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술 깨는 데는 차가운 게 최고지
그날 밤.
리체 일행은 평야에 천막을 쳤다. 오늘은 야영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식사를 마치고, 하루의 피로를 녹이는 시간을 가졌다.
“캬-. 히베츠만 공자, 뭘 좀 아는군요?”
꿀떡꿀떡. 사람으로 돌아온 케이슬리는 로벤하프가 가져온 술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녀의 고향에서 만드는 전통주였다.
마탑의 케이슬리를 만난다는 말에 사업차 필요할까 준비한 건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술을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역시 뭐든 미리 해두면 좋다니까.’
로벤하프는 속으로 꿍꿍이가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저 인간, 꽤 마시는데?]
술을 좋아하는 건 케이슬리뿐만이 아닌 듯했다.
리체는 눈을 빛내는 파이톤스를 바라봤다. 요새 티타 때문에 풀이 죽어 있던 탓에, 오랜만에 보는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파이톤스도 마실래? 로벤하프한테 물어볼까?’
[됐어. 다람쥐가 무슨 술이야.]
거절했지만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야, 다람쥐. 너도 마시고 싶냐?”
케이슬리가 컵에 술을 따라 파이톤스 앞에 두었다. 파이톤스가 침을 삼켰다.
이 인간이 나를 시험하는군.
[위대한 별인 내가-.]
“오, 못 마시나? 다람쥐는?”
케이슬리가 술병을 들고 낄낄거렸다. 거기에 발끈한 파이톤스가 술잔을 잡고 들이켰다.
케이슬리가 잘 마신다고 감탄하며 제 술병을 비웠다.
“삐익! (제법인데! 인간!)”
“또 마실래? 응?”
다시 채워지는 파이톤스의 술잔. 인간과 다람쥐의 기묘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괜찮겠지?’
리체는 그런 파이톤스를 잠시 걱정했다가, 이내 괜찮을 거라 여겼다.
파이톤스의 본체는 다람쥐가 아니라 별이니. 별이 술에 취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잖아.
“술은 마차 안에 더 있어요. 원하시면 가져다 드세요.”
로벤하프는 케이슬리에게 술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마부는 먼저 천막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이따 불침번을 설 요량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제 리체와 저 사이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다.
로벤하프는 옆자리에 앉은 리체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체가 무슨 용건이라도 있냐며 눈을 깜빡였다.
[로벤하프. 내 동생한테 개수작 부리지 마라.]
며칠 전, 로벤하프가 마차로 리체를 데려다주기로 결정된 날.
평생 처음으로 로벤하프에게 통신을 건 데온이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귓가에 아른거리긴 했지만.
개수작은 가벼운 마음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놈들이 하는 짓이고.
자신은 진지했다.
“리, 리체.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 좀 하지 않을, 않을래?”
“그래.”
로벤하프의 긴장한 말투에도 리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6년간 이렇게 어색하게 행동하는 로벤하프를 여러 번 봐왔던 탓이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건너편으로 쭉 걸어가다 멈춰 섰다.
케이슬리와 파이톤스의 떠들썩한 소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어둡고 고요한 평야의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리체는 그 별들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로벤하프도 이제 위대한 별에 대해 안다고 했지. 카이샨에게 들었으니까.’
위대한 별의 존재를, 로벤하프가 알고 지크베르트가 알았다.
데온에게도 제가 말해줬다.
“오빠는 안 불안해?”
리체는 하늘을 올려다본 채 로벤하프에게 물었다.
로벤하프는 그런 리체의 옆모습을 빠져들 듯 바라보다, 되물었다.
“뭐가?”
리체가 고개를 돌렸다.
살랑이는 긴 은발에 제 마음도 살랑인다. 절 보는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다운 은안에 제 마음이 요동친다.
리체의 부드럽게 움직이는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가 제 귀를 간지럽힌다.
로벤하프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위대한 별의 본체가 오빠 몸에 있잖아. 그 별이 깨어나서 오빠의 몸을 차지하면 어떻게 해.”
리체의 걱정하는 시선.
