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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2화 (12/166)

〈 12화 〉 진격

* * *

마력탈진에서 깨어나자마자 미녀 둘을 연속해서 안았더니 좀 진이 빠지긴 한다.

아. 그 전에 타라한테도 정액세수를 시켜줬던가.

이틀 정도는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푹 자고 싶지만, 더 지체했다가는 켈자르 놈들에게도 회복할 시간을 주는 꼴이 되니.

오록스와 무산토는 내가 마력탈진에 빠진 동안 이미 출격 준비를 모두 마쳐두었다.

기사와 병사들이 모두 출격을 바라는데 총사령관인 내가 뒤로 뺄 수도 없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들기며 마차에 올랐다. 손발을 꽁꽁 묶이고 입에 재갈까지 물린 체닐린이 메이드들에 의해 짐짝처럼 옮겨졌다.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껴안는 베개로 쓸 예정이다.

마차 주변을 기사들이 호위하고, 뒤로 보병대대가 따랐다.

드디어 켈자르와의 경계선인 라울 강을 넘어 진격하는 것이다.

“부디 몸 성히 다녀오세요. 각하의 건승을 빌겠습니다.”

마티란 자작은 브레이스를 비롯한 다섯 미녀들을 이끌고 라울 강 남단까지 마중을 나왔다.

배를 쓰다듬으면서 허리를 숙이는 게, 벌써 자기가 내 애를 뱄다는 걸 강조하고 있는 거다.

하여간 꾀는 쉴 새 없이 부리는구먼.

나는 마차 창문 너머로 마티란 자작의 손을 한 번 잡아주고 여자들을 돌려보냈다.

신변을 돌볼 메이드도 노련한 중년의 메이드와 관상용으로 어린 메이드 하나씩만 남겼다.

켈자르 영지 안에서는 또 전투가 벌어질 테니, 한동안은 자지가 쉴 때가 됐다.

“각하. 도강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물길에 휩쓸리는 병사가 없도록 조심하도록 해.”

“예. 각하.”

라울 강의 폭은 한강의 절반 수준이고 수심도 깊지 않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막으면 도강이 어렵기는 하다.

하지만 도강을 막아야 할 켈자르 변경 영주들은 일찌감치 도망친 후라, 아군은 대낮에 부교를 만들어 강을 건넜다.

병사들은 욕설을 주절거리면서 땀을 뺐다.

나는 마차 안에서 체닐린을 안는 베개로 껴안고 나이 어린 메이드의 부채질을 받으면서 신세 좋게 그 모습을 구경했고.

원정군은 낙오자 하나 없이 무사히 라울 강을 건너, 켈자르령 안으로 진격했다.

“한적하구먼.”

마차에 달린 작은 창문을 열고, 비스듬하게 드러누워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수풀이 우거진 들판의 광경이 이어졌다.

드문드문 작은 밭과 더 작은 집들이 보이긴 했지만 내 주의를 끌만한 건 없었다.

마을 두어 개를 지나치긴 했는데, 인적이 휑하니 비어있었다.

잘 뒤져보면 농민 몇 명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시간을 낭비할 것도 없어서 계속 행군을 시켰다.

가끔 소형 괴수들이 나타났다가 우리 군의 규모를 보고는 후다닥 도망갔다.

발이 느린 놈들이 나타나면 파샨이 득달같이 쫓아가서 사냥하고는 마력석을 캐왔다.

“도련님! 오늘의 첫 전리품! 도련님께 드리겠습니다!”

파샨은 말을 타고 마차에 바싹 붙어서 피를 대충 닦은 마력석을 내게 바쳤다.

크기는 엄지 손톱만하지만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어서 예쁘기는 하다. 잘 보면 안쪽에 이상한 모기 같이 생긴 결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에 든 마력은 쥐알만해서 별로 쓸데가 없긴 하지만, 파샨의 정성이 갸륵해서 고맙게 받기로 했다.

마차에서 메이드 허벅지를 베고 누워 졸다 깨다 하다 보니 이거 행군이라기보다 산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땡볕에 걷는 병사들은 그렇게 안 느끼겠지만.

