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역쿠데타
* * *
나는 부게른 남작을 끌고 미리 정해둔 은신처로 달려갔다.
뭔가 사건이 벌어진다면 위령비 근처의 주택으로 모이라고 당부를 해뒀다.
그러고 보니 저택에 있는 여자들이 걱정이긴 한데.
적어도 세리야와 체닐린은 미리 빼돌려놓는 건데... 하고 후회해봐야 늦었지.
그래도 세리야한테는 저택 안에 숨을 곳을 일러뒀으니 잘 숨었기만을 바라고.
지금은 앞으로 내달릴 때다.
은신처에는 이미 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야?”
타라가 먼저 대답했다.
“적여우 기사단장이 휘하 기사들의 출입을 전면통제했습니다. 휴가 나갔던 기사들도 모두 즉시 복귀하라는 명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것만으론 애매하지 않나?”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백여우 기사들에게는 근신명령이 돌고 있습니다. 곧 북동면, 파티스 공국과의 분쟁지역으로 파견 보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흠…….”
자기 세력은 아티아 안에서 굳히고, 내 세력은 쳐내고.
설마 친위 쿠데타라도 벌이겠단 건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티란 자작에게 물었다.
이런 정략에 능한 건 이 중에는 그녀가 제일일 테니.
“루이사. 아버지가 미친 거 아닌가?”
“글쎄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요.”
“어째서?”
“각하께서 스물을 겨우 넘긴 나이에 레시아르 전역에 위명을 떨치고 영웅이 되셨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백작께서도 두렵지 않겠어요? 지금이 각하의 기세를 뒤집을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요.”
하긴. 아티아에 아버지 눈 안 닿는 곳이 없으니.
내가 부게른 남작과 몇 번 만난 것도 알긴 알았을 거다.
마티란 자작에 이어 부게른 남작이 내 쪽으로 넘어왔으니, 아버지는 깔아둔 판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판을 뒤집어엎으려는 건가.
내 딴에는 유리하게 협상하려고 뒀던 수가 파국을 부른 셈인데.
아니, 내 잘못은 아니지. 시발.
왜 나잇살 처먹은 양반이 진 걸 인정을 안 하냐고.
“천년만년 백작 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게 물려줄 거면서 욕심은...!”
“권력욕이 그런 거랍니다.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지요.”
“그럼 정말로 아버지가 실력행사에 나설 수도 있다고?”
“가능성이 없지 않아요. 각하의 수족인 백여우 기사단과 원정군 출신 보병들을 북동부에 보내버리고, 각하께서 아끼시는 여자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잡아 인질로 삼는다면 어쩌시겠어요?”
갑갑하긴 하다.
여긴 켈자르 주도 카르마시아가 아닌 레시아르 주도 아티아다.
다 뒤엎어버리겠다고 마력을 뿜어내며 싸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조선처럼 효충이 강조되는 사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힘으로 꺾어서 작위를 빼앗는 아들에게 고운 눈길을 보내지도 않는다.
게다가 중앙에서 참견할 여지를 최대한 배제하려면 아버지와 내가 직접 맞붙는 대결만은 피해야 한다.
그럼 어쩌란 거지.
“이거 답이 안 나오는 거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역으로 백작의 수족을 자르셔야지요.”
마티란 자작은 친위쿠데타를 뒤집는 역쿠데타를 제안했다.
“백작의 수족을 모두 잘라서, 백작이 못 버티고 반강제적으로 선위(??)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요.”
“그런다고 아버지가 백작위를 넘길까?”
“넘기지 않으면 추해질 뿐인 걸요. 백작께서는 권력욕이 많으신 거지, 멍청하신 게 아니니 패배가 확실해지면 적당히 양보를 받을 수 있는 선에서 선위를 하실 거예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준비가 덜 되긴 했는데.
어차피 아버지와 나는 서로 선에 발을 디딘 상태.
먼저 선을 넘는 자가 무조건 유리하다.
아버지의 공격을 기다리는 안일한 짓은 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선공을 가하는지는 차후에 중대한 명분싸움으로 이어지겠지만, 그건 대체로 승자가 유리하게 각색하는 대로 변하기 마련이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벌써 선을 넘었는지도 모르지.
“주사위는 던져졌다!”
“예...?”
