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8화 (8/166)

〈 8화 〉 수성전

* * *

내가 마력탈진에 빠졌다는 소문을 부채질하기 위해 이틀 동안은 침실에서 아예 나가지 않고 마력회복에만 집중했다.

내 삶을 지배하는 성욕을 몰아내고 명상만 하려니 진짜 죽을 지경이었다.

그동안 마력은 빵빵하게 회복이 다 되었다.

물을 안 빼줘서 좆도 빵빵해졌다는 게 문제긴 한데.

여자를 안고 싶어 미칠 때마다 수혈 농도가 짙고 털이 수북한 수인 여자들을 불러다가 춤을 추게 했다.

발기 죽이는 데에는 그게 늘 최고였다.

오늘도 그렇게 보낼까 했는데.

“각하. 이제 나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오록스가 침실 문을 두들겼다.

“켈자르 군이 움직였나?”

“예. 라울 강에 세운 진지를 걷어치우고 도강(??)하고 있다 합니다.”

“기사단이 몇이나 와 있는지는 확인했나? 소집된 기사단이 둘 이하면 여길 노리진 않을 거야. 아무리 마력탈진에 빠졌다고 속였어도 마법사는 마법사니까.”

“하늘기린 기사단에 더해 진흙악어 기사단, 청록물소 기사단이 합류했습니다.”

“다른 변경 영지를 노리기에는 과잉 전력이고, 그렇다고 마티란 성을 우회하기에는 찝찝할 테니. 그럼 여기로 오겠군. 좋아. 이제 일어나도 되겠네.”

나는 메이드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갖춰 입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오록스와 제1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놈들이 언제쯤 도착하겠나?”

“라울 강을 넘어오면 마티란 성까지는 쭉 평지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중에는 도착할 겁니다.”

“그럼 공격은 빨라도 내일부터일 테고.”

“예.”

“수성 준비는 다 해뒀지?”

“화살과 기름 모두 넉넉합니다.”

“이제부터는 주민들도 출입 완전히 통제 해. 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오록스를 따라 성을 한 바퀴 빙 돌면서 물었다.

“병사들 사기는 어떤가?”

“각하께서 마력탈진에 빠졌다는 소문 때문에 높지는 않은 편입니다. 마티란 자작군도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켈자르 군을 끌어들이려면 어쩔 수 없지. 단장이 보병대장이랑 돌아다니면서 잘 좀 다독여 봐.”

“예.”

“그래도 사기가 낮은 채로 수성전을 할 순 없으니까, 밤에 야습 한 번 걸어보자고. 기사단이 언제든 출격할 수 있게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오록스를 보내고, 전망대가 있는 서문 쪽 첨탑에 올라가서 적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평선 너머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이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와. 진짜 떼로 몰려왔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은색 갑옷을 차려입은 기수(?手)들이 깃발을 치켜들고, 그 뒤를 마력병들이 뒤따랐다. 행진하는 것만 봐도 군기가 바짝 든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말이 일 만이지, 보병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켈자르 군은 성벽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진영을 차렸다.

보병들이 막사를 짓는다, 투석기를 옮긴다 하며 부산스레 움직였다.

“아! 도련님! 저기 저번에 도망간 체닐린입니다!”

파샨이 적진 한쪽을 손가락질 했다.

하늘기린 기사단장인 체닐린이 휘하 기사들을 데리고 화살 사정거리 바깥에서 성벽을 한 바퀴 빙 돌고 있었다.

긴 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쉴 새 없이 뭐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건방진 년.

확 뛰어가서 목을 잡아채올까 했지만, 지금 내가 나서면 적들은 그대로 물러나겠지. 그럼 지금까지 금욕하면서 버틴 의미가 없다.

“일단은 병사들을 쉬게 해. 오늘 당장 쳐들어올 거 같진 않으니까.”

“네!”

병사들에게 든든하게 저녁을 먹이고 해가 지기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오늘밤 달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나는 기사들과 함께 줄을 타고 성벽 밖으로 나갔다.

“제2 기사단은 나를 따라 적진을 공격한다. 제1 기사단은 중간지점에서 대기하다가 쫓아오는 적이 있으면 요격해라.”

“예.”

주둔지 내의 막사가 어슴푸레 보이는 지점에 말을 묶어놓고, 모두 하마(下馬)했다.

“오록스. 귀관은 여기서 기다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령관 각하의 무운을 빕니다.”

살금살금 걸어가, 감시탑 근처에서 일단 멈추었다.

불을 피워놓고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보였다.

