깐 넋이 나간듯했던 모건을 걱정하며 물었다.
모건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응. 그랬나 봐. 오랜만이야, 리체.”
“오랜만이라니. 우리 어제도 봤잖아.”
리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랬지. 참.”
어제 하루가 유난히도 길었던 탓이었을까. 정말로 오랜만에 리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모건은 리체에게 물었다.
“오늘도 산책하러 온 거야?”
“아니.”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산책은 당분간 못 할 것 같아. 미안, 모건. 내가 먼저 제안했었는데.”
“아니야. 그런데 리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모건은 리체의 말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그걸 무시할 수 있었던 건, 리체를 향한 걱정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산책을 못 한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니면 날 밀어내는 걸지도 몰라. 내가 적이라고 말해서.’
리체가 역시 날 미워하는 걸까.
모건은 슬그머니 올라오려는 두려움을 꾹 눌렀다.
‘그것 또한 예상했던 일 중 하나잖아. 새삼스럽게 겁먹지 마. 모건 데이얼.’
리체는 걱정하는 모건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응. 별 건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
“맞아.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지.”
모건은 리체의 말에 맞장구쳤다.
얼마 전,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는데 못 일어날 것 같아서 큰일이다.”라는 같은 과 학생의 말에,
“왜? 그냥 일어나면 되잖아.”
라고 답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한편, 리체는 속으로 부끄러움을 참고 있었다.
아무리 거짓말이라지만, 매일 새벽 훈련까지 다녀오는 모건의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이안이 날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
[괜찮다니까. 인간들 수면 시간은 다 다르다고. 그보다, 계약자-.]
파이톤스가 리체를 재촉했다.
어제 모건 데이얼한테 장식을 빌렸어야 했는데, 계약자가 영 정신을 못 차려서 오늘 다시 온 참이었다.
아, 그렇지.
리체가 모건을 향해 물었다.
“모건, 사실 나, 부탁할 게 있는데…….”
“응. 뭔데?”
“그때 찾던 장식 좀 잠깐만 빌려 줄 수 있을까?”
“장식?”
모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리체가 말하는 게 뭔지를 알아차렸다.
“그건-.”
모건은 입술 떼기를 머뭇거렸다.
곤란해 보이는 모습에 리체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소중한 건데, 내가 괜한 부탁을 한 거 같아.”
[괜한 부탁은!]
주머니 속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파이톤스가 쪼르르 나와 리체의 어깨로 올라갔다. 이 배려심 넘치는 계약자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내가 직접!]
‘파이톤스?’
[…….]
대단한 걸 할 것 같이 두 발로 서서 가슴 털을 부풀린 파이톤스는, 침묵했다.
호기롭게 올라왔으나, 제가 장식을 빌리는 게 무리란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모건 데이얼 앞에서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선까지 끌었는데 다시 주머니로 들어가기에는-.
‘위대한 별 자존심이 있지.’
뭐라도 해야 한다.
파이톤스는 절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는 모건을 향해 앞발을 내밀었다.
“삑. (줘.)”
“……?”
짧은 의문 뒤, 모건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가죽끈을 길게 묶어 목걸이로 차고 있던 장식을 벗어 리체한테 건넸다.
“빌려줄게. 리체.”
“하지만-.”
“내가 지난번에 피칸한테 잘못한 것도 있고. 너무 늦게 돌려주지만 않으면 돼.”
“……고마워. 모건.”
리체는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넘겨받았다.
손바닥에 올려진 목걸이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하마드와 모건의 6년의 세월이 제 손바닥에 얹힌 것 같았다.
리체는 장식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모건이 리체에게 물었다.
리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응? 뭐가?”
“리체가 이걸 말없이 보고만 있어서.”
“아! 미안. 예뻐서 봤어. 하마드한테 이번에 비슷한 걸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거든. 내 건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돼서-.”
“그랬구나. 예쁘지? 하마드가 손재주가 좋아. 우리 아카데미 기계과 수석이거든.”
“으, 응. 어쩐지 남다르더라.”
이안의 입에서 나오는 하마드의 칭찬에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양심 좀 챙기자. 트아리체.
어쨌든, 이안의 소중한 장식을 빌렸으니. 빨리 파이톤스의 용건을 해결하고 돌려줘야 할 듯했다.
리체는 고맙다는 말과 곧 가져다준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몇 시간이면 돼! 금방 가져다줄게!”
리체가 자리를 뜨자, 모건은 가던 길을 마저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리체가 갑자기 왜 장식을 빌려 가고 싶어 하는 걸까.
설마 유리 조각이 어떤 건지 눈치챈 걸까?
‘그건 아니겠지.’
그랬더라면 리체가 한 번쯤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유리 조각에 관해 언급했을 터였다.
하지만 리체는 거울은커녕, 제가 어렸을 때 이따금 듣던 ‘게르웨르 공작가를 아느냐.’라는 질문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하마드한테 맡긴 장식 때문인지도 몰라.’
예뻤다고 했으니, 가져가서 보고 싶었는지도.
‘리체가 더 예쁜데.’
그러다 모건은 무의식적으로 흘러간 제 생각을 의식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었을 리 없을 텐데도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귀 끝이 홧홧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모건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모건 데이얼.”
“아, 로드윅 교관님.”
여전히 밝은 하늘 아래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남을 나누는 데에도 퇴폐적인 요소가 기준으로 들어간다면, 데르케디온은 그런 부류의 미남일 터였다.