나도 전생에서는 군대에서 개뺑이치는 거 개좆같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병사들이 갑자기 불쌍해진다.

켈자르를 약탈하면 전리품은 적당히 나눠줘야겠다.

“각하.”

“아. 오록스 단장인가. 그래, 왜?”

“전방의 마을이 불타고 있습니다.”

“마을이 이유 없이 불탈 리는 없고. 청야전술인가?”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애초에 켈자르 군이 보급을 끊어서 타격을 줄만큼 아군의 수가 많은 것이 아닌 지라.”

그렇긴 하다.

중상자들은 백작령으로 돌려보내고, 마티란 성에 수비병을 남겨두었고. 사망자도 결코 적지는 않다.

이래저래 해서 여기까지 끌고 온 원정군의 수는 기사 백 명에 마력병 이십 명, 보병 천 명뿐이다.

어차피 원정군의 최대전력은 나니까 병력의 수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아슬아슬하기는 하다만.

여담이지만 오록스는 내가 마력탈진에 빠진 동안 아버지께 증원을 부탁했다고 한다.

물론 증원요청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답신조차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변경 영주들을 소집했어도 기꺼이 달려오는 자는 거의 없었겠지.

이 정도면 그냥 돌아오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거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적당히 상을 내리고 나를 더 견제하겠지.

이만한 병력이 내 지휘 하에 있을 때, 아버지도 흠 잡지 못할 정도로 빛나는 성과를 거머쥐어야 한다.

여하튼 켈자르 군도 아군의 수가 많지 않은 건 공성전에서 확인했을 테니, 자기네 마을을 불태워서까지 보급을 끊는 방법을 택하진 않았을 텐데.

“일단은 가서 확인해봐.”

타라에게 기사 열 기를 주어 선행시켰다.

잠시 후.

본대와 함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보인 것은, 타라와 기사들이 산적 같은 놈들을 마구 베고 있는 광경이었다.

“모조리 베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타라는 보기 드물게 분노해서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항복하겠습니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크아악!”

산적들은 무기를 내던졌지만, 그 목 위로 칼이 날아들었다.

오십 명 정도 되는 산적들이 모두 죽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말리려면 말릴 수는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 타라 하고픈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는 마차에서 타라가 보고하러 오기까지 기다렸다.

“각하. 켈자르 군 패잔병이 마을을 약탈하고 있어, 모두 처단했습니다.”

“음? 산적이 아니라 켈자르 패잔병이었나?”

“예.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변절한 쓰레기들입니다.”

타라의 말은 신랄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었나보다.

“읍읍읍!”

“넌 또 왜.”

체닐린이 몸을 비틀면서 재갈을 잘근잘근 씹기에 입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나를 표독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자랑스러운 켈자르 군이 그럴 리가 없다! 음흉한 네놈이 뭔가 속임수를 썼겠지!”

승부섹스에서 너절하게 패배한 이후로 체닐린은 내가 숨만 쉬어도 속임수, 속임수 운운했다.

그런 체닐린과 놀아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나는 체닐린의 엉덩이를 꽉 쥐고 속삭였다.

“닥쳐. 자꾸 귀찮게 하면 마차 밖으로 던져서 병사들한테 돌린다?”

“힉...!”

체닐린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은혈 귀족에게 있어 수혈 평민의 씨앗을 배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수치.

내 말을 들었는지 마차 주변에서 서성이던 병사 몇 놈의 눈이 음욕으로 번들거렸다. 길쭉한 장신 미녀, 적 기사단장을 더러운 막사 안에서 윤간할 생각에 벌써 좆이 서겠지.

미안한데 그냥 해본 말이거든.

나는 독점욕이 강한 남자다. 내가 한 번 안은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취미 따위는 없다.

“타라. 병사들 작업 시켜.”

“예. 각하. 뭣들 하나? 빨리 움직여라!”

“알겠습니다요…….”

아군이 켈자르 군을 정리하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왔다.

잘 보니 공터에 널린 시체 중에는 패잔병 뿐 아니라 농민들도 꽤 있었다.

