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메이드 데이지의 평범한 일상
* * *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지라고 합니다.
호그풋 마을에서 나고 자란 시골 처녀에요.
평생 그 마을에서 살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이란 게 생각대로 흘러가질 않더라고요.
어느 날 갑자기 켈자르 백작님과 레시아르 백작님이 전쟁을 벌인다고 했을 때만 해도, 별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시아르의 공자님이 마법사라고는 해도, 아직 너무 젊으시잖아요?
우리 켈자르 백작님은 노련한 마법사이시니 금방 이길 줄 알았죠.
그런데 이게 웬걸.
레시아르의 공자님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세 개 기사단이 한 번에 져서 도망쳐버렸다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마을에서 제일 발 빠른 한스 아저씨를 영주님께 보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 때는 이미 영주님도 성에서 도망친 후였어요.
그래도 저희 마을 같이 조그마한 시골에 별일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려요.
패잔병들, 켈자르 군의 표식만 보고 마을에 받아주었는데...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아무렇게나 창을 찔러대던 남자들.
사냥꾼 거넨 아저씨가 죽고, 옆집 바이예 아주머니가 강간을 당했어요.
할아버지가 재빨리 저를 숨기지 않았다면 저도 거기서 처녀를 잃었거나 죽었을 수도 있겠죠.
그 때 나타난 게 순백의 여기사. 타라 님.
그리고 레시아르의 공자님이신 바이스 님.
그렇게 무섭던 병사들이 칼 한 번 제대로 못 휘둘러보고 죽었어요.
그 모습에 조금 희열까지 느꼈던 건 지금까지도 비밀입니다.
할아버지는 호그풋 마을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저를 레시아르 공자님, 지금이야 백작님이 되었지만, 여하튼 바이스 님께 맡겨서 저는 그 분을 따라가게 되었어요.
마차 안에서 지켜 본 바이스 님은 좀... 많이 여자를 밝히시는 분이셨어요.
포로로 잡히신 체닐린 님을 끝없이 만지고 주무르고 핥고 빨고 하셨으니까.
그걸 보고만 있던 제가, 심지어 저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는데도 속옷을 다 적실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하지만 마차 밖에서 본 바이스 님은 대단했습니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 요새라던 디부시 요새를 하루아침에 격파하고, 켈자르 백작님까지 사로잡아서 카르마시아를 점령하셨으니까요.
여하튼 저는 바이스 님을 따라 레시아르까지 와서 저택의 메이드가 되었습니다.
늘 즐겁기만 한 일상은 아니지만, 저는 나름대로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매일 새벽, 닭도 울기 전의 이른 시각이 기상시간입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씻고 나풀나풀한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졸린 눈을 애써 뜨면서 대식당으로 가야 해요.
수십 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메이드들이 서로 꾸벅꾸벅 졸면서 걸어가는 광경은 처음 봤을 때는 참 재밌었는데. 저도 이제 그 중 하나가 되었네요.
메이드장 님께서 대식당에 메이드들을 모아두고 아침 조회를 여십니다.
“오늘도 백작님을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서 그 분께 봉사하도록 하세요.”
“예. 메이드장 님.”
메이드장이신 세리야 님은 무척 아름다우신 분이세요.
안경이라는 유리알을 코에 걸치시고 이리저리 명령을 내리시는 게 무척 어울리시는 미녀시죠.
저도 마을에 있을 때는 남자애들이 고백을 하기도 하고, 저나름대로 예쁜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레시아르 백작님 곁에 모인 미인들을 보면 위축되곤 하네요.
가끔은 세상의 미녀들이 여기 다 모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거기. 데이지. 듣고 있나요?”
“예... 예!”
“오늘은 특히 일이 많으니까 주의하도록 해요.”
“예. 메이드장님.”
“그럼 계속할게요. 아픈 사람은 없나요? 태기(??)가 느껴지는 사람은? 누누이 말하지만 백작님의 아이를 받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태기가 느껴진다 싶으면 일이 신경 쓰인다고 숨기지 말고, 바로 말하도록 하세요. 여러분의 선배들도 몇이나 이미 출산 휴가를 쓰고 있어요.”
