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가 설명해 봐
“리체?!”
“리체!”
숨도 못 쉴 만큼 커다란 고통. 리체의 상체가 숙어졌다.
놀란 블레이크와 로벤하프가 리체에게 다가갔다. 이어 사태의 다급함을 느낀 이들이 그 주위를 에워쌌다.
“아가씨!”
“리체 아가씨!”
“트아리체?!”
리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유리구슬 같은 눈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넘어갈 듯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호흡.
블레이크가 급히 능력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능력의 부작용으로 쌓인 옴이 다시금 리체에게 흘러 들어갔으니.
“쿨럭.”
리체는 피를 토해냈다.
블레이크의 기운을 모조리 정화할 생각으로 쓴 르티옴의 능력이었다.
마치 물이 담긴 욕조의 마개를 연 것처럼, 블레이크의 옴은 리체의 몸을 향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려 들어갔다.
단숨에 들어간 옴은 그녀의 살갗을 찢고 근육을 뒤틀리게 하고 심장을 할퀴었다.
전생의 아그네스가, 게르웨르 공작의 부작용을 정화했을 때 받던 고통.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왜?’
리체의 눈물에 피가 섞여 나왔다.
왜 고통스러운 거지? 파이톤스가 있는데.
‘아파.’
누군가 절 눕혔다. 블레이크가 눈물을 흘리며 제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시야가 흐릿해져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작게 웅웅거렸다.
모두에게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지난번처럼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미안해요. 나 정신을-.’
끔찍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리체는 정신을 잃었다.
* * *
“……리체.”
충격 속, 모든 것이 고요했다.
리체가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좀 해 봐.”
케이슬리가 중얼거렸다.
망할 로드윅 놈들과 히베츠만 공자는 아는 듯한데.
저만 모른다.
“리체, 리체……!”
조금 전. 피를 쏟는 트아리체의 모습에 로드윅 공작이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했다. 정신없이 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붉은 눈에, 그 로드윅 공작이 흘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눈물이 흘렀다.
“가주님!”
갈색 머리의 수행원이 로드윅 공작에게서 트아리체를 넘겨받고 바닥에 눕혔다.
괴로워하는 트아리체의 몸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입고 있는 옷 곳곳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까.
“…….”
그런 트아리체에게 당장이라도 붙어 걱정할 줄 알았던 히베츠만 공자는, 입술을 꾹 깨물며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트아리체에게 닿기를 참는 것처럼. 그가 쥔 두 주먹 사이로 핏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리체 아가씨-!”
갈색 머리의 수행원을 닮은 하녀가 울부짖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 주변의 이들도 트아리체를 부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 속에서 나이 많은 의원이 다급히 달려와 트아리체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트아리체가 정신을 잃은 지금.
마치 이 끔찍한 광경이 무슨 상황인지 아는 듯, 사람들은 침묵하고 흐느꼈다.
저만 모른다.
“누가 설명 좀 해달라고!”
초조해진 케이슬리가 외쳤다.
제 마음에 든 트아리체가 저렇게 당장에라도 죽을 것처럼 있는데.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자신이 그에 맞는 마법이라도 사용할 게 아닌가.
이럴 줄 알았다면-.
“후회해?”
누군가의 상냥한 음성이 케이슬리의 귓가에 울렸다.
케이슬리는 뒤를 돌아봤다. 세상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오로지 자신과.
“다람쥐……?”
트아리체와 함께 다니던 다람쥐.
이래서였나. 자신이 고양이 모습으로 말해도 트아리체가 놀라지 않았던 건. 말을 할 줄 아는 다람쥐인 줄은 몰랐다.
“넌 정체가 뭐지?”
몸에 마석을 지니지 않은 걸 보니, 저 같은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나는-.”
다람쥐의 몸을 환한 빛이 감쌌다. 빛은 점점 사람의 크기만큼 커지더니, 이내 한 여인의 형상이 되었다.
트아리체를 연상시키는 긴 은발과 은안. 선이 고운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
“신.”
여인은 케이슬리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케이슬리의 시선이 그녀를 좇았다. 다시금 멈춰 있던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 누구냐!”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여인은 쓰러진 트아리체에게 손을 얹었다.
블레이크가 그 팔을 낚아챘다. 날카로운 붉은 눈이 그녀를 매섭게 응시했다.
“뭐 하는 자냐.”
여인은 팔을 잡힌 채 블레이크를 바라봤다. 같은 은색이지만, 리체와 달리 공허한 눈.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
“로드윅 공작부인이 죽은 날?”
“……!”
블레이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어 눈을 깜빡인 것처럼 세상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블레이크의 손이 허공을 그러쥐었다. 여인이 사라졌다.
“가주님! 아가씨가!!”
……리체 또한.
오갈 데 없는 블레이크의 분노가, 슬픔이, 후회가. 절규 속에 섞여 나왔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블레이크뿐만이 아니었다.
쩌저저적.
공작성의 절반이 순식간에 얼음으로 뒤덮였다. 로벤하프의 능력이었다. 얼음은 계속 퍼져나갔다. 리체를 데리고 사라진 여인을 쫓듯, 그녀를 잡아서 세포 하나까지 얼려버릴 기세로.
“아, 아가씨!”
“아가씨를 찾아!”
아직 공작성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급히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케이슬리가 중얼거렸다.
“저, 봤어요.”
작은 소리였지만, 블레이크가 들었다. 딸을 잃은 아비의 얼굴은 그새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든 블레이크를 향해, 케이슬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트아리체의 다람쥐가 그 여자로 변하는걸.”
* * *
“모건 데이얼! 오늘도 왔나?”
“네.”