패잔병들에게 강간을 당한 듯, 하체에서 피와 정액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 나쁜 놈들. 돈만 훔쳐 가면 되지, 사람은 왜 죽인단 말이냐.”

뒤늦은 곡성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죽은 척 하는 패잔병들을 창으로 찔렀다.

“감사합니다. 귀하신 분들.”

노인 하나가 대표로 나와서 감사인사를 올렸다.

나는 마차에서 나오지 않고 타라가 대신 인사를 받았다.

재미없는 공치사가 잠시 오가는데.

“헉. 레, 레시아르 군이다!”

농민들 중 아군의 표식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있었는지, 갑자기 그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마을이 어수선해졌다.

농민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죽이는 게 아닐지 잔뜩 긴장했다.

“조용히 해!”

노인이 일갈했다.

“켈자르 군은 마을을 약탈하고, 레시아르 군은 마을을 구해주셨는데 켈자르고 레시아르고 무슨 상관인가?”

노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이번에는 타라가 아니라 내가 탄 마차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은인께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엄하구나.”

타라가 검에 묻은 피를 휘둘러 털어내면서 말했다.

“이 안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너희 같은 천것은 말을 올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타라.”

“예. 각하.”

“비켜 봐.”

타라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물러났다.

나는 창문을 열고 노인을 내다보았다.

“목을 걸고 그 부탁이란 걸 할 수 있겠나? 들어보고 시원찮으면 그냥 목만 치고 갈 건데 말이야.”

“예. 나으리. 쇤네의 목이라도 바쳐서 부탁을 올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바치지요.”

노인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면서 대답했다.

강단이 있는 인간이네.

“좋아. 얘기해 봐.”

“여자를 하나 데려가주셨으면 합니다. 제 하나 남은 손녀딸입니다. 처녀지요.”

“처녀라. 그런데 왜?”

“나으리께선 레시아르 군을 지휘하시는 분이니 여기 머무르지 않고 곧 북쪽으로 올라가시겠지요. 그럼 이 근방에서 날뛰는 켈자르 패잔병들이 다시 저희 마을을 노릴 겁니다.”

“그러겠지.”

“이번에 마을에 있는 여자들 태반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제 손녀딸은 이번에야 운이 좋아 화를 피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는 없을 테니. 차라리 나으리께 바치는 겁니다.”

현대의 가치관으로 보면 내게만 좋은 일이지만, 이 세계의 가치관으로 보면 노인과 노인의 손녀딸에게도 좋은 일이다.

운 좋게 켈자르 패잔병들의 노리개가 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맺어질 상대는 뻔하다. 비슷한 처지의, 가진 건 불알 밖에 없는 농민.

이런 시골마을의 여자가 귀족의 씨앗을 받는 건 신세를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노인은 그걸 잘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나야 처녀 준다는데 마다할 건 아니지만, 어차피 이런 시골 마을에 있는 여자가 예뻐봐야 얼마나 예쁘겠나.

한 번은 튕겨보기로 했다.

“흠. 그렇다면 다 같이 마티란 영지로 이주하는 건 어떤가? 마티란 자작에게 일러둘 수는 있다만.”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랐습니다. 도적들이 날뛴다고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뿌리 붙이고 살아온 마을을 어찌 떠나겠습니까. 다만 제 손녀딸은 나이가 어리고 앞으로 살날이 많으니 나으리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 일단은 그 손녀딸이란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예. 데이지! 나와 봐라!”

돼지우리 옆에 쌓아둔 짚단이 부스럭거리더니 그 안에서 여자 하나가 기어 나왔다.

타라나 마티란 자작, 체닐린에 비하면 미인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이런 조그마한 시골에서 썩히기에는 아까울 미색이었다.

눈코입이 오밀조밀 모여서 상당히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순수한 시골 처녀라고 하면 이미지가 딱 맞긴 한다.

“미색이 괜찮군. 내가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귀하신 분의 눈에 들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좋아. 받아주마. 그 외에도 나를 따를 여자... 처녀가 있다면 나서라. 처녀가 아니거나 남자라도 마티란 영지에 정착하고 싶다면 보내주겠다.”