메이드장 님의 적나라한 말씀에 처음에는 얼굴을 붉히기도 했었지만 이젠 이것도 익숙해졌습니다.
성 안에 들어오는 메이드는 기본적으로 전원 백작님을 모시는 여자들입니다.
백작님이 원하시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 요구에 응해야 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임신을 하면 그만한 경사가 없습니다.
산모는 특별대우를 받고, 장차 태어날 아이에게도 최소한 동혈 기사의 지위가 보장되니까요. 비록 백작님을 남편이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요.
성 안에서 호화를 누리는 이상 그런 건 다 감내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성 밖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임신한 메이드 선배님이 열 명은 된다고 합니다. 한 분이 몇 번이나 임신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정작 가장 많이 백작님의 아기 씨를 받은 메이드장 님이 지금껏 한 번도 임신을 못했다는 건...
이런 건 생각하지 말도록 하죠.
메이드장 님도 상당히 그걸 신경쓰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아랫배를 쓰다듬는 모습을 언뜻 본 적이 있었는데, 저까지 무척 슬퍼졌어요.
“데이지. 오늘 자꾸 딴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요.”
“죄, 죄송합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집중하도록 해요. 오전 중에 부게른 남작님이 저택에 오시기로 되어있으니 각자 몸가짐에 특히 더 신경 쓰도록 하고, 부장들은 내게 와서 일정표 받아가요.”
그걸로 조회는 마치고.
저희들은 빠르게 아침식사를 해치우고 각자의 일터로 헤어졌습니다.
제가 해야 할 오늘 아침의 첫 일정은 백작님을 깨워드리는 겁니다.
매일 다른 메이드가 돌아가면서 백작님을 깨워드리는데, 오늘은 제가 당번이네요.
저는 백작님의 침실에 살짝 노크하고 삼십 초를 세었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침대 위에서는 세 남녀가 서로 뒤엉켜서 자고 있었습니다.
중앙에 백작님. 왼쪽과 오른쪽에 분홍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 같은 소녀들.
백작님이 노예상점에서 사오셨다고 했는데, 이런 예쁜 아이들도 노예가 되는 거네요.
내심 이상한 감탄을 해보기도 하고.
침대보에는 어젯밤 정사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처녀혈과 정액의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으음. 이걸 빨려면 고생 좀 하겠네요.
백작님의 아기 씨…….
저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는데 벌써 일로만 익숙해진 걸 떠올리면 좀 씁쓸해요.
저도... 각오를 하긴 했었는데...
꼭 바란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로서 자존심이란 게 있잖아요?
주변에 모시는 여자들은 전부 한 번씩 손을 대신 분이... 역시 제가 시골마을 처녀라 너무 소박하게 생긴 게 문제인 걸까요.
에이. 그런 건 생각하지 말죠.
생각해봐야 우울해질 뿐이야.
저는 침대 맡으로 다가가 백작님께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주무시는 백작님은 동화 속 왕자님처럼 잘생겼습니다.
하아아……. 저 높은 콧대하며, 날카로운 턱선하며.
눈매가 좀 느끼한 거 같지만 제가 본 그 어느 분보다 잘생기신 분이세요. 익숙해질 때가 됐지 싶은데 아직도 백작님을 보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말투 때문에 가끔 경박해 보이실 때도 있지만, 좀 경박하면 어때요.
잘생기고 마법사고 이젠 백작이시기까지 한데.
저 따위 여자는 심심풀이도 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딱 하룻밤이라도 좋으니까 모시고 싶다는 욕심이 듭니다.
안아주시지 않으려나…….
아, 아. 안 되요. 안 됩니다.
아침부터 이런 불순한 생각을.
저는 뺨을 착착 쳐서 마음을 바로잡고서 백작님의 얼굴로 고개를 숙여서, 뺨에 키스했습니다.
일이지만 행복한 일이에요.
“백작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백작님은 제 입술이 뺨에 닿자 입꼬리를 위로 감아올리셨습니다.
여전히 눈은 감으신 채지만, 잠에서 깨셨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일어나시지 않는 건 뺨키스보다 더 위의 단계를 바라시는 거죠.
이 능글맞은 미소가 너무 좋아.
저는 제 볼이 확 붉어지는 걸 느끼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서, 이번에는 백작님의 입술에 키스했습니다.
