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27화 (27/166)

〈 27화 〉 노예상점

* * *

잠든 유리 옆에서 메이드들을 차례로 불러서 적당히 회포를 풀고 난 후.

나는 완전히 현자로 각성해서 집무실에 들어갔다.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니까. 한 발 뽑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도 잘 된다고.”

“…….”

“뭐! 할 말 있어?”

타라는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는데 참겠다는 투라 괘씸하긴 한데, 또 이제 막 부관참모를 맡겼으니 사명감에 불탈 때기도 하다.

타라는 평기사에서 수석기사를 거쳐 부관참모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여자를 밝히는 내가 유독 타라만 콕 집어서 그렇게 승진을 시켜주니 슬슬 뒤에서도 여러 말들이 나오는 모양인데.

물론 타라가 예쁘다는 게 승진의 한 이유가 되긴 했다.

오록스를 포섭하려는 데에 타라를 발탁하는 게 유리할 거라는 계산도 또 한 이유였고.

하지만 타라 본인의 능력도 충분히 고려한 인사다.

신분제가 엄연한 사회.

내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면 그 누구도 그게 사슴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타라만은 몇 번이고 내 판단에 의문을 제시하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개는 타라가 틀리기는 했지만, 그런 시도 자체가 값진 거다.

내가 부관에게 기대하는 건 내 생각을 다른 입장에서 재검토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니까.

나는 타라에게서 현안이 적힌 종이를 받아 한 번 쭉 훑었다.

뭐가 많긴 한데.

“이 중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뭔가?”

타라는 즉시 대답했다.

“재정이 모자라다는겁니다.”

돈은 중대 문제지.

켈자르에서 뜯어온 금화는 유공자들에게 보상금 나눠주랴, 귀족들 접대하랴, 쿠데타 수습하랴 홀라당 다 써버렸다.

버는 건 어려워도 쓰는 건 한 순간이라더니.

아버지에게 인계받은 금고를 살펴보니 대침공과 원정 때 군비를 써서 텅 비어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대로 친위쿠데타 때 돈을 살포했겠지.

부자가 싸우느라 괜히 귀족들 배만 불려줬네.

하지만 아버지 성격에 금고에만 돈을 다 넣어 두진 않았을 테고.

어딘가에 비자금이 있을 텐데.

그걸 자기가 순순히 내놓을 양반은 아니고.

“뮌을 끌어들여야 해.”

비자금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으론 그 외에는 떠오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타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뮌 집사장은 전 백작님을 어렸을 적부터 모셔온 사람인데, 지금 와서 끌어들인다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세가 이쪽으로 기울었는데 끝까지 충성을 내세울 인간은 아니야. 정 버티면, 그래도 그 작자가 손자들을 꽤 아끼는 것 같으니까, 그 녀석들을 발탁해주겠다고 꼬시면 되겠지.”

어차피 내게는 인재가 필요하다.

백작가의 집사장으로 큰 잡음 없이 수십 년을 일해 온 뮌의 능력을 반이라도 이어받았다면, 발탁하기에는 충분한 인재다.

거기다가 뮌을 설득해 비자금을 캐낼 수 있다면 꿩 먹고 알 먹고지.

“그럼 제가 맡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타라가 가슴을 탁 치면서 말했다.

커다란 가슴이 주먹에 살짝 뭉개지면서 흔들렸다.

“할 수 있겠나? 처음으로 독립 업무를 맡기는 거 같은데. 이거 생각처럼 만만치 않을 거라고.”

하지만 타라는 의욕이 넘치는 듯했다.

“각하께서 제게 부관참모를 맡기셨으니 기대에 부응하고 싶습니다.”

“그럼 믿어보지. 다음 안건은?”

“전 백작님의 거취를 정해주셔야 합니다. 전 백작께서 계속 아티아에 체재하신다면 불만세력이 결집할 우려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헤시아스로 보내버려. 알아서 본인이랑 헤시아스 남작이랑 욕심쟁이 할아범 둘이서 멋대로 수 싸움하면서 아웅다웅하겠지.”

내가 아버지에게 당할 뻔한 수를 그대로 돌려주는 거다.

이건 좀 속이 시원하군.

어차피 백작위를 넘긴 아버지는 뒷방 늙은이밖에 안 되는 셈이므로, 아티아에서만 치우면 된다.