“예선 합격자는 여유로워서 좋구먼. 올라가게.”
경비병은 익숙한 얼굴에 성곽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을 내어줬다.
벌써 일주일째.
저 잘생긴 남학생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성곽을 올랐다.
남학생만큼 예쁜 여학생이 예선 과제를 한다며 도시를 나간 날부터였다.
‘청춘이지.’
경비병은 흐뭇하게 고개를 들었다. 남학생은 어느새 꼭대기에 다다랐다. 마음만큼 걸음도 빨라지는 모양이었다.
저러니 이 좁고 넓은 도시에 그 여학생이랑 사귄다는 소문이 쫙 돌았지.
‘본선 내기에 영향이 갈 만하다니까.’
덕분에 내기꾼들 사이에서 최종 우승자 예상 순위가 매번 바뀌었다.
그제는 모건 데이얼. 어제는 트아리체 로드윅. 오늘은 다시 모건 데이얼.
하지만 경비병은 최종 우승자가 트아리체일 것이라 예상했다.
어제, 왜 매일 성곽을 오르냐는 제 질문에,
“지금이 같이 산책하던 시간이라서요.”
모건 데이얼이 그렇게 답했으니.
누구와, 라는 말은 안 했지만, 빤했다. 그 다정한 눈빛은 연인을 떠올릴 때 말고는 나오지 않을 눈빛이었으니까.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못 이기지. 그것도 저렇게 단단히 빠졌으면.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부럽긴 하구먼.’
경비병은 코끝을 쓱 훔쳤다.
“…….”
이안은 성벽 난간에 기대 바깥을 바라봤다.
저 멀리 어딘가에 리체가 있겠지. 이안은 왼쪽 눈꺼풀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리체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었다.
‘리체는 왜 그때 내 눈에 입맞춤했을까.’
다정한 리체.
동정심으로 제게 키스해준 걸까. 그게 절 좋아해서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텐데.
하지만 제 욕심이었다. 이안은 피어오르는 욕심을 꾹꾹 눌렀다. 그래도 며칠 전처럼 제 다짐을 무너트리고 터져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버틸 수 있어.’
그날. 리체가 자신을 안고 속삭여준 말.
“나는 살 거야. 너를 위해서.”
그 말에 공허한 가슴이 단숨에 채워졌다.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던 외줄 길이, 탄탄하고 넓은 길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수년간 불안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자리에 채워진 건, 해낼 수 있다는 단단한 믿음.
리체, 넌 나를 언제나 살게 만들어.
9년 전에도, 6년 전에도, 지금도.
리체가 없었더라면 포기했을 삶이었다. 제 아버지에게 끝났을 삶이었다.
“3주 후면 돌아올 거야.”
이안은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평야를 바라봤다. 앞으로 2주. 하루하루가 열흘 같고 일 년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내려가 봐야겠네.’
고작 며칠. 리체와 산책하던 때가 그리워 그 시간이 되면 성곽을 찾곤 했다. 바깥을 보면 리체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한때 리체와 가까이하지 않으려던 자신을 떠올리면 우스운 일이었다.
이안은 성곽을 내려가 숙소를 향해 걸었다.
“모건 데이얼.”
그러다 숙소 근처에서 데온을 발견했다.
그는 상당히 급한 걸음으로 제게 다가와, 팔을 낚아챘다.
“따라와.”
“로드윅 교관님. 무슨 용건이시죠.”
데온과는 지난번 한니반의 개라며 부딪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용건일까.
또 검을 맞대는 건 사양이었기에, 이안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조금 쌀쌀하게 물었다.
“따라와. 아니면 여기서 얘기할까?”
데온의 눈가가 붉었다. 검은 머리는 손으로 헤집었는지, 헝클어져 있었다.
이안이 가만히 서 있자, 데온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
어떻게.
이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찾았다.]
귓가에 이안드웨인을 찾은 죽음이 키득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우직끈.
휘이이잉.
쿠구궁-.
깡!
죽음의 위협이 동시에 이안을 향해 쏟아졌다.
가로수가 쓰러지고, 강풍에 떨어진 항아리가 머리 위를 노리고,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날아왔다.
데온이 날린 오러에 벼락이 흩어지고, 이안의 검에 가로수와 항아리와 쇠꼬챙이가 반토막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겁할 만한 상황이 펼쳐졌음에도,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시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데르케디온 선배.”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의미가 없었다.
데르케디온이 입 밖에 꺼냈다는 건, 그가 제 정체를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데온은 고개를 까딱하고는 앞서 나갔다. 이안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는 훈련장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너.”
빈 훈련장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물었다.
데온의 눈이 이안을 향했다.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참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 무슨 일일까.
데온은 잠긴 목소리로 이안에게 말했다.
“그 다람쥐, 평범한 다람쥐가 아닌 거 알고 있었지.”
“다람쥐요?”
이안은 데온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리체의 다람쥐. 파이톤스를 얘기하는 거겠지.
하지만 리체는 파이톤스의 정체를 숨기고 다녔는데.
이걸 제가 밝혀도 될까.
“아니-.”
스릉.
이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온이 뽑은 칼날이 그의 목덜미를 향했다.
“말해. 모건 데이얼.”
데온의 칼이 흔들렸다. 몇 번을 그와 붙었기에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데온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안은 검에서 데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데르케디온 선배……?”
그가 알던 데르케디온이 아니었다. 늘 무표정하거나 미간을 찌푸리던 얼굴이, 잔뜩 흐트러진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리체가 사라졌어.”
데르케디온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중상을 입은 채로.”
“…….”
“말해. 그러니까.”
데르케디온이 애원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