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5화 (15/166)

〈 15화 〉 카르마시아 전투

* * *

세 갈래 강이 굽이굽이 흐르며 지나가는 아름다운 도시, 카르마시아.

적들은 그 도시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회전을 벌일 생각인가 보군.”

“수성전이라면 주도에도 피해가 가니까요. 그래도 아군에게는 공성전보다 회전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내 말에 타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타라의 말은 일견 당연해보이지만, 이 세계의 전장을 지배하는 제일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평원에서 회전으로 승부하겠다는 건, 마법사인 내게 대항할 전력이 있다는 거겠지?”

“아…….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켈자르 백작이...”

“최소한 전투 한 번 벌일 여력 정도는 있다는 거지.”

내게 있어 최상의 수는 켈자르 가주가 골골거리면서 죽어가는 것.

그래서 적이 어쩔 수 없이 주도를 끼고 수성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켈자르 가주가 적당히 기력이 있음에도 수성전을 벌이는 것도 괜찮았다.

그럼 간을 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퇴각하면 되니까.

최악의 수는 켈자르 가주가 생각보다 건재한 것.

그리고 지금처럼 평원에서 아군을 맞이한 것이다.

이미 원정군은 켈자르 령 깊숙이 들어와 주도를 눈앞에 둔 상황. 여기서 등을 돌리면 결과는 전멸뿐이다.

“우리도 진형을 갖추지. 적들이 바로 습격하진 않겠지?”

“주도가 바로 앞이라 영지민들이 보고 있으니... 불명예를 자처하진 않을 겁니다.”

타라의 말대로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나들이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구경났냐.

켈자르의 승리를 의심치 않아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이기고 나면 저 놈들부터 잡아서 노예로 팔아버릴까.

여하튼 적은 보병 삼, 사천 가량을 하나의 대부대로 편성해 중앙에 정렬시키고, 마력병과 기사들을 좌익에 몰아 배치시켰다.

연이은 패배 때문에 이탈한 자가 많은지 생각보다는 수가 적지만, 그래도 아군에 비해 전력이 압도적이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군 진형은 제1, 2, 4 보병대대가 좌익, 중앙, 우익을 각기 맡았다.

마력병은 세 군데에 적당히 섞었고, 백여우 기사단은 좌익에 몰아넣었다.

파샨을 비롯해 기사 열 명, 제3 보병대대 출신의 친위대 백 명, 삼십 명 가량의 호위병들은 후방에서 나를 호위하는 역할이다.

적 전력이 더 강하니, 아군을 받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켈자르 가주보다 먼저 나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적은 내가 드러난 순간 좌익에 배치한 우월한 기사단 및 마력병 전력으로 나를 타격하는 걸 노리고 있겠지.

이렇게 하면 켈자르 가주가 안전하게 나를 해치울 수 있을 테니.

무난하게 괜찮은 판단이다.

“적 지휘관이 누구인지 파악했나? 켈자르 가주가 직접 지휘하진 않겠지?”

“켈자르 백작 가문의 장남, 유구라드입니다. 성실하고 무던하다는 평이 많습니다.”

“적어도 기책을 내진 않겠군.”

적진에서 백기를 든 기사가 달려왔다.

“정말 정석대로 하려는 모양인데.”

전투 개시 전에 항복을 권하고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전장의 예법.

완전히 무시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주도 앞에서 벌어지는 결전이라 적들은 모양 좋게 예법을 지키기로 한 모양이다.

기사는 말에서 내려서 소리쳤다.

“바이스 레시아르여! 물러나시오! 귀하께선 함부로 켈자르의 영지를 침범하고 인명을 살상하였소! 지금이라도 군사를 물리고 항복한다면 관대한 처우를 내리겠소!”

개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목이 간질간질해도 맞춰주어야 했다.

“먼저 그대 켈자르가 우리 레시아르를 침공하였으니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 군사를 물리기를 원한다면 우선 아티아 침공에 대해 사죄하라.”

“그건 애초에 레시아르가 신뢰를 배반했기 때문이오!”

