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노예유희
* * *
소도시 카락투스는 베티아가 건달들에게 속아 노예로 팔린 곳이기도 하고, 또 베티아의 아들인 카이가 맡겨진 수녀원이 근처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성 아리렐라 수녀원은 바로 아버지가 유리를 보낸 곳이기도 한데.
여러모로 나와 간접적인 인연을 맺은 장소다.
길이 가까우니 복잡하게 인단을 꾸리지 않고 파샨과 친위대 몇만 데리고 나왔다.
아티아에서 카락투스로 가는 도로는 정비도 잘 되어 있고, 주변 풍광도 좋아서 산책 가는 기분이 들었다.
파샨은 내 곁에 착 붙어 있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새를 잡고, 꽃을 뜯고 하면서 난리를 쳤다.
암만봐도 친위대장보다 애완동물이 더 어울리는데.
원래라면 호통을 쳐야겠지만, 보고 있으면 흐뭇해지는데 어쩌겠나.
성 안에서 뛰놀지 못한 만큼 마음껏 놀도록 풀어놓았다.
수녀원은 카락투스 외곽의 포도 밭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가을이 슬슬 끝나가는 시기였으므로 포도 수확은 진작 끝나서 살짝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어서오세요, 백작님. 성 아리렐라 수녀원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포도밭 사이로 마중 나온 수녀원장 니엘라는 후덕한 아줌마였다.
“유리는 잘 맡아줘서 고맙다. 여기 수녀들이 잘 대해줬다고 하더군.”
“착한 아이였지요. 백작님께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수녀원장은 유리에게 듣기로도 평판이 좋았고, 보기로도 인상이 나쁘지 않아서 바로 물어보았다.
“베티아란 여자를 아나?”
“글쎄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지라. 죄송하지만 바로 떠오르는 이가 없네요.”
정말로 모른다는 눈치였다.
하긴. 아무리 선량한 종교인이라도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수는 없다.
백작이 직접 맡긴 메이드와 길거리 창녀는 관심 쏟는 정도가 다를 수밖에.
“마력이 있는 아이를 여기 맡겼다고 하던데.”
“아, 그 여자 말씀이시군요. 이제 기억납니다. 그런데 백작님께서 그 여인은 어쩐 일로...”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맡겼다는 아이를 보러 왔다.”
“그렇군요.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파샨이 내 뒤를 쫄쫄 따라오면서 슬쩍 물었다.
“도련님. 저 여자 혼쭐 안 내십니까?”
“내가 왜?”
“베티아가 그랬잖아요. 수녀들이 자기 아들을 잘 못 보게 했다고. 그럼 수녀들이 나쁜 거잖아요. 수녀원장은 수녀들의 대장이고.”
“그게 왜 나쁜 거야. 수녀원에 창녀가 들락날락하면 애들이 좋은 거 보고 배우겠다.”
“음……. 그런 겁니까? 저는 베티아가 좀 불쌍하던데.”
“아들을 맡아준 시점에서 수녀원장은 제 할 일 다 한 거야. 베티아를 막은 것도 잘 한 거지. 수녀원이 탁아소냐? 맡겨놓고 애 보러 오게?”
“듣고 보니까 맞는 듯하네요. 아얏!”
“듣고 보니 맞는 게 아니라 내 말은 원래 다 맞아.”
수녀원에서는 카이 외에도 사연 있는 아이들을 꽤 맡아 기르는 듯 했다.
담벼락 안쪽에 건물 본관과는 별개로 작은 오두막이 몇 채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앞의 흙밭에서 아이들 예닐곱 명 정도가 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카이가 누군지는 명백했다.
남자가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하렘 차렸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백작님. 본래 수녀원은 금남(?男)의 구역입니다. 카이를 받아준 것도 나이가 어리고 그 여자... 베티아라고 했던가요, 그 사정이 딱해서 받아준 것이었지요.”
“그랬나? 그럼 받아주는 것도 쉽지 않았겠어.”
“예. 그랬지요. 게다가 카이도 나이가 차면서 내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백작님께서 오셨으니... 이것이 네마로우스 신의 인도하심입니다.”
“바이스 레시아르의 인도하심이지.”
