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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19화 (19/166)

〈 19화 〉 마리안 부인의 마음

* * *

늦은 밤. 카르마시아 외성 바깥의 레시아르 원정군 숙영지.

해지기 전에 복귀한 병사들이 그때까지도 자기네들이 따먹은 여자며, 훔쳐온 물건들을 떠벌리느라 온 막사가 들썩들썩거렸다.

나는 병사들의 충성 넘치는 경례를 받아넘기면서 막사로 향했다.

천막을 열어젖히니 오늘 바로 강탈해 온 게 분명한 침대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어디 부잣집에서 털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은색 원목으로 틀을 맞추고 비단을 층층이 쌓아 매트리스처럼 만든 게, 금화 수십 개는 가볍게 호가할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그 침대 위에 엎드려 있는 장신의 미녀, 체닐린 마이포흐.

“체닐린.”

“…….”

체닐린은 뒤로 엎드린 채 고개를 베개에 처박았다.

그녀는 디부시 요새에서부터 나와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시아르 원정군이 카르마시아를 점령하자, 자기를 완전히 자기만의 세계에 가둔 듯했다.

내가 디부시 요새에서 체닐린을 따먹으면서 했던 말.

주도가 불타고 켈자르가 패배하는 게 다 데나시 때문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다.

데나시는 결국 체닐린 자신에게 욕정해서 요충지인 디부시 요새를 넘긴 거니, 결국 켈자르의 패전에는 자기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만사 자기 책임이 아닌 게 어디 있나 싶은데.

나는 체닐린 옆에 앉아 매끈한 등을 쓸면서 취합해 온 정보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됐다.

마이포흐 남작가.

가주는 켈자르 백작과 나이가 비슷한 노인네였는데, 은퇴해서 텃밭이나 가꾸던 노인이 무슨 노망이 들었는지 카르마시아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죽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남, 차남, 삼남, 사남, 오남까지 형제들이 총출동해서 카르마시아 전투에 참전했다가 줄줄이 다 죽었다.

하필이면 오록스를 상대했던 모양인데.

재수도 없지.

줄초상 소식을 들은 남작 부인도 심장마비로 죽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안쓰럽단 생각이 들긴 하지만 딱히 미안하지는 않다.

전장에서 사람 죽는 거야 당연하고, 내 병사들도 천 명 넘게 죽어나갔으니.

남작 부인은 몰라도 남작과 그 아들들은 참전하기로 결정했을 때, 죽음을 각오했을 거다.

그래서 오록스와 겨뤘고, 패한 결과 죽었다. 그것뿐이다.

마리안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내게 내색하지 않은 거겠지.

나를 원망하면서도 켈자르 백작가를 위해서 안긴 거라면... 그건 진짜 무서운 여자고.

여하튼 그래서 마이포흐 남작가의 직계는 딱 두 명 남았다.

하나는 켈자르 백작가에 시집가면서 성을 바꾼 마리안.

다른 하나는 내게 사로잡힌, 전(?) 하늘기린 기사단장 체닐린.

이 둘은 자매관계란 거다.

세상에 단 둘만 남은 자매.

“언니가 있다면서?”

내 말에, 체닐린이 어깨를 움찔했다.

“마리안 켈자르 부인. 정숙한 사람이던데. 유구라드 켈자르가 부럽더군.”

그 남편 모르게 실컷 따먹고 있다는 얘기는 물론 하지 않았다.

체닐린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았던 주제에, 제 언니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세웠다.

“만나게 해주마.”

“... 왜지.”

체닐린은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좋아서.”

“헛소리!”

“정말이야. 이렇게 여러 번 안은 여자가 없었어. 나도 네 사랑을 받고 싶어서 나 나름대로 구애를 하는 거라고.”

완전히 진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도 아니다.

체닐린은 어디서 또 구하기 힘든 늠름한 미인이다. 이번 원정에서 내가 취한 최고의 전리품이고.

당연히 애착을 가지고 있지.

물론 체닐린은 내 말에 답도 않고 고개만 홱 돌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당장 뭐가 바뀔 거라곤 생각 안 했다.

나는 여자 호위병을 막사 안으로 불렀다.

“한 시간 뒤에 체닐린을 성내의 네마로우스교 참회소로 데려와.”

“예. 각하.”

바로 만나게 해줄 줄은 몰랐는지, 체닐린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퀭한 눈. 옴폭 패인 볼.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매력이 흘러나왔다.

덜 예뻤다면 나한테 이렇게 괴롭힘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불쌍한 여자 같으니.

#

이제는 자정을 넘긴 시각. 공식적으로는 카르마시아 약탈이 끝난 시간이다.