“나는 네가 있으면 하나도 불안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대답.
무수한 별들 아래,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는 두 남녀.
‘지금이다.’
로벤하프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진심 어린 제 사랑을, 리체에게 고백할 순간이라고.
“리체, 나는 널…….”
긴장으로 말이 더듬어지지도 않는다. 드디어 제 9년간의 짝사랑이 세상 밖으로 나와 싹을 틔우는 때가 찾아온 것이다.
로벤하프는 리체를 바라보며 말을 이으려고 했다.
하지만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지? 아직 내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않았는-.
“로벤하프 오빠……! 뒤!”
피우우우웅-.
리체의 다급히 손을 들어 외쳤다. 이어 뒤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폭발 소리.
퍼어엉. 퍼엉.
로벤하프는 곧장 몸을 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건, 커다란 폭죽을 터트린 듯 밤하늘에 꽃처럼 퍼진 붉은 불꽃.
그 불꽃 아래, 마차 위로 올라간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하하! 잘 탄다! 잘 타! 봤냐? 다람쥐? 어?”
“삑! 삐익!”
“그래! 내가 조금 하지?”
알딸딸한 얼굴로 리체의 다람쥐와 함께 낄낄거리는-.
‘마탑의 망나니……!’
어쩐지 별명과 달리 리체에게 하는 행동이 점잖다 했다.
술이 들어가니 달라지는군.
뭐, 저와 상관없긴 한데. 저 불꽃을 쏘아 올려야 하는 게 굳이 이 타이밍이어야 했을까.
리체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저 완벽했던 순간에……!
로벤하프가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이봐, 로벤하프.”
케이슬리가 그런 로벤하프를 불렀다.
취기가 올라온 와중에도 로벤하프의 적의를 느낀 모양이었다. 케이슬리가 로벤하프를 향해 시비를 걸었다.
“내 환상적인 마법에 불만 있어? 어? 누가 강한지 겨뤄볼까?”
“삐익! (싸워라! 싸워!)”
케이슬리는 비틀거리며 마차 위에 우뚝 서, 로벤하프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파이톤스가 신이 난다고 양 주먹을 번갈아 위로 올렸고.
리체는 그런 둘과 로벤하프를 난감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어쩌지?’
술 취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블레이크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로드윅 공작성에서 술은 리체가 안 보는 곳에서 마시라는 가주의 명이 있었으니.
‘그래도 로벤하프랑 말이 통하는 걸 보니까 말릴 수 있을지도 몰라.’
리체가 케이슬리를 말리려 한 발 앞으로 나간 때였다.
로벤하프가 리체의 앞을 가로막고, 케이슬리에게 말했다. 수년간 단련해온 사회용 미소에 차마 숨기지 못한 분노가 느껴졌다.
“궁금하시면, 겨뤄보실래요?”
굴러들어온 히베츠만에 케이슬리의 헤이즐 눈이 반짝였다.
실은 며칠간 싸워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로크샤 제국의 능력자는 얼마나 강할는지.
제가 비록 술에 취했지만,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지.
“좋아, 싸워보자고!”
케이슬리가 착용한 초커에 박힌 마석이 반짝였다.
그리고.
쩌저저적.
호기롭게 영창을 시작한 케이슬리는 1초 만에 그대로 얼음 속에 갇히게 되었다. 파이톤스도 같이.
마차 위에서 투지 넘치는 자세로 얼어붙은 케이슬리와 파이톤스.
“헉.”
리체가 놀란 숨을 삼켰다. 로벤하프는 개운한 얼굴로 손을 털며 리체에게 말했다.
“술 깨는 데는 차가운 게 제일 효과가 있거든.”
“그, 그래? 그런데 저렇게 있어도 괜찮아?”
“응. 아침에 얼음을 녹이면 다시 돌아올 거야.”
제 고백을 망친 값으로 이 정도는 약소하지.
어쨌든.
‘……이번에도 글렀네.’
이번에는 정말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93번째 고백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로벤하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 * *
로드윅 공작성. 블레이크의 서재.
제드는 아까부터 서재를 왔다 갔다 하는 제 주인을 바라봤다.
