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디부시 요새
* * *
나는 일단 군의(??)를 소집하기로 했다.
지휘 막사 안에 모인 것은 백여우 기사단장인 오록스, 부단장 파샨, 수석기사 타라, 보병대장 무산토, 친위대장 하이엔, 그리고 나까지 여섯 명이다.
“요새를 공략하려는데 좋은 의견 있는 사람 있나? 기탄없이 얘기해 봐.”
“도련... 각하께서 방어막을 한 군데만 뚫어주시면! 저와 백여우 기사단이 돌입해서 성문을 열겠습니다!”
파샨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내 마법으로도 저 방어막을 뚫기가 쉽지가 않아. 가능한 내 마력은 아끼는 방향으로 방안을 내 봐.”
하이엔이 무산토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요새를 우회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동쪽으로 삼일 정도 돌아가면 요새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곧 카르마시아에서 결전을 펼칠 텐데 뒤에 적을 두는 건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군. 잘못하면 앞뒤로 포위를 당할 수도 있어.”
“제게 보병 대대 한 개만 주신다면 요새에 있는 적군이 나오지 못하게 틀어막겠습니다.”
아무래도 하이엔은 마티란 성 동문 사수의 경험이 뇌리에 깊이 박힌 것 같다.
하지만 보병들로 적 기사단 정예를 막은 건 결국은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만 마력이 부족했더라면 제3대대는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했을 거다.
“청록물소 기사단이 튀어나오면 보병만으로 막을 수 있겠나? 그렇다고 기사나 마력병을 분산시킬 여유도 없지. 그건 안 되겠어.”
내가 하이엔의 안을 쳐내자, 무산토는 착실한 공성전을 펼칠 것을, 타라는 기사단을 동원해 마력 방어막을 깎아낼 것을 주장했다.
모두 단점이 뚜렷한 방법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딱 이렇다고 할 게 없었다.
이럴 때면 모사의 존재가 절실하다.
이 막사에 모인 인물들은 이제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지만, 이 중에서 계략에 뛰어난 사람은 없다시피 하니.
해결책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해가 져서 일단 휴식을 명한 후였다.
호위병 하나가 다가와서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각하. 은밀히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던가?”
“신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온 방향이 요새 쪽이었습니다.”
“가보자.”
호위병의 안내에 따라 진영 내 인적 드문 곳으로 가보니, 중키 정도의 평범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바이스 레시아르 원정군 사령관 각하.”
“그래. 자넨 누군가?”
“저는 디부시 요새에 주둔 중인 하늘기린 기사단의 이등기사 데나시 프룬이라고 합니다.”
“요새에 주둔 중인 건 청록물소 기사단이라고 들었는데? 내 정보가 잘못된 건가?”
“아닙니다. 각하가 알고 계신 대롭니다. 다만 하늘기린 기사단이 각하의 손에 전멸하고,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청록물소 기사단에 임시 편입되어 제가 요새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렇군.”
데나시는 공손한 어투였지만 이마에 튀어나온 혈관이 쉬지 않고 꿈틀대고 있었다.
침착한 인상이었기에 그게 더 불균형적으로 보였다.
호위병들은 긴장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네가 내게 무얼 바라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넨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하늘기린 기사단을 전멸시킨 걸 원망하는 건가?”
“전쟁이 벌어지면 이기고 지는 건 늘상 있는 법인데 어찌 졌다는 이유로 각하를 원망하겠습니까? 다만!”
“다만?”
“각하께선 단장을... 체닐린 단장을 원정에 끌고 오셨다지요?”
딱히 소문을 내려한 것은 아니지만 소문은 잘도 퍼졌다.
매력적인 여자 기사단장이 사로잡혀서 적 사령관의 마차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건 사람들의 은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단장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데나시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간청하듯, 다그치듯, 데나시의 시선은 복잡했다.
그 눈 안에선 데이지를 주운 마을에서 병사들이 체닐린에게 품었던 음욕도 들어가 있었다.
