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개선
* * *
귀여운 소년소녀들이 도로 옆을 왔다갔다 달리면서 꽃잎을 뿌렸다.
환호성과 열띤 함성이 귓가를 찌릿찌릿하게 울린다.
영웅의 귀환에 레시아르의 주도, 아티아가 들썩였다.
그 영웅이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나는 대로 중앙으로 천천히 말을 몰면서 손을 들었다.
처녀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얼굴을 붉혔고,
청년들은 질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격차에 화를 안으로 삭였다.
“바이스 레시아르 도련님 만세!”
“레시아르의 영웅 만세!”
“마티란의 구원자! 디부시 요새의 파괴자! 켈자르 백작을 꿇어앉힌 자! 카르마시아의 정복자!”
영지민들은 열광에 차서 내 이름을 연호했다.
이들 중에도 작년의 대침공 때 켈자르 군에게 가족이나 친구가 죽은 이들이 많을 거다.
그런데 레시아르 백작가의 장남인 내가 나서서 적 주도를 점령하고 백작까지 포로로 잡아서 복수를 해줬으니 속이 시원하겠지.
내 뒤를 따라 행진하는 병사들도 신이 나서 어깨를 으쓱대며 걸었다.
귀환하는 길에 제식 훈련을 시킨 덕에 꽤 각 잡힌 군대 티가 났다.
“온 레시아르가 각하를 찬양하고 있네요.”
마티란 자작이 나란히 말을 몰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아티아에 입성했다.
이번 원정의 일등공신이 나라면, 이등공신은 켈자르의 역침공을 막아낸 마티란 자작이기에 논공행상에 빠질 수 없다.
사실 그것보다는 내 곁을 지키면서 정부 자리를 굳히려는 이유가 큰 것 같기도 한데.
“어머. 방금 이 아이, 발을 찬 것 같아요. 각하. 만져 보실래요?”
마티란 자작은 눈웃음을 지으며 자기 아랫배를 쓸었다.
착상한지 두 달도 안 됐을 텐데 발차기는 무슨.
내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리자, 마티란 자작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각하께서 흠 잡기 힘든 성과를 올리시긴 했지만, 백작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각하의 발목을 잡으려 할 거에요.”
“그러겠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여기, 아티아에선 백작의 말이 곧 법이니까요.”
“그래…….”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제가 각하의 곁에 있으니.”
그건 빈말만은 아니다.
북서부 변경 영주 중에서 마티란 자작은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다.
아버지도 그녀를 무시할 순 없을 터.
내 곁에 마티란 자작이 붙어있다면 아버지도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거다.
“아.”
마티란 자작이 갑자기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저기……. 나와 계시네요.”
아버지가 내성 바깥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심기를 숨기고 의연하게 그 앞까지 가서 말에서 내렸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잘 왔다. 내 아들아. 네가 자랑스럽구나.”
우리는 훈훈하게 포옹했다.
영지민들에게는 레시아르 일가가 단합되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으니까.
아버지는 나를 슬쩍 밀치고 나선, 우선 마티란 자작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타라와 파샨에게 눈을 돌렸다.
“그대가 오록스 단장의 여식인가?”
“고귀하신 레시아르 백작님을 뵙습니다.”
타라가 먼저 무릎을 꿇고 격식에 맞추어 인사했다.
“그리고 파샨 부단장. 오랜만이군.”
“아, 안녕하십니까...”
파샨은 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인사를 올렸다.
카르마시아 전투 때 다친 혀가 나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 이번 원정에서는 모자란 아들을 보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대들의 능력이 출중하고 충성심 또한 깊으니 바이스의 왼팔과 오른팔이 되어주길 바란다.”
말만 들어보면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것 같지만, 내 약점을 자기가 쥐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고 싶은 거겠지.
파샨이야 아티아에서는 늘 감시당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타라에게도 사람이 붙을 거다.
애매한 위치에 선 오록스도 의심을 받겠지.
나야 나쁠 거 없다.
아버지에게 의심 받을수록 그에 대한 충성심은 떨어질 테니.
저택으로 돌아가니, 메이드장 세리야가 성내 메이드들과 함께 나와서 인사했다.
