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7화 (7/166)

〈 7화 〉 정리

* *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각하! 반역이라니요?”

마티란 자작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자작을 무시하고 파샨에게 말했다.

“약을 써서 날 유혹했더군. 마력을 훔쳐가려고 수를 쓴 거야. 켈자르랑 밀약을 맺었겠지.”

파샨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어쩐지! 아무리 도련님이 성욕에 미치셨어도 전장에서 여자를 품을 리가 없는데! 이런 암캐 같은 년! 감히 도련님을 배신해?”

“자, 잠깐만!”

파샨이 검을 빼들자, 마티란 자작은 손에 마력을 둘렀다.

파샨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은혈 귀족인 마티란 자작과 굳이 드잡이를 시킬 필요는 없다.

나는 자작에게 경고했다.

“마티란 자작. 마력을 쓰면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하겠다.”

“그런... 각하! 저는 결단코!”

“결백하다고? 그래. 정말 그런지 알아보자고. 파샨. 저 여자를 묶어서 탑에 가둬놔. 나중에 따로 심문하겠다.”

“예! 도련님! 가자! 이 더러운 암캐 년!”

파샨은 신이 나서 마티란 자작을 앞으로 밀어대면서 방을 나섰다.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호위병들, 물론 여자인 호위병들이, 파샨에게 전후사정을 듣고서는 다섯 미녀들을 줄줄이 엮었다.

“아. 잠깐.”

“예. 각하.”

“브레이스... 거기 금발 여자애는 좀 편한 처소로 데려 가. 내 애를 가졌을 수도 있거든.”

“알겠습니다. 레이디. 따라오시죠.”

호위병들은 브레이스에게 갑자기 공손해졌다.

금혈(血)이 흐르는 내 애를 임신했다면 그 여자는 그 날로 인생 펴는 거다.

브레이스가 동혈일 테니, 최소한 동혈 이상의 아이가 나올 테고, 운이 좋으면 은혈까지는 노려볼 수도 있다.

작위를 떼고 마력량만 따지면 마티란 자작과 맞먹는 수준이란 거다.

사생아라 작위를 이어받지는 못하겠지만 타고난 마력만으로도 출셋길이 활짝 열리겠지.

호위병들은 브레이스를 나머지 네 미녀들과는 분리해서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아니. 그런데 자지 청소해 줄 여자 하나는 남겨둘 걸 그랬나.

나는 천 쪼가리를 주섬주섬 주워서 시무룩해진 좆을 닦았다.

“가, 각하! 괜찮으십니까? 마티란 자작이 배신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타라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죄송합니다! 각하!”

“죄송할 건 없지.”

자지를 대충 닦고서 옷을 걸쳐 입고 나왔다.

방 앞에서 타라와 기사 셋과 완전무장한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라는 뺨을 붉힌 채로 보고를 올렸다.

“파샨 부단장이 마티란 자작을 연행해가면서 경비병들과 몸싸움이 있었습니다. 일단 제압하긴 했지만, 소문이 내성 바깥까지 퍼지면 소란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자작군 수뇌부를 호출해서 미리 신병을 확보해놓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도록 해. 마력병들은 따로 신원확인해서 기사단이 제압하도록 하고. 일반 보병은 몰라도 마력병과 기사들은 놓쳐선 안 된다.”

“예!”

“지휘관들은 연회장에 있나?”

“각자 부대를 통제하러 갔습니다.”

“잘했어. 지시사항 전달하고, 두 시간 줄 테니까 상황 정리해서 연회장으로 보고하러 와.”

“알겠습니다. 각하.”

타라는 군례를 올리고서 기사 하나를 데리고 떠났다.

나는 남은 기사 둘과 호위병 열 명을 이끌고 내성을 돌아다니면서 불안해하는 사용인들을 달랬다.

#

정확히 두 시간 뒤.

검 끝으로 메이드 치마를 들추어보는 장난도 재미가 시들해 질 때쯤.

타라가 연회장으로 올라왔다.

갑주에 피가 튄 걸 보면 제압 과정이 아주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누가 대항하던가?”

“마력병 몇이 도망가려던 걸 막다가...”

“성문 밖으로 도망쳤나?”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됐어. 보고하도록.”

“예.”

타라는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성문, 첨탑, 마력병 숙소와 마굿간, 모두 기사단이 점령했습니다. 무산토 보병대대장이 자작군 장교들을 억류했습니다. 내성은 이제 완전히 통제 안에 있습니다.”

“좋아. 내일 아침 해뜨기 전까지 외성을 손에 넣도록 해. 켈자르 군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밤눈 좋은 병사들을 추려 뽑아서 성 밖에 뿌려놓고.”

“알겠습니다. 각하. 그런데... 마티란 자작은 어떻게 처분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저, 각하. 주제넘지만 간언 드리자면, 은혈 귀족을 체포하려면 적어도 백작께는 허락을 받으셔야 하는 게 아닌지요.”

“타라.”

내가 목소리를 낮추자, 타라는 차렷 자세로 섰다.

“예! 사령관 각하!”

“내가 귀관에게 그런 걸 물었나?”

“아닙니다!”

