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건, 나잖아.
외모 훌륭하고, 검술 실력도 좋고, 인성 좋고, 돈도 많은, 아, 돈은 지금도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위협적인 남사친이 죽음까지 얽혔다?’
웬만한 사랑 가지고는 이기기 힘들 것 같은데.
이거 우리 아가씨 평생 혼자서 지내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우리 가주님께서는 그것도 좋다고 하실 테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일을, 제드는 벌써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리체가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
로드윅 공작성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리체 아가씨는 돌아오실 거야. 매정한 분이 아니시니까.”
억지스럽지만, 그 믿음마저 없으면 불안했기에.
자신들의 공작성이 당장이라도 살인귀 가문이라 불리던 예전의 삭막한 성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
성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얼마나 포근한지를 몰랐던 때와는 달랐다.
이제는 그 삭막한 성을, 자신들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 또 기억나는 게 있네요.”
제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 리체의 초상화를 계속 보고 있어서인지, 예전 일이 끊이지 않고 새록새록 떠올랐다.
“초상화 속 나이 때의 아가씨는 겁도 많으셨죠. 도서관에서 귀신이 나온다고 우시는 걸 도련님이 업고 나오셨다니깐요.”
“도서관요?”
이안이 흥미 있는 눈으로 제드의 말을 들었다.
“전전대 가주님의 개인 도서관이었는데, 애들한테는 좀 무서울 법한 분위기긴 했어요. 괴상한 수집품들이 많았거든요. 거기에 놀라서 우셨던 것 같기도 하고.”
제드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팔불출처럼 자꾸 올라갔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워하시더니, 꽤 마음에 드셨나 보더라고요? 얼마 안 가서 개인 도서관으로 사용하셨죠. 일주일에 한 번은 몇 시간 동안 들어박혀서 나오시지도 않고요.”
일주일에 한 번.
자신과 시간을 정해 거울로 이야기하던 주기와 똑같았다.
그 도서관에 거울이 있을 거야. 이안은 제드에게 물었다.
“도서관을 구경해도 되나요?”
“아가씨의 도서관이요?”
로드윅 가문의 개인 도서관은 가주나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그곳은 블레이크가 무척이나 아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이 도련님의 정체가 게르웨르 도련님이라 해도, 딸바보인 가주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안 될 일에는 힘을 쏟지 않는 편이었기에, 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권한이 아닌-.”
“리체의 도서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그때, 계단을 걸어오는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체는 블레이크의 선이었기에, 넘는 것은 곤란했다. 제드는 무표정한 제 가주님을 보며 어떻게 이안의 변호를 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 * *
그러나 제드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구경할 만한 게 있으면 하거라. 망가트리지는 말고.”
블레이크는 의외로 이안이 리체의 도서관에 출입하도록 허락해줬으니.
“리체 아가씨의 도서관은 오랜만에 개방하네요. 전 로비에 있을 테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네.”
무척 잘생겼네.
도서관의 사서인 얀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이안은 걸음을 옮겨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전전대 가주의 흔적은 사라진 듯했다.
복층의 넓은 도서관은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곳곳에 있는 아기자기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리체를 닮은 도서관.
‘리체가 여기서 책을 읽었을까.’
이안은 표면이 매끈한 원목 책상을 슬쩍 짚어보고는 손을 뗐다.
딸깍.
그러다 책상 상판이 위로 올라가 재빨리 손으로 잡았다. 눌렀다 떼면 상판이 열려 그 속에 물건을 보관하게 만든 책상인듯했다.
“아.”
이안은 그 안에서 거울을 하나 발견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검은 표면의 거울. 이거구나.
언젠가 들었던 리체의 말처럼 접시만 한 크기였다.
‘여기 위에 천을 덮어서 얘기한 거겠지?’
이안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거울을 꺼내 보았다. 손이 닿아야 게르웨르 공작가의 거울과 연결되었기에, 거울을 덮은 천 아래는 늘 리체의 작은 손이 보였었다.
