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가지 마
데온은 리체의 이마를 살짝 툭 치며 말했다.
“대신 나도 같이 가.”
“도련님까지 가시게요?!”
필립이 화들짝 놀랐다.
‘마음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네!’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다.
제 도련님은 분명 잘됐다며 아가씨의 기권을 찬성한 게 틀림없었다.
솔직히 크셀폰에 있어서 데온 도련님이 좋을 게 뭔가. 리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벌써 로드윅 가로 돌아가셨을 위인이었다. 아니, 아예 오지도 않으셨겠지.
다 때려 치고 리체 아가씨와 로드윅 성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데온 도련님이 바라 마지않는 것일 터였다.
‘그렇지만, 아가씨의-. 아가씨의 우승이-.’
안타까운 마음에 필립이 속으로 우승을 메아리쳤지만, 데온까지 나선 마당에 제 의견을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이, 리체가 데온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빠는 운영회 간부잖아. 나 혼자 갔다 올게. 그리고 가끔 모건 좀 지켜봐 줄 수 있어?”
“내가 왜.”
그 말에 리체의 말문이 턱 막혔다.
데온이 그럴 필요는 없지. 하지만 이안이 걱정되는걸.
리체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모건은……. 운이 없잖아.”
그 모습에 데온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 건 알아서 하겠지. 내년이면 성인인데.”
“어?”
리체는 데온의 말에 순간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성인이 되는 나이는 18살이었다. 자신과 모건의 대외적인 나이는 16살. 내년에 성인이 되는 건, 17살인 지크와, 이안인데-.
“뭐.”
절 보는 데온의 붉은 눈이 어쩌라고, 라는 빛을 띠었다.
데온이 계산 실수를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설마, 데온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체는 그 문제를 뒤로 미뤘다. 지금은 마물의 숲에 다녀오는 게 먼저다.
데온은 바깥보다는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크셀폰에 있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모르고.
‘티타교가 능력자들 몸에 있는 별들의 본체를 노린다고 했어.’
6년 전. 히켄카가 능력자들에게서 별들의 본체를 꺼내는 방법이라며 했던 농담이, 어쩌면 진짜일 지도 모른다.
“그릇을 파괴하고 꺼내야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는 않을 거야.
리체는 데온에게 말했다.
“그래도 나 혼자 갔다 올게.”
“안 돼.”
“왜?”
“넌 약해 빠졌잖아. 몇 주를 어떻게 바깥에서 혼자 보내게 해? 마물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피칸도 같이 갈 거고, 마물은-.”
“피칸? 그 다람쥐? 걔가 뭘 할 수 있는데?”
[뭐? 데르케디온, 너 말 다 했어?]
잠자코 듣고 있던 파이톤스가 발끈해 주머니 밖으로 나왔다.
리체도 데온의 말을 반박했다.
“마물은 나도 상대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내가 도와주면?”
실랑이를 벌이던 리체와 데온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 외에 누군가 있었다.
필립과 파이톤스를 포함한 넷이 소리가 난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장의 무게를 지탱하는 보 위,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체의 시험 교관인, 케이슬리였다.
* * *
“예선 합격 보류 신청이 통과됐습니다. 확실히 객관적인 기준은 아니군요. 꽈-악, 이라니.”
크셀폰 운영회 예선 관련 부서.
예선 담당자는 신청서에 ‘통과’라고 커다랗게 적힌 도장을 찍었다.
데르케디온 로드윅이 운영회 간부가 되자마자 제출한 신청서였다.
트아리체 로드윅의 예선 합격을 보류해달라는 내용.
사유는,
합격증을 받고 싶다면 저를 찾아서 꽈-악 붙잡아보세요.
저는 대회장을 제외한 도시 내에 있을 거랍니다.
- 시험 교관 케이슬리
케이슬리의 시험 과제의 합격 기준이 너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었다.
‘꽈-악’이 기준이라니, 맞는 말이긴 했지만.
‘여동생이 합격 보류가 될지도 모르는데, 용케도 신청서를 넣었군.’
과연 ‘합격률 0퍼센트’의 데르케디온 로드윅이다.
동생에게도 칼 같네.
예선 담당자는 제 맞은편에 선 케이슬리를 향해 종이 한 장을 넘겼다.
“케이슬리 교관님께서는 새로운 예선 과제를 적어주셔야 합니다. 이번에 합격이 보류된 트아리체 로드윅 출전자는, 그 예선 과제를 통과해야 합격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말, ‘꽈-악’이 뭐가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힘껏, 꽈악, 붙잡으면 된다니까?”
“……새로 적어주십시오.”
케이슬리는 투덜거리며 예선 담당자가 넘겨준 종이에 글자를 채워 넣었다.
새로운 과제 내용에 마침표를 찍는 케이슬리의 입꼬리가 조용히 씰룩거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다.
“나한테 트아리체가 기권하지도 않고, 안전하게 집에 다녀올 수 있는 좋은 계획이 있는데.”
“……말해봐.”
로드윅이 제 완벽한 계획에 넘어갔다. 옆에서 듣던 트아리체도 좋은 계획이라며 로드윅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가 만족하는 계획이다. 그 모두에 자신도 포함된 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지.
“여기요.”
케이슬리는 새로운 예선 과제를 적은 종이를 담당자에게 건넸다.
예선 담당자가 과제 내용을 눈으로 읽었다.
3주 이내에 롬 사막을 끝에서 끝까지 왕복 횡단하세요.
