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출정
* * *
나는 백여우 기사단 부단장인 파샨과 함께 말을 타고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원정군에 편성된 병사들이 열심히 구보를 뛰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원정이 실행될 수 없는 걸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최소한 몇 달 전부터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여자를 찜하자마자 꼬투리를 잡아서 원정에 보내버린 거지.
내가 여자에 미쳐있었다고는 하지만 가문의 이인자인 나 모르게 원정을 기획하고, 나를 함정에 빠뜨려서, 결국 자기 계획대로 나를 부려먹는 걸 보면 아버지의 노회함에는 감탄까지 나온다.
“파샨. 넌 알고 있었냐?”
“무, 무엇을 말입니까?”
“원정 말이야. 이거 나만 몰랐던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저, 저도 몰랐습니다!”
“거짓말할 때 말 더듬는 습관 고치라 했지.”
나는 파샨을 불러다가 머리에 주먹을 먹였다.
부단장이란 녀석이 마력 펀치 한 방에 눈물을 글썽였다.
동글동글한 동안에 여우 귀.
귀엽기는 하지만 파샨은 여우 혈족의 수인이라 팔과 다리에 체모가 많다.
체모라고 해도 여우털이라 사람털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여하튼 내 취향은 아니고, 나는 취향이 아닌 여자를 봐 줄 생각이 없다.
“울어? 한 대 더 먹어라. 마력 펀치.”
“으으. 으으으. 아픕니다, 도련님.”
“너 임마. 내가 잘 챙겨준다고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지는 해, 나는 뜨는 해라니까? 줄 잘 서라고 했지?”
“예!”
“근데 왜 제대로 보고를 안 해. 응?”
파샨은 내 주먹을 황급히 피하고는 여우 귀를 제 손으로 잡고 툴툴거렸다.
“억울합니다, 도련님.”
“뭐가? 일단 한 대 맞고 변명해.”
“으으. 도련님께서 한 번이라도 막사에 찾아오셨다면 다 얘기를 했겠지요!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매일 저택에서 메이드들이랑만 노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거 봐라? 내가 너를 찾아가? 누가 보면 네가 내 상사인지 알겠어.”
“그게 아니라, 아얏. 단장님이 저를 감시한다고요.”
“아.”
백여우 기사단 부단장 파샨은 내가 은혜를 입혀놓은 내 사람이다.
그에 비해 단장 오록스는 아버지의 오른팔이다.
아버지가 나 모르게 원정을 기획했다면 오록스를 시켜서 아랫사람들을 단속하기는 했겠지.
나와 접점이 있는 파샨은 감시 일순위에 올랐을 테고.
“후. 그래. 그래도 한 번 빠져나올 기회가 없었냐? 사람 한 번, 서신 한 번 보낼 수도 없었어?”
“그렇게 따지면 도련님도 한 번은 기사단 쪽에 오실, 아야!”
“점점 더 건방져져.”
“죄, 죄송합니다.”
“말 더듬는 거 봐. 이제는 죄송하다는 말도 거짓말이냐?”
“아, 아니에요.”
마력 펀치.
파샨은 눈물을 또르르 흘리고는 결국 입을 닫았다.
내 수족이 이렇게 멍청해서야 일을 벌이고 싶어도 못 벌리겠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말을 돌렸다.
“됐어. 원정군 사열이나 한 번 하자. 어차피 연습 많이 했을 거 아니야.”
“아까 안 하신다고...”
“안 한다고 하고 하는 게 더 재밌잖아.”
파샨은 나를 귀신 보는 것처럼 보더니 연병장 저쪽으로 말을 달려갔다.
곧 부사관들의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울렸고, 여기저기서 훈련을 받던 보병들이 욕설을 주워섬기면서 급히 부대 깃발을 찾아 달렸다.
흙먼지가 뿌옇게 날아올랐다.
이만한 인원을 내 말 한 마디에 부릴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되는구먼.
레시아르 백작가의 사병은 백여우 기사단 이백, 적여우 기사단 삼백과 보병 육천 오백 명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원정군으로 편성된 것은 백여우 기사단과 보병 이천이다.