평범한 이등기사가 아름다운 기사단장을 어떻게 봐왔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나는 턱을 쓸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범했지. 울고 빌면서 그만해달라고 할 때까지 범하는 걸 멈추지 않았네. 그 긴 다리를 위로 붙잡아 올려서 자궁이 꽉 찰 때까지 정액을 털어 넣었으니, 곧 있으면 체닐린의 배가 불러 올 거야.”
데나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는 곧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광소에 호위병은 더욱 긴장했다.
하지만 나는 급발진하는 놈들은 무섭지 않다. 전생의 경험으로 그런 놈들은 대개 찐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웃기를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후. 후아. 후아. 후, 죄송합니다. 각하. 체닐린 단장은 저의 우상이었니다.”
“우상이라.”
“동혈 기사, 그것도 수혈 농도가 반을 넘는 반푼이 동혈 기사가, 기사단 안에서 따돌림 당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데나시는 갑자기 자기 일대기를 늘어놓았다.
남자 놈 이야기 들어봐야 좋을 거 없고. 나는 적당히 걸러 들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혈통 안 좋은 자신이 기사단 안에서 따돌림 당할 때 체닐린이 이것저것 보살펴주고, 검도 봐주고 했다는 얘기다.
찐따가 사랑에 빠지기에는 충분한 개연성이다.
어차피 자기랑은 급이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연정이 커지는 걸 어쩔 수는 없었겠지.
그러다가 갑자기 체닐린이 내게 사로잡히고,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오면서 눈이 확 뒤집혀서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온 거다.
이것도 순애보라면 나름 순애보다.
체닐린이 내게 따먹힐 때 이 녀석 이름 한 번 안 나온 걸 보면 체닐린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또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날 죽이고 싶은가?”
“할 수만 있다면 죽이고 싶습니다. 단장의 몸을 범한 그 추잡한 물건을 돌로 내려찍고, 단장을 탐한 입술을 단칼에 후려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보지?”
“그것은 제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혈기에 휩쓸려서 각하께 덤빈다면, 체닐린 단장을 구할 사람이 없어지겠지요. 그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럼 뭐하자는 건가? 이제 그만 본론을 말하게.”
데나시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벌려보였다.
“체닐린 단장을 제게 주십시오. 그렇게 약속하신다면 디부시 요새의 방어막을 제 손으로 부수겠습니다.”
“뭐,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마석 방어망은 정교한 기계장치로 작동되는 것입니다. 내부에서 장치를 부수면 방어막은 저절로 파괴됩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 디부시 요새는 이미 공략된 것이나 다름없다.
“조건은 나쁘지 않아.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저는 체닐린 단장에 대한 제 마음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각하께서는 레시아르 가문을 걸고 맹세하십시오.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군.”
나는 바로 맹세했다.
“내가 맹세를 어기면 레시아르 백작이 창놈이다.”
“그,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만큼 맹세를 지키겠다는 거지.”
“그렇군요.”
데나시도 나를 따라 맹세했다.
“체닐린 기사단장을 연모하는 이 순정에 걸고, 나 데나시 프룬은 바이스 레시아르와의 계약을 지키겠다고 맹약한다.”
“좋아. 그럼 방어막은 언제쯤 깨줄 텐가?”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가능합니다. 마침 제가 그 때 당번을 서도록 되어있으니.”
“그럼 그렇게 부탁하지. 아침에 연기를 세 줄기로 올릴 테니, 그 때 방어막을 치우라고.”
“각하께서도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내가 약속을 깨면 내 아버지가 창놈이라니까. 세상에 포로 하나 안 잃으려고 아비를 창놈 만드는 자식이 어디 있겠나?”
“그도 그렇군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나시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돌아가면서 자기가 구해준 체닐린과 사랑을 키우는 상상이라도 하는 걸까.
미안한데 그럴 일은 없다.
나는 장교들에게 내일 아침 기습 준비할 것을 이르고, 갑자기 괜찮은 장난이 떠올라서 내 막사에 체닐린을 불렀다.
체닐린은 두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요새를 앞에 두고마력을 채워두면 갑자기 탈출할 위험이 있어서, 체닐린은 식사를 제한당한 상태였다.
원래도 길쭉하고 늘씬한 편이라 체닐린은 굶으면 티가 바로 났다.
