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25화 (25/166)

〈 25화 〉 역쿠데타

* * *

# 병영, 무기고.

보병 사관 사이트는 은밀하게 전해진 쪽지를 받고 내심 흥분에 차 있었다.

‘백작님께서 내리신 밀지!’

레시아르 백작은 음모를 꾸밀 때마다 쓸 만한 부하들에게 종종 이런 밀지를 내리곤 했다.

사이트는 바로 쪽지를 펼쳐보았다.

­ '원정군 출신 병사들을 감시하고, 움직임이 있다면 즉시 봉쇄하라.'

­ '가능하다면 보병대장 무산토를 체포하여 감금하라.'

쉽지 않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완수하기만 한다면 출셋길은 보장되어 있었다.

보병대장 무산토부터가 이 밀지를 받아 승진한 자였다. 지금은 바이스 레시아르의 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아니, 그러니 오히려 보병대장 자리가 비게 되는 게 아닐까.

사이트는 휘파람을 불며 보병대장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동혈 귀족의 여식과 결혼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젊고 늠름한 군인.

“크흐흐흐.”

그는 사관 숙소에서 나와 병영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기에 촛불을 들고 나와야 했다.

보병들 사이에는 언제나 사관들의 끄나풀이 있다.

사관이 그들의 편의를 적당히 봐주는 대신, 그들은 일반 보병 사이의 소문이나 동향을 전해주기도 하고, 가끔 불손한 분위기가 생기면 주동자를 밀고하기도 한다.

끄나풀 중에서 제일 쓸 만한 녀석이 에밀이다.

돈을 밝힌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녀석은 언제나 돈값을 해주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추어 에밀이 참나무 밑에 서 있었다.

귀여운 이름과는 다르게 체구가 건장한 청년이었다.

“에밀.”

“사관님. 안녕하십니까. 헤헤헤.

“요즘 어때?”

사이트는 에밀에게 은화 한 닢을 던져주면서 물었다.

에밀은 재주 좋게 은화를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늘 같지요, 뭘.”

“아니. 원정군 출신 놈들 말이야.”

“그게 말입니다……. 하, 참. 진짜 이거 알아내느라 죽을 뻔 했는데.”

에밀은 손을 비비면서 뜸을 들였다.

사이트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녀석을 혼쭐낼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은화를 두 닢 더 꺼내서 던져주었다.

“비싸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해.”

“아, 예. 헤헤헤. 그게 말입니다. 원정군 놈들이 지금 뭉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오밤중에 말인가?”

“예. 그 자식들, 무슨 암살자라도 된 것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막사를 관리하는 부사관들이 몇이나 쥐어터지고 묶였습니다. 밖으로는 소리 하나 안 새어나가게 그러는 게 어찌나 무서운지요. 저도 정말 간신히 도망쳐 나온 겁니다.”

사이트는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이 움직이기도 전에 원정군 병사들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

‘무산토가 몰래 지시를 내린 건가? 자리에는 없던데……. 아니, 아니. 지금은 일단 원정군 출신 놈들이야. 이 놈들이 감히 반란을 일으켰단 말이지.’

상급 장교에게 경계령을 내려달라고 하면 금방 해결되겠지만, 그는 공을 나누기가 싫었다.

‘백작께서 밀지를 내리신 건 나뿐이겠지. 그럼 백작님도 나 혼자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하신 걸 거야.’

사이트는 급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사실 상황이 그렇게 암담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해가 진 후에는 초병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반납된 무기는 무기고에 수납된다.

원정군 병사들이 정병이라고는 해도, 거의 대부분이 마력 없는 수혈 평민.

무기를 들지 않았다면 그냥 힘 좀 센 마을청년과 다를 것이 없다.

“에밀. 너 발 넓지? 믿을만한 놈들 좀 데려와. 한 백 명 정도.”

“믿을만한 놈들이라뇨?”