“그 또한 맞지요.”
니엘라가 푸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카이는 베티아의 설명대로라면 아홉 살 정도일 텐데, 몸집이 작고 눈동자가 커서 유약해 보였다.
남자가 보기에 그래 보인다는 얘기였고, 여자가 보기에는 또 다른 듯싶었다.
카이는 자기보다 대여섯 살은 많은 누나들에게 둘러싸여서 귀를 잡히고, 볼을 꼬집히고, 배를 문질러지고 있다.
그런데도 표정은 영 마뜩찮은 것 같다.
저런 놈이 여자에게 인기 있으면서 늘상 죽상을 짓고 다니는 놈이다. 재수 없는 놈.
내가 다가가자 꼬마 여자애들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카이를 둘러싸듯 감쌌다.
요 년들, 벌써부터 남자에 목숨 거는 거 봐라.
살짝 마력을 발하자 바로 흙바닥에 이마를 붙이기는 했지만,풍채 좋은 성인 남자가 위압적으로 다가와도 카이를 지키려고 했다는 것부터가 저 애들의 결의를 증명했다.
카이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이 꼬마 숙녀들의 마음을 벌써 휘어잡고 있는 거다.
마음에 안 드네.
무릎을 꿇고 멍한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는 카이를 콕 집어 말했다.
“일어서.”
“... 네.”
지 엄마를 닮아서 맹한 건지, 느린 건지.
“마력이 있다고 들었다. 맞나?”
“아마도요.”
“마력에 아마도란 건 없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불이 나온 적은 있어요.”
첫 발현에서 속성을 발현했다고?
별 기대 안하고 왔는데 갑자기 구미가 당긴다.
베티아는 마력이 전혀 없었고, 베티아를 임신시킨 녀석도 아마 평민이었을 거다.
마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궁핍하게 살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수혈 평민 간의 자식인 카이가 마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격세유전 때문이다.
조상 중 누군가가 귀족의 씨앗을 받은 거지.
귀족의 피는 세대를 거치며 옅어지지만, 낮은 확률로 먼 후손들에게 마력을 발현시키기도 한다.
유리의 할머니가 내 조부의 사촌과 밤을 같이 보냈고, 그 결과 유리의 동생들이 마력을 가진 것처럼.
대부분의 마력병들은 그렇게 격세유전으로 얻은 마력을 가진 자들이다.
베티아의 조상 중 누군가도 귀족의 씨앗을 받은 걸 텐데…….
여하튼 카이가 첫 발현에서 단순한 마력의 파동이 아닌 불을 피워냈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첫 발현에서 속성이 있는 마력을 끌어냈다고 해서 모두 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마법사가 된 자들은 모두 예외없이 첫 발현 때 속성마력을 이끌어냈다.
나도 그랬고.
조금 의욕이 솟아서 한 수 가르쳐보기로 했다.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라. 그 상태에서 오줌을 쌀 것처럼 간질간질해질 때까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앞으로 기운을 내몬다고 생각해.”
카이는 내 말대로 자세를 취하다가 부르르 떨었다.
바지 앞섬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
“괜찮아. 종종 있는 일이다.”
인체에서 가장 기본적인 배출은 호흡, 그리고 배설이다.
마력을 뿜어내는 것 또한 인체에서 배출을 다루는 한 방법을 익힌다는 것.
그러니 호흡을 무너뜨리거나 갑작스레 배설하는 건 마력을 막 발현한 초보자들에게는 꽤 자주 있는 일이다.
나는 계속 지시를 내렸다.
“기운을 아랫배에서 묵직하게 밀어내되, 완전히 뿜어내지 말고 그 안에서 빙빙 돌려.”
“... 쉬 마려워요.”
“참아.”
나는 속으로 백까지 천천히 세었다.
어린애한테는 꽤 긴 시간이었는데 카이는 이를 앙다물고 버텼다.
근성 있네.
“좋아. 잘했어. 이제 모은 기운을 천천히 위로 올려가는 거야. 두 손을 단전에 대고 천천히 끌어올려. 그렇지. 가슴까지 올려서, 두 팔을 반대로 뻗었다가, 앞으로 쭉 모아서... 쏴!”
