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기권한다고?
그 뒤로도 리체와 파이톤스는 히켄카가 있는 기억만을 형상화했지만.
파이톤스가 발견했던 기억 외에는 유리 조각 속 트아리체를 찾을 수 없었다.
‘히켄카의 눈에 비친 건, 분명 19살의 나였어.’
정확히는 19살의 아그네스였다.
게르웨르 공작가의 지하실의 우리 속에 갇혀 있던.
책상에 앉은 리체는 장식 속 유리 조각에 제 얼굴을 비쳐 보았다. 하지만 6년 전, 게르웨르 저택에서 본 거울처럼, 검은색의 유리 조각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유리 조각 속에 있었지?”
“혜안이야.”
파이톤스가 중얼거렸다.
혜안. 게르웨르 공작가의 능력자들이 사용하는 히켄카의 능력.
“노랑이 자식의 눈에, 그 조각에 숨겨져 있던 게 비친 거라고.”
파이톤스의 말을 들은 리체가 잠시 생각하다, 질문했다.
“이안도 봤을까?”
“그게 전생의 네 모습이라면, 아니.”
파이톤스는 단언했다.
“별의 고유 특성은 힘을 아무리 전해 받더라도 원래 주인만큼은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
게르웨르의 능력자들이 히켄카의 능력을 사용한다지만.
고작 인간의 몸에 히켄카의 힘의 잔해가 남아 있는 것이었다.
“별 조각도 비슷해. 별이 가졌던 고유 특성을 사용할 수 있다지만, 원래 힘의 10퍼센트도 사용하지 못하는걸.”
“노랑이의 혜안보다 이안의 혜안이 못하다는 소리야?”
“그렇지. 노랑이 자식은 과거와 가끔은 미래까지도 볼 수 있어. 이안드웨인이 보는 건 기껏해야 현재, 그것도 당장 눈앞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거나, 실체를 보는 데에 그치겠지.”
그러면 이안은 유리 조각 속 아그네스를 보지 못했다는 거네.
리체는 책상 위에 상체를 엎드린 채,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고개와 함께 옆쪽으로 돌린 시선 속에 장식이 들어왔다.
‘어떻게 하지?’
유리 조각 속에서 전생의 모습을 발견했다지만.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안 것뿐.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커다란 실타래가 제 앞에 나타나 시작점과 끝점을 꼭꼭 숨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얽힌 이안과 내 운명, 이안을 쫓아다니는 죽음, 19살의 내 죽음, 티타교, 거울 속 전생의 나, 히켄카의 행방, 데온과 로벤하프와 지크의 몸속에 있는 별들의 본체…….’
리체는 파이톤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장식 앞에 앉은 파이톤스도 고민에 찬 모습이었다.
“파이톤스, 전생의 내가 르티옴을 만든 별과 연관이 있었을까?”
“없다고는 못하겠어.”
제가 아는 한, 르티옴은 이번이 두 번째 삶이었으니.
시간과 관련된 건, 그 호구밖에 하지 못한다.
아니, 이제 호구라고 부르면 안 되나.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녀석.
‘처음에는 걔가 르티옴을 되살린 이유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잠든 녀석이 무리하게 힘을 쓴 게 아닐까 걱정됐다.
그렇게까지 할 만큼 이번 대의 르티옴에게 무언가가 있는 건가 하는 호기심도 있었고.
솔직히 말해 초반에는 몇 년 정도면 제 궁금증이 모두 해소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 뒤에는 계약을 해지하고 무덤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었다.
‘호숫가에서 르티옴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덤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있었을 텐데.’
오늘이 내일인지, 내일이 오늘인지, 혹은 백 년 뒤인지, 전인지.
수천 년을 별다를 것 없이 지내왔던 무료한 삶을 살면서.
‘무덤?’
순간 파이톤스의 머릿속에서 반짝하는 게 있었다.
별들의 융합. 그러고 보니 그 노란 눈깔 자식과 그런 짓을 했었지.
“계약자! 결정했어!”
파이톤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체도 그런 파이톤스를 따라 슬며시 상체를 일으켰다.
“뭐를?”