‘이쯤일까.’
이안은 기억을 더듬어 리체가 손을 대고 있던 부분을 찾았다. 그리고 그 위에 제 손을 가져가 보았다.
“안녕, 리체.”
그리움을 담아 리체를 불렀다.
건너편은 깨진 거울을 이어 붙인 텅 빈 방일 것임을 알면서도.
이안은 유리 조각에 말을 건네던 지난날처럼, 리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았다.
“잘 지내고 있어?”
“밥은 잘 먹고 있고?”
“지난번에 데르케디온 선배를 만났어.”
“다들 네가 보고 싶은가 봐.”
“어디에 있어? 리체?”
버틸 수 있다. 무너지지 않을 거다.
이안의 다짐은 이전보다 단단해졌지만.
그렇다고 가슴을 쑤시듯 파고드는 괴로움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리체가 사라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다.
후회, 절망, 슬픔, 책망…….
꼭꼭 숨겨놓은 수많은 괴로운 감정들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 자책할 자격도 없어요. 데르케디온 선배.”
“너만 그런 건 아니지. 나도 그러니까.”
그런데도 조금이라도 더, 터지지 않게 감추어두는 것은.
저만큼 그 감정들을 감추려 노력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어. ……많이.”
툭, 하고 이안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거울에 번졌다.
그리고.
“……!”
물감이 퍼지듯, 거울의 검은 표면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이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손은 거울에 댄 채였다.
[안녕.]
건너편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이안은 그 소리에 놀란 것보다, 거울 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울에서 나타나 제게 말을 건 사람은.
[오랜만이야. 이안드웨인.]
리체였기에.
* * *
“어떻게 바깥을 볼 수 있는데?”
리체는 히켄카를 따라 걸었다.
게르웨르 공작가의 지하실은, 히켄카의 손짓에 사라졌다.
대신 나타난 건 넓고 긴 복도였다.
‘문은…….’
바깥과 연결돼 있다는 지하실의 문마저 사라졌을까, 리체는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문만은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히켄카는 안심하고 자신을 따라오는 리체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안드웨인이 갖고 다니던 거울 조각이 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응. 왜 거기에 내 전생이 보였던 건지 궁금해.”
“르티옴이 궁금하다면 알려줘야지.”
히켄카가 손짓하자, 복도 양 벽에 넓은 간격을 두고 거울들이 생겨났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손거울, 욕실 거울, 화장대의 거울, 전신 거울, …….
특이한 점은 대부분 표면이 검은색으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치 전전대 가주의 수집품이었다는 거울이나, 황도의 게르웨르 저택에서 본 깨진 전신 거울처럼.
“이게 다 뭐야?”
“티타의 수집품. 모두 인간계 곳곳에 있는 거울들이지. 별의 힘이 담긴 마석을 심어서 시간의 틈새와 연결해놨어.”
“연결됐다고?”
“그래. 인간계의 거울을 티타가 시간의 틈새와 연결하면, 그와 같은 거울이 이 공간에도 생기지.”
히켄카는 거울 하나를 가리켰다. 로켓 목걸이 안에 있는 거울이었는데, 풀을 뜯어먹는 짐승의 입이 보였다.
“저건 초원에 버려졌나 보군.”
이해해. 아무것도 안 비치니 거울 노릇을 할 수가 있나.
히켄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리체가 그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이안의 거울도 같은 거야?”
“그렇지. 이걸로 이곳에서 인간계를 구경할 수 있어.”
“구경만?”
“구경만. 티타는 거울을 오갈 수 있지만, 우리는 능력이 없으니 구경밖에 못 하지.”
“인간계의 거울은?”
“그건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검은색밖에 안 보이잖아.”
히켄카의 대답에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 거울로 이안과 통신했는데?”