“도련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세리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나는 가볍게 세리야를 끌어당겨서 안았다.
세리야는 내 어깨에 살포시 뺨을 문지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어서오세요, 도련님.”
“다녀왔어.”
이거거든.
내가 처녀를 뚫어준 쭉쭉빵빵한 메이드들도 다 한 번씩 포옹하고 난 뒤.
세리야는 내 뒤에 다소곳이 선 데이지를 보고 물었다.
“그 아이가 누군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베섹 근처였나?켈자르 변방 마을에서 주웠어. 메이드 삼으려고.”
“그럼 제가 맡아서 교육시키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리고 저 사람이...”
체닐린은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려다가, 그건 또 아닌가 싶은지 허둥지둥 거렸다.
“체닐린. 여기서 긴장할 필욘 없어.”
“그게 아니라…….”
“그렇군요. 저 사람이 전 하늘기린 기사단장……. 도련님. 어떻게 대우하면 될까요?”
“아직은 못 정했어.”
마리안이 빨리 정하라고 하다가 섹스하면서 좀 흐지부지 끝났지.
여하튼 실력만 보면 기사로 서임하는 게 맞긴 한데, 체닐린의 심경도 그렇고 레시아르 사람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당장은 어렵다.
“일단은 손님으로 대할까.”
“도련님. 죄송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포로를 손님으로 대하면 가문의 기강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처우를 도련님께서 정하실 때까지는 제가 메이드로 교육하는 게 어떨까요.”
“그럼 그렇게 해.”
체닐린이 뒤늦게 소심하게 한 마디 했다.
“메이드라니……. 나, 나는 청소를 해본 적이 없다.”
세리야는 체닐린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럼 더 열심히 배워야겠군요.”
세리야는 중간관리직 특성상 서열정리에 민감한 만큼, 당분간은 체닐린이 고생 좀 할 거다.
마리안이랑 약속한 게 있으니 너무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도록 하겠지만, 켈자르의 기사가 레시아르에 동화되려면 이런 과정도 거쳐야겠지.
나는 체닐린의 등을 툭툭 치고는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오늘은 피곤해서 빨리 자야겠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백작께서 도련님 돌아오시는 대로 들여보내라고 하셔서...”
이런 씨.
먼저 가있겠다고 하더니 뭔가를 준비해놓은 모양인데.
정겨운 환영회일 리는 없고.
“마티란 자작. 따라와.”
“예, 각하.”
나는 마티란 자작만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방 안에는 아버지가 상석에, 좌우로 두 명의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레시아르의 변방 영주 중 세력이 크고 충성도도 높은 셋을 뽑아 세 마리의 번견이라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북서부의 마티란 자작.
나머지 둘은 북동부의 기돔 자작과 부게른 남작이다.
즉, 여기에 레시아르의 핵심 영주들이 모두 모인 셈이다.
기돔 자작은 깔끔한 인상을 풍기는 미남자인 반면, 부게른 남작은 키가 작고 뚱뚱한데다가 대머리 추남이었다.
둘 모두 나이는 사십대 후반 정도.
“앉아라. 마티란 자작도 거기 앉으시오.”
아버지는 근엄하게 말했다.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는데 선빵필승이다.
나는 선 채로 선수를 쳤다.
“켈자르에서 아군의 원정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켈자르 놈들이 원정 일정에 맞춰서 역침공까지 계획해서, 잘못하면 마티란 성이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렇게 됐다면 원정은 상당히 힘들어졌겠죠.”
“정보는 어디서든지 새는 법이다. 레시아르에도 놈들의 간첩이 적지 않을 테고, 정오의 그림자 쪽에서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지.”
“누군가가 작정하고 흘린 건 아니란 말씀이시죠?”
“글쎄다. 네가 말하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그를 탄핵하려거든 증거를 가져와야지. 증거 있느냐?”
명탐정 코난 보면 꼭 저렇게 말하는 새끼가 범인이던데.
뭐, 이번 원정에 수상한 점이 그것만은 아니니까.
나는 계속 맹공을 이어갔다.
“켈자르 역침공 때문에 병사를 많이 잃었습니다. 오록스 기사단장이 지원을 청한 걸로 알고 있는데, 지원은 왜 없었습니까?”