넷... 아니, 다섯 명.

“마력 투사에 자신 있는 사람. 앞으로 나서. 지원자 열 명.”

기사들이 눈치를 주고받더니 딱 열 명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좋아. 오른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두 명이 한 놈씩 맡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나. 둘. 셋. 쏴.”

다섯 개의 마력창이 거의 동시에 보초들을 꿰뚫었다.

“컥.”

보초들은 소리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좋아. 들어가자.”

기세 좋게 주둔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재수도 없게 순찰 돌던 병사 한 무리와 마주쳤다.

평기사 하나가 곧바로 마력창을 쏘았지만, 푸르스름한 원형 방패가 허공에 나타나서 창을 퉁겨냈다.

일반 보병이 아닌 마력병이었다. 그것도 꽤나 정예.

“제, 제기랄! 적습이다!”

“기사다!”

“마력병! 모여! 모여라! 방어막 전개!”

마력병들은 사각 방진을 짜서는 마력을 한 군데에 모았다. 오로지 방어에만 온 마력을 쏟아 부으려는 거다.

이러면 기사들이라도 뚫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한 수 도와주는 수밖에.

나는 마력을 송곳으로 형상화해서 가장자리에 있는 놈에게 쏘았다.

“엑!”

방어막을 전개하던 마력병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수혈의 허접한 마력으로 금혈, 그것도 마법사의 마력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방어막 한 귀퉁이가 일그러지더니 슥 사라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제나가 죽었어!”

“당황하지 마! 빈 자리를 메꿔라! 곧 지원이 올 거야!”

마력병들은 커다란 집단 방어막을 형성하려 했지만, 나는 마력송곳을 여러 개 만들어서 방어막을 펼치는 마력병들을 차례대로 저격했다.

뚫린 구멍 사이로 기사들이 들어가 학살을 펼쳤다.

“죽여라! 다 죽여!”

방어막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 파샨이 방방 날뛰며 칼을 휘둘렀다.

마력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렇게 되면 기사들이 하나씩 쫓아다니며 사냥할 뿐이다.

“적은 어디냐?”

옥타브 높은 고음이 귀에 똑똑히 들렸다.

“여깁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늘기린 기사단이 간다! 조금만 버텨라!”

이윽고 체닐린이 연청색 망토를 펄럭이면서 나타났다.

장신의 미녀가 장검을 빼들고 서 있으니 꽤 매력적이다. 베개처럼 껴안고 자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체닐린은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의 마력파동이 내 근처에 서 있던 평기사 둘을 난타했다.

“큭!”

“흐억!”

“크레이니! 마킨! 저들을 부축해서 물러나라!”

상급 기사가 체닐린에게 마력창을 난사해 견제하면서 급히 말했다.

“각하. 이만 퇴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래. 더 있다가는 포위되겠군. 돌아가자.”

우리는 잽싸게 등을 돌려 달아났다.

하늘기린 기사단은 잔뜩 약이 올라 우리를 쫓아왔지만,

“공격하라!”

미리 대기하던 오록스가 제1 기사단과 함께 요격하자 어이 없이 허물어졌다.

쩌렁쩌렁 울리는 오록스의 외침 때문에 하늘기린 기사단은 지레 겁을 먹었다. 밤이 어두워서 아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게 적들의 패인이었다.

“반전해라! 휘몰아쳐라!”

제2 기사단도 몸을 돌려서 제1 기사단과 함께 하늘기린 기사단을 마구 쳐 죽였다.

체닐린은 버티지 못하고 숙영지로 도망갔다.

틈을 봐서 낚아오려고 했는데, 진짜 도망치는 거 하나는 일품이다. 성 안으로 유인 안 하면 정말 못 잡겠네.

“이만하면 이득 봤지. 기사들이 더 튀어나오기 전에 도망치자.

“예! 각하!”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까지 달렸다.

성벽을 순시하던 대대장이 내 얼굴을 보고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목을 축이고 나서 기사단을 정렬시켰다.

“다들 수고했어. 점호하고 보고해.”

“제2 기사단에서 일곱 명, 제1 기사단에서 두 명 낙오했습니다.”

“밤길에 어디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밤눈 좋은 병사들 풀어서 찾게 하고. 나머지는 들어가자. 참. 전과는?”

“적 마력병을 오십 이상 격살했고, 하늘기린 기사단에도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야습이 성공했으니 아군 사기는 오르고 적군 사기는 떨어질 겁니다.”