“그래? 그러면 운이 좋았네. 인간계에 있는 이안드웨인의 거울과 네 거울이 이 복도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거울에 달린 마석이 통신구 역할을 하도록 했을 거야. 그리고 네가 거울 조각에서 본 건, 전생이 아니라.”
히켄카는 걸음을 멈춰 그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을 바라봤다.
“시간의 틈새에 갇혔던 또 다른 너지.”
리체도 거울 앞에 멈춰 섰다가, 거울에 비친 여자를 보고 놀라서 숨을 삼켰다.
“어때?”
히켄카가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널 닮았지?”
“……닮았다고?”
고위 사제가 입을 법한 옷을 입은 은발의 여자.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나잖아……?”
“티타교의 교주야. 티타의 현재 그릇. 별과의 계약을 맺었을걸. ‘별들의 유희’를 위해서.”
“……별들의 유희?”
그것도 르티옴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다른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 나인데.
그러면 지크가 말한 티타교의 교주가 또 다른 나였어? 능력자들의 몸 안에 있는 별의 본체를 노리는 그 인물이?
리체의 눈빛이 흔들렸다. 히켄카가 말했다.
“저게 네가 말한 거울 조각 속의 너야. 티타가 네 전생이 아닌 또 다른 과거에서 가져온 너지.”
“또 다른 과거라니.”
“이번이 세 번째야. 르티옴.”
히켄카는 거울 속의 교주를 보는 리체의 옆에서 중얼거렸다.
“티타는 이미 과거를 두 번 되돌렸다고.”
“왜?”
리체의 말에 히켄카가 인상을 썼다.
히켄카가 티타와의 거래를 파기하려던 이유가 이거였다.
티타가 과거를 두 번이나 되돌린 이유.
“왜긴.”
히켄카는 리체의 팔을 잡아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울 너머라도 티타교 같은 짓거리를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과거에 갇혀 사는 주제에 미래를 바꾸려고 하니까 그렇지. 매번 실패하더니 이번에는 작정한 모양이야. 신이 되어서 과오를 고쳐? 몇천 년의 시간을 돌려서 어쩌려고.”
“그게 무슨 소리-.”
[푸헹취!]
경박스러운 기침 소리가 났다.
히켄카와 리체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 벽에 걸린 직사각형의 거울 속이었다.
[아,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안 그래도 아까부터 누가 내 이름을 자꾸 부르더라고. 근데 위치를 모르겠단 말이야? 노랑이 자식인가? 위대한 건 곤란해. 그렇지? 영감?]
[그 꼴을 하고도 잘도 말하는구나. 홀딱 벗고 다니니 감기에나 걸린 게지.]
[부러워? 영감은 칭송받아본 지 좀 돼서 부럽긴 하겠어?]
거울에 비친 건 노인이었지만, 그 옆에서 흘러나오는 킬킬거리는 목소리는-.
“파이톤스!”
리체가 거울을 향해 소리쳤다.
“무리야 르티옴. 아무리 말을 걸어도 티타가 아니면 이 공간에서 거울로 바깥과 소통하는 거는……. 허……?!”
쯧쯧거리던 히켄카의 금안이 놀라 점점 커졌다.
거울을 손으로 짚은 리체가 그대로 거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나갔어……?”
히켄카는 그런 리체를 따라 거울을 힘껏 밀었다.
하지만 딱딱한 벽을 미는 기분만 날 뿐. 거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 이게 정상인데.
“르티옴이 티타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아무리 르티옴이 티타가 만든 존재라지만, 불가능했다. 시간의 거울 사이를 이동하는 건 티타가 가진 고유 특성 중 가장 고유성이 짙은 것이었으니.
“말도 안 돼.”
히켄카가 보기 드문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한편, 리체는 땅을 짚은 채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앞으로 기운 몸을 지탱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누, 누구냐!”
리체의 머리 위로 침입자를 향한 노인의 고함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든 리체가 본 건.
“계약자?”
상체를 헐벗고 앉아 저를 보는 파이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