“네가 켈자르로 간 동안 파티스 공국에서도 심하게 견제가 들어왔다. 병력을 더 뺄 여유가 없었다.”
“다른 영주들을 소집하지도 않으셨지요.”
“그들에게 피의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값비싼 일이다. 아무 때나 소집 깃발을 들 수는 없지.”
“켈자르를 정벌할 때 소집 깃발을 들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든다는 겁니까?”
“나는 너를 믿었다. 그리고 내 기대대로 너는 켈자르를 이겼지.”
아버지는 자기 안목을 띄우면서도 결국은 내 성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한 동안 나와 아버지는 치열한 눈싸움을 벌였다.
세 마리 번견들은 주인과 새로운 주인이 될 자간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또는 노심초사하며 지켜보았다.
짧은 침묵이 끝나고, 아버지가 반격을 개시했다.
“켈자르 백작은 왜 죽이지 않았느냐? 내가 분명히 그 자를 죽일 수 있으면 죽이라, 그렇게 말했을 텐데?”
“어차피 오늘내일 하는 늙은인데, 내 손에 피 묻힐 필요가 뭐 있습니까? 비실비실 대는 꼴을 보니 아버지가 떠올라서 안쓰럽더군요.”
아버지는 파르르 손을 떨었다.
웃기네.
내 손을 더럽히면 켈자르는 레시아르가 아니라 나를 철천지원수로 대할 텐데, 내가 그 노인네를 왜 죽이나.
켈자르 백작은 좀 더 살아서 아버지와 대립하며 양쪽의 힘을 적당히 빼주길 바란다.
그래서 조약 맺은 대로 라울 강에서 바로 돌려보내줬지.
골골거리는 거 보면 오래 못 살 거 같긴 하던데.
“그래... 그렇다면 배상금은 어디 있느냐? 수만 개나 되는 금화를 받았다고 들었다.”
“전부 쓸 데가 있어서 썼습니다.”
“전부 썼다고? 네가 그만한 돈을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아니,그리고 이번 원정을 치르느라 전비(戰?)가 얼마나 들었는지 아느냐?”
“그것은 영지세로 해결해야 할 게 아닙니까. 대침공 때의 일을 보복하고, 켈자르와 파티스에 경고하며, 레시아르의 위신을 세웠으니 들인 전비가 아깝게 쓰이진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레시아르 영주인 내 명도 없이 네가 사사로이 그걸 착복했단 말이냐!”
“죄송하지만 켈자르와 맺은 조약에 따라 배상금은 레시아르가 아니라 바이스 레시아르, 제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착복이 아니라 원래부터 제 돈인 셈입니다. 설마 아버지께서 아들 돈을 뺏어다 쓰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버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얇은 피부 위로 혈관이 불끈 튀어 올랐다.
그래. 한 대 쳐라. 나도 한 대만 치게.
하지만 아버지는 세 영주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화를 안으로 삭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통 큰 척하면서 배상금을 전부 내게 주겠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자비로워진 건 아닐 테고.
왜 그런지 알만했다.
정말 중요한 건 배상금이 아니라 영지 분배니까.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겠지.
“그래서, 베섹, 펜슬빌, 오치라는 어떻게 분봉(??)하기로 했습니까?”
원정에서 점령한 켈자르 변방 영지들이다.
이번에 켈자르와 맺은 조약에서는 그 영지들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영토 할양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레시아르에 할양하겠다는 확약을 받으면 좋았겠지만, 켈자르 입장에서는 그걸 레시아르에 넘긴다는 게 엄청난 부담이라, 유구라드 켈자르도 그것만은 기를 쓰고 막았다.
그래서 결국 켈자르 령을 레시아르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수준에서 타협을 보았다. 조약서에는 내용이 없는 구두 계약이지만.
영지를 빼앗긴 켈자르 영주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분쟁의 불씨가 남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여하튼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영지를 획득한 것도 사실이다.
그 영지에 누구를 영주로 앉힐 지가 문제인데.
나는 당연히 그 영지를 내 사람들이 받기를 원한다.