“뒤통수 치지 않을 녀석들 있잖아. 일이 잘 풀리면 부사관으로 승진시켜준다고 하고 무기고로 데려와.”

‘딱 백 명만 갑옷까지 입혀서 완전 무장시킨 다음에 병영을 순찰 돌게 하면 원정군 병사들도 포기하겠지.’

에밀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무기고를 여시려고요?”

“그래.”

“그럼 무기고 열쇠는 사관님이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래. 오늘 당번이 나거든.”

퍽.

사이트는 갑자기 몰려온 통증에 코를 싸매 쥐었다.

코뼈가 부러진 게 틀림없었다. 코피가 마구 흘러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커억!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에밀은 대답하는 대신 사이트를 마구 두들겨 팼다.

사이트는 사관이긴 하지만 수혈 평민출신으로, 글을 배워 그 자리에 오른 자였다.

당연히 마력은 없고, 체격 건장한 에밀에게 선수를 당한 이상 몸을 구부리면서 한 대라도 덜 맞으려고 낑낑대는 수밖에 없었다.

“마, 말로 해라! 말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윽!”

“왜 이러냐고? 무기고 열쇠에 금화 백 개가 상으로 걸렸어! 너 같으면 안 이러겠냐?”

“그런 거짓말을 믿는다고?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누가 미쳤다고 일개 보병한테 금화 백 개를 주냐!”

“거짓말? 우리 도련님은 거짓말 안 하셔! 어떻게 믿느냐고? 참여한다고 말만 해도 금화 하나씩을 다 나눠주셨거든! 이 금화가 증거다, 이 새끼야!”

“그, 그럴 수가…….”

“개자식아. 도련님 좀 보고 배워! 이 새낀 존나게 부려먹고 은화 몇 푼 주면서 생색은 오질나게 해요! 에라이, 한 대 더 맞아라!”

말단 보병한테까지 금화를 뿌려...?

미친 새끼…….

사이트는 바이스 레시아르의 돈지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 내성, 성문.

적여우 기사단장 제트리는 무구를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가 대문 바깥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

“어서 들어가시오. 요즘 분위기가 하도 수상하니 문단속 잘 하고.”

“일찍 오실 거죠? 혼자 자기 싫단 말이에요.”

아내는 속도 모르고 애교를 부렸다.

제트리는 허허 웃으며 아내를 한 번 안아준 뒤에 돌아섰다.

대로 한 편에는 이백 명에 달하는 적여우 기사들이 완전 무장한 채 서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말은 어디다 놔두고 왔는가?”

“단장님께서 말은 묶어두고 오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밤중에 주도 대로에서 말발굽을 달리면 아티아 전체가 혼란에 빠질 거라고...”

부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그러던가?”

“누크입니다.”

“누크!”

“죄송합니다, 단장님. 저는 아라트에게 단장님께서 그리 전달하라고 했다 들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단장님. 저는 코텔에게...”

제트리는 이마를 짚었다.

‘근래 부쩍 백여우 기사들과 술 마시며 어울리는 녀석들이 늘었다 싶었는데... 없는 명령을 지어서 팔았군. 어차피 이 자리에서 색출하기는 힘들겠고. 기사들끼리 서로 불신을 조장하느니... 그냥 덮자.’

“생각해보니 내가 그리 명령했던 것 같다. 이대로 출발한다. 서둘러라.”

그는 레시아르 백작이 명한 대로 내성으로 향하면서 속으로 바이스를 마구 욕했다.

‘또 이런 야비한 수를. 능력은 인정하지만, 도련님은 경박하고 비열한 사람이다. 백작님께 정식으로 승계를 인정받기 전까진 모시기 싫은 분이야.’

내성으로 이어지는 성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도보로 가니 예상보다 훨씬 속도가 늦어진 탓이었다.

제트리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성문 위의 보초병에게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적여우 기사단장 제트리다!”

묵묵부답.

분명히 들렸을 텐데, 보초병은 제트리를 본 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무언가가 비틀어지고 있다.