하지만 볼 일이 있으니 열라는 내 말 한 마디에 수문장은 순순히 외성의 문을 열었다.

“수고하는군.”

금화 몇 닢을 튕겨주자, 수문장은 허리까지 굽혀 인사했다.

패전을 거듭한 켈자르 군의 기강을 알만했다.

수습하려면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겠지.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곳은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교회.

이 세계에서 종교의 위세는 낮다.

신의 기적은 고대 이후로 끊긴 반면, 혈통에 따른 마력은 지금까지 존재감을 뽐내고 있으니까.

그래도 자애와 평화를 주창하는 네마로우스교()는 나름대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인도주의적인 소수의 영주와, 세간의 평판을 신경 쓰는 다수의 영주들이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준 덕에 어지간한 영지에는 네마로우스 교회가 하나씩 다 있다.

잠자다가 불려나온 신관은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인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내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이스 레시아르님. 저는...”

“인사는 됐고. 참회소 구경 좀 하지.”

“참회소 말입니까? 혹시 바이스 님께서 참회성사를 하실 건지요?”

“아니. 그건 아닌데. 하여튼 잠시 빌리지. 근처엔 오지 말도록 해.”

“예...”

참회소는 세 개의 분리된 방이 나란히 배치된 구조로 되어있었다.

중간 방에 성직자가 들어가고, 좌우측의 양쪽 방에는 참회하려는 교인들이 들어간다.

중간 방의 벽면은 아주 얇고, 참회창이라고 하여 좌우측 방과 연결되어 열고 닫을 수 있는 창문이 있다.

창문이라곤 해도 주먹보다 더 크기가 작아서, 안쪽을 들여다보기는 곤란하고 말소리를 주고받는 용도다.

머릿속으로 대충 그림을 그려봤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떠올라, 사람을 보내 마리안을 호출했다.

시간적으로 보면 침실에 있었을 마리안은, 내가 부르자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오른쪽으로 땋아 내린 게 생활감이 있어서 신선했다.

“애들은 잘 재우고 나왔어?”

“... 네.”

“남편은?”

“일찍 잠드는 사람이라...”

“말 안하고 왔어?”

“…….”

방금 대화 좀 괜찮았다.

불륜하는 남녀 같아서.

내가 느낀 걸 마리안도 그대로 느꼈는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수치심뿐만이 아니라, 미묘하게 호감과 부끄러움이 섞인 홍조였다.

이게 웬일이야.

떡정이라도 들었나?

하긴. 해 지기 전에 어지간히 박아주긴 했으니까.

시원하게 질싸하고서도 마리안한테는 피임막 쓴 것처럼 속였으니, 막 나가는 나쁜 남자가 자기 부탁을 들어줬다는 호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씨발 웃기는 일이다.

착한 놈이 착한 일하는 건 당연한데, 나쁜 놈이 가끔 한 번 착한 일 해주면 대단한 선행을 베푼 게 되니까.

전생의 호구 같은 인생이 떠올라서 괜히 또 화가 난다.

마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괜히 뒷짐 지고 그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마리안은 내가 또 무슨 지랄을 할지 불안해하는 눈치.

나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문을 뗐다.

“그래. 마이포흐 가문 출신이라고.”

“... 예.”

마리안은 그 한 마디로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한 눈치였다.

“나도 마이포흐 가문 출신을 하나 알지. 체닐린 마이포흐. 남작가 영애로 은혈 귀족. 하늘기린 기사단장. 그런 여자를 마티란 성 공방전에서 포로로 잡았는데.”

“…….”

“그만한 위치에 그만한 능력되는 여자. 당연히 몸값을 내고 되찾아갈 법한데, 이상하게 한 번도 협상단이 찾아오질 않았단 말이야.”

나는 마리안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귓가에 바람을 훅 불었다.

“왤까?”

“... 제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왜?”

“켈자르 백작가의 맏며느리 된 여자로서, 사사로운 정을 앞세워서는 안 되니까요.”

“체닐린을 구하는 게 사사로운 일인가?”

“레시아르 원정군에 붙잡힌 기사들은 체니 말고도 많아요. 다 몸값을 지불하기 힘들 정도로. 그 분들 모두 켈자르에 충성하느라 고역을 치르셨는데, 제가 제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체니만 구한다면, 그 누가 켈자르에 충성을 바치겠어요?”

“체닐린은 딴 놈들이랑은 다르게 능력 있는 기사단장이잖아.”

“하늘기린 기사단이 전멸한 시점에선, 지휘할 기사가 없는 기사단장이죠.”