그 경우, 마티란 자작이 내 여자가 됐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레시아르 북서부가 완전히 내 손에 들어온다.
켈자르에 대해서는 완벽한 방패가 되겠지만, 반대로 켈자르와 손잡고 레시아르로 짓쳐들어온다면 무시무시한 창이 되겠지.
내가 설마 그러겠냐고.
하지만 모든 걸 의심하는 아버지는 그런 경우의 수도 상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걸 떠나서라도 내 영향력을 더는 늘리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고.
원정에서도 몇 번이나 내 발목을 잡으려 수를 뒀으니.
아버지는 늘어난 영지에 자기 사람들을 앉히려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아버지는 여기서만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대뜸 답했다.
“그 영지에 앉힐 사람들은 이미 내가 다 정했다.”
“제가 임시 영주로 봉한 자들이 있습니다.”
“오록스 백여우 기사단장, 무산토 보병대장, 그리고 전사한 하이엔이라는 자였지? 그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이 돌아갈 것이다.”
“금화 몇 푼이나 주시겠지요. 제가 점령한 영지에, 아버지가 마음대로 영주를 임명하시겠다는 겁니까?”
“마음대로라니? 나는 레시아르의 백작이며 가문의 주인이고 네 아버지다! 네가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임명권은 네가 아니라 내게 있단 말이다!”
논쟁이 격화되면서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양보할 생각은 둘 모두에게 없으니, 논쟁은 공회전할 뿐이다.
결국 아버지는 탁자를 쾅 치곤, 자리에 모은 세 영주들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이대론 정해지지 않을 듯싶군. 그대들의 의견도 듣고 싶다.”
노림수가 이거였군.
충성 영주들의 힘을 빌려 내 의견을 꺾겠다고.
이들은 레시아르 통치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만큼, 이들이 의견을 내면 나로서도 계속 반대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레시아르의 영웅 운운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레시아르의 백작이 아닌, 그의 아들일 뿐이니까.
원래라면 마티란 자작까지 아버지의 거수기가 되었겠지만, 내가 의지를 꺾어 복종시킨 덕에 그녀만은 내 편을 들 게 확실하다.
그래도 불리한 건 마찬가지다.
기돔 자작과 부게른 남작, 이 두 남자와 나와는 접점이 거의 없었으니.
아무래도 지금까지 섬겨온 아버지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일 대 이로 의견이 갈리면, 결국 지는 건 나다.
내 초조함을 읽었는지 아버지는 느긋하게 패를 까기 시작했다.
“기돔 자작. 그대의 의견은 어떻소?”
“도련님이 반대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만... 영주라는 자리는 쉽게 정할 게 아닙니다. 이미 레시아르에 많은 공을 세우고서도 영지를 받지 못한 자들이 있으니, 순번에 따라 그들이 먼저 영주로 봉해지는 것이 순리임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원정에 공을 세운 임시 영주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이 전해져야겠지요.”
말은 좋지만 결국은 금화 몇 푼 먹고 떨어지란 거다.
아버지와 다 말을 맞춰놨겠지.
“그래. 다음은 마티란 자작.”
“저는 원정군 사령관 각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원정에 공을 세운 자들이 분봉되는 것이 맞지요.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후에 레시아르를 위해 싸우려고 하겠어요?”
화끈하게 내 편을 드는 마티란 자작.
어차피 내 라인에 선 이상 아버지 눈치는 보지 않겠다는 투였다.
아버지는 눈썹을 찌푸리다가, 얼른 표정을 풀고 마지막 패를 풀었다.
“부게른 남작. 그대는 언제나 신중하고 지혜롭기로 유명하지. 현명하게 판단하리라 믿소.”
“저는...”
뚱뚱한 부게른 남작은 한참 뜸을 들이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더 많은 이들의 의견을 모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으... 음...?”
“이제껏 레시아르에 공을 세워 영지를 받을 만한 자들과, 이번에 원정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공론을 들어보고 정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나... 그리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부게른 남작의 일탈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당연히 자기편을 들 줄 알았는데 사실상 중립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도 놀랍기는 매한가지인데.
저러면 아버지랑 척을 지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건데.
