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6화 (16/166)

〈 16화 〉 항복의 조건

* * *

“그럼, 양측이 합의한 항복 조건을 읊겠소.”

하나. 유구라드 켈자르 백작 대리는 레시아르 침공에 사과하고, 원정군 사령관 바이스 레시아르의 이번 원정이 그 침공에 대한 정당한 복수임을 인정한다.

둘. 유구라드 켈자르 백작 대리는 원정군 사령관 바이스 레시아르에게 금화 사만 개를 즉시 배상한다.

셋. 카르마시아는 이틀간 약탈당한다. 그 동안 켈자르 군은 기사 백 명을 제외하고 모든 무장을 해제한다. 다만 내성과 귀족 및 기사의 저택은 약탈 대상에서 제외된다.

넷. 켈자르 군과 레시아르 원정군이 잡은 포로는 서로 일대일로 교환한다. 교환 후에 레시아르 원정군 측에 남은 켈자르 군 포로가 있다면, 유구라드 켈자르 백작 대리는 기사 일인당 금화 열 개, 마력병 일인당 금화 세 개, 보병 일인당 금화 반 개로 계산한 금액을 원정군 사령관 바이스 레시아르에게 몸값으로 지불한다.

다섯. 유구라드 켈자르 백작 대리가 위 조건을 이행하는 동안 켈자르 백작은 볼모가 되며, 원정군은 라울 강을 넘기 전에 켈자르 측에 켈자르 백작의 신병을 무사히 인도한다.

“이상이오. 이제 이의 없소?”

켈자르 백작의 장남이자 카르마시아 전투의 적 지휘관이던 유구라드가 지친 기색으로 물었다.

내가 켈자르 백작을 사로잡음으로써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이 밤중까지, 거의 반나절 동안 설전을 벌였으니 당연하다.

“좋소. 그대로 합의합시다.”

내 말에, 유구라드는 간신히 표정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오. 나는 남자랑 악수하지 않는 주의라.”

나는 유구라드 옆에 다소곳이 서 있던 여자의 손을 잡았다.

유구라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손이 참 곱군. 이 숙녀 분은 누구요?”

“내 아내요.”

나는 손을 꼭 잡은 채 다시 한 번 여자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회색에 가까운 은발을 등까지 길게 길렀고, 눈매가 긴 편인데 아래로 내려가서 온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서른 조금 넘었을까.

마티란 자작과 비슷한 연령 같지만 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마티란 자작과는 달리 청초하게 생겼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귀부인 상인데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체닐린이 떠올랐다.

키가 여자치고는 큰 편이라도 나보다는 머리 하나 작으니 체닐린과는 꽤 다른 편인데.

왜 그러지?

“부인. 이름을 여쭈어도?”

“마리안 켈자르입니다. 사령관님.”

마리안은 자연스레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빼면서 치마를 살짝 잡아 올렸다.

그 손이 내려가기 무섭게 유구라드가 낚아채서 자기 손에 쥐었다.

손 한 번 잡은 거 가지고 되게 질투하네.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소. 부디 아버지를 잘 부탁하오.”

유구라드는 자기 아내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막사를 걸어 나갔다.

돌아가서 섹스하려나? 부럽네.

“각하. 이번 전투 보고 준비되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전장 정리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던 타라가 피곤한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피곤하면 내일 해.”

“아, 아닙니다.”

“그럼 그냥 일찍 끝내지. 우선 켈자르 백작은 어떤가?”

“마력을 많이 써서 마력탈진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화로를 꺼내 몸을 덥히고 약을 준비하도록 일러뒀습니다.”

“잘 했어. 중요한 인질이니까 호위는 엄중하게 하고, 죽지 않게 잘 관리 해.”

“예. 그럼 다음으로...”

“아군 피해부터.”

“우선 보병 중에서는 사망자가 백오십, 중상자가 백 명입니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제1 보병대대에서 나왔습니다.”

“제1 대대에서 기사단을 막아줘서 피해가 많이 났지. 보병대대 중 일등 공훈은 제1 대대로 해. 카르마시아 약탈할 때... 그러니까 내일에도 가장 먼저 입성시키는 걸로 하자고.”

당연히 전리품 분배는 별도다.

배상금과 포로 몸값으로 금화를 어마어마하게 벌었으니, 보병들에게도 금화를 적당히 나눠줄 생각이다.

“다음으로 백여우 기사단에서는 기사 열 세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피해가 더 커질 수 있었는데 오록스가 잘 막아줬어. 뭐라도 하사품을 주고 싶은데, 뭘 주면 좋아할까?”

타라는 뿌듯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 단장은 레시아르 백작가에 충성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사람입니다.”

“그 충성이 백작가가 아니라 나를 향하면 더 좋을 텐데 말이야.”

“... 그렇군요.”