“켈자르와 레시아르가 신뢰를 운운할 관계는 아니었지. 항복은 내가 권한다. 너희 켈자르 놈들이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내가 켈자르에 줄 건 창칼과 화염뿐이다.”

“후회하실 거요.”

기사는 홱 등을 돌려선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아갔다.

타라는 그 사이에 중앙에 간이 연단을 만들어두었다.

“병사들이 각하의 연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장군 연설을 바라는 병사는 없어. 그래도 준비했으니 짧게 끝내지.”

나는 연단에 올라 첫 마디를 뗐다.

“나는 이기는 싸움만 한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켈자르와 파티스가 연합해 쳐들어온 아티아에서 이겼고, 세 개 기사단이 몰려온 마티란에서 이겼으며, 난공불락의 요새 디부시에서 이겼고, 이제 여기 카르마시아에서 이길 것이다.”

맞장구를 치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나는 연전연승했고, 적은 연전연패했다.

지금 피아의 전력 차가 얼마나 나든,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카르마시아가 눈앞에 있다. 수백 년 동안 부를 쌓아온 도시다. 나는 제군들에게 그 도시를 이틀간 약탈할 것을 허락하겠다. 그 이틀간은 무얼 해도 좋다. 금과 보화를 털고, 능력껏 여인을 취해라! 혹시 아나?”

꽁꽁 묶은 체닐린을 단상 위로 올려, 그 허리에 손을 휘감고 젖통을 꽉 쥐었다.

“제군도 카르마시아에서 이런 여자를 얻을지!”

“와아아!”

사기가 번쩍 오르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남자는 뇌를 좆이 지배하는 게 맞다.

내가 그러거든.

긴 말 필요 없이 이기면 미인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어지간한 놈들은 따르게 되어 있다.

“나팔을 불어라. 먼저 전진한다.”

부.

부우우.

우리가 먼저 전진하자, 곧 적진도 부산스러워지더니 이내 전진을 시작했다.

최전방에 선 창병들이 서로 어렴풋이 얼굴을 알아볼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나팔수가 미리 귀띔받은 대로 한 번 더 나팔을 불었다.

아군 보병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고, 적 보병들은 당황하면서도 따로 지시가 없으니 계속 전진했다.

어디 책에서 봤던 내용인데, 이렇게 한 번 호흡을 챙겨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 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실전에서 제대로 먹힐지 조마조마했지만,

과연.

적 보병이 아군 진형까지 달려오느라 헐떡이는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찔러!”

중대장들의 우렁찬 외침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창을 내질렀다.

호흡이 무너진 적들은 창끝을 막아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내 병사들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창을 푹 찔렀다.

천여 명에 달하는 보병들이 마치 한 몸처럼 창을 내미는 건, 흡사 거대한 고슴도치와도 같았다.

원거리 행군과 몇 번의 전투를 통해 원정군 보병들은 정병으로 거듭나 있었다.

수는 많지만 마력창이나 화살받이로 쓰이고 버려지는 적 보병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각하. 아군의 기세에 적들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좌측, 저기 언덕지대까지 쭉 밀라고 해. 저기서 재정렬한다.”

“예.”

타라가 연락병들을 풀었다.

곧 대대기가 좌측을 가리키며 펄럭였다.

“제1 대대! 전진한다!”

“제2 대대! 뒤쳐지지 마라!”

“제4 대대! 저녁은 카르마시아에서 먹는다!”

대대장들이 서로 경쟁하며 조금씩 자신의 대대를 진격시켰다.

각 대대마다 몇 명씩 배치된 마력병들이 때때로 마력창을 내던져 적 사관들을 저격했다.

켈자르 군은 보병대에서 마력병들을 따로 빼어 기사들과 함께 좌익에 편성하였으니, 아군의 마력병을 상대할 적수가 없었다.

하급 지휘관이 마구 죽어나가자, 적 보병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수는 세 배나 많은 켈자르 보병대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렸다.

결국 언덕지대 곳곳에 레시아르의 대대기가 올라왔다.

“됐군. 이러면 적들이 따로 수를 쓰지 않는 이상 보병 간 힘 싸움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적 좌익 움직임은 어떤가?”