제트리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백작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쳐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거구의 남자가 횃불을 들고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여우 기사단장 오록스였다.

“오록스 경!”

“제트리 경.”

오록스는 고개만 까딱해보였다.

“거기서 뭐하는 거요?”

“수상한 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소.”

“백작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소? 나는 알지 못하는데!”

“돌아가시오.”

오록스는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양, 성벽 위에 도끼를 세게 내리찍었다.

돌조각이 튀어서 굉음을 내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 기세에 적여우 기사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좋지 않은데.’

제트리가 백작에게 받은 명령은 단시간 내에 내성을 접수하는 것.

하지만 성문이 백여우 기사단에 의해 이미 틀어 막힌 이상, 피를 보지 않고서는 그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같은 레시아르의 기사끼리 꼭 피를 봐야 하는가?’

수혈의 평민 병사들이었다면 가차 없이 목을 따고 성문을 열었겠지만, 상대가 같은 기사라는 것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제트리는 일단 성문 앞에 진을 치고 오록스를 설득하기로 했다.

백작의 권위는 강철과 같으니 감히 대항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다만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내가 함께 용서를 청할 테니 운운.

물론 오록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속절없이 아까운 시간만 흘렀다.

결국 제트리가 칼을 뽑아 결단을 내리려는 순간.

적여우 기사들 뒤편 어딘가에 숨어있던 파샨이 백기를 들고 그에게 달려갔다.

“제트리 단장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백여우 부단장... 아니, 이젠 아니었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친위대장입니다!”

“그래. 친위대장. 내겐 무슨 일인가?”

“이걸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안부도 전해달랍니다.”

파샨은 무언가를 휙 던졌다.

제트리는 순간 긴장했지만, 그게 너풀거리는 천 쪼가리임을 알아채고 손을 뻗어 낚아챘다.

“그럼 이만!”

파샨은 후다닥 어둠 속으로 도망갔다.

“이건……?!”

제트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손아귀를 쥐었다.

그 안에는 자기 부인의 속옷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이런 비열한 수작을!”

# 도우블레 부인의 살롱.

기돔 자작은 아티아에 체류하는 동안 친한 귀부인의 저택을 빌려서 묵고 있었다.

하지만 귀부인의 농익은 몸을 즐기는 것도 처음 며칠 뿐.

그는 슬슬 초조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체류가 너무 길어지는데.’

영지 분봉은 언제나 잡음이 끼는 문제기는 했지만, 현 레시아르 백작은 정치 감각도 있고 업적도 적지 않았다.

풋내기 아들의 도전 따위는 금방 물리칠 줄 알았건만.

‘백작님이 이렇게 고전할 줄은 정말 몰랐다.’

속이 타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영지에도 문제는 산적해있었으니. 한없이 아티아에 붙박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어쩐지 추세도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티란 자작이 돌아서고. 이제는 부게른 남작도 바이스 레시아르와 술을 같이 마신다지?’

어쩌면 자기도 편을 갈아타야 했던 게 아닐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여자와 대머리. 명문 귀족이라 해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결함품들이야. 그런 자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리 없지.’

그는 애써 자기합리화를 했다.

‘이번에 백작께서 바이스 레시아르의 도전을 이겨내면, 그에게 줄을 선 마티란 자작과 부게른 남작은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늘 셋 중의 하나로만 꼽히던 기돔이 레시아르 다음가는 명문가가 될 절호의 기회다.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인 거야.’

그는 가문의 표식이 그려진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비상하는 기돔 가(家)의 미래를 상상했다.

“기돔 자작님.”

도우블레 부인이 다가와서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낭독회 준비가 다 됐어요. 손님들도 모두 도착하셨고요.”

“그래요? 그럼 같이 갈까요?”

“네.”

기돔 자작은 귀부인의 저택에 머무르면서 매일 자선회나 만찬, 낭독회 등을 개최했다.

아티아 내의 귀족들을 결집하고 백작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는 수단이었다.