타라는 움찔하더니, 아직 자기가 그런 말을 받을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보고를 계속했다.

“친위대의 피해가 가장 큽니다. 하이엔 친위대장은 전사, 휘하 친위대원도 전멸했습니다. 다만 전장을 정리하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중상자 세 명을 구했습니다.”

“친위대는 앞으로도 제대로 키운다. 일단 약속한 건 전부 지킬 거야. 전원 기사 서임하고, 하이엔은 명예 남작으로 봉한다. 살아남은 친위대 세 명은 새로운 친위대의 사관으로 하지.”

“병사들이 각하의 은혜에 감사할 겁니다.”

“호위병도 피해 많이 봤으니까 보상 준비하고... 그리고 파샨은...”

“녜. 됴련님.”

내 품 안에서 몸을 만 여우 수인이 꼬물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귀여운 얼굴에는 타박상이 한 가득이고, 온 몸에는 퍼런 멍이 들어 완전히 만신창이였다.

파샨은 적 기사들의 말을 베다가 말발굽에 밟혀서 갈비뼈가 부서지고 혀끝이 잘렸다.

피를 한 통이나 토했다는데, 청록물소 기사단은 파샨이 기절해서 죽은 줄 알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가. 기사들에게 걸렸으면 정말로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

내 손으로 만든 첫 번째 부하이자 귀여운 충복을 잃을 뻔 했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등골이 오싹해진다.

파샨이 죽었으면 청록물소 기사단의 처형을 항복 조건으로 달았을 지도 모른다.

켈자르 놈들이 그걸 받아주진 않았겠지만.

여하튼 파샨도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기여도만 따지면 죽은 하이엔 못지않으니 할 수만 있다면 작위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파샨.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다 시켜줄 테니까.”

“구롬... 댠쟝 시켜쥬세요.”

“그건 안 되지.”

“애여.”

“타라 얼굴 좀 봐라.”

타라는 야차처럼 파샨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 미얀.”

“아닙니다. 부, 단장님.”

오록스가 없더라도 파샨은 기사단 단장을 맡기기엔 성격이 맞지 않는다.

출신도 너무 낮아서 귀족들을 자주 만나야하는 단장직을 주긴 좀 어렵다.

“자꾸 기사단 부단장 불러다가 부려먹는 것도 불편했는데... 이 기회에 그냥 친위대로 옮겨. 제2대 친위대 대장. 어떠냐?”

“치니대... 대쟝...? 죠아여...”

파샨은 대답하다 꾸벅꾸벅 졸더니 그대로 잠에 들었다.

많이 다쳤으니 잠이 고플 만 하지.

나는 파샨을 침대에 제대로 눕혔다.

타라가 어째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부단장이 돌아와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이지. 그리고 귀관도, 오록스 단장도, 생환한 모든 병사들이 생환할 수 있어 다행이다.”

죽은 자들은 안타깝지만 산 자들에게는 영광과 욕망의 길이 활짝 열렸다.

원정군은 승리했다.

내 부하들은 카르마시아를 취할 테고, 나는 승리와 이득을 통해 원정군을 사병화했다.

궤짝 째로 옮겨질 금화니, 상승장군이라든지 마법사를 꺾은 마법사라는 명성이니 하는 건 전부 부차적인 거다.

중요한 건 내가 내 세력을 확보했다는 것.

이 정병들을 데리고 귀환하는 날에는 켈자르 뿐만 아니라 레시아르의 패권도 바뀌겠지.

타라를 돌려보내고 파샨과 같은 침대에서 잤다.

소비한 마력을 회복하느라 꿈도 안 꾸고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시끌벅적한 소리에 막사를 나와보니,

아침부터 병사들이 모두 안달이 나 있었다.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허리를 돌리는 시늉을 내는 자도 있고, 한몫 단단히 챙기겠다며 빈 자루를 몇 개씩 허리에 묶어둔 자도 있었다.

얼마나 신이 나서 들썩이는지 중대장들이 병력 통제를 버거워할 정도였다.

여기서 고함지르고 채찍을 치라고 하면 군기가 다시 번쩍 들겠지만.

어제의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내 병사들에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마차를 병사들 앞으로 몰아, 그 위에 섰다.

병사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소음이 잦아들어 이야기가 들릴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외쳤다.

“우리는 승리했다!”

와 하는 환호성이 들렸다.

나는 잠깐 기다렸다가 한 마디 더 했다.

“카르마시아는 이제 우리의 것이다!”

“바이스! 레시아르! 바이스! 레시아르!”

병사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긴 말 따윈 필요 없었다.

“가자! 카르마시아를 탐하러!”

“와아아아아!”

나팔수가 그 어느 때보다 세게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카르마시아 성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가를 따라 쭉 서 있는 양과 염소 수인 여자들.