“기사단은 아직 출격하지 않았습니다. 아, 방금 마력병 일부가 좌익을 빠져나왔습니다. 향하는 곳은... 아군 보병대가 점령한 언덕지대입니다!”

“수는?”

“삼, 사십 명 정도입니다.”

“언덕을 탈환하려는 거겠지. 초전의 실패가 거슬리나 보군.”

“예…….”

타라는 가만히 있으려니 손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백여우 기사단을 출격시키면 적도 마찬가지로 기사단을 보낼 거다.

그렇게 되면 곧장 전면전이고.

보병끼리의 전투는 아군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만큼, 최대한 길게 끌어서 이득을 봐야 한다.

“각하. 적 마력병이 보병과 합류했습니다.”

“아군이 밀리네.”

지금까지 적수 없이 날뛰던 아군 마력병들이 적 마력병들에 의해 하나씩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아군은 마력병을 대대에 흩뿌려놓은 반면, 적은 마력병으로 소대를 꾸렸으니.

수에서도, 결집력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건 어쩔 수가 없다.

레시아르와 달리 켈자르는 꽤 오래 전부터 마력병을 중시하면서 별개 분과로 운용하고 있었으니까.

적에게도 배울 건 배워야지.

이번 원정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면 나도 마력병들을 따로 뽑아 조련시킬 생각이다.

뭐, 그건 나중의 일이고.

아군 마력병이 소모되자, 켈자르 군이 기세를 되찾아 역공을 시도했다.

적 마력병이 선두를 맡고 한꺼번에 마력창을 수십 개나 던지자, 아군 보병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나갔다.

저런 일이 벌어지면 한 순간에 전장이 뻥 뚫린다.

적에게는 쾌진격할 도로를 닦아주는 셈.

중앙을 맡은 제2 대대가 적들의 맹공격에 뒤로 물러났다.

“저런! 겁쟁이!”

가만히 있던 파샨이 분노해서 송곳니를 드러냈다.

“겁쟁이가 아니야. 잘 판단한 거지.”

제2 대대가 전선을 뒤로 물리자, 자연스레 적의 중앙부가 앞으로 돌출된 형국이 되었고, 좌익과 우익으로 양쪽 언덕을 점거 중인 제1, 4대대에게 그대로 측면이 노출되었다.

“투창!”

제1, 4대대 보병들이 일제히 나무창을 던졌다.

언덕 사이에 끼인 지형에 밀집된 채로 옆구리를 내준 적 선두 병사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마력병들이 이따금 방어막을 전개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지금까지만큼의 활약상은 보이지 못했다.

타고난 출신이 동혈 이하, 대개 수혈이니 마력의 출력에 한계가 뚜렷한 것이다.

“제2 대대! 전진한다!”

주춤거리던 중앙의 제2 대대도 아군의 분전에 용기를 내어 적과 맹렬히 부딪혔다.

적 보병대는 삼면에서 공격을 받으며 혼란에 빠졌다.

여전히 적의 수가 아군보다 세 배는 많지만, 당장 전선에 투입되어 창칼을 맞대고 있는 켈자르 병사들은 마치 포위된 듯한 착각이 들겠지.

승리의 징후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적 보병 중에 불안스레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는 자가 늘어나고.

부사관들의 외침이 비명소리에 묻히며.

켈자르 군의 깃발이 하나둘씩 부러지며 땅에 눕는다.

“포위당했다!”

“살려줘!”

“레, 레시아르 놈들이 사방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적 진형이 붕괴하기 직전.

진흙악어 기사단 일부가 깃발을 올리고 출격했다.

“그래. 켈자르 놈들도 보병을 다 버릴 순 없겠지. 우리도 백여우를 보내. 악어를 쫓아라.”

오록스가 도끼를 위로 쳐들어 신호를 보냈다.

백여우 기사단들이 말에 올라 창을 부여잡았다.

“각하. 소관도 다녀오겠습니다.”

나를 곁에서 보조하던 타라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승리다. 승리를 가져와라.”

“예. 각하. 레시아르에 승리를.”

타라는 내 명령에 오히려 안심한 기색이었다.

흔들림 없이 말을 몰아가 백여우 기사단에 합류했다.