파이톤스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노랑이 자식부터 잡자.”
* * *
크셀폰 내의 여러 훈련장 중 하나.
“설명해봐. 모건 데이얼.”
얼마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건은 흉흉하게 절 보는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설명해봐. 모건 데이얼. 내 동생이랑 사귀나?”
카페에서 데르케디온이 리체와 제 사이를 오해했을 때였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동생의 적인가?”
“아닙니다.”
데온과 검을 맞대고 있다는 점.
교차하며 비등한 힘으로 대치하던 검이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호각이다.
“…….”
“…….”
모건과 데온은 순식간에 일정 거리를 벌려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검을 든 채로 다음 공격을 노렸다.
대치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데온의 날카로운 붉은 눈과, 모건의 싸늘한 금안.
조용히 기다리던 두 쌍의 눈에 상대의 다음 수가 읽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박차며 앞으로 나간 그때.
“오빠!”
벌컥, 하고 훈련장의 문이 열렸다. 리체였다.
모건과 데온은 흠칫 놀라 그대로 방향을 틀어 멈췄다.
데온이 모건에게 뽑은 검을 슬쩍 집어넣었다.
‘저 자식은 왜.’
그러다 제 옆, 저처럼 검을 집어넣은 모건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게다가 벌써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 열린 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제 여동생을 보고 미소 짓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저게 한니반의 개…….’
저렇게 꼬리를 흔드는 꼴을 보자니 한니반이 아니라 리체가 주인 같았다.
데온은 일단 모건을 향한 적의를 잠시 접었다. 리체가 없을 때 다시 추궁할 계획이었다.
그 사이, 모건이 리체를 불렀다.
“리체.”
“모건?”
모건을 발견한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호기롭게 열었던 훈련장 문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걸 깨달았다. 리체는 제 팔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데온한테나 하던 행동을 이안한테 보이다니. 조금 창피하네.
‘이안도 같이 있는 줄 몰랐어.’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필립. 데온은 바로 옆의 훈련장 건물 안에 있다길래, 혼자 훈련하는 줄 알고 활짝 문을 연 참이었다.
‘아, 장식.’
그러다 리체는 제 주머니에 있는 모건의 장식을 떠올렸다.
데온과의 용건을 끝낸 후, 모건을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다. 만난 김에 돌려줘야지.
“모건, 이거 진짜 고마워.”
리체는 모건을 향해 장식을 건넸다.
하마드가 만들어준 소중한 걸 빌려주다니.
정말 고마운데, 데온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리체는 짧은 시간 내에 제 진심을 전하기 위해 장식을 건네받은 모건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들었다.
“정말로.”
리체가 꼭 잡은 모건의 손을, 모건도 보았고 데온도 보았다.
모건의 맥박이 쿵쿵 뛰었고, 데온의 눈가는 씰룩거렸다.
리체의 뒤를 따라온 필립은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달려오려다, 데온의 눈짓에 저지당했다.
“내가 나중에 꼭 보답할게.”
“괜찮아.”
“아니야.”
리체는 단호히 말했다. 이안이 그렇게 힘든 삶을 살 동안, 저는 아무것도 못 해주었는데.
“꼭 보답하게 해줘.”
“……알겠어.”
장식을 빌려준 일에 이렇게 각오가 담긴 대답을 받을 줄 몰랐다.
리체의 기세에 밀린 모건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계까지 참을성을 발휘하던 데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오빠, 잠깐 나 좀 봐.”
그대로 리체의 손에 이끌려 훈련장 밖을 나가긴 했지만.
모건이 그런 리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중, 문가에 서 있던 필립과 눈이 마주쳤다.
필립. 황립 아카데미에 있을 때 리체의 수행원이었던 기사.
필립과는 인연이 좀 되었다. 호수에 빠진 절 리체와 함께 구해준 것도 필립이었고.
“게르웨르 도련님, 요즘 잠은 잘 자고 다니시죠?”
필립은 제게 살가운 편이었다. 부교관과 출전자로 만난 지금도.
반가운 마음에 이안은 필립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필립 부교관님.”
“…….”
