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익숙하지 않아?
‘왜지?’
리체는 바닥에 누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깜빡였다.
블레이크의 옴을 정화하다가 부작용이 왔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었다.
‘아프지 않아.’
그런데 지금은 아프지 않았다. 마치 정화의 부작용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꿈인가?’
부작용은 유리 조각 속 전생의 제 모습을 본 것 때문에 꾼 생생한 악몽일까.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지. 눈앞에 보이는 건 돌벽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파이톤스는?’
몸은 멀쩡했지만, 아직도 고통이 뇌리에 남아 생생했다.
파이톤스한테 내가 겪은 일을 물어보고 싶어.
몸을 막 움직이려던 리체의 시야에, 바닥을 짚는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리체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언제까지 늘어져서 자고 있을 생각이야?”
이마 위로 쓸어올린 금발, 별처럼 빛나는 금안을 가진 미남자가 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험한 분위기.
남자는 누운 리체의 머리를 바닥을 짚은 자신의 양손 사이에 가두고, 얼굴을 천천히 숙였다.
붉은 입술이 리체의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해가 중천인데.”
그 귓속말에 리체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뺨에 닿은 남자의 숨결이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분위기와 눈빛이 익숙한 것이, 제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다.
“……히켄카?”
비틀린 미소를 짓는 걸 보아하니 더 확신이 섰다.
히켄카다.
“금세 알아차렸네. 재미없게.”
히켄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체도 그런 히켄카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 모습은 원래 모습이야?”
“원래 모습?”
“파이톤스도 사람처럼 변한 적이 있었어. 원래 모습이라고.”
히켄카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신이었을 때 모습이기는 하지.”
리체는 파이톤스를 찾기 위해 별의 탐지를 사용해봤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파이톤스는커녕, 눈앞에 히켄카가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이톤스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어. ……설마.’
그러다 리체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화의 부작용. 꿈이 아니었다. 파이톤스가 인간계에 없었기에 부작용을 겪은 것이었다.
호수에서 나온 빛이 파이톤스가 아닌 다른 위대한 별이었나?
‘히켄카는 여기에 있고, 지크 몸에 들어간 카이샨은 사념체였어. 두 별은 유리병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고. 남은 건…….’
단 하나.
“티타가 날 데려왔어?”
“똑똑한데.”
히켄카가 히죽였다. 리체가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정화를 하다가 부작용이 왔어.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아.”
“티타가 네 몸의 시간을 되돌렸나 보지. 그게 그 녀석의 특성이잖아.”
“……여기는 어디야?”
“어딘지 모르겠어? 주변을 둘러봐봐.”
“주변을?”
리체는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하지 않아?”
히켄카의 말대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마다 낯설지 않았다. 곰팡이 핀 돌벽, 차가운 바닥, 쇠창살. 낮은 계단과 문…….
“……게르웨르 저택의 지하실.”
리체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소름이 돋았다.
“정확히는 전생의 네 기억 속에 있는 공간을 재현한 것이지만.”
“재현한 거라고?”
리체는 벽을 쓸었다. 차갑고 거친 벽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여기는 정확히 어디인데?”
“시간의 틈새. 내 유리병 속의 세계를 나만이 간섭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은 티타만이 간섭할 수 있는 세계지.”
“티타가 나를 가뒀어?”
“그래.”
“히켄카, 너도 갇힌 거야?”
“글쎄.”
히켄카는 지하실 우리의 철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 앞에는 의자가 있었다. 게르웨르 공작이 앉아 우리 속에 있는 아그네스를 보던 곳이었다.
리체는 그 의자에 앉는 히켄카의 동작을 눈으로 좇았다.
‘거울 조각에 관해서 히켄카에게 물어봐야 해.’
궁금한 것은 끝도 없이 많았지만, 히켄카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이안이 가진 거울 조각 속에 전생의 내가 있었어.”
“……이안드웨인을 만났어? 거울 조각은 어떻게 알았지?”