곧 백여우 기사단이 아군 보병 후방으로 길게 돌아가던 진흙악어 기사단의 꼬리를 물었다.

마력창이 사방에서 번뜩일 때마다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기사들의 싸움은 보병들과는 또 달랐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다채로운 색의 마력이 번쩍이며 때로는 창으로, 때로는 방패로, 때로는 특유한 파동 형태로 나타나서 살을 가르고 피를 뿌렸다.

“진흙악어 기사단! 돌아서서 맞서라!”

“비열한 백여우 녀석들을 찢어발겨라!”

뒤에서 물린 탓에 꽤나 손해를 입은 진흙악어 기사단이 목표물을 아군 보병에서 백여우 기사단으로 바꿨다.

백여우가 진흙악어를 일방적으로 사냥하던 형국에서, 태극 문양으로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는 형국으로 변했다.

전투가 더 치열해지면서 흙바닥에서 열기까지 피어올랐다.

오록스가 도끼질로 적 이등기사 하나를 말과 함께 베어버리자, 그에게로 기사 넷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타라가 급히 끼어들어 그 중 하나를 막는 동안, 오록스는 세 놈의 목을 차례대로 날렸다.

분노한 적 일등기사 두 명이 합을 맞추며 오록스에게 칼을 내밀었다.

검 끝이 오록스의 얼굴과 가슴팍을 긁고 지나갔지만, 오록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 기사 한 놈의 말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말이 주저앉으면서 일등기사가 위로 튀어 오르자, 오록스는 그를 붙잡아서 반대편의 일등기사에게 내리찍었다.

켈자르 기사 둘은 서로 부딪혀서는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시체도 제대로 남지 않을 것 같은 흉악한 죽음이었다.

확실히 오록스의 무위는 기사들 중에서도 발군이다.

그의 활약 덕에 아군 기사 수가 더 적음에도 접전은 대체로 백중세.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는다면 수가 더 적은 아군에 더 치명적이다.

게다가 적 기사단 잔여 전력도 어느새 출격해 백여우 기사단의 근처를 빙빙 돌고 있다.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대로 백여우 기사단을 치겠다고 시위하는 거겠지.

켈자르 가주가 먼저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결국은 내가 먼저 힘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파샨.”

“예! 도련님!”

“이제는 개싸움이다. 무조건 날 지켜.”

“이 파샨! 몸 바쳐 도련님을 지키겠습니다!”

“너만 믿는다.”

손을 튕겨서 불똥을 만들어내고, 그걸 휘어잡아서 앞으로 내던졌다.

튀어나간 화염이 백여우 기사단의 후미를 노리던 청록물소 기사단 깃발을 휘감았다.

기수(?手)가 화들짝 놀라 깃발을 땅으로 내던졌다.

“마법사다!”

“저기다!”

“레시아르의 탕아를 죽여라!”

아무리 전장이 넓더라도 마법의 불길이 날아온 곳을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곧, 내 쪽으로 진흙악어 기사단 일부와 청록물소 기사단 전원, 그리고 마력병들이 맹돌진해왔다.

켈자르 가주가 정정하다면, 그리고 모험적인 노인네라면 저 안에 숨어있겠지.

나는 화염을 엮어 거대한 화살을 만들어 내고, 놈들을 향해 쏘았다.

“타 죽어라!”

“방어막 전개! 한 번만 버텨라! 한 번만 버티면 된다!”

마력병들이 견고한 집단 방어막을 형성해냈다.

수백 명이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짜낸 방어막.

화살은 방어막 정중앙에 콱 꽂혔다. 균열이 생기긴 했지만 바로 관통하진 못했다.

불화살은 확 불길을 일으키면서 방어막 위에서 꿈틀거렸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켈자르 마력병들도 필사적이었다.

놈들은 코와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소리쳤다.

“버티면 일 계급 특진이다!”

“여기서 뚫리면 레시아르의 탕아가 카르마시아를 불태우고 네 놈들의 아내와 딸을 겁탈할 거다!”

“죽어도 막아라! 죽는다는 기세로 막아라!”

화르륵, 불길이 방어막을 뒤덮듯이 번졌지만 마력병들은 사력을 다해 마력을 짜냈다.

