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81)화 (80/89)

81화 빌어, 이안드웨인

“가지 마. 리체.”

리체는 이안의 품에서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왜?’

왜 갑자기 이안이 나를 안았지?

답이 내려지지 않는 수많은 의문. 리체는 그중에서 하나를 꼽았다.

‘그냥 떠난다는 말만 해서 그래. 내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게 불안한 걸까?’

비록 자신과 같은 감정은 아니겠지만. 제가 이안이 걱정되어 데온에게 이따금 봐달라 부탁한 것처럼.

이안도 자신이 걱정됐을까.

우리의 죽음이 얽혔으니까. 서로가 죽지 않아야 3년 뒤에도 그 삶이 이어질 테니까.

‘이안.’

다정히, 그러나 힘있게 자신을 안은 팔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바로 말해야 한다.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고. 고작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 주면 돌아온다고.

하지만 가슴이 저릿했다. 가슴뼈 부근에 얹힌 뜨겁고 묵직한 기운이, 목까지 차올라 말을 가로막았다.

‘이안, 많이 힘들어?’

내 죽음이 너를 힘들게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내가 싫어.

“…….”

리체는 이안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듯 단단히 리체를 가두고 있던 이안의 팔. 하지만 리체의 작은 거부에도 이안의 팔은 순순히 풀렸다.

이안은 리체를 마주 보고 서서 입술을 열었다.

“내가…….”

황금빛 노을을 머금은 금안이 작게 진동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음성이 떨렸다.

당장에라도 리체의 손에 키스하고 제가 이안드웨인이라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나 달싹이는 입술은 차마 뒤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소중하기에 곁에 있고 싶었다. 소중하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너와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달리 점점 욕심이 커져만 간다.

이 감정 때문이다.

너와 재회한 순간부터 한 방울씩 떨어지던 이 감정은, 어느새 순식간에 불어나 날 깊이 빠지게 했다.

‘리체.’

하지만 눌러야 했다. 당장에라도 제 다짐에 그어진 실금을 비집고 터져 나올 듯한 이 욕심을 눌러야 너를 지킬 수 있으니.

나는 널, 잃을 수 없어.

[3년 후 네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또다시 욕심이 제게 속삭였다.

그렇게 살아남아 만신창이가 된 네게, 무엇이 남느냐고.

히켄카는 6년 동안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게르웨르 공작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리체에게 어릴 적 만난 이안드웨인은 이미 잊힌 존재일 지도 모른다.

남은 건 한니반의 개. 판 대륙의 모건 데이얼. 

[지쳤잖아. 리체에게 빌어.]

내가 널 사랑해버렸다고.

부디 이런 날 동정해 곁에 남아달라고.

[빌어. 이안드웨인.]

‘안 돼.’

이안은 그렇게 속삭이는 제 욕심을 다시 내쫓았다. 

마주 선 리체가 놀란 얼굴을 했다. 맑은 은색 눈에 비친 이안이 조용히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모건.”

리체는 이안의 팔을 붙들고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저항 없이 끌려간 이안은, 문에 기대듯 주저앉았다. 리체가 그 앞에 앉아 물었다.

“가지 말라니. 내가 어딜 가는 줄 알고?”

모르겠어.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

리체는 고개를 젓는 이안에게 대답했다.

“예선 과제를 하러 가는 거야. 케이슬리 교관님한테 받은 예선 합격이 보류가 났거든. 새로운 과제를 수행해야 합격증을 받을 수 있대.”

“…….”

이안이 리체와 눈을 맞췄다.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눈빛은, 그게 정말이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리체는 살짝 일으킨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다.

“3주 후면 돌아올 거야.”

사랑스러운 이안. 너는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지.

내 죽음이 온전히 나의 몫이면 좋았을걸.

리체는 그의 눈꺼풀 위에 키스했다. 구할 수 없는 용서와 위로의 마음을 담아.

