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뭘 그렇게 봐
“오호, 시간의 틈새로 출입할 수 있다고?”
“네.”
리체는 영감에게 대답하며 손을 거울 안으로 집어넣었다 뺐다.
한 번 거울을 통과하고 나니 어떤 식으로 하는 건지 감이 왔다.
그러다 거울 속에 넣은 손을 꺼낼 수 없었는데, 안쪽에서 히켄카가 리체의 손을 잡고 붙잡고는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네, 괜찮은가?”
“……네, 잠시만요.”
리체는 거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조금 전 그 복도에서, 히켄카가 웃으며 제 손을 붙잡고 있었다.
“히켄카, 손 놔줘.”
“나도 데려가. 르티옴.”
“히켄카는 못 들어오잖아.”
이미 몇 번이고 시도해봤다. 하지만 히켄카고, 파이톤스고, 영감이고.
리체 외에는 어떤 별도 거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일단 놔줘. 파이톤스랑 대화하고 싶어.”
리체는 히켄카에게 잡힌 손을 빼고 다시 파이톤스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일렁이다 다시 단단해진 거울을 건드리며, 영감이 감탄했다.
“신기하군.”
“어때? 내 계약자가 이렇게 대단하다니까.”
파이톤스가 낄낄거렸다.
근육이 꽉꽉 찬 상체에 리체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사람 모습인데다가, 이번에는 지크베르트와 비슷할 정도로 덩치까지 커져 버리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너는 이안드웨인 벗은 몸도 봤으면서 왜 그래?”
“무, 무슨 소리야.”
그런 리체의 모습을 눈치챈 파이톤스가 말했다.
어쩔 수 없나. 이 훌륭한 근육을 가리는 건 제 미학에 어긋나는 일이긴 해도. 아직 어린 계약자의 심신을 위해서라면야.
파이톤스가 손을 튕기자, 큰 천 한 장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파이톤스는 그 천을 대충 상체에 감았다.
“이러면 됐지?”
“그런 것도 가능해?”
“이 계약자가 아직도 모르네. 나한테 불가능한 것은 없어.”
“여기서 나가는 걸 못 하지 않았느냐. 장장 7개월 동안.”
“윽. 영감. 조용히 안 해?”
파이톤스가 영감과 함께 갇혔던 공간.
별의 무덤 내에 티타가 만든 공간으로, 오가는 출입구가 리체가 들어온 저 거울 하나뿐이라고 했다.
티타 외에는 올 수 없는 곳을, 리체가 출입한 것이었다.
영감이나 파이톤스가 갑자기 나타난 리체에게 놀랄 만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갇히게 된 거야? 히켄카의 영혼 조각만 받아오면 된다고 했었잖아.”
리체의 질문에, 파이톤스가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게, 티타가 내 앞에 나타날지 몰라서 방심하다 잡혔지 뭐야.”
‘포획’. 여섯 개의 무덤 관리자 중에 티타만이 가진 고유 특성이었다.
가지고 다니는 공간을 펼쳐 별을 잡고, 이곳에 집어넣을 수 있는.
“네놈이 바보처럼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랬지. 정신 줄을 금세 잡았으면 잡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건 영감도 마찬가지 아니야? 제대로 도망가지도 못해서 같이 휘말려 놓고는. 노랑이 영혼 조각은 누구한테 줬어? 이제는 말해줄 때도 된 거 같은데.”
“몰라. 이놈아.”
영감과 파이톤스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갑자기 나타난 리체에 놀란 두 별이, 지금처럼 투덕거리던 걸 생각하면 금세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파이톤스를 꺼낼 방법을 찾고 빨리 인간계로 가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7개월이 흘렀다.
마지막 기억이 정화의 부작용에 고통받는 절 걱정하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신이 멀쩡히 있다고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는 사이에도 인간계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리체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영감. 너, 티타가 심은 끄나풀 아니야?”