타라도 수긍하고 넘어갔다.

“다음으로, 새로 점령한 영지 분봉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나도 땅 욕심이 나지 않는 건 아니다.

욕심대로만 하자면 전부 직할령을 만들고는 싶지만, 직할령이라고 전부 세출보다 세입이 더 많은 건 아니다.

오치라, 펜슬빌, 베섹은내가 진격하면서 한 번 털어먹고, 켈자르 패잔병들이 튀어나와서 두 번 털어먹은 영지들이니 당장은 돈 나올 일보다 돈 들어갈 일이 더 많다.

이미 곳간이 텅 빈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나 따라서 모험을 같이 해 준 공신들에게는 어차피 대우를 해줘야 하니까.

통 크게 주지 뭐.

“오치라는 오록스 단장, 펜슬빌은 무산토 보병대장, 그리고 베섹은 마티란 자작에게 주겠다. 다만 오록스 단장과 마티란 자작은 당분간 아티아에서 나를 보좌해야 하니까 대리 통치를 시켜야겠는데. 괜찮겠지?”

“켈자르가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대리 통치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럼 무산토 보병대장 후임은 생각해두신 자가 있으십니까?”

“아. 보병대장이란 계급을 없앨 거거든. 군대부터 시작해서 행정 관료까지 제도를 싹 개편하려고 했는데... 이건 돈이 없으니 시간을 좀 두고 해야겠어. 하여튼 무산토 후임은 없다. 당분간은 보병들 대대장 위에 바로 내가 통솔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생각난 김에 공신 보상은... 영지 받은 자들은 그걸로 됐고. 부게른 남작한테는 뭔가를 해줘야 할 텐데. 돈은 없고. 뭐 대신 줄 게 없나? 자작위라도 주는 건 어때?”

“가문 승계 이외의 승작(??)은 중앙에서 허가를 받으셔야 할 테니...”

“힘들겠군.”

나는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부게른 남작이 살구를 먹어치우듯이 키스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공부만 열심히 하느라고 여자는 영 모르는 인간 같던데.

여자라.

“이 건은 내가 알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건 해결된 거 같은데? 뭐가 더 있나?”

“백작위 계승식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건 미룬다. 돈이 없잖아, 돈이.”

“하지만 각하께서 백작위를 이으셨다는 걸 영지민들에게 알리고 권위를 세우는 데에는 계승식이 꼭 필요합니다.”

“계승식이 돈 한 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내 입맛도 쓰긴 쓰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는 이 세계에서 의식은 단순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존재와 의미를 인민의 기억에 새기는 작업이다.

승전 개선식과 위령비 조성, 그리고 기사 서임식은 바이스 레시아르라는 호색한 도련님을 전쟁 영웅이자 차기 백작이 될 만한 그릇으로 만들어주었다.

쿠데타 이후에 아티아가 크게 들썩이지 않은 건 그 의식들로 인해 아티아의 성민들이 나를 믿을만한 지도자로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타라 말대로 계승식은 주도 아티아 뿐 아니라 레시아르 령 전역에 내 승계를 알리고, 주변 영지와 이웃국에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이걸 대충 넘기면 내 권위도 얕잡아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안 한다는 게 아니야. 돈이 들어올 때까지 미뤄두자는 거지.”

마티란 자작은 특별세를 걷으라고 건의했었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좋게 승계한 것도 아닌데, 내가 백작이 되자마자 세금을 새로 걷으면?

그 또한 불만 세력이 결집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거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정권이 바뀌면 괜히 돈부터 풀고 그러는 게 아니다.

결국 돈, 돈, 돈인데.

“그래. 파티스 공국에서 차관을 좀 들여와야겠어.”

“돈 빌릴 데가 없어도 그렇지, 하필이면 그 자들에게서 돈을 빌린다니요.”

“돈 빌릴 데가 없어서 파티스에서 빌리는 게 아니라, 파티스라서 거기서 돈을 뜯어오는 거야.”

타라는 아직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차분차분 설명해주었다.

“켈자르가 내게 진 이상 마법사도 없는 파티스는 레시아르에 대항할 수 없지. 그러니 돈을 빌려달라는 게 일종의 협박인 거야. 대침공 때 켈자르하고 연합해서 쳐들어온 거 안 잊는다. 켈자르는 이미 피의 복수를 당했다. 너희는? 좋게 말할 때 돈 내놓고, 안 빌려주면 마법 맛 좀 보여주는 거고.”