리체 아가씨가 오늘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쭉 이 상태였다.
“가주님, 폴 씨가 서류들을 오늘까지 결재해달라고 하셨는데요?”
“알고 있어.”
집사인 폴이 결재해달라고 가져온 서류가 아직 많았다.
블레이크는 제드의 말에 책상에 앉았다가, 두어 개를 처리하고는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성의 출입문이 보이는 창문이었다.
‘어휴, 우리 가주님은 여전하다니까.’
일은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끝내는 블레이크였다. 그런 가주님의 집중력이, 고작 10분을 넘기지 못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가주님이 딸바보인 걸 아는 우리나 믿지.’
제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블레이크의 곁으로 걸어갔다.
블레이크에게 딸바보니, 하면서도 저도 내심 리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저희도 성에 현수막 하나 걸 걸 그랬어요. 지난번에 황립 아카데미에서 건 거요.”
“쓸데없어.”
블레이크의 붉은 눈이 제드에게 슬쩍 닿았다.
제드는 개의치 않고 제 말을 늘어놓았다.
“‘축, 귀환’. 그런 거라도 걸어서 리체 아가씨를 맞이해야죠. 물론 리체 아가씨는 그런 거 싫어하시겠지만~ 아가씨의 위상을 이번에 같이 온다는 시험 교관에게-.”
아차. 그러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험 교관이 마탑 소속이었지. 마탑은 최근 있었던 일로 조금 민감했다.
“마탑에서 아가씨를 노리고 있죠?”
“그래.”
그제, 마탑주가 블레이크에게 접근했다.
전세계에서 강함을 쫓는 마법사들이 모인 탑. 그 탑의 주인인 마탑주. 40대이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남이었다.
“오랜만이네. 블레이크.”
과거 블레이크가 전쟁터를 누비던 중, 마탑주와는 마주친 전적이 많아 나름의 친분이 있었다.
블레이크가 우딕 아카데미 총장의 뒷조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듯했다.
“한니반 카이샤. 마탑에서도 골치를 앓는 양반인데, 우리 쪽에서 처리해 줄까?”
그렇게 말하는 마탑주의 눈그늘이 짙었다.
전쟁터에 있을 때보다 피곤해 보이는 몰골. 삶이 힘든 모양이군.
그런 몰골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처하러 제 앞에 나타난다?
원하는 게 있군. 블레이크가 물었다.
“뭘 원하지?”
“자네 딸, 한 번만 만나게 해줘.”
“내 딸을. 왜.”
“전도유망한 마법사니까? 졸업 전에 안면을 터 두고 싶거든.”
“거절하지.”
리체가 마탑에 관심을 가지면 모를까. 제안의 조건이 제 딸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우딕 아카데미의 총장인 한니반이 로드윅에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고.
블레이크는 마탑주를 내쫓듯 돌려보냈다.
“이게 다 저희 아가씨께서 잘나셔서 그렇다니깐요. 그런데 아가씨의 시험 교관은 마탑 소속이면서 마탑주에게 신뢰를 못 받나 봐요? 그자가 아가씨와 안면을 텄는데도 마탑주가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걸 보면요.”
제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커튼을 넘겼다.
때마침 출입문에서 꿈을 꾸는 건가 싶은 정도로 화려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히베츠만 공자님 솜씨군.’
제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 도련님은 센스가 좋은 것 같은데 가끔 엇나가는 경향이 있다니까.
하여튼 간에, 저 마차 안에 우리 리체 아가씨가 계신단 말이지. 그 쪼끄맣던 아가씨가 그새 커서 크셀폰 예선도 보시고.
제드는 리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윽, 하고 심장을 잠시 부여잡았다. 상상만으로도 귀여워서 심장에 무리가 간다.
제드는 옆에 있을 블레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가주님, 리체 아가씨께서 오신 것 같은데 슬슬 내려가 보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이미 서재를 떠난 후였다.
열린 문 너머로 사라지는 구둣발.
“진짜 딸바보시라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드의 걸음도, 빠르게 움직이긴 매한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