하지만 필립은 인사를 받는 대신, 모건을 똑바로 노려볼 뿐이었다.
“우리 아가씨께 허튼짓하면.”
“……?”
“그 몇 배로 갚아주지. 한니반의 개.”
그러고는 엄지를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리체를 따라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필립이 보인 명백한 적의에 모건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 * *
리체는 데온을 이끌고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지난번 리체가 빵가루를 뒤집어쓴 그곳이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건물. 리체는 문을 닫고 멈춰서, 데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빠.”
“시비 안 걸었어.”
“?”
데온의 말에 리체가 하려던 말을 잠시 멈췄다.
불만스러운 눈을 한 데온이 내키지 않는 말투로 제 말을 보충했다.
“모건 데이얼한테 시비 안 걸었다고.”
아. 데온의 말을 알아들은 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그렇지만, 리체가 데온을 끌고 온 건 다른 용건이었다.
“근데 그것 때문에 오빠 데려온 거 아닌데.”
“뭔데.”
“오빠, 나 집에 좀 다녀올게.”
“……?”
제 동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집에 간다고?
“크셀폰은?”
아무리 예선 합격을 했다지만, 본선까지 도시에서 나가지 못하는 게 대회 규정이었다.
데온의 질문에 대답을 망설이던 리체는, 이내 데온을 바로 보고 말했다.
“기권할래.”
“네?”
놀란 소리를 낸 건 필립이었다.
리체와 데온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온 필립은, 누가 들을새라 문을 꼭 닫고 리체에게 다가왔다.
“아, 아가씨. 기권하신다고요?”
“응.”
리체는 단호히 대답했다.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미안해서 대답하기를 망설였던 거지.
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마물의 숲으로 가야 해.’
파이톤스가 히켄카를 찾을 방법을 떠올려냈다.
“별들의 융합을 푸는 건, 무덤에 사는 영감의 고유 특성인데.”
“영감?”
“별명이지, 뭐. 신이었을 때부터 영감같이 생겨서. 성격도 그렇고. 하여튼 그 영감한테 남아 있을 거야.”
“뭐가?”
“노랑이 자식의 영혼 조각. 그 영감 취미가 융합을 풀 때 영혼도 살짝 떼어내서 모으는 거거든. 원래는 금기시되는 행동이라 호구가 못 하게 하던 건데, 인간으로 치면 머리카락 한 올 정도 뽑아내는 거라 최근 몇백 년은 봐주고 있었지.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나머지 위대한 별들이 모두 잠든 탓에, 몇백 년 동안 파이톤스가 홀로 별들의 무덤을 관리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파이톤스는 이게 다 제 선견지명이었다면서 낄낄거렸다.
“그런데 파이톤스, 그 영혼 조각이 왜?”
“왜긴. 내 고유 특성이 뭔지 잊은 거야? 영혼 조각만 있으면 별의 탐지로 노랑이 녀석 찾아내는 건 문제도 아니야.”
파이톤스가 무덤으로 가서 히켄카의 영혼 조각을 얻게 되면, 별의 탐지로 히켄카를 찾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크셀폰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본선이 끝나기까지 기다렸다가 히켄카를 찾는 것은 너무 늦었다.
이리저리 꼬인 실타래지만, 리체는 제가 반드시 풀어야 할 매듭 하나를 발견했다.
‘히켄카를 찾고, 아는 걸 들어야 해. 티타란 별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왜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냈는지.
왜 그 별이 되돌린 과거에 저와 이안의 운명이 얽혔는지.
왜 19살의 아그네스가 게르웨르 저택에 있던 거울에 비쳤는지.
…….
수많은 ‘왜’를 풀어나가야 하는 건, 그 이후였다.
“그래도, 아가씨.”
필립이 아쉽다는 소리를 냈다.
본선에 진출한 저희 아가씨가 그 망할 한니반의 개를 눌러버려 주셔야 하는데.
아니, 그 개는 제가 누를 테지만. 우승컵을 품에 안을 리체 아가씨의 미래가 너무 물 보듯 빤했다.
“아깝-.”
“마음대로 해.”
그런 필립의 말을 데온이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