“그럼 귀관이 내게 그런 걸 진언할 위치인가?”

“아닙니다!”

“이리 와.”

“예. 각하.”

“각반 내려.”

타라는 지체 없이 검은색 가죽 각반을 끌러서 벗었다.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나는 가차 없이 타라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윽...!”

타라는 입술을 깨문 채 고통을 참았다. 근성이 괜찮네.

하얀 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번 더 찼다.

“흑!”

나는 멍 든 부분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이쯤 그만 두기로 했다.

“가서 파샨이나 불러 와. 오록스 단장 불러서 내성 단속 잘 시키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읏. 각하.”

타라는 절뚝거리면서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짬이 난 김에 눈을 감고 잔여 마력을 체크해봤다.

오후에는 켈자르 군을 상대로 마법을 쓰고, 밤중에는 마티란 자작과 미녀들에게 정자를 쓰느라 마력이 뭉텅 깎였다.

마력이란 게 수학적으로 딱딱 나뉘는 게 아니긴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삼분의 이 정도는 소모한 듯하다.

이틀은 꼼짝없이 마력 회복에만 정진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켈자르 군이 작정하고 암살자를 보내면 위험하다.

“도련님! 찾으셨습니까!”

파샨이 기사를 한 무리 데리고 응접실에 들어왔다.

“그래. 할 일은 다 마쳤지?”

“예!”

“데려온 기사들 다 호위로 돌리고, 너는 이리 좀 와라.”

마티란 자작의 침실은 넓고 안락했다.

나는 파샨을 안고 복실복실한 꼬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잠에 들었다.

암살자는 오지 않았다.

#

다음날.

응접실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자니 타라 대신 오록스가 직접 보고를 올리러 찾아왔다.

“사령관 각하. 외성을 모두 접수했습니다. 이제 자작군은 모두 원정군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수고했네. 이리 와서 식사 좀 들겠나?”

“괜찮습니다.”

“어제 부상당한 기사들은 좀 어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좋은 의사와 약재가 필요합니다.”

오록스는 내 눈치를 살폈다.

백작령으로 귀환시켜야 하나?

“여기서는 치료 못 할 정도인가?”

“예…….”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죽은 기사들 장례식도 치러줘야 하니까, 호위병 좀 붙여서 백작령으로 돌려보내. 그럼 제1 기사단에 남는 기사가 몇이지?”

“육십 명 조금 넘습니다.”

“알겠네. 귀환시키는 건 단장이 알아서 하고. 켈자르 군 동향은 어떤가?”

“라울 강 방면으로 퇴각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 쪽 진지와 합류하면 총병력이 일 만을 족히 넘을 듯합니다.”

“이 놈들이 작정하고 들어왔네.”

요나스란 놈이 말한 수보다 배는 더 많았다.

“그럼 하늘기린 기사단 외에도 다른 기사단이 따라왔을 거야. 정찰병을 넓게 풀도록 해.”

“예. 각하.”

식사를 마치고 나서 파샨과 함께 탑을 올랐다.

외성의 북문 쪽에 붙어 있는 첨탑인데, 수성할 때는 화살탑으로, 평시에는 감옥으로 쓰인다고 한다.

탑 꼭대기 층은 온기가 없어서 싸늘했다.

단 하루 거기 갇혀 있었을 뿐인데 마티란 자작의 눈이 퀭했다.

손목이 뒤로 묶인 채로 앉아있던 마티란 자작은 나를 보더니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각하! 이건 오해에요!”

“반역자가 자기가 반역자라고 말하진 않겠지.”

“각하! 저는 마티란 자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레시아르에 반기를 든 적이 없습니다! 저는 레시아르에 충성했어요! 켈자르와 싸우며 남편을 잃어도, 성이 불타올라도 늘 레시아르에 충성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충성스러운 신하가 어제는 왜 내 마력을 그렇게 못 뺏어가서 안달이었던 거냐.”

“그건 각하께서...!”

“내 탓인가?”

마티란 자작은 차마 내 탓이란 말은 못하고 입술을 씹었다.

“자작이 전쟁터에서 마력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켈자르 군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자작이 내 마력을 그렇게 탐하려던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각하. 저는 그저 각하께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그래. 그렇게 계속 변명하라고. 나도 몸을 섞은 여자를 죽이는 게 탐탁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미운 꼴 보여줘야 결심이 서지.”

나는 휙 등을 돌려서 탑 아래로 내려갔다.

“각하! 가, 각하!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각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뒤에서 마티란 자작이 소리쳤지만, 그냥 무시했다.

파샨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물었다.

“도련님. 그럼 저 여자 사형은 언제 시키실 겁니까?”

“파샨. 너 깜찍한 표정으로 그렇게 살벌한 말 하는 거 아니야.”

“네? 왜요? 사형시키실 거 아니에요? 마티란 자작은 켈자르랑 붙어먹은 배신자잖아요.”

“아니. 그거 사실 거짓말이야.”

“네에에?”

파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펄쩍 뛰었다.

“그,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큰일이잖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입장에서 배신자는 맞지. 켈자르가 아니라 아버지랑 짜고 나를 엿 먹이려고 한 거지만.”