마리안은 소신을 지키겠다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잔뜩 오그라들어서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마리안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그녀의 허리, 어깨, 가슴, 옆구리를 검지로 쿡쿡 찔렀다.

“그래서 여동생이 흉악한 남자 밑에 깔려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카르마시아에서 일대결전이나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야. 무섭다, 무서워.”

마리안은 자기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부어오른 죄책감을 한 번 더 자극했다.

“그래, 앞으로도 몸값을 낼 생각은 없고?”

마리안은 대답 없이 눈을 꼭 감았다.

체닐린은 능력과 지위 모두 높으니 금화로 몸값을 내려면 어지간한 액수로는 턱도 없다.

남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서 거의 멸문한 마이포흐 남작가의 재산으로는 몸값 낼 여력이 나질 않겠지.

그렇다고 마리안 성격에 시댁인 켈자르 백작가의 창고를 털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이거, 이거. 생긴 건 완전히 현모양처처럼 생겨서는. 알고 보니 아주 냉혈한이었어. 친동생은 어디서 누구한테 당하든 나 몰라라 하고. 주도에서 편하게 잠이 오던가?”

마리안은 눈물을 꾹 참고 나를 노려보았다.

“저도 괴로웠어요! 체니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늘 악몽을 꿨다고요!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레시아르의 장남은 여자를 밝힌다던데. 능욕을 보였을까. 죽이는 건 아닐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당신이... 당신 같은 남자가 뭘 안다고!”

“아.그래. 힘들었겠군.”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나와 큰소리치면서 싸울 생각이던 마리안은 내가 물러날 줄은 몰랐는지,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모아둔 비방과 생각해둔 힐난이 토해지지 못하고 마리안의 입 안을 맴돌다가 결국 안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안으로 떠밀려간 감정의 격류에, 숨겨두었던 속내의 어느 부분이 무심코 눌렸는지도 모른다.

마리안은 마치 정말로 참회성사를 하는 듯한 말투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안았을 때……. 아니, 아니에요. 아니... 에요.”

마리안은 급히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기점이다.

여기서 마리안의 속마음을 조금만 더 건드린다면 무언가가 튀어나올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부드럽게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뭔데. 말해 봐.”

“아,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말해보라니까. 괜찮아. 무슨 말을 해도 뭐라 하지 않을게. 마리안, 그대 잘못이 아니야. 그대도 그걸 알잖아.”

마리안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이미 스스로의 감정에 북받친 여자다.

포옹과 위로 몇 마디면 스스로 터뜨리게 되어 있다.

그대로, 마리안은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흐윽... 흑... 저는... 저는, 정말 더러운 여자에요.”

“그렇지 않아. 마리안. 그대는 강하고 고귀한 여자야.”

“당신에게 안겼을 때, 저, 실은 안심했어요. 당신이 저를 더럽혔으니,저도 그 아이랑 똑같이 되었다는 거에 안심한 거예요. 그걸로 체니가 구원 받는 것도 아닌데. 한심한 자기만족이죠.”

그랬군.

아무리 이타적인 사람이라도 백작가의 며느리 정도 되는 인간이면, 배상금 좀 줄이겠다고 적장에게 안기는 짓은 못한다.

그녀가 내게 몸을 판 이유가 있었다.

마리안은 방치한 체닐린에게 부채감을 안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내게 안김으로써 체닐린이 느낀 고통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부채감을 해소하려고 했던 거겠지.

배상금은 어찌 보면 내게 몸을 내놓기 위한 핑계거리였을 지도 모르겠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마리안은 속내를 다 쏟아내려는 것처럼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결국은 그이를 배신하는 건데, 그이를 위한 거라고 자기를 속이면서. 네. 헤픈 여자죠. 헤픈 여자에요. 창녀라고 하셔도 좋아요.”

“아이들을 보기가 부끄러워요. 히아신스 그 아이가 나를 보며 웃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아이에겐도덕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쳤는데, 엄마가 하고 있는 일을 저 아이가 안다면 나를 어떻게 볼지. 늘 그런 것만 생각하게 돼요.”

"체닐린은 잘 있나요? 제가 물어볼 자격이 없는 것 알아요. 늘 남들 앞에 서고, 물러나질 않는 아이였는데. 당차고 부러지질 않는 아이였어요... 기사가 된다고 했을 때에도 그렇게 말려도 듣질 않더니... 흐윽... 흑. 으으윽..."