아. 여기엔 그런 말이 없나.
하여튼.
“나, 바이스 레시아르가 선언한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바이스 레시아르는 백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모든 행동을 개시하겠다. 현 레시아르 백작은 권력욕에 눈멀어 켈자르와 파티스의 대침공을 야기하고, 이번 원정에도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으며, 늘 흉계와 의심이 많아 휘하 영주와 기사들을 괴롭게 하고 민정을 파탄 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기는 것이 괴로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또한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믿는다.”
좌중이 잔뜩 긴장해서 내 말을 들었다.
나는 마력을 뿜어내면서 물었다.
“나를 따르지 않을 자는 여기서 지금 당장 떠나라! 잡지 않겠다!”
떠나면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떠나는 자는 없었다.
취중에 끌려온 부게른 남작이 딸꾹질을 심하게 하긴 했지만.
“부게른 남작. 술은 다 깼나? 아, 미안하지만 이제는 하대를 하겠네.”
“무, 물론입니다. 바이스님. 히끅!”
“그럼 바로 묻지. 어떻게든 기돔 자작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순 없겠나?”
“그게, 히끅! 원체 보수적인 사람이라, 히끅! 힘들 것 같습니다.”
하긴. 기득권자가 굳이 위험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겠지.
부게른 남작은 본인이 울분이 있는 것도 있고, 못생겨서 여자에 약한 틈을 파고들어서 회유에 성공한 거다.
솔직히 운이 좋았던 거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민으로 살았던 경험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 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은 돈으로 발라보라 이거야. 그리고, 아티아에 인맥은 좀 있나?”
“히끅... 허흠, 큼흠... 있긴 합니다만.”
“통 크게 일만 개, 아니, 이만 개 내놓지. 오늘 밤 중에 다 뿌려.”
부게른 남작은 입을 쩍 벌렸다.
솔직히 슬슬 후달리긴 하는데. 켈자르에서 벌어온 돈을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겨야 한다.
이건 건곤지척의 승부다.
아버지가 권위에 직접 도전한 아들을 그냥 둘 거 같진 않고.
이기면 백작, 지면 목줄 묶인 마법싸개가 될 테니.
“마티란 자작은 부게른 남작을 도와서 금화를 뿌리도록 하고... 이제 중립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록스 단장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타라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쿵쿵 땅 울리는 소리가 났다.
거구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록스 단장.”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와주었으니 죄송할 거야 없지. 여기 왔다는 건, 내 편에 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오록스는 도끼자루를 땅에 콱 꽂고 고개를 숙였다.
“각하께선 무패의 상승장군이십니다. 소관은 각하를 모시는 것이 레시아르를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든든하군. 귀관은 백여우 기사단을 휘어잡고 적여우 기사단을 견제해주길 바란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완벽히 계획을 세워 두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은 몇 번이나 상정해봤으니.
나는 미리 생각해둔 대로 착착 명령을 내렸다.
“파샨. 하이덴. 친위대 정원이 지금 어떻게 되나?”
“어... 그러니까...”
“마력병들을 우선해서 뽑았습니다. 마력병이 스무 명, 일반 보병이 팔십 명입니다.”
파샨이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을 접는 동안 하이덴이 먼저 대답했다.
“아직은 마력병이 적군.”
“예. 하지만 보병들도 원정군 중에서 특히 실력 있는 자들을 추렸으니, 기대하셔도 됩니다.”
“친위대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야 한다. 들이칠 곳을 정해줄 테니 신속하고 날렵하게 기동하라.”
“알겠습니다.”
하이덴은 나이가 아직 어린데도 꽤 믿음직스러운 면을 보였다.
파샨도 실전에 강한 편이니 잘해주겠지.
“그럼 무산토. 보병들 회유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각하께서 레시아르를 통치하는 것이 더 낫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위령비와 추모식 건으로 감화된 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담 쓴 돈이 아깝지 않군.”
“하지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건 원정군 출신 정도일 겁니다.”
“그거면 충분해. 연락망은?”
“촘촘하게 구축해뒀습니다.”
“당장 연락 돌려서 병영과 무기고부터 접수해. 아... 여기도 돈 좀 더 풀지. 시발, 그냥 다 돈으로 쳐발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달반. 내 무기는 완성됐나?”