하지만 더 나서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켈자르 군에 당했다고는 해도, 나고 자라면서 적이라고만 생각해온 레시아르로 이주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태어나면서부터 한계가 정해진 수혈 평민 중에는 운명론적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많다.

내 정자를 마셔서 기사단 부단장까지 오른 파샨은 예외 중의 예외다.

나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나는 마차 안으로 데이지를 들이고, 행군을 재개시켰다.

내 영지의 내 사람들이었다면 시체 수습도 돕고 군의관도 풀겠지만, 남의 땅 남의 사람들인 이 자들에게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다.

켈자르를 병합하면 또 모르겠지만.

데이지는 내 눈치를 보며 가만히 소리죽여 울었다.

창문 밖으로는 노인이 손을 흔들었다가 허리를 숙였다가 하는 모습이 보였다.

#

베섹, 펜슬빌, 오치라.

레시아르의 마티란처럼 켈자르의 변방을 지키는 영지들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물론 영지민들까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영주 식솔을 비롯해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대장장이, 직조업자 등 쓸 만한 인력이 모두 도망쳤다는 얘기다.

원정군은 주인 없는 성에 차례대로 무혈입성했다.

약탈은 승자의 권한이긴 한데, 귀족들은 이미 다 도망갔고, 내게 바로 문을 열어준 평민들을 털어먹는 것도 좀.

그래서 영주성에 남은 것만 살뜰하게 털기로 했다.

그것만 해도 금화가 궤짝을 채울 정도는 나왔다.

나는 임시로 기사단장 오록스, 보병대장 무산토, 그리고 마티란 성 동문에서 체닐린의 돌격을 막느라 애쓴 제3 대대장 하이엔에게 성 하나씩을 내렸다.

정식으로 봉신이 임명되기 전까지 그 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어차피 다들 나를 따라 켈자르령 안으로 계속 진격할 테니 영주 노릇을 실제로 해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봉신 임명할 때에도 내가 임명한 임시 영주들은 기여도를 인정받을 테고, 설령 다른 영주가 임명되더라도 그에게 위로금을 받을 거다.

충성도가 올랐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뜨지 않아도, 세 남자들의 충심이 깊어진 건 알 수 있었다.

특히 오록스는 자기가 맡은 제1 기사단이 번번이 피해를 입고, 파샨과 내 지휘를 따른 제2 기사단이 성과를 내는 걸 보고 많이 쭈그러든 상태.

이제 슬슬 당근을 내밀면 반길 때가 됐다.

어차피 사상자 때문에 정원도 반으로 줄었으니 제1, 제2 기사단은 백여우 기사단으로 다시 합치고 지휘권도 단장인 오록스에게 몰아줬다.

하는 김에 타라도 평기사에서 수석 기사로 올렸다.

아직 검술 실력은 부족하지만, 마력은 동혈인 제 아비의 피를 물려받아서 괜찮은 편.

뭣보다도 성희롱하려면 곁에 두고 쓰는 게 편하다.

“감사합니다. 사령관 각하.”

오록스는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내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이전보다 내게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느낌이 든다.

천성이 무관인 오록스에게는 정치가 타입인 아버지보다 전장에서 활약하는 지휘관 타입인 내가 더 바람직하게 보였을지도 모르지.

아버지와 내가 싸우게 된다면, 오록스가 내 편을 들어주진 않더라도 적어도 중립 정도는 지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수준은 됐지 싶다.

시골마을에서 주운 데이지는 짬날 때마다 중년 메이드의 교육을 받았다.

별일 없으면 메이드가 되어서 나를 따라다니겠지.

성품은 순한 편이라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문제라면 체닐린이 아군의 쾌진격에 점차 기력을 잃고 있다는 걸까. 동태눈을 하고 마차 밖으로 켈자르 영토가 차근차근 정복당하는 걸 바라보는 게 은근히 꼴렸다.

하여튼 별일 없이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다가.