드러낼 수 없는 제 이기적인 감정은 꼭꼭 감추고.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이제야 시작점을 찾은 실타래에 이안을 저 지옥에서 빼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이 있어?’ 

19살의 아그네스가 리체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 차디찬 지하실에 널 끌고 갈 생각이 없어. 이안. 

리체는 이안을 포옹했다.

지금은 네 이름도 불러주지 못하지만.

내 위로가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나는 살 거야.”

리체는 또렷한 음성으로 이안을 말했다.

“널 위해서.”

너는 혼자 도망치는 게 아니야.

이안이 조용히 흐느꼈다. 리체는 그런 이안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 * *

다음 날 아침.

리체는 성곽 입구에서 데온과 필립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위험할 거 같으면 고양이를 적한테 던지고 너는 도망가.”

“맞아요. 아가씨. 저 교양이 교관님이 저래 봬도 마탑 이인자라 하더라구요. 차기 마탑주라니까 아가씨의 방패쯤은 되겠죠.”

데온과 필립이 단단히 조언했다. 리체의 옆에 선, 고양이로 변한 케이슬리가 어이없다는 듯 둘을 올려다봤다.

“내 걱정은 말고 두 사람 걱정이나 해. 그 교단이 오빠를 노리고 있다며? 나 말고 오빠가 더 걱정이라고.”

“……걱정?”

“도련님을요?”

리체의 말에 데온과 필립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쟤네들은 왜 서로를 걱정할까. 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케이슬리가 지겨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트아리체, 이만 출발해요.”

케이슬리의 재촉에 리체는 인사를 마무리하고 성곽 바깥으로 나왔다.

모건과는 미리 인사를 끝냈다.

어제, 모건은 붉은 눈가를 접어 쑥스럽게 웃음 지으며 리체에게 말했다.

“미안, 리체. 오늘 운 게 창피해서 내일 배웅은 못 할 것 같아.” 

대신 착용하던 목걸이를 리체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걸 왜?” 

리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마드가 만들어준 이안의 소중한 장식을 단 목걸이였다.

“무사히 다녀오기를 바랄게.” 

이안은 제 바람을 담듯 리체의 목에 건 목걸이의 장식을 잡고 입맞춤했다. 리체는 반짝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절 올려다본 모건과 눈이 마주쳤다.

“…….”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짧은 침묵.

모건은 장식에서 입술을 떼고, 리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닿을 듯 가까워지는 입술에 리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제게도 입맞춤하려는 걸까.

“미안. 매듭이 거의 풀려 있었네.”

착각이었다. 목걸이의 풀어지는 매듭을 발견하고 그걸 다시 묶어주려고 한 것이었다.

‘하긴. 하마드가 있는데, 이안이 나한테 그럴 리가.’

다행히 이안은 제 오해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착각할 게 따로 있지.

리체는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볼을 붉혔다.

“끼야옹!”

그러다 케이슬리의 커다란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붉은 늑대, 지크베르트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털을 곤두세운 그녀를 향해, 지크베르트 머리 위에 올라탄 파이톤스가 낄낄거렸다.

[겁이 많은 고양이네.]

“컹.”

지크베르트도 가볍게 짖었다.

케이슬리가 꼬리를 바짝 세웠다.

기분 탓인가. 저 무식하게 덩치 큰 늑대랑 한 입 거리도 안 돼 보이는 다람쥐가 절 보고 얕잡아보는 듯한 느낌은. 

케이슬리가 하악질을 했지만, 둘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지크!”

리체가 가까이 다가가자 지크베르트의 꼬리가 마구 살랑거렸다.

리체는 케이슬리를 향해 지크베르트를 소개했다.

“교관님, 이쪽은 제 친구예요.”

오호라. 트아리체의 친구였단 말이지. 

케이슬리는 동그란 헤이즐 눈매를 세모나게 좁히며 리체에게 말했다.

“로드윅 영지까지는 친구가 데려다준다고 그랬죠? 그 늑대를 타고 갈 건가요?”