팟!
카이의 손바닥에서 라이터 불 정도 되는 작은 불똥이 튀었다.
여자애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카이 본인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게 놀랄 거 있나? 전에도 몇 번은 해봤을 거 아니야.”
“이렇게... 마음대로는... 안 나왔어요.”
하긴. 마력조절이 안 된다는 것도 마력 초심자들의 특징이다.
나 같은 고위 귀족이야 그냥 생각하는 대로 마법을 뿜어내고 형상화까지 자유자재로 가능하지만, 마력의 질과 양 모두 낮은 수혈 평민은 애를 쓰고 연상해야 한다.
“연습해. 꾸준히 연습하면... 글쎄, 이렇게 될 지도 모르지.”
헛된 꿈을 품게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어린놈의 자식이 제 엄마랑 똑같이 죽은 눈을 하고 있는 게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염검을 풀었다.
물결치는 검날을 따라서 아름다운 불의 파도가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대낮 태양볕에도 지지 않는 눈부신 광휘에 그 자리 모인 모두가 눈을 감았다.
아니, 카이만은 눈을 감지 않고 똑바로 그 불길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베티아를 닮아서 잿빛으로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어떤 열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선망과 욕심이 뒤섞인 열기다.
“귀족님.”
“백작이다. 내가 바로 레시아르 령의 적법한 통치자, 바이스 레시아르이니.”
“백작님... 백작님!”
카이는 넙죽 엎드려서 소리쳤다.
“제게 마법을 가르쳐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건...”
카이는 우물쭈물했다.
해줘, 하면 해줄 줄 알았나?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 천방지축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애는 애다.
“대가를 바쳐라. 그러면 마법을 가르쳐주지.”
“무엇을 바칠까요?”
“충성을 바쳐라. 목숨을, 인생을 바쳐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가장 아까운 것을 모두 바쳐라. 마법을 배운다는 건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다. 넌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네!”
카이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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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카이와 헤어지게 된 수녀원 꼬마 숙녀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마력도 없는 꼬맹이들을 내가 데려갈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품기에는 너무 어리고.
함께 데려가 달라는 부탁은 단칼에 거절했다.
수녀원장 니엘라가 어르고 달래기도 해서, 소녀들은 울면서 카이와 작별했다.
그 와중에 카이는 소녀들과 십 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렇게 많은 애들한테 동시에 플래그를 꽂다니. 보통이 아니야.
나는 카이를 앞에 태우고 과수원 사이로 말을 몰았다.
카이는 자기가 불을 발현시킨 게 신기했는지 계속 마력 돌리는 연습을 했다.
“말 타는 동안은 연습 그만해. 지금 네가 지리면 나까지 젖는다.”
“죄송합니다.”
“심심하면 이거나 보고 있던지.”
손가락을 탁, 튕겨서 불꽃나비를 수십 마리 만들어냈다.
나비 떼는 내 근처를 맴돌면서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벌렸다.
"와아..."
“그래. 마법은 왜 배우려는 거지?”
“예뻐서요.”
“예뻐서. 그럴 수 있지.”
마법은 실제로 아름답다.
마력의 극한을 다루는 일곱 가지 속성의 미학이다.
권력과 재물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세속을 마다하고 자신의 마법에 취해서 오로지 연구 일생을 달리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정말로 애는 애다.
카이는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쪼잘쪼잘 떠들어댔다.
“그리고 엄마한테 복수하려고요.”
“복수?”
화염검을 봤을 때와 동일한 열기가 또 한 번 카이의 눈에서 일렁였다.
“엄마가 저를 아기 때 버렸대요. 누나들은 그래도 엄마 얼굴은 아는데, 저는 엄마 얼굴도 몰라요.”
“음…….”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여서 혼자 죽상을 짓고 있던 이유가 그거였나.
베티아가 카이를 못 만난 건 수녀원장이 막은 거겠지만.
카이가 그것까지 알진 못하겠지.
카이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마법사가 돼서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면 엄마가 저를 버리지 말걸, 하고 후회할 거예요.”
“그래. 그러겠지. 그거 참 무서운 복수군.”