“무슨 끔찍한 소리를. 그리고 너, 라니. 네놈은 말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어.”
“허, 내가 영감보다 먼저 태어났거든? 어디, 최초의 기억이라도 까볼까?”
리체는 두 별의 눈치를 보다 슬쩍 거울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있는 거울 중에 로드윅 공작성 도서관에 둔 거울이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히켄카가 복도로 들어오는 리체를 향해 물었다.
“왜?”
“내가 사용했던 거울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그러면 바로 아빠한테 갈 수 있잖아.”
“도와줘?”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는 길고 넓은 데다가 벽에 걸린 거울들도 수백 개는 족히 돼 보였다.
히켄카가 도와준다고 하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이만한 크기야.”
리체는 두 손으로 거울의 크기를 가늠해 히켄카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복도의 왼쪽 오른쪽을 하나씩 맡아 걸어가던 중이었다.
“르티옴.”
전신 거울 앞에 선 히켄카가, 조금은 심각한 목소리로 리체를 불렀다.
앞쪽으로 꽤 나갔던 리체는, 몸을 돌려 히켄카에게로 걸어가며 물었다.
“찾았어?”
“네 거울은 아니고, 이안드웨인이 있네?”
“이안?”
이안이라니.
그 말에 리체의 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그동안 이안은 어떻게 지냈을까. 크셀폰에서 우승했을까. 혹시 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을까. 그사이 죽음이 이안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을까.
짧은 거리를 걷는 중에도, 이안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차올랐다.
“…….”
그리고.
히켄카의 옆으로 간 리체는 거울 속 이안의 모습을 보고 망부석처럼 몸이 굳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탓이었다.
“저거, 너잖아?”
히켄카의 말대로였다. 이안이 함께 마주 보고 웃는 사람은, 또 다른 자신이었으니.
“좀 더 가까이 가면 소리가 들릴 텐데.”
“……괜찮아.”
아까 파이톤스의 소리를 들었을 때와 달리 거울과 거리가 있었기에, 거울 속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갈 자신도 없었다.
“쟤가 왜 티타교 교주랑 같이 있어?”
히켄카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자신이 잠깐 힘을 앗아가긴 했지만, 이안드웨인은 제 능력을 받은 게르웨르의 능력자였다.
왜 티타교 따위랑-.
“르티옴, 들어가서 저 녀석 좀 정신 차리게 해 봐.”
“싫어.”
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마주하기가 무서운가 보군. 그러다 히켄카는 혀를 찼다. 르티옴이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르티옴.”
금안에 비친 복도 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히켄카는 리체의 팔을 잡았다.
그 사이,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어딘가로 나가 방이 텅 비었다.
히켄카는 리체를 그 거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면 거울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가.”
“왜?”
“그 녀석이 왔어.”
리체를 밀던 히켄카의 손끝에 딱딱한 거울의 표면이 느껴졌다.
반대편으로 넘어간 리체는, 슬쩍 뒤를 돌았다가 거울을 피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히켄카도 거울과 떨어져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맞은편의 끝에서 걸어오는 긴 은발의 여자가 있었다.
“왔군. 티타.”
히켄카는 썩 내키지 않은 인사를 건넸다.
티타는 공허한 얼굴로 히켄카의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에게 물었다.
“내 아이는?”
“나도 몰라.”
히켄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의 틈새는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곳이었다. 주인인 티타도 공간 내 생명체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어, 공간을 압축하는 것으로 제가 집어넣은 생명체를 찾곤 했다.
그리고 티타는 르티옴이 여기를 빠져나갔다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
“르티옴도 두 발이 달렸으니 어딘가로 가 있겠지. 내버려 둬. 가만히 있기 갑갑할 텐데.”
히켄카의 말을 들은 티타는 별 대답 없이 손짓했다.
복도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건 아까의 지하실이었다.
리체를 찾으려는 공간의 압축이 아닌, 주변 형태를 변화한 것이었다.