“백작님이랑요?”

“그래. 나도 처음에는 켈자르 쪽이라고 생각했어. 공성전을 미끼로 나를 끌어들였다면 딱 절묘하거든.”

하지만 마티란 자작이 켈자르에 붙었다면, 어제 밤을 그냥 넘겼을 리가 없다.

암살하려면 내 마력을 쫙쫙 뽑아낸 어젯밤이 절호의 시기였을 테니까.

자작군이 미리 호응해서 외성의 문을 열어주고, 하늘기린 기사단을 비롯해 기사와 마력병들로 들이치는 와중에 뛰어난 암살자를 내 침실로 보냈다면 나도 속절없이 당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암살자는커녕, 켈자르 군이 움직이는 낌새조차 없었다. 오히려 라울 강으로 퇴각했지.

그렇다고 해서 마티란 자작이 정말로 나를 위해서 접대를 해줬다는 것도 이상하다.

레시아르의 울타리인 마티란이 내 마력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공성전 직후에, 언제 켈자르 군이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내 정액을 뺀다?

이건 노림수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켈자르 군과 최전선에서 대치하는 마티란 자작이 혼자 꾸며낼 수 있는 생각도 아니다.

“그, 그래도 백작님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증거는 없지. 그래도 동기는 있어.”

아버지는 내가 대승을 거두는 걸 바라지 않는다.

이번 원정에서 화려하게 승리하고 돌아가면 내 기반이 탄탄해질 걸 나도 아는데,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지.

그렇다고 내가 죽기까지 바라지는 않겠지.

나는 마법사고, 레시아르 백작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패니까.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켈자르를 가까스로 이기거나, 아니면 무승부가 나는 걸 최적이라고 여길 거다.

따라서 마티란 자작을 유도해서 싸움 직전에 내 마력을 잔뜩 빼놓게 한 거다.

내가 마력을 뭉텅이로 빼앗겨도 켈자르에 지지는 않겠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내 인성은 못 믿어도 내 능력만은 누구보다 믿는 아버지.

정말 쥐어 패고 싶은 분이다.

이게 이순신 장군 괴롭히는 선조랑 다를 게 뭐냐.

마티란 자작도 이해가 일치했겠지.

잘하면 내 씨앗을 품고 정실을 노려볼 수도 있고, 못해도 내 총애를 얻겠다는 계산이 섰을 테니.

아버지에게 이권 몇 가지를 추가로 약속받았을 수도 있다.

“그럼 마티란 자작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반역자로 계속 몰아야지.”

“네? 켈자르 간첩은 아닌 거잖아요?”

“내 정액 훔쳐간 건 사실이잖아. 켈자르 쪽에 유리한 짓 한 건 맞지, 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병사들한테 소문을 내.”

“뭐라고요?”

“마티란 자작이 내 마력을 몽땅 뺏어가서 내가 앓아누웠다고 말이야. 마력탈진에 걸렸다고 하면 되겠다. 그리고... 곧 있으면 제1 기사단 부상병들이 백작령으로 돌아갈 거란 말이야? 그걸 좀 과장을 해. 백여우 기사단이 대거 본성으로 귀환한다는 식으로.”

“왜 그렇게... 아! 혹시 켈자르 군을 여기로 유인하려는 겁니까?”

“너도 많이 늘었구나. 그래.”

“헤헤헤.”

파샨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다가 되물었다.

“그런데 켈자르 군이 그걸 믿을까요?”

“당연히 믿지.”

“어... 왜요?”

“이 성 안에 켈자르 군 간첩이 없을 리가 없고, 그러니 마티란 자작이 발가벗겨져서 탑에 유배됐다는 사실은 곧 알려질 거야. 그럼 당연히 내가 그 여자와 질펀하게 놀았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방탕하기로 유명하긴 하잖아.”

파샨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 펀치.

“아얏! 왜 때리십니까!”

“내가 그렇다고 해도 너는 아니라고 해야지.”

“순 억지…….”

“하여튼, 잘 됐어. 체닐린 그 년 다리가 길어서 도망치는 거 하난 빠르던데, 성 안으로 끌어 들이면 도망은 못 가겠지.”

“정말 적 기사단장을 잡아서 강간하실 겁니까? 설마 그것 때문에 유인 작전까지 짠 건 아니시죠?”

“나 좋으라고 그러는 거 같냐? 아군 사기 올리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으음. 음. 음, 그렇군요.”

마력펀치.

“아얏! 이번엔 왜요! 그렇다고 해드렸잖아요!”

“거짓말인 게 너무 티나잖아. 넌 아부하는 법 좀 배워야겠다.”

“아우. 아우우.”

“궁금한 거 다 물어봤으면 이제 가 봐.”

“아 하나만 더요. 그럼 마티란 자작은 언제 풀어주실 겁니까?”

“켈자르 놈들 몰아내고 마력 풀충전하고 나서. 사형시키겠다고 겁주면서 따먹을 거야. 사생아 낳아도 인지 청구 안 하겠다고 서약 받고 임신섹스해야지.”

“와…….”

파샨은 나를 대단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마력펀치를 한 대 더 맞고 울면서 나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