히켄카는 의자의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댄 채, 눈동자를 굴려 쇠창살 속의 리체를 바라봤다. 자신이 거울 조각 속에서 본 르티옴은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번 르티옴은 확실히 팔자를 고친 것 같네. 저렇게 윤이 나는 걸 보아하니.
‘가지고 싶네.’
여기는 티타의 세계였다. 그 귀찮은 파이톤스도 없고, 티타도 르티옴을 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있는 건 오로지 저와 르티옴뿐.
억지로 파이톤스와의 계약을 파기하게 하고 저와 계약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르티옴을 내 것으로 만들면 재밌을 거 같은데.’
히켄카의 음침한 속내를 모른 채, 리체가 입을 열었다.
“유리 조각에 관한 건 우연히 알았어. 이안은 여전히 모건이고. ……왜 이안의 운명이 내 운명이랑 얽히게 된 거야? 내 죽음은 왜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될 수 없었어?”
“그거야, 너희는 티타에게 바쳐진 제물이었으니까.”
히켄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물이라니. 누가 우리를 티타에게 바친 건데?”
“게르웨르 공작.”
게르웨르 공작. 그 말에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리체는 울컥하는 감정을 내뱉는 대신 히켄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 전생에서 깨어난 위대한 별은, 그 세 녀석만이었을까?”
히켄카가 말하는 건 카이샨을 비롯한 로드윅과 히베츠만에게 능력을 준 위대한 별이었다.
리체의 전생에 데온, 로벤하프, 지크베르트의 몸을 그릇으로 삼고 부작용이 온몸을 덮을 때까지 그들의 능력을 마구 사용했던.
“나와 티타도 깨어났어. 나는 11살의 이안드웨인을 그릇으로 삼았고, 티타는 10살인 네 몸에 들어갔지. 게르웨르 공작은 네 몸에 들어간 티타에게 르티옴을 돌려 달라고 빌었어.”
“티타가 내 몸에? 하지만 그랬더라면-.”
리체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갑자기 두통이 일며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의 아그네스, 나는 도적 같은 놈과 거래를 했단다. 다른 시간에 있는 내가 가져야 할 너를, 그 도적에게 줘버렸지. 하지만 보거라. 덕분에 나는 너를 잃지 않았단다.”
전생, 10살의 어느 날.
게르웨르 공작의 부작용을 정화하고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났던 제게, 게르웨르 공작이 한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 말을 듣고 도망쳤다가 잡힌 기억이 떠올랐다.
히켄카가 제가 한 말의 이유를 덧붙였다.
“게르웨르 공작의 꿈에 미래가 나왔던 모양이야. 티타가 시간을 한 번 되돌릴 걸 알았더군. 그래서 티타가 돌아갈 시간, 즉. 이번 생의 너와 이안드웨인을 티타에게 제물로 바치겠노라 했지. 대신 지금의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르티옴을 가져가지 말라는 조건으로. 그때 게르웨르 공작과의 거래로 너희 둘의 운명이 얽혔어.”
리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게르웨르 공작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안과 자신이 제물로 바쳐졌다니.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리체는 다시금 실마리를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그 사이, 히켄카가 입을 열었다.
“아, 네가 왜 생을 두 번 살게 된 건지 알아? 티타가 네 몸에 한 번 들어갔기 때문이야. 그 영향으로 기억을 이어받았지.”
티타는 시간을 돌린 일로 네 전생보다 과거보다 늦게 깨어났어. 다행으로 알아.
“덕분에 몇 년 동안 로드윅에서 잘 먹고 잘살았잖아?”
히켄카가 짓궂게 말했다.
“나는 왜 여기에 가둔 건데?”
“말했잖아. 제물이라고. 신이 되려는 별에게 제물을 받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히켄카의 금안이 절 똑바로 바라보는 리체에게 향했다.
탐이 나게 생긴 아름다운 은색 눈동자는 결코 제게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별이니까. 지금 너한테 말한 얘기는 내 눈에 비쳤던 티타의 기억 일부를 옮긴-.”