결국 화살은 방어막을 깨지 못하고 사라졌다.

제기랄.

그 사이 기사들은 시시각각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성급한 놈들은 벌써부터 마력창을 휙휙 던져댔다.

포위당한 채 접근전에 들어가면 불리하다.

나는 친위대와 호위병들을 이끌고 일단 우측으로 기동하려 했다.

그 순간, 언덕지대 근처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도련님!”

파샨이 급히 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얼음 칼날이 파샨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죽을 뻔했네.

동체시력은 순수 수인인 파샨이 나보다 배는 낫다. 이거 나 혼자였으면 손도 못 쓰고 죽었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파샨의 귀를 쓰다듬으면서 진정시켰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어. 넌?”

“저도요. 근데 저거...”

“그래. 노인네가 드디어 나왔네.”

나는 몸을 일으키고는 동그랗게 화구를 빚어냈다.

적진에서 또 한 번 얼음 칼날이 날아와 내 화구를 터뜨렸다.

마법사의 마력이 날아온 길을 되짚어 보니,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네가 보였다.

거리는 꽤 멀지만 마법사가 쏘아낸 마력의 궤적은 매우 독특해서 못 알아볼 수가 없다.

그가 선 곳은 언덕지대 중 적 마력병 분대가 물러나면서 점거한 분지.

기사들 중에 섞여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병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말을 탈 정도의 기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 노림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골치 아프게 됐다. 언제 또 저기까지 가나.

“레시아르의 탕아가 저기 있다!”

“마티란 성의 복수를!”

“하늘기린 기사단의 복수를!”

켈자르 가주의 견제에 잠시 주춤한 사이, 적 기사들이연기와 화염을 뚫고나를 향해 쇄도해왔다.

여기서 발목을 붙잡히면 켈자르 가주에게 좋은 표적이 될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켈자르 가주에게 붙어서 그 노인네를 죽이건 사로잡건 하는 게 이 전투를 끝낼 유일한 방법이다.

“가자!”

나는 호위병과 친위대를 이끌고 놈들을 피해 돌면서 언덕지대 쪽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친위대는 제3 보병대대를 개편해서 만든 부대로, 거의 전원이 보병출신이다.

말을 탄 자가 거의 없고, 말을 탄 자의 기마실력도 형편없다는 뜻이다.

점점 친위대가 뒤로 늘어지면서 악귀처럼 쫓아오는 적 기사단에게 하나둘씩 사냥 당했다.

“각하! 이대로 당하느니 차라리 뒤를 막아 싸우겠습니다!”

하이엔이 친위대를 반전시켰다.

그러지 말라느니, 살아 돌아오라느니 하는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친위대는 살건 죽건 모두 명예기사로 서임하겠다. 가족들은 기사의 가족으로 대우해주지. 하이엔 친위대장, 그대는 지금부로 남작이다. 서임식은 백작령에 돌아가서 하겠다. 반드시 참석하도록.”

“예. 각하.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그럼, 친위대! 돌격!”

친위대는 하이엔의 호령에 따라 적 기사단에 돌격했다.

모래로 된 인간이 파도에 달려들면 그런 식으로 무너질까.

친위대는 순식간에 적들의 무리 속에 삼켜졌다.

그들이 번 시간은 내가 숨 한 번 고를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간마저도 너무나 중했다.

“씨발…….”

“도련님!”

파샨이 내 어깨를 오른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왼쪽으로 얼음 칼날이 살벌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내 뒤에서 말을 달리던 호위병 하나가 얼음 칼날을 얼굴에 맞고는 애처로운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낙마해 굴렀다.

딴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들어보니, 켈자르 가주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서 얼음 칼날이 찔끔 새어나오다가 사출되는 대신 그대로 땅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래. 저 노인네도 기력이 충분하진 않다.

내가 급한 만큼 켈자르 가주도 병약하다.

그렇다면 승산은 있다.

저기까지 닿기만 한다면.

문제는 그걸 적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거다.

내가 언덕지대까지 가서 켈자르 가주를 잡느냐, 못 잡느냐의 승부.