본래 이들은 레시아르 백작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라 아들과 아버지간의 다툼이 벌어지면 백작의 편을 들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 다들 마음을 굳힌 듯하니, 연명서를 받아내기만 하면 된다.’

기돔 자작은 오늘 낭독회에서 은근히 분위기를 주도하여 바이스 레시아르를 규탄하는 연명서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아티아의 언론은 결국 귀족과 관료들에 의해 좌우된다.

연명서가 제출된다면, 레시아르 백작은 못 이긴 척 연명서를 받아들이고, 바이스 레시아르를 남부로 추방시킬 것이다.

바이스 레시아르가 레시아르의 점령자가 아니라 통치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상, 그도 귀족들의 뜻이 모인 연명서를 무시하기는 힘들 터.

‘물론 그것만으로는 바이스 레시아르를 묶을 순 없겠지만... 백작께서도 오늘 밤에 움직이신다고 하셨으니. 수족이 다 잘린 채 내일을 맞이할 바이스 레시아르를 추방하기에는 딱 좋은 핑계거리가 되겠지.’

기돔 자작은 생각을 정리하고 라운지로 나섰다.

열 명 정도 되는 귀족과 관료들이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기돔 자작이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고 있는데, 시종이 도우블레 부인에게 다가가 불청객의 방문을 고했다.

“마나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기돔 자작님. 혹시 더 부르신 분이 있나요?”

“아니, 모일 사람은 다 모였을 텐데요.”

“이상하네. 누구지?”

“그게...”

시종이 망설이는 동안 두 명의 남녀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다들 여기 모여 계셨군요.”

마티란 자작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들어왔다.

그 요사스러우면서도 색기 넘치는 눈웃음에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녕하시오.”

부게른 남작이 손수건으로 숱 없는 머리의 땀을 닦으며 들어왔다.

그를 반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티란 자작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오늘 여기서 자선회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자선회가 아니라 낭독회요.”

“아~ 날짜를 착각했나 보네요.”

“그럼 돌아가 주시오.”

“여기까지 왔는데 헛걸음하고 돌아갈 순 없잖아요. 그렇죠, 도우블레 부인?”

도우블레 부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온순하고 소극적인 그녀로서는 기 센 마티란 자작에게 감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집주인도 아닌 기돔 자작은 마티란 자작과 부게른 남작을 쫓아낼 명분이 없다.

마티란 자작은 기돔 자작의 눈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고 도우블레 부인과 수다를 떨었다.

“낭독회도 관심이 가긴 하는데, 전 일단 자선회를 찾아온 거라. 도우블레 부인을 믿고 이 자리에서 헌금을 내려고 해요. 사실 기부를 하려는데 날짜가 뭐 중요하겠어요? 그렇죠, 도우블레 부인?”

“네, 네. 그럼요.”

“자. 가지고 와요.”

마티란 자작이 부채를 접고 손뼉을 치자, 건장한 하인들이 궤짝을 다섯 개나 짊어지고 왔다.

그들이 마티란 자작의 신호에 따라 궤짝을 끌러 안을 보여주는 순간, 라운지 안이 금빛으로 확 밝아지는 듯했다.

“이게... 이게 다 무슨...”

“금화 일만 닢이에요.”

부유한 귀족들이라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액수였다.

기돔 자작은 낭패감을 느꼈다.

‘연명서 얘긴 쑥 들어가겠군.’

금화 일만 닢은 그 자체로 화젯거리였다.

오늘 밤 사이에 이걸 밀어낼 이야깃거리는 없을 터.

“이걸 어디다 기부하실 생각이세요?”

도우블레 부인도 자연스레 기돔 자작의 팔에서 손을 떼고 마티란 자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 일만 닢은 그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마티란 자작은 후후, 소리내어 웃고는 답했다.

“바이스 공자님께서 위령비를 세우신 건 아시죠?”

“네. 관대하게도 일개 보병들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해주셨다죠.”