총 전력의 절반 좀 못 되게 끌고 가는 것이니, 아버지도 나름대로 도박수를 띄운 것이다.
아무래도 작년에 놈들이 우리 주도까지 쳐들어 온 게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나 어렸을 적에는 고작 백작가에 이만한 군대를 편성하는 게 말이 되는지, 우리 백작가는 북한보다 더 심한 선군정치(????)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 많이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이 세계에서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게 수인과의 혼혈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의문이 풀렸다.
단적인 예로 저 앞에서 열심히 기사단을 정렬시키는 파샨은 여우 수인이다.
여우 수인은 임신 기간이 칠, 팔 주에 불과하고, 한 번에 대여섯 명의 아기를 낳는다. 토끼 수인은 더 심하다. 임신 기간 한 달에, 최대 열 명의 아이를 낳으니까.
물론 영아 사망률이 높기는 한데, 그래도 수인들이 워낙에 아이를 많이 낳아대니까 인구수가 많고, 따라서 병력 자원도 많다.
레시아르 같은 중형 영지에서도 충분히 수천 명의 병력을 뽑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파샨이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헥, 헥. 도련님! 사열 완료했습니다!”
“그래? 한 번 보자고.”
“예!”
“근데 오록스 단장은 어디 갔나?”
“그게... 모,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허. 이 양반이 벌써 기 싸움을 하자는 거야, 뭐야.”
오록스 그 꽉 막힌 인간이 저 혼자 나랑 붙어보려는 생각을 했을 리는 없고.
분명히 아버지가 입김을 불어넣은 거겠지.
아직 원정은 시작도 안 했는데 발목부터 붙잡는 걸 보니 갑갑하다. 견제도 견제할 때에 해야지.
내가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조금 열 받네.”
“네, 넵.”
나도 모르게 날이 섰나보다.
사방으로 뿜어져나간 살기 어린 마력에 파샨이 털끝을 곤두세웠다.
“일단 사열식은 예정대로 진행해.”
“예!”
“그리고, 오록스 딸이 기사단에 또 있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타라입니다. 평기사에요.”
“데려와.”
“네, 넵. 그런데, 도련님. 혹시 그 아이를...”
“잔말 말고 데려와.”
“넵!”
나는 병사들이 창칼을 들고 행진하는 걸 내려다보면서 오록스의 딸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 오분 정도 지났을까?
파샨이 새하얀 여우 수인 한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파샨도 백여우족이라 하얀 편이지만, 그래도 살면서 이런저런 얼룩이 묻어 있는데, 오록스의 딸은 정말로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색. 갑주와 방패도 모두 백색 맞춤이었다.
“도련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라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네 아버지가 내 호칭을 그렇게 가르치던가?”
“예...?”
“나는 원정군 사령관이다. 너는 사령관을 도련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교육 받았나보지?”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이건 이유 있는 갈굼이다.
당장 파샨부터 시작해서 레시아르 영지민들은 나를 어렸을 적부터 도련님이라 불러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지휘를 받는 부하가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도 된다는 건 아니다.
파샨은 예외. 이 띨띨한 여우수인은 그래도 내 몇 안 되는 수족이니까.
나는 타라에게 가차 없이 지휘봉을 내리쳤다.
할 수만 있다면 자지로 후려치고 싶지만, 사열식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까지 또라이는 아니니까.
어깨에 지휘봉을 맞은 타라가 휘청거리다가 자세를 되잡았다.
“아픈가?”
“아...닙니다.”
“아프다고 아버지에게 이를 텐가?”
“아닙니다!”
“그래. 앞으로는 상관의 호칭에 주의하도록.”
“예! 사령관 각하!”
나는 타라를 물리고, 대충 훈시를 하고서 사열식을 마쳤다.
파샨이 얼른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바로 안 취하십니까?”
“내가 그 정도로 성욕에 미치지는 않았어.”
“그, 그렇죠?”