“뭔가…….”
체닐린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당분간은 요새에서 진격이 정체될 거라 생각한 건지 심경이 좀 안정된 것 같았다.
나는 체닐린의 손목을 잡고 침대에 눕히고는, 그 긴 몸을 다리로 휘감아 껴안았다.
“한동안은 다시 안지 않을 것 같더니.”
체닐린은 싫은 척하면서도 몸을 빼진 않았다.
내게 여러 번 속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켈자르령 안에서 내 정액을 빼두면 켈자르 군에 유리하다는 건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니까.
자기가 먼저 유혹할 생각은 없어도 내가 권하면 못 이기는 척 섹스해줄 생각이겠지.
마티란 자작에 비하면 귀여운 끼부림이다.
뺨을 슬쩍 꼬집었다.
“자, 자꾸 뭔가. 할 거면 빨리 하도록 해라!”
“하고 싶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안 해.”
“읏…….”
체닐린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면서 제 몸 위에 얹힌 내 다리를 주물렀다.
키 큰 여자가 애교를 부리니까 키 작은 여자랑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이러니까 또 한 번 빼고 싶은데…….
근데 한 번만 싸고 참을 자신은 없는지라 그냥 체닐린을 꼭 껴안기만 하기로 했다.
“읏?”
“들어봐. 오늘 기사 하나가 야습을 왔더라고.”
체닐린의 귀가 쫑긋했다.
하지만 물어보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묻지는 않았다.
나는 그 귀를 핥고 움찔거리는 체닐린의 몸을 더 안쪽으로 꽉 껴안으면서 말했다.
“데나시라는 기사인데...”
“데나시?”
“아는 사람이야?”
“모, 모른다.”
거짓말 한 번 못하네.
“어쨌든. 실력이 상당하던데. 피해가 꽤 났어.”
“흥. 레시아르의 경계는 형편없나보군.”
“너희도 경계 개판으로 쳐서 마티란 성 공격할 때 나한테 야습 당했잖아. 시발년아.”
가슴을 꽉 쥐자 체닐린은 흐아앙하는 귀여운 신음소리를 냈다.
“아, 알았다! 알았다고오!”
“알긴 뭘. 하여튼 너를 구하러 다시 오겠다고 하더라고. 적이라도 기사다운 남자였지.”
“그렇군. 데나시가…….”
체닐린의 표정에서는 뿌듯함이 드러났다.
남녀관계가 아니었던 건 확실하고. 뭐, 체닐린이 처녀였으니까 애초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고.
일방적으로 데나시가 좋아하는 거였겠군.
“하암. 졸리네. 하여튼 데나시란 놈. 다시 오면 가만 안 둬.”
“데나시. 데나시가. 으음. 그렇군.”
체닐린은 데나시가 자길 구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일은 죽었다깨어나도 일어날 수가 없는데.
나는 발기한 자지를 체닐린의 엉덩이 사이에 문지르다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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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병사들은 조용히 갑주를 갖추어 입고 무기를 들었다.
취사병들이 미리 쌓아둔 땔감에 불을 붙여 연기를 올렸다.
곧 시꺼먼 연기 세 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요새에서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각하.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데나시라는 남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타라는 뭐가 걱정스러운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지?”
“아군에게 너무 유리한 제안이라 의심이 갑니다. 마석 방어막을 해제한다고 속이고, 아군의 일부를 요새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방어막을 전개하면 아군이 둘로 분단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요새 안으로 들어간 아군은 퇴로가 막힌 채 전멸하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다.
“하지만 그 놈의 눈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어.”
“예?”
“데나시란 놈이 여자에 미친놈이란 말이다. 난 거기에 걸었다.”
어차피 정도(??)로는 디부시 요새를 떨어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전생에 도태한남으로 살았던 경험에 비춰보면, 데나시의 일그러진 정욕에 거는 건 꽤나 승률이 높은 도박이다.
내가 데나시였더라도 체닐린 같은 쭉빵미녀상사를 따먹을 수 있는 기회에 인생을 던졌을 테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각하께서 그리 확신하면, 아마 그게 맞는 거겠지요.”
타라는 한 발 물러났다.