“…….”
모건을 보는 데온의 눈썹 사이가 살짝 좁혀져 있었다.
조금 전에 목격한 모건 데이얼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오빠, 모건한테 시비 걸지 마.”
어제 들었던 여동생의 잔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어차피 오늘 용건은 따로 있었기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나?”
“이야기요? 하지만 출전자는 시험 교관과 사적인 만남을 금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아직 데온이 운영회 간부가 되었다는 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데온은 모건에게 말했다.
“상관없어. 관뒀으니까.”
“관두셨다고요?”
“그래.”
데온은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데온이 시험 교관을 관뒀다는 말에 따라가는 게 더 꺼려졌다.
데온은 망설이는 모건을 지나치며, 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따라와. 한니반의 개.”
그 말에 모건이 살짝 놀란 빛을 띠었다가, 이내 굳어진 얼굴로 데온의 뒤를 쫓았다.
데온은 그런 모건을 곁눈질하곤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저런 얼굴로 살았나 보군. 게르웨르.’
* * *
몇 시간 전.
잠에서 깬 데온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온몸에 상쾌함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 멍멍이가.’
제 동생이 밤에 몰래 왔다가 정화를 하고 간 게 분명했다.
자는 동안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걸 보아하니, 또 그 모습을 감추는 능력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데온은 다른 인기척을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데온 도련님.”
방문 앞에 서 있던 필립이 제법 쓸만한 얼굴로 절 불렀다.
리체의 기사인 주제에 저런 진지한 모습은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게 문제지만. 그래도 괜찮은 정보를 물어왔다는 의미였다.
데온이 방으로 들어가자 필립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뭔데.”
“어제 잡으신 놈의 배후를 찾았습니다.”
어제, 카이샨과 데온의 전투가 있던 후.
데온과 필립은 대회장을 나와 리체를 찾으러 가던 길이었다.
리체의 숙소를 멀리서 지켜보는 수상쩍은 놈이 있었다.-리체의 숙소에서는 제드가 낌새를 눈치채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필립이 말을 걸었고, 도망가는 걸 데온이 잡았다.
“너, 뭐 하는 자식-.”
데온이 그 정체를 추궁하려던 그때.
수상쩍은 이의 온몸에 강한 화염이 일더니, 순식간에 몸이 타버렸다.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바닥에 남은 그을음뿐.
“……집에 연락해서 알아봐.”
“네.”
데온의 명령을 받은 필립은, 곧장 통신국으로 가 로드윅 공작가에 통신을 넣었다.
필립은 통신을 받은 제드에게 물었다.
“그, 제드 씨. 예전에 그런 놈들을 상대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부하가 잡힐 거 같으면 아예 목숨을 끊어버리게 한다는.”
[아, 있었지. 판 대륙 쪽이었을걸? 조사해보고 연락할게.]
그런 뒤, 다음날인 오늘. 이른 아침에 제드의 연락이 왔다.
[지저분한 놈이 우리 리체 아가씨한테 붙은 모양인데? 이름은 한니반 카이샤고, 우딕 아카데미의 총장이야. 그 인간 아래에서 일하는 놈들은 한니반에게 방해물이 될 것 같으면 그런 식으로 처리된대.]
“우딕 아카데미요? 지금 크셀폰에 참전한 아카데미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겁도 없지. 우리 가주님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나셨다니까? 아카데미 하나가 총장을 잃게 생겼어.]
“……여기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그 블레이크 로드윅이 화가 나다니.
거기도 걱정이지만 여기도 걱정이었다.
데온 도련님의 화는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힘내라고. 필립. 일단 정보나 넘겨줄게.]
자기 알 바 아니라는 제드의 매정함에, 필립은 눈물을 삼키며 제드가 말하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외웠다.
그리고.
필립은 제 머리가 차갑게 식을 만한 정보를 듣고야 말았다.
“도련님.”
리체 아가씨께 첩자를 보낸 자가 우딕 아카데미의 총장이다.
보고를 들은 데온의 분노가 필립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필립도 제 도련님의 화가 무섭지 않을 만큼 분노가 끓고 있었다.
“모건 데이얼이 한니반의 개랍니다.”
리체 아가씨의 적이요.
“그렇게 아가씨와 가깝게 지내놓고, 등 뒤로는 날카로운 검을 숨기고 있었다고요.”
필립은 밀려오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 * *
리체의 숙소.
리체와 파이톤스는 모건에게 빌려온 장식의 기억을 보는 중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하녀에게 빙의한 히켄카와, 어린 이안의 형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리체는 형상화한 히켄카 앞에 서서, 제 어깨 위의 파이톤스에게 물었다.
“히켄카한테서 수상한 걸 봤다고?”
“응. 조금 있으면 나올 거야.”
이제 곧 자신이 본 장면이 나온다.
파이톤스는 히켄카의 모습에 집중했다.
“여기!”
그러다 움직이는 히켄카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는 왜 가져가려고?]
이안의 손에서 히켄카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렸다.
유리 조각을 눈앞으로 가져오는, 히켄카가 빙의한 하녀의 얼굴이 점점 커다래졌다.
리체와 파이톤스는 금색으로 빛나는 하녀의 오른쪽 눈을 유심히 관찰했다.
눈동자에 비친 유리 조각. 그 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은발의 한 여인.
“……나야.”
지금의 모습과 달리, 더러운 몰골의 트아리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