“맞아요. 위령비에는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만 적었는데,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품격이 떨어져서요. 켈자르 원정에 기여한 게 수혈 평민들만 있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옳으신 말씀이에요.”

도우블레 부인은 금화와 마티란 자작을 번갈아보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니 그 옆에 새로 기념비를 새워서 켈자르 원정에 기여한 귀족 여러분의 가문명과 이름을 후원자로 적어 넣으려고요. 이 금화는 비문(?文)을 적어주시는 데에 대한 사소한 성의표시라고 할까요.”

여기 모인 귀족 중, 마티란 자작을 제외하면 켈자르 원정에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마티란 자작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우같은 년. 자선회가 다 그렇다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귀족에게 기부한다고 말하는 건 저 년 외에는 없을 거야. 차라리 자선회가 아니라 뇌물회라고 하지.’

기돔 자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미 다른 귀족들은 이미 마티란 자작의 달콤한 목소리와 금화의 빛깔에 취했다.

하지도 않은 일에 찬사를 표하면서 돈을 주겠다고 하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일만 닢을 이 자리에 모인 귀족 열 명에게 똑같이 나누기만 해도 인당 금화 일천 닢씩이 떨어진다.

하룻밤 안에 가만히 앉아서 벌기에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것이다.

게다가 기념비에 이름을 적고 켈자르 원정에 숟가락까지 얹을 수 있다면?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로서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따위 촌극에 놀아나는 게 레시아르 백작에 대한 이적행위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야.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니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고 마티란 자작과 부게른 남작 앞에서 오늘 밤의 계획을 말할 수도 없고.’

기돔 자작은 혼자 애가 탔다.

“그럼 같이 기념비에 적을 문장을 생각해볼까요? 백 년 넘게 남을 기념비인데, 길이 남을 명문(名文)을 지어야지요.”

마티란 자작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밤을 새울 생각이군. 나를 묶어두고 귀족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 하룻밤에 금화 일만 개를 털어 넣은 거야. 마티란 자작이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이스 레시아르가 지시한 거야……. 영웅과 미치광이는 한 끝 차이라더니.’

기돔 자작은 허리에 맨 검집을 꽉 쥐었다.

여기서 칼부림을 낼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자신만은 몸을 빼야 했다.

‘일단은 돌아가서 백작님과 다시 논의를...’

“기돔 자작님.”

부게른 남작이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했다.

살찐 남자 특유의 체향이 그를 불쾌하게 했다.

“뭐요?”

“저 궤짝이 몇 개로 보이십니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고 있소. 다섯 개 아니오?”

“아닙니다.”

“아니라니?”

“문 앞에 꽁꽁 봉해놓은 궤짝 다섯 개가 더 있습니다.”

“그게, 무슨…….”

“아시지 않습니까. 저들은 금화 일만 닢을 열 명이서 나누지만, 자작께선 온전히 금화 일 만 닢을 홀로 가지시는 거지요.”

“나, 나를 돈으로 사려는 겐가! 나를 모욕할 셈인가!”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딱히 뭘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오늘 밤만 여기 살롱에서 나가지 마시고 저희와 함께 보내십시오. 어차피 아티아의 유력 귀족들이 다 여기 있는데 기돔 자작님 혼자 돌아다니신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기돔 자작은 자신의 검을 슬쩍 가져가는 부게른 남작의 손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 레시아르 가 저택.

집사장 뮌은 대식당 문을 닫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양쪽 벽면에 걸린 촛불이 복도를 환하게 비추면서 그의 그림자를 뒤로 길게 만들어냈다.

‘메이드장이 보이질 않는다.’

메이드장 세리야는 바이스 레시아르의 동정을 받은 여자이자, 그의 충실한 종이다.

게다가 늘 저택 안에 있으니, 바이스 레시아르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택 안에서 내가 모르는 장소는 없을 텐데. 메이드장도 대단하군. 아니, 도련님이 대단하시다고 해야 하나.’

