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말 잘 들으면, 보여줄게
“…….”
탬버의 집에서 남자가 나왔다.
그가 검집에 집어넣은 검이 시리게 울었다.
남자는 앞으로 걸어갔다. 민가가 없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후드를 벗었다.
찬란한 금발이 드러났다. 아름다운 얼굴의 붉은 입술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법 춥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이안은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봤다.
‘리체는 춥지 말아야 할 텐데.’
티타가 리체를 데려간 지도 반년.
해를 넘겨 이안은 18세, 리체는 17세가 되었다.
아직 자신이 멀쩡히 살아 있으니, 리체는 죽지 않았을 거다.
“티타교를 무너트리면 그 별이 나타날 거라던데.”
우딕 아카데미의 총장인 한니반의 목을 물어뜯은 몇 주 뒤.
이안은 판 대륙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데온을 만났다.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살 거예요.”
“그러든가.”
그렇게 데온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이안은 계속해서 살아갔다.
죽음을 피해서 달아나고, 리체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파이톤스도, 히켄카도.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안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안드웨인 게르웨르.”
불안할 때면 제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죽음에 안도했다.
죽음은 아직 날 쫓고 있어.
리체와 제 목숨이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리체가 죽지 않았으니 자신도 죽지 않았다. 리체는 살아 있다.
리체가 나를 위해 살아주는 한, 나는 무너지지 않아.
“모건 데이얼.”
그러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뒤에 올 때까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상당한 실력자. 이안은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자신을 부른 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가,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로드윅 공작님.”
기억 속의 익숙한 붉은 눈과 무표정한 얼굴, 가까이하기 힘든 고고한 분위기.
40대 초반의 로드윅 공작은 여전히 정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로드윅 영지와 가까웠었지.
이안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블레이크에게 인사했다.
모건 데이얼이라 저를 불렀는데, 자신은 어떻게 로드윅 공작을 대해야 할까. 고민은 짧게 끝났다.
“데온에게 들었다. 예전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블레이크가 저를 알아봤기 때문일까.
어릴 적. 블레이크가 제게 몽유병을 치료하는 목걸이를 건네줬을 때.
이안은 잠시 아버지란 존재가 이런 걸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제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어른이 블레이크였기에.
“밥은 먹었나?”
“……아니요.”
블레이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척한 모습은 이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블레이크는 저 멀리 세워진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집에 들렀다가 가거라. 딸 친구한테 밥이라도 대접해줘야지.”
이안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쾅. 쾅. 쾅.
“문 열어! 티타!”
쾅. 쾅.
“내보내 줘!”
쇠창살 우리 밖으로 나온 리체는 계단 위, 굳게 닫힌 지하실 문을 두드렸다.
시간의 틈새. 모든 것이 쉽게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허상과도 같은 공간이지만. 단 하나. 리체가 두드리고 있는 문만은 진짜였다.
“거기를 열면 인간계로 나갈 수 있어.”
그 말을 히켄카에게 들은 뒤로, 리체는 저 문을 두드리며 티타를 부르고 있었다.
저렇게 절박하게 부르는 이유는 전생의 파이톤스가 잠들었다는 것과,
“여기서는 시간이 바깥과 다르게 불규칙적으로 흘러가지. 네가 온 지 얼마 안 돼 보이지만, 인간계에서는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고?”
이곳과 인간계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돌아가야 해! 티타! 제발!”
“기운이 넘치네. 르티옴은.”
히켄카는 의자에 앉아 허공에 손짓했다.
원하는 걸 떠올리자, 낡은 테이블은 사라지고 근사한 티테이블이 생겨났다.
시간의 틈새에서는 티타가 막지 않는 한, 원하는 걸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히켄카는 따듯한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여유로운 듯 보였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유리병에서 짐승 자식밖에 못 꺼냈어.’
그것도 영혼으로 되돌려 놓지도 못하고 사념체로.
히켄카가 티타에게 요구했던 건 그녀에게 제물로 바쳐진 현시대의 이안드웨인이었다.
그러다 티타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된 히켄카가 거래를 파기했고.
티타는 제 계획을 방해하려는 히켄카를 시간의 틈새에 가두려 했다.
낌새를 눈치챈 히켄카가 다른 위대한 별들을 유리병 밖으로 꺼내려 했으나, 카이샨의 유리병을 깨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실패라니.’
히켄카는 짜증이 치밀었다.
어차피 별들에게 남는 건 시간이었고, 유흥이라고는 한심하게 돌아가는 인간계를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갇히는 건 상관없지만, 티타가 신이 되는 건 못 봐주지.’
경계가 무너져 세계가 망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계가 멸망하든, 무덤이 멸망하든. 제 알 바는 아니었으니.
다만, 제 거래를 망친 티타가 신이 되는 꼴은 봐줄 수가 없었다.
‘인간계는 지금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몇 년이 흘렀다고는 해도, 아직 티타가 신이 되지는 못했을 거야.’
쾅. 쾅.
“티타! 내보내 줘!”
‘완전한 신이 되려면 적어도 백 년은 이름을 칭송받아야 하니까.’
쾅. 쾅.
“나는 돌아가야 해!”
‘티타교로 잠시 힘을 얻었어도 언제든 별로 돌아올 수 있는-.’
쾅.
“르티옴, 시끄러워.”
“하지만, 이안이!”
“안 죽었어.”
히켄카의 말에 리체가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이제야 조용해졌네.