“예. 여기 있습니다.”
달반은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그러자 곧바로 방 안이 화끈화끈한 열기로 가득 찼다.
“이게…….”
검면은 불에 막 달군 것처럼 시뻘겋고, 칼날은 물결치는 형태다.
손잡이에는 큼지막한 화석(火?)이 통으로 박혀있다.
예쁘다.
쓸만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공자님께 받은 마력석으로 만든 화염검입니다.”
나는 세로로 한 번 검을 휘둘러 봤다.
불길이 번쩍 일면서 허공을 베었다.
급히 마력을 통제하지 않았으면 맞은편에 앉은 파샨의 여우 귀를 다 태울 뻔했다.
“와...! 도련님! 멋집니다!”
파샨은 여우통구이가 될 뻔한 줄도 모르고 박수를 짝짝짝 쳤다.
나이 어린 하이덴도 동화에나 나올 법한 화염검의 위용에 넋을 놓은 모양.
“상당히 괜찮네. 보기보다 마력 소모도 적은 거 같고.”
“속성석이 공자님의 마력에 감응하여 더 큰 힘을 이끌어내는 겁니다. 제가 만든 검 중에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좋긴 좋은데. 제일 좋은 건 이걸 쓰는 일이 안 생기는 거지.”
나는 화염검을 들고 일어섰다.
“각자 지시사항 숙지했지?”
“예!”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 오늘밤, 새로운 해가 뜨기 전에 모든 게 결정된다.”
사람들이 후다닥 자리에서 튀어나가, 각자의 전장으로 달렸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내가 싸울 곳은 저택.
나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그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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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련님.”
집사장 뮌이 가늘게 눈을 뜨면서 나를 살폈다.
화염검은 검집에 들어가니 평범한 철검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갑옷은 입지 않고, 달랑 칼 한 자루만 찬 상태.
물론 마법사는 그 자체로 흉기기는 하지만.
내 뒤로는 호위병도, 친위대도 없이 나 혼자다.
어차피 마법사는 마법사로 견제해야 하는 법.
아버지는 나를, 나는 아버지를 서로 저택 안에 묶어두는 역할이다.
폐허가 된 아티아를 취하길 바라는 건 아니니, 서로 가장 강력한 수는 봉인해두는 게 현명하지.
서로는 서로의 억지력이 된다.
그 점에 대해서만은 나도 아버지도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식당에 들어서자 긴 직사각형 모양의 식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식기가 수십 개나 올려져 있다.
미리 다 준비를 해두고 기다린 듯했다.
“앉아라.”
아버지는 식탁 끝에 혼자 앉아있었다.
나는 그 맞은편, 식탁 반대쪽 끝에 가서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붙였다.
“식전주를 따라드리겠습니다.”
집사장 뮌이 혼자 식사 시중을 들었다.
“먹자꾸나.”
아버지는 와인 잔을 슬쩍 들어보였다.
나도 멀리서 와인 잔만 살짝 올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어지간한 독 따위는 마법사에게 듣지 않으니 대범하게 고기를 씹고 뜯었다.
음식은 거의 다 식어있었다.
어차피 맛은 나나 아버지나 거의 느끼지도 못하겠지.
와인으로 목을 축이는데도 긴장감으로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아버지를 씹어대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충돌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아무리 짧아도 일 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식탁보를 들어 입가를 닦았다.
“요즘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더구나.”
“아버지도 그러시는 거 같더군요. 제가 새로 늘린 영지 때문에 골치 아프시죠? 어떠십니까, 골방 늙은이들끼리 머리 맞대고 모여서 소득이 좀 있었습니까?”
“... 너무 건방지구나.”
“마티란 자작과 부게른 남작은 제 안을 지지하는 것 같던데요. 변방이나 지키던 개한테 물리시려니 속이 좀 쓰리시겠습니다. 아, 혹시 했던 말을 또 뒤집는 건 아니시겠죠?”
아버지는 식탁을 쾅 치더니,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부들거렸다.
“집사장은... 이만 물러나게. 아들과 단 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예. 그럼.”
뮌은 허리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아버지는 식탁에 두 손을 올려두고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한 발 물러나겠다는 양,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오치라, 베섹은 대침공 때 공을 세운 기사들에게 주겠다. 대신 펜슬빌은 무산토 보병대장에게 내리마. 그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다.”