“그렇군요. 하지만 각하께서 지금 주도를 비우시는 건 위험한 게 아닐지...”

“누가 정말로 파티스를 정벌한대? 요는 그렇게 협박을 한다는 거야. 파티스 놈들도 위험과 비용을 계산해보고 적정한 수준에서 차관을 내주겠지.”

돈을 안 주면 미친 척하고 정말로 쳐들어가는 것도 생각해볼 법은 하다.

켈자르에서 뜯어온 만큼만 뜯어오면 지금 있는 문제가 다 해결 되니까.

아마 그런 것도 파티스에서 고려를 하겠지.

뮌을 끌어들여서 비자금을 찾아내고 파티스 공국에서 차관을 받아오고.

둘 다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돈이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놀고 있을 수도 없다.

“노예상이나 보고 올까.”

“…….”

“돈 벌러 가는 거야, 돈 벌러!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나! 에이씨!”

괜히 한 번 화를 냈더니 타라는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생각이 짧아...”

“영지에 돈이 없어서 백작이 직접 돈 벌러 나간다는데! 부관이 이렇게 백작을 핍박하나! 이거 서러워서 백작 노릇 하겠어? 어!”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리 와서 엉덩이 대.”

타라는 머뭇거리다가 내가 씁, 하고 소리를 내자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 등을 돌려 엉덩이를 내밀었다.

길쭉한 흰 꼬리가 위로 빳빳하게 올라갔다.

자주색 면바지에 빵빵하게 들어찬 엉덩이가 탐스럽다.

얘는 온 몸이 다 예술품이라니까.

얼굴부터 발끝까지 티 하나 없이 다 예쁜 상아색인데, 가슴도 크고 골반도 넓다.

허벅지 아래에서부터 엉덩이 밑까지 손으로 살살 쓰다듬다가,

기습적으로 손바닥을 풀스윙했다.

짜악!

“... 읏.”

타라는 갑작스런 타격에도 이를 앙다물고 버텨냈다.

하지만 아픈기는 아픈지, 엉덩이를 저도 모르게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학심이 또 치솟는다.

짜악!

“...!”

타라는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손가락을 깨물고 있으려나.

그래도 잘 참는다. 이번에는 살짝 마력을 담아서.

짜아악!

“하으흑!”

결국 타라가 못 버티고 신음소리를 냈다.

“이리와.”

나는 타라가 정신 못 차린 틈을 타서 내 허벅지 위에 끌어다 앉히고는 자상한 목소리로 어르고 달랬다.

“타라. 나는 귀관에게 기대하는 게 많아.”

“알고...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기대를 받고 있다는 걸.”

“그래. 그런데 말이야. 귀관은 자꾸 나를 여자에 미친놈으로만 보는 것 같아.”

“그런 일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타라는 꾸물거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타라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카르마시아에서도 말했지? 거부감을 가지고 보면 보일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부관인 그대가 편협한 시야를 갖고 있으면 누가 내게 조언을 해주겠나.”

“죄송... 합니다.”

“죄송하면 고치면 돼. 때린 건 미안하군.”

나는 붓기로 부풀어 오른 타라의 엉덩이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해주었다.

세상에 모든 상관들이 나처럼만 하면 상냥한 세계가 될 텐데.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들은 가문의 일은 세리야와, 영지의 일은 마티란 자작과 상의해서 정해서 보고만 하라고 휙 던져두고 나왔다.

저택을 나서자 알아서 친위대원들이 따라붙었다.

“고생들 하는군. 파샨은 어디 있나?”

“친위대장은 잠시 근방 순찰을...”

“앗! 도... 백작님!”

담벼락을 만지면서 걷던 파샨이 나를 발견하고는 도도도 달려왔다.

입가에 검붉은 소스가 잔뜩 묻어 있었다.

“순찰은 무슨. 땡땡이치고 군것질 하고 왔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입에 묻은 건 뭐야. 그리고 거짓말 할 때 말 좀 더듬지 말라고.”

파샨은 팔을 들어 비싼 정복으로 입을 슥슥 문질렀다.

“하여튼. 지금 딱히 할 일 없지? 따라와.”

“네!”

“어디 가는지 물어보지도 않네.”