백작의 이목이 깔린 저택 안에 은신처를 마련하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꾀를 부렸다면 그건 세리야가 아니라 바이스 레시아르일 터.

뮌은 다시 한 번 바이스 레시아르의 능력에 탄복했다.

‘결점이 적지 않으신 분이지만, 그만큼 능력도 뛰어나신 분이다. 케인즈 님 만큼이나 주인으로 모실 보람이 있는 분이지. 이십 년 쯤 뒤에는 말이야.’

뮌은 바이스 레시아르를 높게 평가하는 편이었지만, 너무 젊어서 그런지 그는 약점이 많았다.

‘여자를 너무 좋아하시고, 또 그만큼 아끼시지. 그게 다 약점인 게야.’

세리야는 비록 놓쳤지만, 바이스가 아끼는 메이드들은 전원 사로잡았다.

바이스 레시아르가 이들을 위해서 대업을 포기하진 않겠지만, 이들을 인질 삼아 한순간의 망설임을 이끌어내기에는 충분하리라.

뮌은 시종을 호출했다.

“메이드들은 잘 있지?”

“예. 꽁꽁 묶어놨습니다.”

“혹시라도 손대는 놈이 없게 잘 감시해. 그런 놈은 내가 직접 손목을 자를 거야.”

백작의 우세를 점치고는 있지만, 바이스 레시아르가 이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뮌은 평생 진 적이 없었다.

늘 양쪽에 배팅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기 위해선, 바이스 레시아르의 여자를 잘 간수해야 했다.

“레시아르 가를 섬기는 자 중에서 도련님의 여자를 건드는 놈이 있겠습니까.”

시종은 웃어넘겼다.

충성심 때문에라도 그렇지만, 바이스가 자기 여자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인간은 바이스의 여자라면 얼굴도 빤히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묶기만 묶어뒀다 뿐이지, 극진히 모시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는 메이드 하나가 유석죽(???)까지 가져달라고 해서 제 년 팔자에도 없는 호사를 시켜줬지 뭡니까.”

“유석죽을 가져다달라?”

“예. 몸이 편찮답니다. 웬만하면 무시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끙끙대는지. 묶어둔 동안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제가 책임지겠다고 하고 만들어서 주라고 했는데... 괜찮은 거겠지요?”

유석죽은 영약으로 쓰이는 마력석을 곱게 갈아 만든 유동식(??)이다.

마력탈진에 빠진 자나, 마력을 오랫동안 쓰지 않은 자의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 쓰이는데…….

뮌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 메이드! 누구던가?”

“새로 들어온 여자 같던데요. 저는 이름은 모르고, 키가 큰 여자...”

“아차!”

켈자르의 전 기사단장 체닐린이 견습 메이드로 일하고 있다는 건 저택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적이었다고는 해도 기사를 메이드로 삼는 것은 귀족에게는 치욕적인 대우이니, 밖으로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말 단속을 시킨 것이었는데,

‘나도 늙은 건가! 적어도 감시를 맡긴 시종들에게는 그걸 전달했어야 하는데!’

켈자르 기사단장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시종들은 체닐린을 그냥 키 큰 메이드로만 알았다.

“내 실책이구나. 내 실책이야.”

“집사장님?”

쾅!

문짝 박살나는 소리가 귀청을 찢어놓았다.

곧 높은 외침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가련한 여인들을 묶어놓고 인질로 삼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나, 체닐린 마이포흐가 너희들의 파렴치함을 심판하겠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전장에서도 묻히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니, 그 소리가 저택 바깥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뮌은 사색이 되었다.

‘맹점을 찔렸다.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켈자르의 기사였던 자가 왜 도련님을 위해서 움직인단 말이냐. 설마 정말로 몸정이라도 든 건가?’

체닐린의 실력은, 전해 듣기로는 백여우 기사단장 오록스조차 밀어붙였다고 한다.