적 기사들은 뜨거운 콧김을 몰아쉬며 내 뒤를 바싹 추격했다.

“청록물소! 물소의 뿔!”

“아이! 아이! 아이!”

“투사!”

뒤에서 부웅하는 소리가 나더니 등골이 섬뜩해서 슬며시 돌아보았다.

청록물소 기사들이 쐐기진형으로 달리며 그대로 마력창을 쏘아, 하나의 거대한 쐐기 모양의 마력창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이건 못 피한다. 막아내거나 비껴내야 하는데.

마력을 꽤 소모해서 불길을 뒤로 확 쏘아냈다.

방사된 화염이 거대한 마력창의 끝을 살짝 들어올려, 그대로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것도 잠시.

적 기사단 사이에서 또 한 번 지랄맞은 외침이 울렸다.

“청록물소! 물소의 뿔!”

또냐.

이대로 찔끔찔끔 마력을 소모하면서 가다가는 켈자르 가주 앞에서 마력이 부족해 낭패를 볼 지도 모른다.

결국 누군가가 또 산제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파샨은 어리버리해보여도 꽤 눈치가 있는 편이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휘하 기사들과 함께 말머리를 돌렸다.

“도련님. 가세요! 제가 막겠습니다!”

“파샨... 죽지만 마라.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할 테니까.”

“도련님이 저 키웠잖습니까. 저 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파샨은 히 웃고는 단검과 중검을 양손에 뽑아들고 적을 향해 갔다.

작은 여우 수인이 적진에서 날뛰면서 청록물소 기사들을 마구 베고 찔렀다.

나를 노리고 하나로 응집되던 마력창이 도중에 무산되며 사라졌다.

“됐다! 일단 물러나! 도련님께로 돌아간다!”

하지만 성난 청록물소 기사단은 파샨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레시아르에는 근본 없는 수인이 기사단에 있다더니.”

“바이스 레시아르의 여자라지?”

“저 년의 목을 베어라! 탕아의 앞에 던져줄 것이다!”

빛나는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파샨에게 검을 휘둘렀다.

파샨은 말 아래로 굴러선, 놈들이 탄 말의 다리를 베었다.

그리고는 어지럽게 말발굽이 돌아다니는 흙바닥을 아슬아슬하게 돌아다니며 말 다리만 골라서 찍고, 베고, 자르고.

파샨의 목적은 분명했다.

기사들을 말에서 떨어뜨려 추격을 늦추는 것.

애마를 잃은 기사들은 분노해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비천한 여우 년이!”

“비겁한 수작이그 주인에 그 종이구나!”

“온전하게 죽을 생각은 말아라!”

파샨은 곧 체구가 커다란 적 기사들 사이에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살아만 있어라. 죽지만 마라.

나는 계속 그 말을 되뇌면서 달렸다.

이제 내 곁에 남은 것은 스무 명 남짓한 호위병들 뿐.

친위대와 파샨의 희생 덕에 언덕지대까지는 간신히 올라왔다.

다행히도 아군 보병의 우세는 유지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군은 언덕 위에 임시 진지까지 구축한 제1 대대.

깃발도 잃었고 연락병도 없다.

하지만 제1 대대장은 내 지시 없이도 기민하게 보병들을 이동시켰다.

그들은 나를 쫓아온 적 기사들 앞으로 우르르 내려와 방진을 짰다.

고지대를 점한 아군 보병에 지세가 유리해, 적 기사단은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마티란 성 동문에서 그랬듯, 밀집한 보병이 기사를 잠시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결코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나는 길목을 틀어막은 제1 보병대대를 뒤로 하고, 쉼 없이 말을 채찍질했다.

“켈자르 백작은 어디냐?”

“저깁니다! 각하!”

호위병이 내 옆으로 말을 달리며 전방을 가리켰다.

켈자르 가주가 근위기사들과 함께 분지 뒤편으로 탈출하려하고 있었다.

저기서 카르마시아 남문까지는 말 달려 십여 분이면 도착할 거리다. 놓치면 모든 게 끝난다.

“달려라! 이랴!”

말이 뻘뻘 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다리는 열심히 놀리고 있지만, 이제 곧 한계라는 거다.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는데 지금껏 착취만 한 게 갑자기 미안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속도를 늦출 순 없다.