“파이톤스는?”
능청스럽게 말하던 히켄카가 리체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왜 네가 말한 내 전생에 파이톤스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당연히 들었어야 할 의문이었다.
몇백 년 전, 별들이 인간계로 넘어오는 걸 막기 위해 싸움까지 일으켰던 파이톤스였다.
그런 파이톤스가 그때도 별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티타도 넘어왔었다는데.
히켄카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걔는 진작에 잠들었지.”
* * *
“이봐. 거기는 위험해. 다리가 망가졌다고.”
초저녁.
마을 사람은 흔들다리 앞에 있는 사내를 향해 말을 걸었다.
후드가 달린 로브, 한쪽 어깨에 멘 짐가방을 보아하니 외지인인 모양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모르고 건널 뻔했네요.”
남자는 몸을 돌려 마을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머리에 쓴 후드 때문에 얼굴은 안 보이지만, 목소리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졌으면 잘 생겼겠어.
“멀리서 왔나 보네? 억양이 판 대륙 쪽이군.”
“티가 나나요?”
“살짝? 그런데 내 귀가 예민해서 그렇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로크샤 제국 사람인 줄 알았을 거야. 아, 로크샤 제국에서 귀족은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잘못 걸렸다가는 감옥행이라고.”
마을 사람은 농담처럼 가볍게 경고했다.
행색으로 봐서는 평민인 거 같은데, 이런 상식은 빨리빨리 알려주는 편이 좋았다.
“다리를 건너려던 거면, 반대쪽 마을에 볼일이 있나 보지?”
“사람을 찾으려고요. 혹시 탬버란 사람을 아십니까?”
“아, 그 술주정뱅이.”
마을 사람은 얼굴을 찌푸렸다.
“알지. 몇 년 전에 크게 아팠는데도, 그 성질머리는 나아지질 않아. 그 집에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옆 마을에 갈 때마다 애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라니까. 그 어린 게 반항 한 번 못하는 게 어찌나 마음이…….”
흠칫.
마을 사람은 순간 오한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듣는 줄 알았던 남자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목덜미를 쓸며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헛것을 보고 주절거렸나…….”
* * *
“꺄악!”
탬버의 아내, 노라는 온몸 군데군데에 멍을 달고 집을 뛰쳐나왔다.
더는 폭력적인 남편과 살지 못하겠다며 도망치는 것이었다.
노라를 잡겠다고 따라갔던 탬버는, 얼마 못 가 뛰는 것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내가, 헉, 저걸 잡아서, 헉, 버릇을 고쳐놔야, 헉, 하는데-.”
내뱉는 숨에 알코올 냄새가 짙게 섞여 나왔다. 탬버는 벌게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절뚝이는 다리는 몇 년 전 마차 사고로 입은 후유증이었다.
달리느라 술이 깼으니 집에 가서 다시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런데 집에 술이 있나.”
마지막 병을 비운 것이 기억났다. 탬버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돈이 없지. 참. 주머니만 돈이 없나, 집에도 없었다. 빚밖에 없는 몸뚱어리.
그러고 보니 제게 부잣집으로 팔려 간 조카 하나가 있지 않았던가.
“이름이 뭐더라. 내가 이름을? 어라? 이름을 안 지어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아꼈는데.”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무려 공작 가문에 팔려 갔으니. 돈도 섭섭지 않게 모았을 터였다. 돈이 없으면 도둑질을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집에 널린 게 금은보화일 테니.
집 현관문은 노라가 열어놓은 그대로였다. 탬버는 집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그래, 제가 거둬야겠다. 그 불쌍한 조카를 제가 거둬야겠어.
“이렇게 조카를 생각해주는 큰아버지가 어디에 있냔 말이야!”
끼익.
그러다 탬버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들린 한 남자의 목소리.
“당신이 탬버인가?”
누구-.
뒤를 돌아본 탬버의 시야에, 절규 같은 섬광 한 줄기가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