“거울 복도는 당분간 보지 마.”
“왜? 인간계에서 뭘 하려나 보지?”
히켄카가 이기죽거렸다.
티타의 텅 빈 시선이 그런 히켄카에게 닿았다.
“히켄카. 네가 내 계획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이해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이해. 짜증 나는 소리다.
“그 녀석들의 힘까지 빼앗아서 과거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뭐야.”
티타가 원하는 몇천 년 전의 과거로 시간을 돌리려면, 그녀가 신이 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능력자들의 몸에 있는 위대한 별의 본체를 노리는 것이었다.
껍데기에 그득한 별의 힘을 취하기 위해.
“내가 멍청했지. 너한테 이용당하다니.”
히켄카는 이를 으득 갈았다.
위대한 별들의 사념체를 유리병 안에 넣는다.
분명 히켄카가 7년 전에 직접 말한 계획이었지만, 그 말을 하도록 유도한 건 티타였다.
히켄카는 티타에게 말했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네가 우리한테 용서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마. 지금의 우리와 네가 되돌린 시간대의 우리는 엄연히 다르니까.”
“……알아.”
“르티옴도.”
히켄카의 말에 티타가 멈칫해 그를 바라봤다.
‘제물을 받았으니 인간과 거래를 해? 우습지도 않지.’
제가 직접 겪은 과거는 아니지만, 티타는 게르웨르 공작의 황당한 거래를 받아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르티옴을 그릇으론 사용하면 됐었을 것을. 굳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형태로 르티옴을 취한 것은-.
“모든 걸 과거로 되돌리려는 마당에, 지금의 르티옴이 사라지는 게 싫어서 시간의 틈새에 가둬둔 거. 그걸 알면 르티옴이 널 용서할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세계에서 네 이기심 때문에 혼자 지내야 하는걸.”
“…….”
“그만 욕심부리지? 티타.”
히켄카의 말에, 티타는 지하실의 문고리를 돌리며 말했다.
“……걔는 내 아이야.”
* * *
히켄카의 조언대로, 리체는 곧장 거울이 있는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복도는 숨을 곳 하나 없이 휑했다. 다급히 숨을 곳을 찾는 리체의 눈에 들어온 건, 문이 열려 있던 옆 방이었다.
리체는 그곳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왔다는 건 티타를 말했던 거겠지?’
티타가 시간의 틈새에 왔다. 혼자 남은 히켄카가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 몸을 숨겨야 하는 건 리체도 마찬가지였다.
건물의 양식을 보아하니 신전인 듯했다. 티타교인가.
시간의 틈새에 있는 동안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게다가 인간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자신은 알지 못하니.
우선 숨어야 했다. 리체는 방문을 닫았다. 아쉽게도 잠금장치가 없는 문이었다.
‘이안은 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그렇게 또 다른 자신과 웃으면서 대화한다는 건, 교류가 오래되었다는 뜻일까.
방 내부에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벌컥.
하지만 어딘가에 숨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리체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아그네스.”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이제는 제 이름이라 하기에 너무나도 어색해진, 전생의 이름.
또 다른 나는 아그네스라 불리고 있었나.
“…….”
“뭐 하는 거지?”
익숙하지만 그 속에서 흐르는 냉랭함은 낯설었다.
‘로벤하프도 있었어.’
이곳에 있는, 제가 아는 사람은 이안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그네스라 부른 것을 보면, 교주가 자신와 같은 사람이라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리체는 몸을 돌렸다.
머릿속으로 늘 다정했던 그의 상냥한 웃음을 떠올리며 로벤하프를 마주했지만.
‘……이게 도대체.’
리체가 본 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로벤하프의 상냥한 얼굴이 아니었다.
상체를 덮고, 그 위의 얼굴까지 올라와 일렁이는 옴.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뒤덮은 그 속에서, 로벤하프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봐. 또 내 기운이 네 눈에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