“쪽. 백작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가끔은 백작님이 혀를 얽어서 진하게 키스를 하시는 일도 있지만, 오늘은 그 날이 아닌가 보네요.
백작님은 눈을 살짝 뜨고 제 뺨을 어루만지고는, 이내 크게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셨습니다.
조금 아쉽네요.
“데이지인가?”
“예. 백작님. 레몬수를 따라드릴까요?”
“그래. 고맙군.”
저는 탁자에 놔둔 유리병을 기울여 레몬수를 잔에 따라선 백작님께 두 손으로 바쳤습니다.
백작님은 그걸 단번에 마시고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람한 성기가 좌우로 덜렁덜렁 흔들립니다.
마을에서 멱을 감을 때 봤던 꼬맹이들의 조그마한 고추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저런 게 다 들어가는구나.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여자애들은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없는데, 어젯밤 내내저런 조그마한 애들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물건이 들어갔다 나왔다 했을 테니 피곤할 만도 합니다.
백작님은 제 옷시중을 받고는 바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기분에 따라 아침에 목욕 시중을 받으실 때도 있으니까, 메이드로서는 백작님이 무얼 바라는지 바로바로 알아채고 맞춰드려야 합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메이드 선배님께서 백작님을 수행해 대식당으로 가셨습니다.
선배님께서 식사 시중을 드는 동안, 저는 저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불과 침대보, 베개를 모두 걷어서 세탁 바구니에 넣고 방을 나서자,
누군가가 구두 굽을 또각거리면서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게 보입니다.
저 분은, 마티란 자작님이시네요.
저택을 출입하시는 분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잘못해서 모른 척 지나가기라도 하면 큰 무례가 되니까요.
얼른 복도 한 편으로 비켜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대로 지나쳐 가실 줄 알았는데,
마티란 자작님은 제 바구니 안에 든 침구를 보고는 저를 검지로 가리켰습니다.
“너. 지금 백작님을 깨워드리고 오는 길이니?”
말투가 날카로우시네요. 새가슴이 도근도근 콩닥거립니다.
작위도 높으시고 마력도 많으신 데다가 미인. 그것도 백작님의 아이를 막 임신하신 분.
이런 분께 찍히면 앞으로 데이지의 인생은 어둡기 그지없을 겁니다.
저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바싹 수그렸습니다.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하며 대답합니다.
“네에. 마티란 자작님.”
“그럼 알고 있겠네. 백작님이 어젯밤에는 누굴 품으셨지?”
“새로 사오신 노예 둘... 분홍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여자애들이었습니다.”
“흥. 귀엽긴. 내세울 건 나이밖에 없는 년들이지.”
“죄송합니다.”
이럴 때는 딱히 죄송하지 않아도 빠르게 사과드리는 게 중요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눈치 없다고 몇 번이나 혼쭐이 났던지요.
다행히 마티란 자작님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시면서도 제게 분풀이를 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요새 백작님께서 너무 밖으로만 도시는데……. 브레이스랑 애들이라도 다시 불러야 하나. 아니면...”
“…….”
“뭐해? 일하러 가 봐.”
“예.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마티란 자작님.”
저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빠르게,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 척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십년감수했네요.
백작님의 총애를 받는 건 좋기도 하겠지만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든 안전제일이죠.
저는 그냥 평범한 메이드 생활에 만족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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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뒤에 조경림으로 잘 가려진 사각지대.
귀하신 분들께 보이지 않게 세탁이나 도축을 마치는 사용인들의 장소입니다.
열심히 빨래를 마치고 나서 빨랫줄에 이불을 하나씩 걸었습니다.
찬 물에 담갔던 손이 조금은 시립니다.
곧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올 텐데.
보통 겨울에는 빨래를 잘 하지 않지만, 겨우내에도 백작님이 쓰시는 이불은 자주 빨아야 할 테니 걱정이 됩니다.
이불을 한 번씩 나무 채로 두들겨서 주름지지 않게 쭉 편 다음,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거기 메이드. 데이지... 였나? 잠시 괜찮을까?”
“예. 참모부관님.”
저를 부른 건 타라 님이셨습니다.