(단, 사실 확인을 위해 시험 교관이 동행합니다.)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평범한 사람의 걸음 속도로는 두 달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게 거리만으로 따져서는 그렇다는 거지, 롬 사막에 득실거리는 마물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걸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살아서 돌아올 수나 있나.
예선 담당자는 곤란한 듯 말했다.
“케이슬리 교관님, 출전자 사망은 조금 곤란합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 적어놨잖아요. 시험 교관 동행.”
“그렇긴 합니다만……. 출전자의 생명이 위험할 때 교관님께서 개입해주실 건가요?”
시험 교관을 실력 위주로 뽑기 때문에, 개중에는 과제 중 출전자가 죽어나도 방관하는 시험 교관도 적지 않았다.
거기에,
‘마탑의 천재 망나니 케이슬리.’
앞에 붙은 수식어만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 케이슬리였다.
그녀가 과연 출전자의 위험에 몸을 움직일는지.
고양이로 변해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우려 섞인 예선 담당자의 말에, 케이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허가나 해주세요. 어차피 과제 내용은 시험 교관 마음이잖아요? 이번처럼 운영회 간부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상냥한 말투였지만, 케이슬리의 치켜 올라간 헤이즐 눈동자가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날카롭게 빛났다.
케이슬리가 말한 대로, 과제 내용은 시험 교관의 재량에 맡겼다.
이 과제가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하긴 했지만, 역대 과제 중에는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것도 찾으려면 적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나.
‘트아리체 로드윅도 강하다고 하니까, 죽지는 않겠지.’
예선 담당자는 '허가'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도장을, 케이슬리가 적은 과제 위에 찍었다.
케이슬리는 그 모습에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이제 트아리체랑 삼 주는 같이 다닐 수 있다고.’
그때까지 제 제자로 들어오게 꼬셔볼 생각이었다.
* * *
모건은 몇 시간 째 검을 휘둘렀다.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자꾸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말.
일전에 데온에게 리체의 적이 아니라 말했을 때, 데온이 저를 믿지 않은 이유가 그 말 하나로 다 설명됐다.
“한니반의 개.”
살아남은 개가 목줄을 끊고, 주인을 물어뜯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말.
‘후회하지는 않아.’
총장의 개가 된 건 후회하지 않는다. 덕분에 이안드웨인이 절대 살지 못할 삶을 살았으니.
어쩌면 지금 죽음이 자신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은, 총장의 개로 살던 삶 때문인지도 모른다.
“…….”
모건은 더는 팔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을 때가 돼서야, 검 휘두르는 것을 멈췄다.
훈련장 내의 시설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깥으로 나왔다.
새벽달이 떠 있던 하늘에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와. 물감 병을 쏟아버린 것 같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건의 옆에서, 뜬금없는 감상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노을 진 하늘보다 아름다운 광경에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자신의 삶. 모건의 지친 얼굴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리체.”
“안녕, 모건.”
리체가 슬쩍 웃었다.
“지난번에 내가 정신없이 갔었지? 마음이 쓰여서 다시 말하러 왔어. 장식 빌려줘서 고마워. 모건.”
“리체, 그건 이제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모건이 일부러 장난스러운 말투를 섞었다.
“또 고맙다고 하면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황송해서.”
리체는 모건의 농담에 말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다며 가볍게 받아쳤다.
“그것도 그렇고.”
“?”
“사실 인사하러 왔어.”
별들의 무덤과 연결된 호숫가로 가려면, 보름달이 뜨는 날에 맞춰 마물의 숲에 도착해야 했다.
파이톤스와 날짜를 계산해보니, 내일쯤 출발하면 비슷한 시기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여유롭게 미리 출발해도 좋겠지만, 3주밖에 시간이 없어 이 일정이 최선이었다.
“3주 이내에, 롬 사막 횡단이요? 로드윅 영지에 최대한 빨리 다녀와도 2주는 넘게 걸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트아리체. 제가 그런 것도 계산 못 했을까 봐요? 마법에서 제일 기본적인 건 계산이라고요. 자신이 펼친 마법이 미치는 범위까지 계산할 수 있어야, 뛰어난 마법사라고 할 수 있죠. 트아리체는 그런 계산에 능숙한가요?”
“그렇지는…….”
“잘됐네요. 제가 3주 동안 가르쳐 드릴게요.”
어쩌다 보니 수업까지 듣게 생겼지만.
예선 과제는 케이슬리가 생각이 있다고 했다. 리체는 일단 크셀폰에 관한 건 뒤로 미루고 파이톤스와 호숫가를 다녀오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나, 떠나거든.”
리체는 모건을 향해 생긋 웃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내일 아침이면 떠나는구나.
출발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모건의 얼굴이었다.
데온에게 기권을 말할 때만 하더라도, 이안을 다시 만나는 건 본선에서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참관객, 이안은 출전자로.
케이슬리 덕분에 3개월이 2주가 되었지만. 그래도.
떠나기 전에 모건을 보고 가고 싶었다.
‘이안, 내가 많이 좋아해.’
리체는 옆에 서 있는 이안을 향해, 전하지 못할 고백을 속으로 속삭였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해. 염치없지만.
“…….”
그러다 옆이 이상하게 조용한 것을 깨달았다.
리체는 고개를 돌렸다가, 이안의 흔들리는 금안을 마주했다.
이안이 리체를 팔을 잡고 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한 손은 리체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은 리체의 뒷머리를 감쌌다.
마치 리체를 놓으면 그대로 잃어버릴까 두려워, 이안은 그렇게 리체를 꼭 붙들었다.
이안의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낮은음으로 작게 떨리며 리체에게 애원했다.
“가지 마.”
“모건?”
“떠나지 마. 리체.”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