원정군은 드디어 켈자르의 주도(??) 카르마시아를 방어하는 요충지, 디부시 요새에 다다랐다.

여기만 뚫고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평지고, 카르마시아까지는 지척이다.

그런 만큼 켈자르도 상당히 공을 들여 요새를 축조해 놨다.

커다란 언덕 사이에 요새가 끼어있고, 그 언덕들에는 또 높은 탑이 각 두 개씩 있어서 밑에서 보자면 공격하기도 전에 먼저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거 만만치 않겠구먼.”

“예. 각하.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요새를 지키는 수비병이 천 명을 족히 넘고, 그 중 마력병의 수가 일백이라 합니다. 게다가 패퇴한 청록물소 기사단이 여기서 재집결했다고 합니다.”

하이엔이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가 맡은 제3대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해서, 제3대대를 해산시키고 친위대로 재편성했다. 전부 다가 수혈 평민 출신이니 능력보다는 동문에서의 공적을 인정해서 출세시켜 준 거다.

그 결과 하이엔도 자연스레 친위대장이 됐고.

그는 생긴 대로 야심이 있는 남자였다. 틈만 나면 병사들을 조련시키고, 다른 대대장이나 기사들과 만나서 정보를 교환하면서 더 높은 자리를 노렸다.

다스리는 입장에서는 부하가 적당히 향상심이 있는 게 편하긴 하다.

멀리서 보병대장 무산토가 자기 부하의 출세를 시기하는지 하이엔을 노려봤지만, 보병들을 갈아서 정예기사들을 막아냈으니 이 정도 대우는 해줘야지.

“켈자르 가주가 있는지는 확인 안 됐지?”

“예. 마법사의 행적은 극비인지라.”

전략병기인 마법사가 어디 위치한지는 전쟁의 향방을 좌우한다.

원정군인 내가 위치를 드러내는 건 어쩔 수 없어도, 방어하는 켈자르 입장에서야 숨기고 싶을 때까지는 숨길 수 있겠지.

“아버지는 켈자르 가주가 몸져누웠다고 했지만, 그걸 완전히 신뢰하는 건 바보고. 여기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그래도 적당한 위력의 마법 한 방 정도는 박아줄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다들 비켜 봐.”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아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내 이름을 연호했다.

이것 참.

시꺼먼 남자놈들 응원도 나름대로 맛이 있구먼.

나는 손을 휘저어 커다란 불길을 내고는, 그걸 압축해서 원형으로 만들었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화구(火?).

거대한 불의 공이 요새를 향해 날아갔다.

요새 수비병들이 목 찢어져라 소리쳤다.

“마법사다!”

“당황하지 마라!”

“마석 방어막 전개!”

요새 벽면 앞에 황금색의 사각방패가 출현했다.

내가 쏜 화구는 사각방패에 부딪혀 불똥을 튀겼지만, 방패를 뚫지는 못하고 사라졌다.

“어……. 뭐야, 저거?”

“금석(??)을 이용한 방어막인 듯합니다.”

무산토가 하이엔을 제치고 나와서 말했다.

마력병 장교 출신에 불과한 하이엔보다는 그래도 동혈 귀족으로 태어난 무산토가 견식이 더 넓긴 했다.

“금석 방어막이라.”

괴수들이 품은 마력석 중에는 드물게 일, 월, 화, 수, 목, 금, 토의 일곱 가지 속성을 가진 것이 있다.

그런 마력석은 마력 장비를 만드는 데에 주로 이용되고, 그 중에서도 품질이 특히 좋은 것은 마법사의 영약이 되기도 한다.

내가 화석(火?)을 쥔 마법사라 불리는 것도 화석을 갈아 마셨기 때문인데.

디부시 요새는 금석(?)을 요새에 때려 박아 마력 방어 시스템을 만든 거다.

화(火) 속성은 금(?) 속성에 상성으로 당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유리하다고 하기도 힘들다.

마력을 아낌없이 쓰면 뚫을 수야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켈자르의 영지.

마법사인 가주 놈이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는데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다.

이걸 어떡한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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