저는 가지런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저희 마을을 구해주신 분이라, 제 마음 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친숙하고 정겨운 분이세요.
물론 타라 님은 저에 대해서 별 생각 없으시겠지만.
“잠시만…….”
타라 님은 품 안에서 편지 몇 통을 꺼내선 한 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그것들을 한 번씩 다 확인해보셨어요.
어쩜 저렇게 깨끗하게 생기셨을까요.
윤기가 나는 백발과 뽀얀 우유색 피부, 커다란 가슴과 골반까지.
네마로우스 신께서 타라 님을 만드셨다면 오직 상아로만 빚어내셨겠죠.
메이드 선배님들의 미모는 가끔 질투가 날 때도 있지만, 이렇게나 차이가 벌려지면 질투할 생각도 들질 않습니다.
이러니 백작님도 타라 님을 총애하시는 거겠죠.
참모부관이란 직위도 오직 타라 님을 위해서 새로 만든 것이라고 저택 내에서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 이거군. 지금 바빠서 그런데, 이걸 나 대신 마부에게 전해주겠어? 지금쯤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타라 님은 편지 한 통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지금은 집무실을 청소하러 가야 할 시간이지만, 타라 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저는 공손하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고마워.”
타라 님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어주셨습니다.
같은 여자끼리라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미소였습니다.
돌아서서 어딘가로 가시는 타라 님을 배웅하고 슬쩍 편지 봉투를 확인해보자, 파... 파... 크레 아카... 아카데미라는 곳이 적혀 있었습니다.
메이드 선배님들께 글을 배운 보람이 있네요. 뿌듯합니다.
그런데 파크레 아카데미…….
어디서 들어봤다 싶었는데, 잘 떠올려 보니 메이드 선배님의 동생 분들이 다닌다는 아카데미였습니다.
그걸 알아서 뭐가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묘한 만족감이 듭니다.
저는 편지 봉투를 마부에게 전해주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서 급히 집무실로 향했습니다.
메이드 선배님들이 왜 늦게 왔냐고 혼을 내시기에 타라 님의 심부름 때문에 늦었다고 답했지만, 변명하지 말라고 더 혼났습니다.
이런 건 불합리합니다…….
한참을 혼나가면서 집무실 청소를 마치고.
이제는 오찬 시간을 백작님께 알려드리러 가야 합니다.
백작님이 어디 계신 지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아까 전에 시종이 부게른 남작님을 응접실로 모시는 걸 봤습니다.
백작님도 아마 거기에 같이 계시겠죠.
저는 응접실로 가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며시 문고리를 돌려서 안을 확인해봤습니다.
이건 메이드 선배님 중 한 분께 전수 받은 비기에요. 윗분을 모시려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할 때도 있다면서 알려주셨는데.
물론 들키면 크게 경을 친다지만 저도 이 비기 덕을 많이 봤어요.
방 안에선 백작님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습니다.
백작님은 의자에 앉아서 눈동자가 흐릿한 여자를 품 안에 안고 있었습니다.
베티아라고 했던가요. 저 사람도 백작님이 사온 노예였지요.
그 맞은편 바닥에서는, 뚱뚱한 대머리 귀족님이, 아, 부게른 남작님이시란 말인데.
그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전신이 꽁꽁 묶인 여자 노예를 슬쩍슬쩍 만지고 있었습니다.
“돼지 같은 새끼! 내 몸에 손대지 마!”
“아니, 그러니까, 그게…….”
노예는 앙칼지게 소리쳤습니다.
촌마을 처녀인 저도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좀 머리가 이상한 애일까요?
그래도 부게른 남작님은 정말로 손을 떼고는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았습니다.
생긴 거와는 다르게 상냥하신 분이네요.
“백작님. 이런 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남작. 그 년은 노예야. 안 될 게 어딨나? 감히 노예 년이 남작의 명을 거역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보나? 남작이 법을 많이 공부했으니 알 거 아닌가. 왕국의 계급법이 그렇게 정하던가?”
남작님과 백작님이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 받으셨습니다.
백작님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럴 때의 백작님은 무서우세요.
저는 ‘문 살짝 열어 살피기’를 쓰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방에 들어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요.