마력이 얼마나 회복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사단장까지 맡았던 여자이니, 저택 안에 있는 근위 기사들을 동원한대도 이길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저 여자가 노리는 게 뭘까. 백작님? 아니, 아냐. 어차피 백작님과 도련님은 서로를 견제하며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패다. 거기에 체닐린이 더해져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다.’

‘그 여자가 저택 안에서 노릴 목표라면... 일단은 도련님의 인질이 될 메이드를 해방하는 것. 그러면서 반대로 백작님의 인질이 될 사람을 잡는 것인데...’

‘저택 안에서 인질로 노릴 자라면, 백작님의 최측근인 나밖에 없겠군.’

뮌은 멀뚱멀뚱 서 있는 시종 놈을 밀치고 달렸다.

‘저택만 빠져나가면 된다.’

체닐린은 저택 안에서만 생활해서 근방의 지리를 모른다.

일단 저택을 빠져나가서 숨으면 그녀가 그를 붙잡을 일은 없다.

‘마지막 수가 어설프군, 그래. 그러니 도련님이 아직 어리시다는 겁니다.’

뮌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속으로 킬킬 웃었다.

메이드들을 인질로 삼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자신이 잡히지만 않으면 바이스 레시아르도 의외의 수를 놓고서도 절반의 성공만 거두게 되는 셈이다.

늙은 몸을 채찍질해서 달리기를 얼마간.

그는 정원 근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발을 떼었다.

장미꽃밭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꽃향기가 갑자기 짙어지더니,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뮌의 발목을 붙잡았다.

집사장은 흉하게 앞으로 넘어졌다.

“크흑!”

“어머. 다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세리야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메이드복에 잔뜩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넸다.

뮌은 그녀가 올라온 흙구덩이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곳에 숨어 있었던가……. 설마 메이드장이 그런 더러운 곳에 숨었을지는 몰랐군.”

“도련님이 손수 파주신 은신처랍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치스러운 곳이지, 더러운 곳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세리야는 새침하게 대답하고는 구덩이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끝이 예리한 단창이 그녀의 손에 잡혔다.

“무기까지 숨겨놨던가?”

“늘 최악을 대비해야지요. 집사장님 지론 아니었나요?”

“나와 싸우려고?”

“집사장님이 항복하지 않으시면, 그래야지요.”

뮌은 단창을 쥐고 자신을 겨냥한 세리야를 보며 고심에 빠졌다.

같은 동혈 출신이라고 해도 자신이 메이드장에 비해 마력량이 뒤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무기가 없이 싸워야한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불리하다.

게다가 상대인 세리야로서는 그를 이길 필요도 없다.

다만 체닐린이 올 때까지 잠시라도 버티며 소란을 피우면 되는 것이니.

‘졌구나.’

인질이라 생각했던 메이드들 사이에 전 기사단장을 섞어놓고서 반격함으로써 자신의 도주를 유도하고는, 절묘한 경로에 매복해 있다가 절호의 순간을 노려 공격하다니.

처음부터 이런 정교한 함정을 설계해놨다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음모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하던 자기가 한심해졌다.

뮌은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이런 식으로 메이드장에게 붙잡힐 줄은 몰랐군. 마이포흐 양과 다 수를 짜놓은 건가?”

“아뇨. 운이 좋았죠.”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거라고……?”

“운도 실력 아닌가요?”

“맞지. 맞네.”

뮌은 한숨을 내쉬었다.

행운도 지배자의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뭐든 승승장구하는 바이스 레시아르는 자신의 주인을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 대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굴까.

내 사람이냐. 아버지 쪽 사람이냐.

아버지와 나의 시선이 동시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쏠렸다.

“보병대장 무산토, 도착했습니다.”

무산토는 병영 전도(??)와 무기고의 열쇠를 꺼내서 두 손으로 바쳤다.

“백여우 기사단장 오록스, 이어서 당도했습니다.”

오록스는 바닥에 투구와 갑주를 내려놓았다.