객관적으로 보면 미녀라고 할 만한 여자도 꽤 섞여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화장이 짙고 옷차림이 야하다.

창녀들이 분명하다.

누가 수를 썼나 본데.

“레시아르 원정군 만세!”

“안아주세요!”

“아앙!”

창녀들의 교태 어린 목소리에 병사들 눈이 뒤집히는 게 보인다.

목숨이 넘나드는 싸움을 하고 나니 한 시라도 빨리 정욕을 풀고 싶겠지.

그런데 성문이 열리자마자 수백 명의 미녀들이 추파를 던진다면?

그걸 어떻게 참나.

어떤 여자를 취하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긴 하다.

이미 눈이 뒤집힌 병사들에게 그런 말을 해봐야 들리지도 않을 테고.

굳이 그걸 권할 이유도 없고. 나야 병사들에게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되니.

대대장들이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내게 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중대장에게 허락을 맡고 다섯 명이 한 조로 뭉쳐 창녀들에게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곧장 교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앙!”

코가 큰 병사 하나가 전희도 없이 양 수인 여자에게 삽입했다.

하지만 여자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양모가 북실북실한 다리로 병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좆이 시무룩해졌지만, 대부분 수혈 출신인 원정군 보병들은 오히려 음심이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다리가 길쭉한 병사가 급히 꿇어앉아서 양 수인 여자의 입에 기다란 자지를 찔러 넣었다.

그를 기점으로 수십 명의 병사들이 떼로 허락을 받고 바로 창녀들을 찾아갔다.

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리를 벌렸다.

성문 앞에서 갑자기 난교가 벌어졌다.

타라는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조금 떨구었다.

내가 사정하는 모습은 봤어도 이렇게 단체로 난교를 벌이는 건 못 봤을 테니.

“타라. 뭐 느끼는 거 없나?”

“느, 느낀다니요?!”

“이 모습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단 말이야? 실망인데. 거부감을 가지고 보면 보일 것도 보이지 않는 거야.”

“죄송... 합니다.”

“이번은 설명해줄게.”

창녀들은 원래 군인들을 상대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우리 원정군은 약탈의 권리를 가진 자들.

마음 풀릴 때까지 섹스하고서도 동전 하나 내놓지 않을 원정군을 그녀들이 반길 리가 없다.

그런데 창녀들이 성문 앞에서부터 원정군을 기다린 건, 분명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던 거겠지.

“설마, 병사들을 지치게 하고 기습하려고 말입니까?”

“너무 나갔어. 켈자르 가주가 우리 손에 있는 한 놈들은 함부로 나서지 못해. 백작 대리도 아비 죽인 놈이라는 소릴 듣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할 거고. 뭣보다 골골 앓는 늙은이라도 마법사를 잃고 싶진 않을 테니.”

“그럼 성민들을 원정군의 강간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군요.”

“그래. 맞아. 그럼 왜 이런 수를 썼을까?”

“성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건 현상이지. 그 이면에 있는 건 성민들의 불만을 피하기 위한 의도야.”

나는 천천히 말을 몰면서 병사들이 창녀와 다양한 체위로 붙어먹는 걸 감상했다.

앙앙거리는 신음소리와 열기가 뒤섞여서 이 근처는 완전히 광란의 장이었지만, 조금만 더 나아가면 거리는 한산했다.

행인은 아예 없었고, 집집마다 판자로 문과 창을 덧대어 가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몰래 이쪽을 훔쳐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불안, 분노, 공포, 체념.

그 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뭉쳐서 카르마시아는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연전연패한데다가 주도 앞에서까지 패했으니 켈자르 가문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겠지. 그런 상황에서 성 안의 여인들이 강간까지 당하면 위신을 회복하기가 굉장히 힘에 들 거야.”

“최악을 막기 위해 창녀들을 모은 거군요.”

“그래.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과감하군. 이런 수를 하루 만에 떠올려서 실행할 수 있단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타라는 그런 수작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나를 기망한 것은 아닌지를 우회적으로 물어보았다.

“나로서도 나쁠 건 없지. 전투에선 승리했고, 켈자르 백작의 신병도 확보했지만... 그래도 아군은 병력 수가 너무 적거든. 겨우 수백으로 카르마시아에 입성했으니. 가급적이면 성민들의 불만이 터지지 않는 편이 좋아.”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카르마시아 성민들이 소란을 부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내 병사들이 창녀들의 접대에 불만을 가진다면 그건 다른 얘기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으니.

“다만 이런 수를 쓸 만한 자가 켈자르에 있다면 앞으로도 경계를 하긴 해야겠어.”

켈자르는 이번 원정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뛰어난 지도자가 있다면 언제나 재기는 가능하다.

적어도 유구라드 켈자르는 그런 기재 있는 남자로 보이진 않았는데.

나는 수를 짜낸 자가 누구일지 고민하다가 일단 접었다.