백작님께 제 몸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적어도 처녀만은 그냥 평범하게 단 둘만 있을 때, 백작님의 화려한 침실에서 드리고 싶은걸요.
“남작. 내가 보기에 남작은 너무 자기의 욕망을 분출할 줄은 몰라.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찬해줄 것 같나? 전혀 아니야. 오히려 우습게보지. 못생긴 놈이 성격도 호구라고 말이야. 내 말이 틀린가?”
“... 아닙니다.”
“기분 나쁜가? 기분 나쁘겠지. 지금 느낀 그 감정, 그 분노! 남작 안에 있는 분노를 표출하란 말이야.”
“... 예.”
“그럼 따라 해봐. 무시하지 마!”
“무, 무시하지 마...”
“더 크게! 무시하지 마!”
“무시하지 마!”
“그렇지. 그럼 이제 그 오만한 노예 년한테 그 분노를 풀어봐.”
백작님이 발끝으로 노예를 가리키자, 남작님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남작님은 줄로 묶인 노예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었습니다.
“무, 무시하지 마!”
“흐윽! 대머리가. 어지러워! 놔!”
“무시하지 말라고!”
“돼지새끼가 뭐래? 웃겨.”
“내가 돼지새끼로 보이나? 나는 삼백 년 전통을 가진 부게른 가문의 가주이고, 영예로운 남작이고, 중앙에서 표창까지 받은 법학도야!”
남작님은 말을 하면서 열이 뻗치는 게 얼굴에 그대로 보였습니다.
“너도 아내처럼 내가 우습냐? 이래서 여자는 다 똑같아! 결혼하기 전에는 모시고 살 것처럼 간도 빼줄 것처럼 굴더니, 결혼하고 나니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피하고! 살구만이 나를 봐주지. 오직 살구만이... 그러니까 너는 그냥...”
백작님이 추임새를 넣었습니다.
“씨발년이지!”
“그래! 씨발년이야!”
부게른 남작님은 백작님의 말을 따라하면서 성이 났는지 노예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꺄악!”
“헉. 미, 미안...”
“손... 대지... 말라고...! 돼지 새끼야!”
“... 이 씨발년이! 생각해줘도!”
남작님은 주먹으로 노예의 얼굴을 후려쳤습니다.
퍽 소리가 터지면서 노예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러나왔습니다.
무, 무서워요.
“어허. 얼굴에는 손대지 말고.”
“배, 백작님... 제가... 무, 무, 무슨 짓을...?”
“괜찮아. 때린 건 문제가 없네. 적절한 훈육도 필요한 법이야. 다만 때릴 때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귀족인 그대가 잘못 치면 평민인 저 년은 그냥 죽어. 그러니까 힘을 슬쩍 빼고, 손바닥으로, 가슴이나 허벅지, 엉덩이를 치는 거야. 이렇게.”
백작님은 품에 안고 있던 베티아의 가슴을 짝 소리나게 쳤습니다.
늘어진 가슴이 흔들리면서 서로 부딪혔지만 베티아는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남작님은 그 모습을 보곤 침을 삼키고서 자기 앞의 노예에게 다시 다가갔습니다.
그 눈동자에는 이전과는 다른 욕망과 광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문 틈 사이로 훔쳐보는 제게도 그게 느껴지는데, 코앞에서 남작님을 대하게 된 노예는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겠지요.
노예는 부르르 떨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왜 나마안...”
그 다음부터는 눈뜨고 보기 힘든 능욕의 시간이었습니다.
노예의 작은 몸이 남작님의 두툼한 살집 안에 완전히 파묻히다시피 해서, 노예의 몸은 거의 드러나지도 않았어요.
그저 때때로 들리는 신음소리로 노예가 거기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죠.
남작님이 노예의 안에 잔뜩 사정하고 나서야 끝이 났어요.
“오늘은 이 정도 하고. 남작, 배고프지 않나? 오찬이나 가지.”
“예. 백작님.”
남작님은 아쉬운 듯 혀로 입술을 훑으면서도 일어섰습니다.
곧, 두들겨 맞은 노예를 제외한 백작님과 남작님, 그리고 베티아까지 모두 방문으로 줄줄이 나왔습니다.
