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자 가문의 수양딸이 되었다 (83)화 (82/89)

83화 누구한테 뺏겼는데

“아빠!”

“조심하거라.”

블레이크는 마차에서 뛰듯이 내리는 리체를 품에 안았다.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었나. 그새 보는 제 딸은 이전보다 의젓해진 것만 같았다.

아카데미를 보낸 후 매번 느끼는 감정이었다. 볼 때마다 이전과 달리 자라 있는 딸.

그게 대견하기도 하면서 언제 이렇게 커버렸나 하는 서운함도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경쾌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케이슬리였다. 얼음이 정말로 술 깨는 데에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전날보다 더 멀쩡한 얼굴이었다.

“로드윅 공작님, 잘 지내셨어요?”

뒤따라 내린 로벤하프도 붙임성 있게 웃으며 블레이크에게 인사했다.

블레이크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준 후, 리체에게 물었다.

“크셀폰의 예선 과제를 근처 지역에서 본다고.”

“맞아요. 로벤하프 오빠 덕분에 일찍 도착해서, 집에 이틀 정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리체는 블레이크의 품에 안겨 대답했다.

오랜만에 맡는 은은한 코롱 향에 마음이 편안했다. 아빠 냄새.

“잘 됐구나.”

블레이크가 다정히 미소 지었다.

원래 크셀폰의 예선은 성곽 안 도시에서 외부에 그 내용을 노출하는 걸 철저히 금지한 채 진행됐다.

그러니 리체가 바깥으로 나왔다고 한들, 블레이크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제 예선 과제 내용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잘 됐지. 예선은 도시 밖으로 나오려는 핑계였으니까. 롬 사막과 로드윅 영지는 정반대에 있기도 하고.’

덕분에 소질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뒤, 짧은 환대와 성대한 식사가 이어졌다.

로벤하프와 케이슬리에게는 손님용 방이 하나씩 주어졌다. 그들도 로드윅 공작성에 머물렀다가, 리체가 돌아갈 때 함께 갈 예정이었다.

리체는 공작성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내 방!’

[오오, 그대로네?]

오랜만인데도 기억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안락한 침대, 익숙한 인테리어와 가구들, 책상 위에 두었던 필기구 하나까지도.

방뿐인가. 달라지지 않은 것은 로드윅 공작성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블레이크, 리체를 반기는, 보고 싶었던 공작성 사람들.

잠시 집에 돌아온 것이다.

“많이 먹고 많이 쉬렴.”

리체는 블레이크의 말처럼 편안한 휴식을 보냈다.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달콤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이틀 뒤.

“파이톤스. 보름달이 떴어.”

이안이 준 장식을 만지작거리던 리체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커다란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었다.

* * *

[르티옴!]

[왜 이번에는 빨리 왔어?]

[나랑 놀자!]

[아니야, 나랑!]

마물의 숲. 호숫가.

리체는 작은 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 파이톤스가 꼬리를 한 번 팡, 내리치자, 꺅 소리를 내며 일제히 주변 나무 뒤로 숨었다.

‘흐응.’

파이톤스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래야 위대한 별이지. 요즘은 인간들이 절 귀여운 다람쥐로만 본다니까. 그래서 인간들이다. 본질을 봐야지, 본질을. 

파이톤스는 별들을 한 번에 물리친 제 위대함에 뿌듯해하며, 리체에게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저것들하고 놀고 있어.”

“응. 조심해.”

“조심할 것도 없지. 거기는 내 구역이라고.”

파이톤스는 자신만만한 소리를 내뱉고는,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리체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호수를 바라봤다.

* * *

별들의 무덤. 문명이라고는 하나 없는 삭막한 사막을 닮았다.

아름답지도 않고 찬란하지도 않다.

저벅.

작열하는 태양을 닮은 사내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남았다.

붉은 장발, 헐벗은 상체의 근육이 모자람 없이 탄탄했다.

“여기는 올 때마다 여전하네.”

여전히 지겹고 따분하단 말이야.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 본 것보다, 최근 몇 년간 인간계에서 본 것들이 더 많은 기분이었다.