어차피 당장 답 나오는 문제도 아니고.

“하여튼 병사들 관리는 확실히 해야 해. 나중에 우리 병사가 뒷골목에서 칼에 찔린 채 발견되고, 그런 일 나면 양쪽에 좋을 게 없으니까.”

“예. 돌아가면서 순찰을 돌리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산책하듯 카르마시아를 돌아보았다.

주민들은 하나같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숨어있었다.

물론 문을 잠갔다고 해서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고.

거친 병사들이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선 동전과 은화를 잔뜩 털어서 나왔다.

운 없는 여자들은 도로까지 끌려 나와서 희롱 당하기도 했다.

정오쯤 되자 바짓춤을 내리고 다니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양과 염소 수인들은 섹스를 잘하고, 또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아마 우리 병사들도 많이 짜였겠지.

묵혀둔 정자는 다 싸냈을 테니, 이제는 주머니를 채우고 싶을 때다.

벽돌로 지어져 있고 정원도 딸려 있어 적당히 먹고 살만해 보이는 집을 지날 때였다.

막 그 집 문을 열고 나오는 병사들이 있었다.

어디 대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레시아르의 표식이 있으니 원정군이 맞긴 하겠지.

그들은 시시덕거리면서 품 안 가득 면직물과 항아리를 들고 나오다가, 나를 보고는 급히 그걸 옆으로 던져버렸다.

“사, 사, 사, 사령관 각하!”

“항아리 깨졌겠네. 기껏 갖고 온 건데 괜찮은가?”

“무, 물론입니다!”

“그럴 거 없어. 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가져가게. 이건 나를 따라준 그대들의 권리야.”

나는 병사들이 옆으로 던진 소박한 전리품을 힐끗 살펴보았다.

면직물이야 괜찮지만 항아리는 금이 가 있었다. 저러면 제값 받기가 쉽지 않다.

“항아리를 팔려고 가져온 거라면 내게 팔게. 물론 팔고 싶지 않다면 팔지 않아도 돼. 그대들이 자유로이 선택하면 되네.”

“저희가 어떻게 각하께 돈을 받겠습니까. 그냥 바치겠습니다.”

“그럼 본말전도지. 자, 넣어두게.”

넉넉하게 금화 세 개를 던졌다.

금일봉 천만 원.

내 전생에 이런 사장 있었으면 죽을 때까지 충성했다.

“이건 너무 많습니다!”

“그대들이 내게 보인 충성에 비하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야.”

병사들은 두 손을 들었다.

“위대하신 바이스 레시아르 사령관 각하께 충성을!”

“충성을!”

솔직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긴 하지만 뭐 어떠냐.

나는 칭송 받아서 기분 좋고, 병사들은 싸구려 항아리로 금화를 벌어서 좋고.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완성이다.

“각하. 저 항아리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병사들에게 받은 거니까 가져가자고.”

호위병이 금 간 항아리를 내게 가져왔다.

“안에 뭐가 들었나? 묵직하군.”

콩이 잔뜩 있었다.

그런데 콩만 든 것 치고는 너무 무거운데.

안으로 손을 넣어 콩 안을 뒤적였다.

“음?”

딱딱한 게 만져졌다.

그대로 꺼내보니.

“마력석이잖아.”

그것도 일반 마력석이 아니라 속성이 있는 마력석.

개중에서도 화석(火?)이었다.

내 속성에 딱 맞는 마력석으로, 잘 갈아서 섭취하면 영약으로 이만한 게 없다.

금화 삼천 개를 털어 넣어도 안 아까울 보물을 금화 세 개에 산 꼴이 됐네.

병사에게는 좀 미안하게 됐다.

그래도 경지를 한 층 더 끌어올릴 생각에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

생각지도 않은 횡재로 기분이 좋아져서 술 한 잔 걸치고 돌아다니는데,

화려한 비단옷 위에 거무죽죽한 망토를 걸친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걷는 게 약간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미인이다.

얼굴도 고양이상으로, 매력적으로 예쁘게 생겼다.

하녀, 메이드와 달리 시녀는 귀족가의 여식이다.

본래라면 함부로 취해서는 큰 문제가 된다.

하지만 나는 카르마시아 주도 앞에서 승리를 거머쥔 원정군 사령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시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시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간신히 원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냥 도망가지 않는 걸 보면 내게 중요한 용건이 있는 모양인데.

“사령관님. 작은 주연(??)을 준비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나는 시녀에게 초대장을 받았다.

“누가 보낸 건가?”

“마리안 켈자르 부인이십니다.”

유구라드 켈자르의 아내. 청초한 인상의 유부녀.

나는 어젯밤에 만졌던 부드러운 손을 떠올렸다.

각도기를 잘 재본 후에 나온 결론.

이건 충분히 걸어볼만한 야스 각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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