“네가 살아 있잖아. 이안드웨인이 지금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으니까 아직 둘의 운명이 엮여 있다고. 이안드웨인이 죽었으면 너도 지금 죽었을걸.”
“그러면 이안은 내가 돌아갈 때까지 죽음에 쫓기는 거잖아.”
다급해진 리체의 표정에 히켄카가 손을 뻗었다.
“르티옴, 진정해 봐.”
“파이톤스는?”
“……걔까지는 모르겠다.”
쾅. 쾅.
다시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히켄카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갇혀 있는 게 상관없다는 말은 취소다.
동거인이 이렇게 소음을 유발해서야,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가 있나.
“르티옴.”
히켄카는 리체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나 철문을 두드렸는지, 살갗이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말 잘 들으면.”
히켄카는 리체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리체가 움찔하는 사이, 당겨진 가죽끈과 함께 목걸이의 장식이 딸려 나왔다. 히켄카는 장식을 손에 쥐고 리체에게 속삭였다.
“인간계 구경시켜줄게.”
“…….”
동그란 눈으로 놀라 절 보는 르티옴.
“응?”
히켄카는 그런 리체에게 꿍꿍이속이 있는 눈웃음을 지었다.
진짜 귀엽다니까. 계약해버리고 싶게.
* * *
이안은 식사를 끝낸 뒤에도 로드윅 공작성에 남아 있었다.
“오래 머물다 가도 된다. 자식들이 다 밖에 나가 있으니 집이 휑하구나.”
블레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에게 손님방까지 내어주었다.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이안이었으나, 리체가 살던 집이었다.
마치 리체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느끼는 기분에, 블레이크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가족 초상화…….’
이안은 난간이 있는 복도에 서서,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봤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나란히 붙어 있는, 실물 크기만 한 가족 초상화 두 개였다.
왼쪽의 초상화에는 상냥해 보이는 로드윅 공작부인과 젊은 로드윅 공작, 어린 데르케디온이 있었다.
‘2살 정도 됐나? 데르케디온 선배는 이때도 눈매가 날카로웠네.’
이안은 오른쪽 초상화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익숙한 모습의 가족이었다.
어린 리체를 안고 미소 짓는 로드윅 공작과, 그 옆에 뚱한 얼굴로 서 있는 데르케디온.
이안은 환하게 웃고 있는 리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귀엽죠?”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가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니, 로드윅 공작의 수행원인 제드였다.
“모건 데이얼, 도련님?”
풀네임 뒤에 어색하게 도련님을 붙이고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 이안드웨인임을 아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제드.”
“음? 말씀 놓으셔도 되는데요. 이것 참. 제가 도련님께 존댓말을 들어도 되나 몰라요?”
능청스럽게 올라온 제드는 이안의 옆에 서서 함께 초상화를 바라봤다.
“아가씨께서 오시고 몇 달 뒤에 그린 거예요. 지금도 인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우시긴 한데, 저 때는 진짜 귀여움이 장난 아니었죠. 저는 우리 아가씨께서 요정인 줄 알았다니깐요?”
제드는 크-, 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안은 그 말에 제드가 부러웠다. 8살인 리체는, 거울로 목소리만을 들었던 터라 얼굴을 보지 못했던 탓이었다.
‘리체도 거울을 사용했다고 했는데.’
황도에 있는 로드윅 저택에는 가본 적이 있었지만. 로드윅 공작성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랑 연락이 안 돼서 거울은 그냥 공작성에 두고 왔다고 했었지.’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저와 리체의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들떠, 이안은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맨 처음 파이톤스의 모습이 비쳤을 때는 주변에 책이 많았었어.’
리체가 거울 너머의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는, 천을 거울에 덮어 주변을 볼 수 없었지만.
이안은 여전히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제드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리체는 어렸을 때도 책 읽는 걸 좋아했나요?”
“아, 좋아하셨죠. 저희 아가씨 취미가 가주님과 함께 책을 읽으시는 거였거든요.”
제드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가씨께서 어렸을 때는 그림책도 좋아하셨다, 어느 날은 사람이라고는 질색하는 저 도련님이 활짝 웃으면서 아가씨와 그림책을 읽고 있더라…….
제드의 말을 들은 이안이 약간 놀란 어투로 물었다.
“데르케디온 선배가 활짝 웃으면서요?”
“상상이 안 가시죠? 저도 안 믿겼다니깐요. 그만큼 저희 아가씨께서 매력적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별마저 홀리셨나.”
적당히 매력적이셨어도 됐을 텐데.
이제는 도련님은커녕, 제 가주님이 웃는 걸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제드는 그림 속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은 리체의 손끝을 슬쩍 만졌다가 손을 뗐다. 아, 우리 아가씨. 닳으시면 안 되지.
“살아 계시겠죠?”
“네.”
제드의 물음에 이안은 확신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제드는 그 대답의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네 죽음이 리체와 연결돼 있다고?”
“네. 리체는 죽지 않았어요. 로드윅 공작님.”
“…….”
서재에서 이안이 블레이크에게 하는 얘기를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엿듣는 것을 가주님도 알고 저 도련님도 알았으니 찔릴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가주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데요?”
그때 자신이 끼어들어서 가주님의 눈물을 저 도련님이 못 봤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
어쨌든.
제드는 이안의 훤칠하고 아름다운 옆모습을 힐끔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우리 아가씨가 저 도련님과 운명이 얽혀 서로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는 사이라니.
‘우리 아가씨의 연애 상대는 나중에 마음고생 좀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