나는 병사들에게 성과를 부풀려서 퍼뜨릴 것을 지시하고 내성에 들어가서 잤다.

간만에 몸을 움직여서 푹 잘 수 있었다.

#

전날 밤 야습에 이를 갈았는지,

켈자르 군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성을 공격해왔다.

쿵. 쿵. 쿠웅.

나는 투석기가 날린 석탄이 성벽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 깼다.

조금 과장해서, 성 전체가 웅웅 울리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런 씨팔, 성벽이 무너지는 건 아니지?”

“마티란 성은 백 년 넘게 켈자르 군의 침공을 막아왔습니다. 투석에 견디도록 성벽이 설계되어 있다하니, 피해가 크진 않을 겁니다.”

아침 보고를 하러 온 무산토 보병대장이 말했다.

그 말대로, 나가보니 성벽은 멀쩡했다.

재수 없는 병사 몇이 돌에 깔려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투석기가 적 보병이 접근하는 동안의 엄호사격 역할은 해준 모양이다.

“와아아!”

어느새 성벽 근처까지 접근한 적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아군도 급히 화살과 돌을 던지면서 응전했다.

하지만 켈자르 군은 마력병들을 능숙하게 운용해서 거대한 집단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궁수들이 쏜 화살이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됐다! 사다리를 걸쳐라!”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교가 소리쳤다.

바로 그에게로 마력창과 화살이 집중됐지만, 적 마력병의 방어막은 아군의 공격을 굳건히 버텨냈다.

저거 진짜 개사기네.

결국 성벽 곳곳에 사다리가 올라왔다.

날쌘 마력병들이 사다리를 날듯이 올라와 자작군 보병을 학살했다. 자작군도 결코 훈련도가 낮은 건 아니지만, 마력병의 비율이 적에 비해 지나치게 낮았다.

“성벽에 오르는 대로 방어막 전개!”

“마력을 아끼지 마라! 마력탈진에 빠지면 바로 후방이다!”

마력병들은 서로 마력을 연계하며 성벽 위를 차근차근 점령해나갔다. 안전지대가 확보되자, 적 보병도 사다리를 올라왔다.

얼마 되지 않아 성벽 위에 아군의 수보다 적군의 수가 더 많아졌다.

공포에 질린 자작군 장교들이 내게 달려와 하소연했다.

“사령관 각하!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각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다려라. 적 기사단이 출격할 때까지는 버텨야 해.”

“하지만!”

“내가 엉뚱한 곳으로 지원 갔다가 반대편으로 기사단이 쳐들어오면 마티란 성은 끝나.”

내가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결국 내 몸은 하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는 없다.

내가 동문에서 적 보병을 천 명 불태워 죽여도 적 기사단이 서문으로 들어와 내성을 짓밟고 켈자르의 깃발을 첨탑에 꽂으면 아군은 무너질 거다.

결국 내가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건 적의 핵심 병력인 기사단이 움직일 때뿐이다.

하지만 기사단은 세 갈래로 나뉘어 성벽을 뱅뱅 돌기만 했다.

하늘기린 기사단은 북문, 진흙악어 기사단은 남문, 청록물소 기사단은 서문 근처를 오락가락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돌격해오지는 않았다.

그저 찔끔찔끔 마력창으로 성벽 위의 궁병들을 저격하고 있을 뿐.

“이 빌어먹을 놈들 왜 간만 보는 거지…….”

“각하께서 마력탈진에 빠진 건지 의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타라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이런 제기랄. 아. 그런 건가. 하긴, 놈들도 바보만 모인 건 아닐 테니.”

“침착하셔야 합니다. 먼저 송곳니를 드러내는 쪽이 패배하는 게임입니다. 각하께서 송곳니를 숨기고 기다린다면, 적 기사단도 각하의 부재를 확신하고 성벽을 넘을 겁니다.”

“그래. 타라, 귀관의 말이 맞아. 후. 침착해야지.”

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손을 쥐락펴락했다.

지휘 막사로 황급한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북문에 적 마력병들을 막을 병력이 없습니다!”

“오록스. 귀관이 가서 틀어막아.”

“예. 각하.”

“서문이 위험합니다!”

“무산토. 예비대가 있나?”

“예. 다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오래 버티도록 해. 가 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문이 뚫렸습니다! 적들이 파도처럼 몰려들고 있습니다!”

“정확히 보고해. 기사단이 들이친 건가?”

“아, 아닙니다. 하지만 적 보병이 수도 없이...”

“파샨. 아니……. 타라. 남은 기사 전원을 주지. 무조건 막아라.”