라인을 바꿔 타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엔 또 내 편을 들질 않았으니 애매하다.
정말로 중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중립을 제시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 편이 기돔 자작, 내 편이 마티란 자작, 중립이 부게른 남작으로 팽팽한 줄다리기가 된다.
누군가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이상, 타개책이 나오진 않을 것 같고.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견들이 서로 갈리니 쉽게 정하기 힘들구나. 먼 길 오느라 바이스, 너도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영주를 정하는 문제는 다른 날에 다시 논의하자.”
문제를 유예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백작이자 가주인 아버지 뜻대로 당장 정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내겐 유리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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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기 편 영주들을 모아 머리를 싸매고 논의를 하는 동안.
나도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다.
우선, 주도 아티아 중심부에 위령비를 세웠다.
땅값이 비싸긴 했지만 배상금과 몸값을 두둑이 받았으니 충분히 감당할 만 했다.
그리고 이런 건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다가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위령비를 세운 바로 그 자리에서 서임식도 열어서, 친위대 출신은 모조리 명예기사로 서임했다.
카르마시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친위대원들이 대표로 내 표창을 받았다.
단상 밑에는 하이엔과 함께 죽은 구십 칠 명의 친위대를 위해 의자를 설치하고, 그들의 유품을 올려두었다.
그 외에도 원정에서 다친 병사와 죽은 병사들의 가족까지 모두 불러 금화를 나눠주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젖먹이 아기를 둘이나 안고 온 아낙네가 금화를 받고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수혈 평민들의 출산율이 극도로 높은 세계.
이들의 목숨은 값싸다.
싸우다 다치면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강제 퇴역 당하고, 죽기라도 하면 그냥 개죽음으로 끝나는 거다.
그래서 내가 원정군 사상자와 유가족에게 금화를 푼다고 했을 때 반대도 꽤 있었다.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쓴다는 거였지.
하지만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자들에게 보상이 없으면, 누가 나를 위해 진심으로 싸울까.
모두들 기쁜 얼굴로 나를 찬양하고 있는 걸 보면 나쁜 선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서임식을 마친 후에, 따로 사람 하나를 만났다.
“고귀하신 분께 인사드립니다.”
선이 가는 미소년. 하이엔의 장남인 하이덴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나이는 딱 열아홉. 막 성인이 된 나이다.
능력은 모르겠지만 제 아버지가 공을 세우고 죽었으니 대대적으로 발탁해서 친위대 부대장직을 주었다.
하이엔의 아내는 울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다.
“하잘 것 없는 보병 사관이던 사람을 그렇게 중하게 쓰시고, 또 아들까지 챙겨주시니 귀하신 분의 은혜가 하늘보다 높습니다.”
이거 참 어색하구먼.
보훈(??)이란 개념도 없이, 전몰자의 처우는 윗사람의 은정에 좌우되는 시대다.
하이엔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슬프다기보다도 아들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모양이다.
아들이 열두 명이나 되었다니 대책 없이 낳긴 했는데.
몸이라도 팔아야 걱정하고 있는데 내가 먹고 살 대책을 마련해주니 안도감과, 그제야 남편 죽은 설움이 터져 나와서 몸을 못 겨누는 거겠지.
꽤나 미인이라 음심이 동하긴 했는데, 날 위해서 싸우다 죽은 놈의 아내를 취하기도 뭐해서.
잘 다독여서 돌려보냈다.
여하튼 위령비와 서임식 덕에 아티아의 호사가들 입에 내 이름이 오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영지 분봉과 내 보상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던 아버지는 골머리 깨나 썩이게 됐다.
세간의 이목이 내게서 떠나질 않으니 레시아르의 영웅에게 보상이 시원찮으면 레시아르 백작으로서도, 가주로서도 자질을 의심 받게 생긴 거다.
덕분에 아버지의 고민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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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명성을 날리니,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명사. 아니꼽게 말하면 식객이라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이들은 대륙을 방랑하며 자신의 재능을 알아줄 주군을 구한다.
알아줄 재능 자체가 없는 쭉정이도 많지만, 개중에는 진짜 보석도 있다.