“이래서 그것들이 르티옴과 계약하려고 안달이지.”

별들의 유희. 하지만 이번 대 르티옴과의 계약은 어림도 없다. 어딜 토끼 같은 제 계약자를 다른 별한테 맡기겠느냔 말이야. 

파이톤스는 하품하며 걸어갔다.

성큼성큼 내딛는 단순한 걸음이지만, 주위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그가 있는 장소가 바뀐 탓이었다.

‘단축’. 별들의 무덤에서 관리자인 여섯 개의 위대한 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여기 있군.’

파이톤스가 걸음을 멈춘 곳은 바위산 앞이었다.

파이톤스는 산 아래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린 후, 안을 향해 물었다. 

“어이, 영감! 있나?”

“있는 줄 알면서 왜 물어보느냐? 허구한 날 그 능력으로 날 귀찮게 하면서.”

안쪽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네놈 때문에 숨어 있는 게 의미가 없어.”

인간의 연을 관장하는 신이었던 별. 영감이 투덜거렸다.

신이었을 때의 능력은 별이 되어 갖게 된 고유 특성에 영향을 끼쳤다. 별이 되어 발전해 고유 특성으로 나타났다.

영감의 능력은 각기 다른 영혼과 육체의 융합, 혹은 해제.

별들의 융합은 취향이 특이한 별들이 원해서, 혹은 종종 불의의 사고처럼 일어나는 일이지만. 해제는 영감만이 가능했다.

그래서 영감을 찾는 별들이 많았고, 영감은 귀찮다며 거처를 옮겨 다니며 몸을 숨기다가, 내킬 때만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별의 탐지가 하필이면 네놈한테 갔으니.”

“다행으로 생각해. 다른 위대한 놈들이 영감을 못 찾는 덕분에 취미 생활도 안 들키고 맘껏 하잖아? 그 수집 말이야.”

영감은 킬킬거리는 파이톤스를 흘겨보았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뭐냐. 지난번처럼 황당한 꼴은 아닌데.”

“영감.”

파이톤스는 턱을 쓸며 물었다. 입가에 슬쩍 걸린 미소가, 곧 들어올 히켄카의 영혼 조각을 떠올린 듯했다. 

“그때 떼놓은 노랑이 놈 영혼 조각, 가지고 있지?”

“없다.”

하지만 단호하게 나온 영감의 말.

“없다고?”

파이톤스는 황당한 얼굴로,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제 몸의 서너 배 되는 바위를 옆으로 던졌다.

파이톤스가 던진 힘 때문에 지면에 부딪힌 바위가 산산이 부서졌다. 

“왜 없어?”

저놈 손에서 뭐가 부서지는 건 익숙했다. 영감은 태연히 파이톤스에게 대답했다.

“뺏겼으니까 없지.”

“뭐?”

뺏기다니. 영감은 다른 별에게 제 수집품을 뺏길만한 별이 아니잖아.

“누구한테-.”

파이톤스가 놀라 추궁하려던 그때였다.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운.

‘단축.’

자신처럼 단축을 사용하는 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눈깔인가, 아니면 파란 눈깔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란 눈깔인가.

가까워질수록 기운이 짙어졌다. 무덤에서는 파이톤스가 제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으니. 이내 누군가의 기운인지도 가늠할 수 있었다.

이건-.

“너……, 너!”

황급히 뒤를 돈 파이톤스의 주황빛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렸다.

그의 앞에 등장한 별이 다정히 속삭였다.

“날 찾았어?”

* * *

첨벙.

[도망쳐!]

[위대한 별이야!]

“파이톤스!”

리체는 호수 밖으로 나온 거대한 빛을 맞이했다. 

금방 온다던 말처럼, 파이톤스가 호수로 들어가고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영혼 조각을 찾았어?”

리체는 제 앞에 둥둥 떠 있는 별을 보며 손 그늘을 만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은, 마치 파이톤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했다.

평소라면 제 계약자의 시력은 소중하다며 곧장 다람쥐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었는데.

“파이톤스?”