“도... 백작님 가시는 데가 제가 가는 데잖습니까! 히히히히.”

간만에 나와 외출을 나온 파샨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도련... 백작님!”

“그냥 도련님이라고 해. 너한테 백작님 소리 들으니까 이상하다.”

파샨은 꼬리를 붕붕 흔들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도련님은 도련님인 것 같습니다! 아, 그런데 ‘춤추는 감자’ 옆에 새로 생긴 여관 가보셨습니까? 거기 꼬치구이가 엄청 맛있어요!”

“군것질 하고 온 거 맞구만. 이리 와. 볼 대.”

“이이잉... 아흡니다...”

파샨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잠시 걸었다.

#

지역마다 다르지만 일단 레시아르 백작령에서는 관습적으로 노예 제도가 묵인된다.

양지에 나오면 때려잡지만 음지에 숨어있는 이상 모른 척 해주는 정도.

대로에서 한참 벗어난 좁은 골목길.

간판에는 목줄을 찬 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실 나는 창관은 갔어도 노예상점은 가본 적이 없다.

그 둘이 비슷해보여도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내가 창관에 가서 흥청망청 놀면, 영지민들은 그냥 도련님이 유흥을 즐기시는구나 하고 만다.

그런데 내가 노예를 샀다고 하면, 영지민들은 안쓰러워한다.

아... 도련님이 얼마나 여자가 급하시면...

이런 차이다.

이제는?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사업하러 가는 거라니까.

나는 당당하다.

“미천한 자가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빼빼 마른 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열고 나와 바로 절했다.

“나를 아는가?”

“레시아르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분이시지요. 누추하지만,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여자는 자기를 주잔느라고 소개했다.

“여자가 노예상이라니, 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내 마음을 그대로 짚은 듯한 물음에 좀 놀랐다.

“그래. 여자가 이런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노예상인이 여자라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이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게 뭔가?”

“노예상인이 남자라면 손님들은 그가 자신이 산 노예를 먼저 건드린 게 아닐까 늘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처럼 여자라면 그런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지요.”

내심 감탄했다. 이거 여자가 남심을 제대로 아네.

어차피 노예가 처녀일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노예상인이 내가 살 노예를 미리 따먹었다면 기분이 상당히 나쁠 거다.

노예상점까지 와서 노예를 구입할 정도의 남자라면 기본적으로 음습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런 점에 대해서도 민감하겠지.

나름 장사수완이 있나보네. 강단도 있고.

뭣보다도, 나도 주잔느가 여자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볼 노예들을 건드리진 않았을 거 아니야.

“상품을 보시겠습니까?”

주잔느는 지하 계단을 가리켰다.

노예를 사려고 온 건 아니지만, 일단은 노예상점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알아야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촛대에 불을 켜고 앞서 나서기 시작했다.

파샨이 혹시 모를 암습을 경계하며 두어 발자국 먼저 걸었다.

파샨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니 꿉꿉하고 구릿한 냄새가 났다.

비 젖은 판초 우의를 꾸겨서 관물함에 넣어놨다가 꺼내놓으면 이런 냄새가 날까 싶다.

“귀하신 분이 오실 줄 알았다면 미리 정리를 해두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주잔느는 민망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평민들은 이렇게 살겠지.

나도 아주 깔끔 떠는 성격은 아니라 견딜만은 하다.

지하층에는 여러 종류의 우리 속에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제일 작은 우리에는 몸집 작은 여자가 납작 엎드려서 혀만 내밀고 숨을 간신히 쉬고 있었다.

고개를 들기만 해도 바로 천장에 닿을 정도로 우리는 낮았다.

“저건 뭔가?”

“주제도 모르고 반항해서 벌을 받고 있는 녀석입니다.”

“저러다 죽겠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가끔은 본보기를 보여야 다른 노예들도 나대지 않으니까요.”

“그건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 주인공이었다면 당장 주잔느를 쥐어패고 저 노예를 구하겠지만, 나는 전생에 못한 지랄을 현생에서 다 할 걸 다짐한 악덕영주다.

날 꼴리게 하면 구해주겠지만 저건 너무 작아서, 좆에 기별도 안 가겠다.

이리저리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노예들을 구경했다.

널브러져서 자거나 동태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노예들의 눈에 희색이 돌았다.

잘생긴 남자가 비싼 옷을 입고 왔으니, 팔린다면 이런 사람에게 팔리고 싶겠지.