타고 간다고 하면 저 늑대의 머리 위는 내가 차지해야지.

누가 더 위에 있는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케이슬리의 바람과는 달리, 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리체의 말에 쳐진 건 지크베르트의 꼬리였다. 제가 리체를 태우고 로드윅 공작가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롬 사막 근처에 있는 티타교를 감시하기에는, 지크베르트의 능력만큼 제격인 게 없었으니.

“그러면 누가-.”

케이슬리의 의문은 질문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리체!”

반가운 목소리에 리체는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슬리도 리체가 보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저 마차를 타고 가나요?”

이쪽을 향해 오는 화려한 마차.

그리고 마부석의 마부 옆에 앉은 하늘색 머리카락의 귀남자. 

미남과 화려한 마차.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케이슬리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취향이 독특하네요.”

마차를 끄는 아름다운 백마 두 마리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 * *

로드윅 영지까지는 마차로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로벤하프의 마차는, 그보다 빠르게 로드윅 공작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로벤하프 오빠, 괜히 능력 사용하는 거 아니야?”

표면을 얼린 마차 바퀴가 닿는 지면이 얼었다.

얼음이 깔린 매끈한 지면을 따라 마차는 흔들림 없이 달려 나갔다.

마찰을 최소로 하는 덕분에, 말이 달리는 속도로 마차를 끌고 갈 수 있었다. 로벤하프가 능력을 사용하는 덕분이었다.

“전혀.”

마차 안. 맞은편에 앉은 로벤하프가 걱정하는 리체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비록 속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번 기회를 이대로 날려 보낼 수는 없어.’

간만에 리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데르케디온도, 지크베르트도 없으니 오롯이 제게 주어진 기회.

리체와 함께 마차로 다닌 지도 어느덧 나흘. 이제 내일이면 로드윅 영지에 도착하지만.

문제는, 그간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너무 빨라. 바퀴를 얼리는 건 하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급해 보이는 리체의 일정. 제 유능함이 리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이따금 그 아낌없이, 에 힘이 들어가 버려 과해지곤 했지만. 

이번 마차도 그랬다. 리체의 안락한 여행을 위해 제일 좋은 마차를 구매하던 중, 보고 만 것이었다. 리체에게 어울릴 만한 아름다운 백마를. 평상시의 로벤하프라면 절대 택하지 않을 조합이었지만.

“사겠습니다.”

“하지만 저건 얼마를 주셔도 팔지 않…….”

“열 배.”

“가져가시지요.”

그렇게 로벤하프는 콩깍지 낀 눈으로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탄생시키고야 말았다.

오죽하면 이따금 릴리가 ‘오빠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같아.’라고 말할까.

어쨌든.

로벤하프의 방해물은 시간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로벤하프는 리체의 옆좌석에 앉은 회색 고양이를 바라봤다.

“……왜 그러죠?”

“아닙니다.”

마탑의 차기 마탑주, 망나니 케이슬리. 

사업체를 운영하는 로벤하프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리체와 함께 가는 시험 교관이 케이슬리라는 걸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막상 보니 별것 아닌 고양이 모습으로 지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방심하고 말았다.

“리체! 이것 좀-.”

“트아리체, 그 계산은 조금 틀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

“리체! 나랑 같이 밤하늘-.”

“별은 마법과 중요한 연관이 있죠. 따라오세요, 트아리체. 제가 별자리와 관련된 마법을 알려주죠.”

“아, 네!” 

시도 때도 없이 리체의 옆에 붙어 다니니 제가 리체와 단둘이 있을 틈이 생기지 않았다.

더욱이 망나니라는 별명과는 달리, 가르치는 실력이 꽤 뛰어난 모양이라서-.

‘리체가 점점 차기 마탑주한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어.’

9살의 자신은 3년을 로드윅 공작가를 드나들며 얻은 마음의 문을. 저 고양이는 나흘 만에.

‘이대로는 안 돼.’

오늘, 뭐라도 해야 했다.

로벤하프는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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