나는 앞에 앉은 카이의 머리를 툭툭 손바닥으로 치고는, 고삐를 당겨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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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에서 아티아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다시 카락투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놈들이 있었다.
유명한 놈팡이들인지, 건장한 남자들도 그 앞을 지날 때면 고개를 숙이고 잰 걸음으로 갔다.
패거리 중에서 한 놈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 송곳니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밥 먹고 양치를 제때 안 했구먼, 저 친구.
내심 안쓰러워하면서 말을 몰아가는데, 귀에 녀석들의 말소리가 들어왔다.
“그랬다니까. 하여튼 그 년 얼굴은 꽤 반반했는데. 아쉬워.”
“얼굴이 좋으면 뭐 하냐고. 밑이 허벌인데. 허공에다 좆질하는 것 같더라.”
“네 좆이 작아서 그런 건 아니고?”
“마콤 저 새낀 지 좆이 큰 줄 알아.”
“뭐 이 새끼야?”
말고삐를 휙 당겨서 말을 멈추었다.
못 들었으면 모를까, 들었는데 그냥 갈 수도 없지.
“마콤, 마콤, 마콤. 아이고. 이 불쌍한 자식아.”
한탄을 하면서 말을 그 놈들 쪽으로 몰자, 건달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무슨... 용건이신지...”
마콤이 나서서 나를 빠르게 훑어보며 물었다.
비싼 나들이옷을 입고 무장한 병사들까지 거느렸으니 어느 정도 위세 있는 놈이라고는 생각하겠지.
동혈 말단 기사라도 건달들로서는 시비가 붙으면 손해가 막심한데.
미안하게도 나는 백작이다.
“너는 왜 이렇게 운이 없냐. 진짜 내가 눈물이 다 난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노예 년 하나를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와서 복수를 해주겠냐. 그냥 흘러가듯 살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하필이면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너와 내가 만나서 이런 살풀이를 하게 됐냐고.”
마콤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대체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베티아. 알지?”
“아... 예. 그런데 그 창녀가 왜...?”
“내가 잘 설명을 해주지. 첫째. 노예의 재산은 주인의 재산이란 말이야. 둘째. 베티아는 내 노예지. 셋째. 고로 베티아의 재산은 내 재산이 된다는 말인데. 알아들었나, 내 완벽한 삼단논리를?”
“예, 예.”
“그럼 자네가 베티아에게 진 채무를 내가 좀 받아야겠어.”
“채무라니요?”
“베티아가 스스로 노예가 되면 금화를 주기로 약속했다며?”
“그, 그, 아닙니다! 계약서가 있는데! 그 년이 귀하신 분을 속인 겁니다! 고약한 년!”
“고약한 년? 내 노예한테 방금 고약한 년이라 했나?”
“헙. 그게 아니라...”
“내가 잘못 들었다고? 내 귀가 병신 귀머거리 귀라는 건가?”
마콤은 땀을 뻘뻘 흘렸다.
계약서고 뭐고 어차피 필요 없다.
힘센 놈이 말하는 게 정의다.
마콤이 베티아를 등쳐먹은 것처럼, 나도 마콤을 괴롭힐 뿐이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본 패거리 녀석들은 슬금슬금 뿔뿔이 도망쳤다.
혼자 남은 마콤은 울먹이면서 내게 사죄를 했지만, 시꺼먼 사내 놈의 사죄 따위는 관심도 없다.
“어쨌거나 나는 금화를 받아야겠는데.”
“드, 드리겠습니다! 당장 집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결국 마콤은 돈을 주고서라도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거다.
“필요 없어.”
“예?”
“내가 그깟 금화 몇 푼 때문에 자네가 집에 달려가서 금화 들고 달려오기까지 여기서 기다려야겠나? 내 시간도 금 못지 않게 귀해.”
“그럼...”
“아 해봐. 아까 보니까 입에도 금화가 하나 박혀 있던데. 내 깔끔하게 그거 하나로 청산해주지.”
“이런, 시발!”
마콤은 뒤돌아 도망치려 했지만 파샨이 톡톡 튀듯이 달려가서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말 위에 카이를 올려두고, 나만 내려서 마콤에게로 다가갔다.