“귀하신 분! 저를 사주세요! 매일 밤낮으로 봉사할 자신 있어요! 요리도 청소도 맡겨만 주세요!”

“저기요! 경비병을 불러주세요! 저는 노예가 아니에요! 꼭 사례 해드릴게요! 제발요!”

“귀족님! 저는 어떠세요? 제 마을에서는 명기로 유명했는데. 앞이든 뒤든 위든 아래든 전부 다 쓰실 수 있어요! 만족하실 거예요! 당장 지금이라도 한 발 어떠세요?”

중간에 뭐 이상한 게 섞여있긴 했는데.

주잔느가 채찍을 들고 눈을 희번덕거리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뒷짐 지고 거닐면서 하나하나 구경했다.

글을 안다거나 자수를 뜰 줄 안다며 자기 특기를 어필하는 여자가 있는가하면, 볼 안쪽에서 혀를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손을 입 앞에 가져다 대어 외설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여자도 있고.

내가 지나가면 말없이 가슴을 까서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자기야 자신 있는 거겠지만, 브레이스의 폭유를 아는 내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래도 땀까지 흘려가며 자기 어필을 하는 노예들을 구경하는 건 재밌었다.

전생에 면접관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 개새끼들 심정이 좀 이해가 가네.

노예를 살 생각은 없었는데 또 와 보니 슬그머니 구매욕이 생긴다.

아주 예쁜 애는 없지만, 그래도 돈 몇 푼 주고 여자를 살 수 있다는 게 얄팍한 전능감을 자극한다고 할까.

“이것들 가격은 어떻게 되나?”

“하급 노예가 금화 반 닢, 중급 노예가 금화 한 닢, 상급 노예가 금화 세 닢입니다.”

엄청 싸네.

제일 싼 건 한화로 백오십만 원 밖에 안 한다고.

비싸봐야 천만 원 언저리고.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이 세계는 참 목숨값이 싸다. 백작가 장남으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 하급 노예는 어떤 건가?”

“저기 벌을 받고 있는 녀석처럼 반항적이거나, 나이가 많거나, 얼굴이 못 생겼거나 하는 등 눈에 띄는 결점이 있는 노예들입니다.”

“그럼 됐고. 상급 노예란 걸 좀 보고 싶은데.”

“따라오시지요.”

주잔느는 촛대를 다시 집어 들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지하 층 자체가 그리 넓지 않아서,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우리가 아니라 제대로 구획이 나뉜 방이었다.

주잔느가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여자 둘이 나왔다.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가 좀 부스스했는데, 나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손으로 머리를 빗고 표정을 만들어 짓느라 부산스러웠다.

“이게 상급 노예인가?”

솔직히 좀 실망스럽다.

나름 미녀라면 미녀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대학 동기 중에서 제일 예쁜 정도?

상급 노예라고 해서 도내 최상위랭크는 될 줄 알았지.

이건 뭐 당장 성내 메이드들만도 못하다.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합니다. 백작님 안목에는 맞지 않을 거라 미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하긴. 건물 규모를 보니 노예 수가 오십 명은 있을까 싶은데.

그 중에서 세 부류로 상중하 나눴다면 급수야 뻔하지.

뭐, 규모야 차차 늘리면 된다.

나는 상급 노예 두 명을 끌어당겨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맛보기 서비스는 없나?”

“백작님께는 뭐든 해드려야지요.”

주잔느는 해골 같은 얼굴로 웃고는 온 방향으로 다시 나를 이끌었다.

양쪽으로 우리가 들어 찬 복도 정중앙에 의자를 놓고 나를 모셨다.

노예들은 두 손으로 철창을 붙잡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녀석들은 내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고, 둔한 녀석들도 주잔느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는 대단히 지위 높은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잡부에게 팔려서 매질 당하며 사느니, 내게 팔리는 게 백배는 낫지.

나는 노예들의 희망을 이용해서 즉석에서 슈퍼노예­K를 개최해보기로 했다.

“한 년당 일 분씩 주마.”

내가 뜬금없이 꺼낸 말에 모두 숨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방법은 뭐든 상관없다. 내 정액을 받아내는 년을 선착순으로 세 명만 사주겠다.”

노예들이 환호성과 비명을 내지르면서 우리 철창을 쾅쾅 두들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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