그래도 내 사람 중에서는 타라가 생각이 제일 유연하고 사고가 넓은 편이다.
잘만 키우면 든든한 부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기특한 녀석.
나는 오록스가 요새를 바라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 슬쩍 타라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타라는 조금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입술을 옴짝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의 추행을 알리지 않은 이상, 타라는 이미 늪에 발을 들였다.
언젠가는 사무적으로 내 아침발기를 처리해주는 부관이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상상도 해보고.
“그럼 데나시가 제대로 일을 해줬나 확인해보자고.”
나는 차분히 마력을 모았다.
작은 불길이 저 앞에서 불쑥 튀어나왔다가, 점차 크기를 키워나갔다.
댕 댕댕댕
감시탑에서 종이 울리고, 요새 수비병들이 부산하게 뛰어다녔다.
아침부터 경계 한 번 철저하군.
“마법사다!”
“겁낼 것 없다! 우리는 어제도 놈의 공격을 막아냈지 않는가!”
“마석 방어막을... 으악!”
어제 쏜 것보다 두 배는 더 큰 화구가 이글이글 타오르며 날아갔다.
그리고는 방어막이 전개되지 않은 틈을 타, 성문을 박살내버렸다.
퍼엉.
불똥이 사방으로 튀면서 성문을 녹이고 성벽을 잔뜩 그을렸다.
데나시가 제대로 일을 했군.
요새 안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소란스러워졌다.
“흐아아악!”
“적이다!”
“방어막, 방어막은 왜 작동하지 않는 거야?”
오록스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성문을 향해 달렸다. 그 뒤를 파샨과 타라, 기사단 일동이 따랐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것은 보병들.
그것도 전날 보인 마석 방어막의 위력을 믿고 해이해진 놈들이었다.
“비켜라!”
오록스는 도끼 한 번 휘둘러서 보병들의 목을 치고는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청록물소 기사단이 진형을 갖추기 전까지 얼마나 깊숙이 뚫고 가느냐가 중요하다.
“진형 유지! 이대로 밀고 들어간다!”
전공을 올리려고 병사들을 쫓으려는 기사들을 타라가 엄하게 주의주었다.
기사들이쐐기진영으로모여 달렸다.
성문 앞에 모인 병사들은 기사의 창칼보다도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
성벽 위에 있던 마력병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마력창을 날렸다.
하지만 기사들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너, 너, 너! 따라와!”
파샨이 손짓으로 기사 몇을 지명해서는 성벽 위로 올라갔다.
곧 성 아래로 적 수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다.
“청록물소 기사단! 기사단은 어딨나!”
적 장교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기사단을 찾다가 오록스의 도끼질에 머리가 쪼개져서 죽었다.
“마법사다!”
“퇴각하라!”
의외로 청록물소 기사단은 백여우 기사단과 칼 한 번 부딪히지 않고 요새 후문으로 탈출했다.
마티란 성에서의 패전을 떠올린 건가.
대국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어차피 요새 점령은 시간문제고, 패할 전장에서 기사단 전력을 낭비하느니 주도인 카르마시아로 퇴각해서 전력을 아끼는 게 현명하지.
하지만 기사단을 제외한 요새 수비병의 입장에서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이 도망간다!”
“이런 개 같은 새끼들! 자기들만 살겠다는 거야?”
“항복입니다!”
나는 친위대와 함께 느긋하게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요새 수비병들이 벽을 보고 무릎 꿇고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성문이 뚫리고 기사단이 탈주하느라 사기가 빠르게 떨어져서 그런지 사망자보다는 투항한 자가 더 많았다.
“하지만 언덕 위의 탑에서는 여전히 교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 거겠지. 굳이 탑에 진입해서 피를 볼 필요는 없고, 둘러싸고 포위만 해. 준비 되는대로 요새 높은 곳마다 레시아르 깃발을 올려. 그럼 알아서 항복할 거야.”
정오 전에 요새는 완전히 접수되었다.
저 멀리서 데나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싱글벙글하는 게, 상상 속으로는 체닐린이랑 결혼해서 손자까지 보고 있겠지.
불쌍한 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