물론 저는 그 전에 복도 뒤편으로 물러나서 막 방금 온 것처럼 행동을 취했고요.
“어. 데이지. 왔던가?”
“예. 백작님. 오찬 시각을 알려드리려...”
“시간이 딱 맞았군. 대식당이 요 앞이니 수행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식사 시중도 오늘은 베티아에게 맡겨볼 테니, 가서 쉬도록 해.”
“하지만...”
“어허. 말대로 해.”
“예. 알겠습니다.”
가끔 백작님은 이렇게 아랫사람들의 일을 빼주시기도 합니다.
저 방 안에서 노예를 괴롭히고 남작님의 욕망을 부추기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을까요?
어쩔 때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괜히 어색해서 백작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이고 백작님들 일행이 먼저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그 분들이 복도 저 편으로 사라지시고 난 뒤.
슬쩍 주변을 살피고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예는 여전히 바닥에 누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기. 괜찮으세요?”
제가 묻자, 노예는 몸을 떨면서도 강하게 소리쳤습니다.
“... 뭐야. 넌!”
“저는 데이지인데...”
“안 물어봤어! 꺼져!”
물어봤잖아요.
어차피 자존심을 내세워봤자 좋을 건 없는데.
제가 충고를 해줘도 받아줄 것 같진 않아서.
저는 치마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오트밀바를 꺼내서 주었습니다.
볶은 귀리와 아몬드를 잘 갈아서 꿀과 섞어서 네모난 형태로 뭉친 것이에요.
저택에서 메이드로 일하다보면 백작님 일정에 따라 식사를 거를 때도 있는데, 그럴 때 몰래 하나씩 꺼내서 먹는 간식입니다.
노예는 저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입을 확 벌려서 오트밀바를 앞니로 낚아챘습니다.
그래도 살려는 의지는 있는 거 같아 다행이네요.
일개 메이드인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겠지요.
저는 가만히 방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오후의 일정은 창고 정리인지라 한참 시간이 걸렸습니다.
쓸데없는 물건들을 팔아치워서 재정을 마련하신다고.
백작가의 물건을 이렇게 팔아도 되나 싶은데, 백작님 결정이니 괜찮겠죠.
문제는 이 창고 정리를 메이드들이 거의 전담했다는 겁니다.
바이스 님이 백작님이 되시자마자 전 백작님의 충복이던 시종들을 몇 명만 남기고 거의 다 내쫓아버렸거든요.
메이드장 님은 전 백작님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저택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설명하셨는데, 머리 좋은 메이드 선배님은 백작님이 집안에 자기 말고 다른 남자가 있는 게 싫어서 그러셨대요.
저는 그게 더 맞는 설명 같아요.
여하튼 마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괜찮겠지만, 저 같이 마력 없는 수혈 평민 여자는 짐을 들고 나르는 게 엄청 힘들다구요.
일할 때 다 배려해주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 팔에 우락부락한 근육이 붙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상자를 들고 나르고.
정리가 끝날 때에는 완전히 팔다리에 알이 배겼습니다.
속으로 시종들을 내쫓은 백작님을 수백 번은 욕했는데.
마지막에 백작님이 나타나셔서 귀한 샹그리아 술과 쿠키를 잔뜩 나눠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먹기는 불편할 테니, 각자 숙소에 가서 먹으라며 술은 병째 내주시고, 쿠키는 포장지에 일일이 싸기까지 해서요.
이런 사소한 마음씀씀이에 아랫사람들은 감동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백작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백작님께 충성을 바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드디어 하루 일과가 다 끝났습니다.
오늘은 정말 일이 많았네요. 어쩐지 높으신 분들과도 자주 마주쳐서 신경도 잔뜩 쓰였고요.
저는 한 손으로는 백작님께 받은 간식 봉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뭉친 어깨를 두들기며 일층의 복도 끝, 침방으로 향했습니다.
별채에 메이드 숙소가 따로 있긴 하지만, 거긴 백작님의 아이를 가진 산모들이나, 경산부들. 그러니까 고참 선배님들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 메이드들은 밤중에 언제라도 일어나서 바로 시중을 들 수 있도록 백작님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게 되어 있습니다.