[아.]

그제야 빛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람쥐일 때의 가벼운 목소리와는 달리, 빛 모습의 파이톤스의 목소리는 무게가 있는 편이었다.

신이었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로.

[찾았어.]

이번에도 빛 속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았다는 말에 리체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이제 노랑이를 찾을 수 있겠네?”

이제야 히켄카를 만날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이안.’

리체는 착용한 목걸이를 매만졌다.

내가 같이 도망칠 방법을 찾아볼게. 그게 아니면 너만이라도 내 운명에서 빼낼 방법을 찾아볼게.

[응. 그런데 계약자.]

기대감에 휩싸인 리체에게 빛이 말했다.

[무덤에서 믿기 힘든 일을 들어서 그러는데,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져도 될까?]

“믿기 힘든 일? 무슨 일이었는데? 설마 다른 별들도 유리병을 깨고 나온 거야?”

[그런 건 아니고. 로드윅 공작성을 떠날 때쯤 알려 줄게.]

분위기가 심각해 보였다.

‘무덤에서 티타의 소식을 들었나?’

요 며칠, 파이톤스가 풀이 죽어 있던 건 티타 때문이었으니.

어차피 내일이면 예선 과제를 위해 롬 사막으로 출발해야 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파이톤스의 기분을 무시하고 재촉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알겠어.”

리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빛은 다람쥐로 변해 리체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새벽이 오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야 하니, 리체는 서둘러 숲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크르……르응!

끼에에엑-!

그런데 숲이 이상했다.

파이톤스의 인지 조작 때문에, 마물들은 여전히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도망치곤 했다.

마물들이 두려워할 만한 포식자가 있는 걸까.

리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파이톤스에게 말을 걸었다.

‘파이톤스, 숲에 무슨 일이 있나 봐.’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 말을 못 들을 정도로 무덤에서 있었던 일이 심란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일까.’

리체는 고민했다. 그러나 깊게 생각을 이어갈 틈 없이, 숲이 변화했다.

변화가 끝났을 때는 마침 숲의 출구가 리체의 눈앞에 있었다.

“잘 됐다. 나갈 수 있겠어.”

입구이자 출구가 열린 건 함께 있는 파이톤스 덕분이었다. 

원래라면 날이 밝을 때까지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마물의 숲이지만. 파이톤스와 함께 있을 때는 숲은 순순히 입구를 여닫아주고는 했다.

‘파이톤스가 고민이 많은가 봐.’

리체는 잠잠한 주머니 속을 바라봤다.

내일이면 말해주겠지. 그래 준다고 했으니까.

리체는 숲 근처에 매어 놓은 말을 타고 공작성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식사 후, 리체는 로벤하프와 케이슬리와 함께 떠날 채비를 끝냈다.

“갈 때도 이 마차로 가는 건가요?”

케이슬리는 화려한 마차를 보며 중얼거렸다.

“로벤하프 오빠의 마차를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깐요. 그래도 멋진 마차인걸요.”

리체의 대답에 로벤하프가 방긋 웃었고 케이슬리는 애매한 신음을 흘렸다. 

그나마 로드윅 공작성에서 말을 바꿔주어서 다행이지.

케이슬리는 백마 대신 근사한 남청색 털을 가진 말 두 필을 바라봤다.

“리체, 잘 다녀오렴.”

블레이크를 비롯한 공작성의 모든 사람이 나와 리체를 배웅했다.

리체는 블레이크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또 몇 달은 못 보겠네. 우리 아빠.

그렇게 생각하니 포옹을 짧게 끝내기 아쉬웠다.

‘아, 옴.’

리체는 블레이크의 가슴께에서 넘실거리는 기운을 바라봤다.

몇 달 동안 정화하지 않았더니 꽤 쌓여 있었다. 건강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옴이 없으면 몸 상태가 개운해지니.

‘이번에 다 정화하고 가야겠다.’

리체는 생긋 웃으며 블레이크의 등에 얹은 손에 정화 능력을 사용했다.

“……허억.”

이어 찾아온 건 끔찍한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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