“그런데 있잖아요. 오늘, 저 느꼈어요. 당신이 제 안을 푹푹 쑤실 때, 임신 시켜달라고 소리치면서, 저, 가버렸단 말이에요. 남편도 아닌 남자의 물건을 받아들이면서. 체닐린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뻔히 알면서 추잡하게 소리지르면서 가버렸단 말이에요! 이 헤픈 여자가! 흐으윽...”

마리안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체닐린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어주는 상대가 자기들을 이 상황에 빠뜨린 건 망각한 듯.

사실 지금 마리안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마리안의 속내를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무엇보다도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는 것.

지금의 그녀에게 나는 유일한 이해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개연성은 얼굴과 자지 길이고, 강간순애는 가능하다.

마리안은 내가 부정해주길 바라기에 오히려 강하게 자학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의 답을 해주었다.

유구라드 켈자르는 이 일을 알더라도 용서해줄 거다.

히아신스는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할 거다.

네가 느낀 건 내가 네 몸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니 네 잘못이 아니다.

위안에 논리 따윈 필요 없다.

그냥 적절한 온기와 촉감이 있으면 된다.

나는 가볍게 마리안의 손을 주무르기도 하고, 볼을 쓸고, 입술에 버드키스를 하거나, 등을 쓸어내리고, 안기도 하면서 마리안을 달랬다.

남편에게 절대 하지 못할 말을 내게 쏟아내는 마리안을 위로하다보니, 진짜로 불륜 연애상대가 된 거 같은 기분이다.

좀 귀찮긴 한데 훌쩍훌쩍 울면서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는 유부녀(애 셋 딸림)가 너무 귀여워서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어느 정도 마리안이 속내를 쏟아내고.

눈물을 검지로 훔칠 여유가 생기고 나서, 마리안은 살짝 혀를 내밀면서 웃었다.

“부끄럽네요...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난 좋은걸. 마리안의 마음을 알게 돼서.”

나는 마리안을 연인처럼 부드럽게 껴안았다.

마리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향해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눈을 감았다.

원하는 게 뭔지는 명확했다.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마리안은 조금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확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하하... 어떡해... 나... 진짜 바람피우고 있는 거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 그대가 유구라드를 사랑하는 걸 알고, 나를 그보다 더 사랑할 걸 바라지도 않아. 다만 그대가 이 순간, 바로 이 순간만은 나만을 봐줬으면 하는 거지.”

“그렇지만...”

“유구라드도 다른 여자를 품잖아. 그대도 잠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거라 생각해. 남편보다 더 젊고 더 강한 남자를.”

“...으휴. 말만은 정말 능숙하네요. 이런 달콤한 말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울렸을지...”

일부러 자지를 허벅지 사이에 문지르면서 모자란 모습을 보이자,

마리안은 피식 웃으면서 두 손가락으로 내 자지를 꼬집었다.

대딸과 손장난의 경계를 오가는 행위 와중에도 우리는 수도 없이 키스를 나눴다.

입술 사이에 늘어진 흰 실을 서로 좁혀가면서 다시 타액을 교환하고, 혀를 녹일 듯이 겹치고 뒤집고 빨고 핥다가, 흥분해서는 서로의 얼굴까지 침범벅으로 만들었다.

마리안이 결국 키스대딸로 사정을 한 발 이끌어내고,

잠시 열기를 식히는 동안.

나는 미끼를 던졌다.

“마리안. 체닐린을 보고 싶진 않아?”

“당연히 보고 싶죠! 하지만...”

“그럼 보여줄게.”

“무슨... 말씀이세요?”

“곧 있으면 체닐린이 여기로 올 거야. 만나게 해준다는 얘기야.”

“이렇게 갑자기요? 하, 하지만 저는...!”

적진에 방치한 여동생을 이제 와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만나야 할지, 마리안은 두려운 듯했다.

“지금 안 만나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데?”

체닐린은 나를 따라 레시아르로 돌아갈 거다.

이건 체닐린이 내 맘에 든 순간부터 정해진 결과다. 마리안의 착각과는 달리, 몸값을 준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체닐린이 레시아르로 가게 된다면, 켈자르 백작가의 며느리인 마리안이 그녀를 다시 만나기까지, 글쎄, 수년이 걸릴지 수십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한참 고민하던 마리안은 결국, 내게 물었다.

“제가... 그래도 되는 걸까요?”

“당연히 그래도 되지. 체닐린도 언니를 보고 싶어했어.”

내 말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했다는 듯 마리안을 두들기며 안았다.

마리안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대었다.

고요한 참회소 안에서 나와 마리안은 다시 한 번 키스하다가, 복도에서 발 울리는 소리에 급히 입을 떼었다.

발자국 소리는 둘.

호위병과 체닐린의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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