“그게 최대라니. 그럼 제가 받을 보상은 뭡니까?”
“남쪽으로 가라.”
“남쪽, 어디 말입니까?”
“헤시아스. 항구도시 말이다. 거길 네게 주마.”
헤시아스라면 주도 아티아 다음으로 큰, 레시아르 백작령 제2의 도시이다.
말만 들으면 아버지가 크게 선심 쓰는 거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헤시아스는 명목상으로는 백작가가 직접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지역 유지인 헤시아스 남작을 통해 대리통치하고 있다.
그 지역은 레시아르 가문이 아직 세가 약할 때, 무력이 아니라 회유로 흡수한지라 토착 세력이 강하다.
가끔은 흉년이 들었니, 전염병이 돌았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세금을 제 맘대로 줄일 정도로.
사실상 독립적인 남작령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거기 내려가서 백작 대리하겠다고 하면 헤시아스 남작과 기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아티아에 가만히 앉아서 불편한 녀석들을 서로 견제시키는 거지.
게다가 국면을 넓게 보자면 백여우 기사단은 북동부로, 무산토는 북서부로, 나는 남방으로 보내지는 건데, 이러면 기껏 모은 내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거다.
내 사지를 하나씩 떼어놓고 차례대로 정리할 생각이겠지.
“이런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버지는 눈을 번득였다.
“백작위가 그리도 탐나더냐?”
“당연히 탐나지요. 그런데 제가 이러는 건, 탐욕이 아닌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라?”
“누이들을 늙은 대신에게 팔아치운 작자가 아들은 못 팔아먹을까, 전장에 보낸 주제에 지원은 고사하고 발목이나 잡는 사람이 등 뒤에서 칼은 찌르지 않을까, 무서워서 그럽니다. 아버지. 솔직히 말합시다.탐욕에 눈이 먼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 아닙니까?”
“닥쳐라!”
아버지는 내게 와인 잔을 던졌다.
나는 고개만 살짝 틀어 피했다.
유리잔이 벽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네가 여자 치마 뒤나 쫓아다니는 것 말고 뭘 할 줄 안다고!”
“불의 마법을 다스릴 줄 알고, 적성 영주들이 침략해오면 격퇴할 줄도 알고, 원정 나가서 적 주도를 점령할 줄도 알고, 내 사람을 만드는 법도 알고, 목숨값을 치르는 법도 알고, 뭣보다 이렇게 아버지를 엿 먹이는 법도 잘 알지 않습니까.”
“오만한 놈! 그게 다 네가 잘나서 그런 것 같으냐? 그 혈관에 흐르는 금빛 핏줄이 아니었더라도 네놈이 그리할 수 있었겠느냐?”
그 말에는 바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밑바닥 계층에서 태어난 전생과 비교하면 현생에서 덕을 본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현생의 아버지는 나를 금수저로 낳아준 은혜는 있었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긴 하다.
“그래, 그건 인정하지요.”
“응...?”
“그러니 말년에 편하게 살게는 해드리겠습니다. 남부 어디 한적한 곳에 널찍한 저택도 세워드리고, 원하시면 괜찮은 미녀도 몇 명 뽑아다 드리지요. 거기서 낚시도 하고 체스도 두면서 편하게 사십시오.”
나를 백작가 장남으로 낳아준 은혜는 그걸로 갚겠다.
“지금이라도 백작위를 물려주시면 가끔은 나들이 다니시는 것까지 허용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사람들이 다칠 일도 없을 테고요.”
“그러지 않겠다면?”
“글쎄요. 추한 꼴을 보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의자 뒤로 허리를 젖히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축객령이 내려질 시간.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만 이어진다.
수를 뒀군.
아버지도 수를 두고,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는 거야. 나와 마찬가지로.
과연 누구의 사람이 먼저 저택까지 도착할지.
내 사람들이 저택에 오면 아버지의 수족이 잘린 거고, 아버지의 사람들이 저택까지 오면 내 수족이 잘린 거니.
백작위가 달린 승부는 이제 나와 아버지의 손을 떠났다.
부하들이 잘해주기를 믿는 수밖에.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와 아버지는 서로 노려보면서 긴 밤을 꼬박 지새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