문을 두어 번 두들기고 들어가자, 같은 방을 쓰는 두 분의 메이드들이 저를 반겨줍니다.
“이제 왔군. 늦게까지 고생했다.”
늠름하게 허리를 쭉 편 채로 앉아 있다가 인사를 건네신 분은 체닐린 마이포흐님.
켈자르의 기사단장까지 하셨던 고귀하신 분입니다.
켈자르 령에서는 포로로 잡힌 게 힘드셨는지 거의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레시아르 령에 와서부터는 살갑게 대해주셔서 저도 염치불구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은혈 귀족, 그것도 기사단장과 친구가 되다니 할아버지가 들었다면 데이지 네가 정신이 나갔냐며 소리를 질렀겠죠.
하지만 체닐린 님께서 먼저 그렇게 청해주셨는데 제가 거절할 수도 없잖아요.
“허브 차를 받아왔는데. 데이지도 마실래? 좀 식었긴 하지만.”
상냥하게 웃으며 잔을 전달해주신 분은 유리 선배님.
저택에서 일한 일수는 저나 체닐린 님과 거의 비슷하지만, 도련님을 뵌 것은 저희보다 훨씬 전이랍니다.
전 백작님이 유리 선배님을 두고 백작님께 강요를 해서 켈자르와 레시아르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고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좀 복잡했지만.
유리 선배님이 전쟁을 일으킨 건 아니잖아요.
고귀하신 분들이 정하셨다면 저희 같은 아랫것들은 어쩔 수 없죠. 감내하는 수밖에.
그래도 유리 선배님은 착하신 분이세요.
늘 먹을 것, 마실 것이 있으면 방에 가져와서 나눠주시고, 가끔 제가 다른 메이드 선배님들께 호되게 혼나고 있을 때는 저를 감싸주시기도 합니다.
백작님 이야기를 너무 자주하시는 게 흠이라면 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허브 차를 마시며 목소리를 낮추어 오늘 하루의 일을 수다 떨었습니다.
대화거리는 사소하지만 다양해요.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저택에 찾아온 손님이 얼마나 큰 목걸이를 차고 있었는지, 백작님께서 드시다 남기신 디저트가 얼마나 달았는지…….
가끔은 깐깐한 메이드 선배님들의 뒷이야기를 속닥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제일 많이 나오는 건 백작님 이야기입니다.
여자와 염문이 끊이질 않는 백작님이니, 화젯거리로서는 이만한 게 없죠.
마티란 자작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당장 어젯밤에 누구를 안았는지부터 시작해서, 누구는 어떤 걸 선물 받았는지, 누가 어떤 시중을 들었는지까지가 다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고조되면, 불을 다 끈 채로 소리 죽여서 백작님께 어떤 체위로 어떻게 사랑을 받았는지까지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건 정말 비밀이에요.
저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서 듣기만 하지만...
에에이!
백작님 이야기가 나오면 이야기를 주도하는 건 유리 선배님입니다.
사랑에 폭 빠진 소녀처럼 두 손을 잡고 꿈 이야기를 하듯 백작님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인 제가 봐도 사랑스럽더라구요.
재밌는 건 그럴 때마다 체닐린 님이 코웃음을 치신다는 거예요.
두 분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유독 백작님 이야기만 나오면 그런다니까요.
유리 선배님 말만 들으면 백작님은 세상에 둘 도 없을 로맨티스트 같은데.
그 말에 딴죽을 거는 체닐린 님의 말을 들으면 백작님은 귀축 중의 귀축이에요.
두 분이 서로 싸울 때면 저만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죠.
하지만 체닐린 님도 말은 틱틱거려도 은근히 백작님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체위 이야기를 은근슬쩍 가장 먼저 꺼낸 게 체닐린 님이셨으니.
계기만 있으면 유리 선배님 못지않게 백작님 바라기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보기도 하고.
촉감 좋은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앉아서, 향기로운 허브 차를 마시며, 아름답고 착한 분들과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이 제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처음에는 저를 백작님께 바친 할아버지를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골마을에서 나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꿈처럼 느껴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잘 계시겠지요?
무서운 일도 있고, 모른 척 흘려보내야 하는 일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과, 때때로 은혜를 베푸시는 백작님 덕분에 저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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