“그리고 체모가 많은 수인은 내 취향이 아니야. 이번엔 그냥 오록스한테 경고장 한 번 날린 거야.”
“타라는 털 거의 없는데요?”
“그래?”
“네. 꼬리랑 귀만 있고, 나머지는 거의 털 안 났습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좀 다르지.
타라는 미인이었다. 코가 높고 눈매가 날카로워서 심지가 굳어 보이는 형태의 미인. 그런 주제에 피부는 모찌처럼 새하얗다니.
이런 미녀를 그냥 넘길 순 없지.
이번 원정에서 반드시 먹고 만다.
“아이고…….”
자기 부하의 불행을 감지한 듯, 파샨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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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은 다음날 새벽, 조용히 시작되었다.
이렇다 할 출정식도 없었다. 출정 자체를 숨길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이 켈자르에 늦게 알려질수록 좋으니까.
아버지는 나와 보지도 않고 집사장 뮌만 보냈다.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도련님.”
“오가는 길에 기회 있으면 그대 손자들에게 안부 전해주지.”
“감사합니다.”
뮌의 작은 눈이 반짝 빛났다.
저 음험한 인간도 손주들은 아끼는 건가. 우리 아버진 집사장만도 못한 인간이네, 그래.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백여우 기사단이 나를 호위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천 명의 병사들이 뒤따랐다.
주도(??) 아티아를 나올 때즈음에는 이미 해가 다 떴다.
밭 갈러 나오던 영지민들이 어리둥절하며 군대의 행진을 지켜보다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작년의 켈자르, 파티스 침공 때 내가 활약한 덕에 영지민들에게 내 인기는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러면 벌써 원정 나간다는 게 켈자르에 다 알려지는 거 아니야?”
“원정 시작 전에 세작들을 한 번 다 솎았으니, 아티아 근처에 남은 간첩은 없을 겁니다.”
오록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그는 여우 수인 중에는 드물게 덩치가 큰 자였다.
조부모 대에는 늑대나 곰 수인의 혈통이 섞여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그 근처에서 말을 달리는 타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늘이 하나도 없는 게,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은 이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록스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어째 좀 불만족스러운데.
“오록스.”
“예. 각하.”
“몸은 다 나았나? 원정 직전에 그렇게 앓아누우면 어떡하나?”
“예... 걱정해주신 덕에... 다 나았습니다...”
오록스는 천상 무인이다. 거짓말이 서툴렀다.
나는 그를 추궁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어제는 타라가 그대를 대신해서 내게 사열식을 보여주었지. 병사들 부리는 걸 보니, 재능이 있더군. 금방 부단장까지 올라가겠어.”
파샨은 억울한 표정을, 타라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록스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딸바보인가.
“소관이 자랑할 것이 많지는 않지만, 타라는 소관의 가장 빛나는 보물입니다.”
“그래. 총명하고 당당하고 또 아름답더군.”
“예. 그렇지요.”
나는 타라를 다시 한 번 흘겨보았다. 타라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당당히 말을 몰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거꾸러뜨린담?
“도련님.”
파샨이 내 쪽으로 다가와 속닥거렸다.
“진짜로 타라를 어떻게 하시려는 건 아니죠?”
“왜. 그러면 안 되냐?”
“아니. 그러다가 오록스 단장한테 들키면 큰일 납니다.”
“내가 질 거 같아?”
“그렇진 않은데요.”
“걱정 마. 이게 다 필요한 일이야. 내가 성욕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고.”
계속 이렇게 아버지에게 목이 묶여 다닐 순 없다.
아버지에게 한 방이라도 날리기 위해서는 이번 원정군은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여우 기사단 단장인 오록스를 포섭해야 하고, 타라는 그 징검다리다.
나는 다 계획이 있는 거다.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도련님이 타라를 건드리시면 오록스 단장이 좋아하진 않을 거 같은데요. 악.”
파샨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혀를 씹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눈을 돌렸다.
늠름하게 말을 달리는 타라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얼굴에 정액을 마구 문지르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를 상상해보면 벌써 자지가 웅장해진다.
언젠간 꼭 먹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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