달반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수염이 덥수룩한 잡종 수혈 평민으로, 야금술에 재능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인종은 없긴 하지만 드워프를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딱 봐도 드워프 같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문객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신의 한수였다.
달반은 자기가 만들었다는 검 몇 자루를 선물로 내밀었다.
나야 그런 건 잘 모르니까 오록스와 타라를 불러서 검을 보였다.
“대단히 좋은 검입니다.”
오록스가 검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고, 전도율이 높은 질 좋은 강철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면 마력을 투사하기에도 굉장히 편합니다.”
“귀관은 도끼를 주로 쓰지 않았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무인으로서 좋은 검에 끌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검이라면 저도 보물처럼 모시고 다닐 겁니다.”
오록스는 저 검이 마음에 든 모양인데.
나는 방 한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달반에게 말을 걸었다.
“달반. 이걸 두 사람에게 줘도 되겠나? 오해할까봐 말하자면 이 둘은 백여우 기사단장과 수석기사이네. 이 검을 다룰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야.”
“물론입니다. 그런 분들께 바친다면 오히려 영광이지요.”
“맞다. 타라. 파샨에게 줄 것도 하나 골라줘.”
“예! 각하!”
타라는 희희낙락하며 검을 골랐다.
나는 그 사이에 달반에게 화석(火?)을 내밀었다.
카르마시아 민가를 약탈하던 병사에게 항아리 째 산거다. 그 병사는 그냥 콩을 담은 항아리로 알았겠지만.
“혹시 이것도 연성이 가능한가?”
“이건, 보기 드문 속성석이군요.”
“속성석?”
“칠속성을 가진 마력석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개념은 오백 년 전에 마미아의 글루테우스가 재정립한 것으로...”
“아. 그거라면 당연히 알지. 학문적인 건 됐어. 하여튼 영약으로 만들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결정 구조를 보니, 영약보다는 무기를 만드는 게 더 나아보입니다.”
“그래?”
“이 자체로 매우 안정적으로 불의 원소들이 결합되어 있으니, 그 결합을 해치기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아는 게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건 전문가들의 직업병인가 보다.
나는 달반의 말을 끊고 물었다.
“무기라면?”
“대개는 검을 많이 만들지요. 지팡이도 궁합이 좋습니다. 활이나 창, 도끼도 따라서는 만들 수는 있으나 추천 드리진 않습니다.”
“남자는 검이지. 검으로 해줘.”
“예.”
“아, 그리고 이것도 좀 봐주겠나?”
나는 파샨이 바친 조그마한 마력석을 꺼냈다.
크기도 조그마하고 내재된 마력도 미미해서 별로 쓸 데는 없어 보인다.
다만 마력석 안에 모기가 들어있어서 특이하다 싶어서 물어본 거다.
달반은 이리저리 마력석을 돌려보다가 수염을 쓸었다.
“글쎄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하지만 굉장히 특수하군요.”
“특수하다니?”
“마력석은 고대의 정령들의 시체가 변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헌데 이 마력석은 안에 모기가, 그것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요. 그렇다면 이 마력석의 정령은 모기를 안에 품고 죽었다는 걸까요? 아니, 애초에 우리는 정령의 형태조차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동물인지, 식물인지, 혹은 기체인지, 액체인지...”
“그래. 줄 테니까 연구해 봐.”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하나씩 벌이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영지 문제다.
아버지가 아버지대로 머리를 쓰는 동안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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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걸어 아래로 내려뜨린 수십 개의 태피스트리 사이로, 언뜻언뜻 헐벗은 여체들이 보인다.
사방에서는 강렬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그 자극을 즐기면서 천천히 술을 마셨다.
“공자님. 부르신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태피스트리를 헤치고 나온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은 짙게 화장했으면서 몸 아래로는 가슴과 생식기만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그걸 안주 삼아 또 한 잔 들이켜고 대답했다.
“들여보내.”
“네. 공자님.”
곧 여자가 땅딸막한 대머리 남자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그 남자는 고개를 쉴새없이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바이스님.”
“어서 오시오. 부게른 남작.”
아버지가 작위와 연륜으로 영주들을 끌어들인다면,
나는 금화와 여자로 내 편을 만들겠다.
이제는 K접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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