나는 채찍질을 더했다.

말은 힘겹게 울면서 더 빨리 달려 나갔다.

“빌어먹을 녀석!”

갑자기 그런 소리가 들렸나 싶더니.

켈자르 가주가 지팡이를 휙휙 휘둘렀다.

내 머리 위에서만 먹구름이 끼더니, 그 아래로 폭우가 쏟아졌다.

쨍쨍한 대낮에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거다. 그것도 내 머리 위로만.

내 말은 갑자기 진탕이 된 땅을 발고는 다리를 접질려 쓰러졌다.

그래도 품종이 좋은 녀석이라 주인이 다치지 않게 제 다리를 꺾으면서도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나를 내려놓았다.

“고맙다.”

나는 내 몸을 불길로 휩싸고 켈자르의 가주에게 달렸다.

이제는 마력을 아낄 때가 아니다.

불길이 확 일면서 내 머리 위에 붙박여 있던 먹구름을 밀어냈다.

적 근위기사들이 마력창을 쏘고 마력파동을 발산했지만, 화염을 뚫지는 못하고 모두 녹아내렸다.

켈자르 가주가 지팡이를 들어서 내게 겨냥했다.

눈덩이가 굴러오면서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작은 아이 정도, 그 다음에는 말이나 소 정도, 그 후에는 집채만큼 불어났다.

피하면 기껏 좁힌 거리가 벌어진다.

강행돌파다.

몸을 태우는 불길에 마력을 땔감으로 밀어 넣어 크기를 확 키운다.

붉은색 화염이 주황색, 황색으로 변하면서 온도를 높여나갔다.

마력 쭉쭉 빠지는 게, 밑도 끝도 없이한없이 사정하는 것처럼 피곤하다.

불알이 쪼그라들다 못해 몸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달렸다.

눈앞에 닥친 집채만한 눈덩이.

두 팔을 엑스자로 들어서 얼굴만 감싸고 달렸다.

“씨바랄!”

퍽.

눈덩이는 나를 통과해서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돌아보니 내가 부딪힌 곳은 화염에 녹아서 구멍이 사람 인자로 나 있었다.

이제 켈자르 백작과의 거리는 오십 미터 남짓.

저 늙은이의 검버섯 핀 얼굴에도 긴박감이 감돈다.

켈자르 가주는 추하게 헉헉거리면서 지팡이를 여러 번 휘둘렀다.

내 주위로 우박이 쏟아졌다.

열기를 내뿜어 모두 녹였다.

땅으로 스며들던 물이 뱀으로 변해서 혀를 날름거리며 내 다리를 휘감았다.

그 놈을 잡아들고 불길을 뿜어 증발시켰다.

그리고는 켈자르 가주가 또 수를 쓰기 전에, 뜨거운 열기를 그러모아 전방으로 분사했다.

“마력창!... 아아악!”

켈자르 가주를 둘러싼 근위기사들이 열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다.

갑옷 사이사이로 드러난 살이 익어가면서 흉한 물집을 냈다.

불길이었다면 창이 아니라 방어막을 전개했겠지만 수증기라 얕잡아봤겠지.

근위기사들이 쓰러진 사이로 커다란 틈이 드러났다.

켈자르 가주가 지팡이를 부여잡고 덜덜 떠는 게 보인다.

나는 화염을 휘감은 주먹을 휘둘렀다.

“파이어 펀치.”

켈자르 가주는 뒤늦게 얼음꽃을 피워냈다.

원래라면 마력병들의 마력 방어막과는 비교도 안 될 견고한 방패.

하지만 늙고 노쇠한 데다가 지친 켈자르 가주는 원래의 위력을 내지 못한다.

쨍그랑!

불주먹이 얼음꽃을 깨뜨렸다.

얼어붙은 꽃잎이 파편으로 휘날리며 켈자르 가주의 몸에 박혀들었다.

“커헉!”

켈자르 백작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적들의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나는 그 늙은이의 머리를 잡아서 위로 올려들었다.

"내가 이겼다. 켈자르 씹새끼들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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