“알겠습니다. 각하.”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사방에서 아군이 죽어나가고 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기사단은 어디냐. 어디냐고, 이런 씨팔! 안 오는 거 아니야?

“동문! 적 기사단이 노리는 곳은 동문입니다!”

갑자기 세 기사단이 모두 깃발을 올리고 동문으로 진격했다.

“가자!”

나는 파샨과 호위병만 데리고 동문으로 달렸다.

그곳에서는 이미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성문에는 장정 셋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틈을 통해서 기사들이 척척 걸어 나와 아군을 밀어붙였다.

“진격! 적은 이미 무너졌다! 유린하라! 마티란은 이제 그대들의 것이다!”

체닐린이 소리쳤다.

그녀를 노리고 용맹한 아군 마력병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혈통이 용기를 압도한다.

체닐린은 장검을 가로로 휘둘러 아군 마력병 셋의 허리를 한꺼번에 잘랐다.

좁은 길목을 틀어막던 마력병들이 떼로 죽자, 보병들은 겁이 나서 뒤로 물러났다.

연청색 망토를 입은 기사들이 기세를 타고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하늘기린 기사단 뒤로도 진흙악어 기사단, 청록물소 기사단이 발을 맞추어 입성했다. 모두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여기 수비 맡은 대대장 누군가?”

“제3 대대장 하이엔입니다. 사령관 각하.”

하이엔은 삼십 대 정도의 야심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하이엔. 여기가 격전지다. 내가 놈들을 태워죽일 테니, 귀관은 현 위치를 사수하며 놈들이 내게 오지 못하게 막아라. 성공하면 귀관에게 작위와 봉토를 하사할 것을 약속하지. 할 수 있겠나?”

“예. 각하.”

나는 보병대대 뒤로 물러나서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길 일이분 여.

적 기사단이 진군하는 길목 양 옆으로 커다란 불길이 확 솟아올랐다. 초라한 목재집들이 불길에 삼켜졌다.

“불이다!”

“어떤 멍청이가 불을... 아니, 이건?”

불길이 이리 형상으로 변해 적 기사단을 덮쳤다.

붉게 타오르는 이리는 기사를 물어서 던졌다. 감히 덤벼드는 놈들에게는 끓는 증기를 내뿜어 안면을 익혀버렸다. 어지간한 마력 방어막은 몸뚱이를 부딪쳐 재로 만들어버리고 안에 숨은 겁쟁이를 불길로 삼켰다.

“마, 마법사!”

이미 한 번 마법사의 염화(?火)의 끔찍함을 목격한 하늘기린 기사들은 공포에 얼어붙었다.

“하... 마력탈진이라더니, 함정이었나.”

체닐린은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장검을 올려 세웠다.

“바이스는 방탕한 남자다! 분명히 마티란의 창녀를 탐하느라 마력을 낭비했을 거다! 내게 저 자의 목을 바칠 켈자르의 기사는 어디 있는가?”

“에네펠! 갑니다!”

“저, 테탑이 바이스의 목을 치겠습니다!”

“레시아르의 탕아를 죽여라!”

체닐린의 선동 한 마디에 기사들이 꾸역꾸역 불길을 뚫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미친놈들.

얼굴이 불길에 새까맣게 타들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날아드는 게 불나방 같다.

하지만 그 기세만큼은 흉흉해서 등골이 서늘할 정도다.

“하이엔! 버텨라!”

“예! 각하! 제3 대대! 집결! 현 위치를 무조건 사수한다!”

하이엔이 급히 뛰어다니면서 보병들을 끌어 모았다.

보병들은 다리를 벌벌 떨면서도 중대장, 소대장의 겁박에 방패를 들고 창을 세웠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비켜라!”

기사들은 마력이 서린 검으로 보병들을 무 자르듯이 잘라냈다.

하지만 밀집한 보병을 단숨에 뚫고 들어가는 일은 기사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내가 기사들을 태워버리는 속도가 기사들이 보병들을 베는 속도보다 빠르다. 그러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일등 기사! 정렬! 발도!”

체닐린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세 개 기사단에서 정예만 뽑아서 제 뒤에 일렬로 세웠다.

“돌격!”

체닐린이 선두에 서서 보병들을 마구 죽이면서 달렸다. 혈육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정예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방진을 유지하라! 버텨라!”

하이엔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방패를 들어도 방패 째로 잘릴 뿐이니, 보병들이 주춤주춤 밀려날 수밖에.