적여우 기사단장 제트리의 무구였다.

“남작 다즌 부게른.”

“그리고 자작 루이사 마티란이 저희의 주인이신 바이스 레시아르께 검을 올립니다.”

마티란 자작과 부게른 남작이 검 세 자루를 내밀었다.

마티란과 부게른, 그리고 기돔 가의 표식이 그려진 검이었다.

“메이드장 세리야 아네예스. 저택의 청소를 끝마쳤습니다.”

세리야는 집사장 뮌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어떻게…….”

아버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는 겁니다. 아버지.”

나는 흥분을 애써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발가벗고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은데.

모든 접전지에서 다 이길 줄이야.

생각지도 않던 최상의 결과다.

심지어 세리야는 잡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뮌을 잡았다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 무승부로 하지 않겠느냐?”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아버지.”

기쁜 와중에도 아버지의 개소리는 컷해주고.

“그래. 인정하마. 너는 능력 있다. 솔직히 자랑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너는 아직 중앙을 모른다. 내 밑에서 더 배워야 한단 말이다.”

“그런 소리는 승부가 결정 나기 전에 하는 겁니다. 다 지고 난 다음에 하는 게 아니라.”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아버지. 이제 인정하시지요. 아버진 졌습니다.”

나는 화염검을 뽑았다.

화르륵. 검면에서 커다란 불길이 일어났다.

그 화려한 모습에 모두가 잠시 말을 잊었다.

아버지가 끝끝내 인정하지 않겠다면 결국은 피를 볼 수밖에 없다.

그건 아버지도, 나도 바라지 않는, 레시아르를 황폐하게 만들 최악의 수다.

일렁이는 불길에 아버지도 결국 기세가 눌린 듯했다.

그는 땅이 꺼져라 장탄식을 늘어놓고는 침울한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생각해보면 너는 항상 내 예상을 뛰어 넘었지.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고서도 마법사가 되었고, 내 지원 없이도 켈자르를 완패시키더니, 이번에는 아티아를 하룻밤 안에 차지했구나.”

아버지는 눈을 감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제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속이 쓰릴 텐데.

“그래! 내가 졌다! 네가 이겼다, 아들아! 바이스 레시아르! 이 후레자식 놈아! 아비를 이겨먹으니 좋으냐?”

“당연히 좋지요.”

“이런 빌어먹을 놈!”

“결과에 승복하시니 다행입니다. 이제부터는 편하게 은퇴 생활이나 즐기세요.”

“크흐흐흐흐흐…….”

아버지는 울분이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릇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식탁 위에 올라섰다.

“모두 들어라! 오늘부터 레시아르 백작은 나, 케인즈 레시아르가 아닌 바이스 레시아르를 일컫는 말이 되리라! 오치라부터 헤시아스까지 레시아르 령의 적법한 통치권은 바이스 레시아르에게 있으니, 내게 충성을 바치던 자들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바이스 레시아르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부디 조상님이 이 거침없이 막나가는 아들놈을 굽어 살피시기를!”

아버지는 엄지에 낀 굵은 금반지를 빼내어 내게 던졌다.

“이것이...”

“그래. 네가 그리 바라는 레시아르 백작가의 인장이다.”

나는 인장 반지를 천천히 꼈다.

그 묵직함이 기분 좋았다.

“바이스 레시아르 백작님께 충성을 바칩니다.”

마티란 자작이 대표로 나와서 내 인장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무산토, 오록스, 부게른 남작, 세리야도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바이스 레시아르 백작님께 충성을 바치나이다.”

백작이다.

진짜 백작이 된 거야.

직할령에서만 기사 사백, 보병 육천, 영지민 육십만을 지배하는 귀족 중의 귀족.

식전에 마신 와인이 이제야 도는 것 같다.

짜릿한 전능감이 몸 안을 휩쓸었다.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백작으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레시아르 백작이 말한다.”

“하명하십시오.”

“처녀 데려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