“입 벌려.”
“예.”
친위대 둘이 양쪽에서 마콤을 붙잡고 입을 벌렸다.
마콤은 발광하면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으아아아! 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오. 금화를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숨겨놨었네. 이러면 두 개를 다 받아야지.”
왼쪽 송곳니와 오른쪽 어금니가 금니다.
입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송곳니부터 엄지와 검지로 꽉 잡았다.
그리고는 마력을 담아, 이빨을 한 번에 뽑아낸다.
“끄르륵...! 끄륵...! 끄륵...!”
금니를 억지로 빼낸 잇몸은 잔뜩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손이 더러워졌네.
입 밖으로 한 번 손을 빼내서 털고 나서, 마찬가지로 어금니를 잡아 빼내었다.
“꼬로록...! 꼬로로록...!”
어디 혈관을 잘못 건드렸는지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친위대원들은 내 명령이 없으니 그대로 마콤의 입을 벌리고 있어서, 녀석은 피를 뱉지도 못하는 상태.
놈은 그대로 자기 피를 꿀꺽꿀꺽 삼키면서 눈물만 질질 흘렸다.
“이러다가 죽겠네. 내가 받을 건 금화뿐인데. 자네 목숨까지 받아가선 안 되지. 지혈 해줄 테니까 아프면 손을 들도록 해.”
손톱 크기 정도로 불을 만들어내서는, 피가 흘러나오는 잇몸 빈 자리에 지졌다.
치이익.
불쾌하게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르륵...! 그륵...”
마콤은 눈을 까뒤집다가 결국 기절했다.
일단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녀석을 적당한 곳에 던져주고, 파샨에게 천을 받아 손을 닦은 다음에, 다시 말을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카이.”
“... 네. 백작님.”
마법사에 고위 귀족인 내가 원시적인 폭력을 행사하자 카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하지만 나를 보는 시선에는 그래도 여전히 경외의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마법사란 지위가 그렇다.
“이거 받아.”
나는 금니 하나를 잘 닦아서 카이에게 던졌다.
카이는 이걸 왜 자기에게 주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묻지는 않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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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카이, 파샨과 친위대원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다시 아티아로 들어갔다.
카이는 일단 시종과 함께 방을 쓰도록 해서 보내고, 베티아를 내 침소로 불렀다.
“백작... 님.”
실크 잠옷을 걸치고 은 귀걸이를 단 베티아는 차분한 인상의 귀부인처럼 보였다.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다.
나는 베티아를 침대에 눕히고, 나도 따라 누워서 그녀를 옆으로 껴안았다.
얇은 옷감 너머로 두드러지는 큰 가슴과 넓은 골반은 정욕을 부채질한다.
방금 목욕하고 왔는지 살결은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좋은 허브 냄새가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자지가 빳빳하게 굳으면서 베티아의 허벅지 사이를 찔렀다.
솔직히 이걸 참는 건 고역이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내 발기를 눈치챈 베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봉사... 해드릴... 까요...?”
“아니. 괜찮아.”
“옷... 벗을... 까요...?”
“이대로도 좋아.”
“그러신... 가요...”
버틴 보람이 있었다.
받을 대로 받으면서도 내게 아무 것도 바치질 못해서 슬슬 안달 나는 게 눈에 보인다.
베티아의 허리로 손을 둘러 더 깊게 껴안은 다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일 점심 먹고 나서, 정원 분수대 근처 장미꽃밭으로 나와.”
“... 네...”
“왜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아?”
“왜... 부르시는... 데요...?”
“선물을 준비해놨거든.”
베티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동자.
하지만 거기에는 이제 미약하나마 어떤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다.
“선물... 안 주셔도... 저는...”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베티아도 분명히 좋아할걸. 내 장담하지.”
베티아는 얕게 한숨을 쉬고는, 돌아누워서 나를 마주 껴안았다.
“잘... 모르겠어요...”
“뭘?”
“그냥... 가슴이... 왠지... 답답해요...”
“그런가? 우연이네. 나도 베티아를 보면 가슴, 여기 이 부분이 답답해지거든.”
“…….”
베티아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눈가에 작은 이슬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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