체닐린은 보병 대대를 완전히 꿰뚫어 내 앞까지 왔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피로 젖어 서 완전히 귀신 같았다.

그녀는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장검을 들어 나를 척 가리켰다.

“바이스. 너를...”

“멈춰라! 체닐린! 네 년은 백여우 기사단 부단장, 나 파샨이 막겠다!”

파샨이 검을 휙휙 휘두르며 체닐린 앞을 막아섰다.

“근본도 없는 여우 수인 따위가... 할 수 있으면 해 봐.”

체닐린은 장검을 꽉 쥐고 파샨에게 뛰어들었다.

검의 실력만 보면 체닐린이 우위다. 마력의 보유량도 마찬가지.

하지만 파샨은 작은 체구로 체닐린이 그리는 검의 궤적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집요하게 체닐린의 다리를 노렸다.

기린 수인의 피가 섞인 체닐린은 다리가 무척 길었고, 키 작은 체닐린이 발목과 종아리 뒤를 노리면 방어하기 힘들어했다.

“비겁한 여우 년!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싸우는 게 비겁한 게 어딨어?”

나는 두 여기사의 검무를 곁눈질하면서 체닐린을 따라온 정예 기사들에게 화력을 쏟아 부었다.

뜨거운 화마(火?)가 기사들을 갑주 째로 익혀버렸다.

체닐린은 부하들이 산 채로 익어서 죽는 걸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비겁한! 그만 둬!”

“뭐 자꾸 비겁하대. 니 보지가 비겁하다, 개년아.”

“이런 악독한...!”

체닐린은 흉흉한 기세로 장검을 사선으로 베었다.

상당히 강한 마력 파동이 발사됐다.

이걸 막으려면 기사들에게 쏟고 있는 화력을 분산시켜야 하는데.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체닐린의 마력 파동이 코앞까지 닥쳤다.

“헉.”

“도련님! 아악!”

내 앞으로 뛰어든 파샨이 비명을 질렀다. 왼쪽 뺨에서 턱까지 난 검상을 따라 피가 뚝뚝 흘렀다.

이런 씨발 년이... 감히 내 애완동물을 다치게 해?

나는 기사들에게 뿜어내던 불줄기를 바로 체닐린에게 돌렸다.

“윽!”

체닐린은 급히 몸을 굴려 불길을 피했다.

파샨이 눈을 반짝이더니, 허점을 노리고 체닐린에게 마력창을 날렸다.

“크윽!”

마력창이 체닐린의 허벅지 사이를 찢고 지나갔다.

파샨은 얼굴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검을 내리그어 마력창을 연사했다.

한 번 상처를 입은 체닐린은 파샨의 파상공세를 막아내지 못했다. 마력창이 연거푸 체닐린의 긴 다리를 찢어발기고 지나갔다.

“꺅!”

“단장님!”

적 기사들이 급히 체닐린을 둘러싸서 마력 방어막을 전개했다.

눈물나는 전우애네.

나는 마력 방어막 자체에 불을 덮어씌웠다. 마법사의 마력은 기사들의 마력을 불쏘시개로 쓰며, 커져서는, 그 아래 숨은 기사들을 덮쳐 불태웠다.

“단장... 님... 도망... 치십...”

“안 돼! 안 돼!”

기사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체닐린을 감싸느라 차례대로 타 죽었다.

정예 기사들이 전멸하는 걸 지켜본 진흙악어 기사단이 주춤거렸다. 청록물소 기사단도 전진을 멈췄다.

나 혼자서 기사단 세 개를 다 불태울 수는 없다.

그래도 기세를 꺾을 수는 있지.

지금은 허세를 부려야 할 때.

나는 남은 마력을 모조리 뽑아내며 기사들에게 불길을 날렸다.

“나, 레시아르의 바이스는 불사조다! 네놈들 켈자르를 지옥의 염화로 모두 불태워주마!”

“크아악!”

“무, 물러나!”

“마법사는 이길 수 없습니다! 퇴각하셔야 합니다!”

진격을 멈추고,

한 걸음씩 물러나다가,

결국은 우르르 등을 돌린다.

“퇴각! 퇴각하라!”

“동문 밖에서 재집결!”

“퇴각!”

나는 놈들이 동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불줄기를 뿜어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자지가 아팠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코에 느껴지는 탄내는 역했다.

시체와 잿더미만 남은 동문의 전장.

체닐린은 마력창에 찔린 허벅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 씨발년.

존나 강간해야 되는데.

나는 아군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옆으로 푹 쓰러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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