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마수 무리
* * *
화염 장창은 엎드려 있던 들개형 마수 하나를 꿰뚫고는 바로 커다란 불길로 변했다.
“키에엑!”
마수는 불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다가 풀썩, 쓰러졌다.
녀석의 시체를 땔감으로 삼아 확 커진 불이 주변으로 빠르게 번졌다.
그 근처에 엎드려 숨어 있던 마수들이 우수수 일어서서 도망치려다가 차례대로 불에 타 죽었다.
연기와 탄내가 자욱하게 깔렸다.
“대낮에 이렇게나 마수들이 돌아다닌다니.”
아마트리체 영애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기사들이 하루에 두 번은 순찰을 돌고 있을 텐데…….”
그걸로 부족한 거겠지.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내 영지도 아니고, 파티스 공작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연기가 좀 걷히고 나자, 새까맣게 타다 만 마수 하나가 이쪽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낮게 울음소리를 내고 있긴 하지만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건 확연하다.
미친 건지 아니면 죽을 자리를 찾는 건지.
아니. 저 정도면 딱 좋겠다.
일행 뒤편에서 따라오던 카이를 불렀다.
“카이.”
“네. 백작님.”
“저 놈, 맞출 수 있겠어?”
“해볼게요!”
카이는 어깨를 빳빳하게 굳히고서 손바닥을 마수 쪽으로 내밀었다.
어려보이는 남자애가 나서자 만만해 뵈는지, 마수가 컹컹 짖으면서 달려왔다.
친위대원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기를 바로 잡기는 했지만, 내 지시가 없으니 따로 움직이지는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히얍!”
카이의 손바닥에서 오렌지 정도 크기의 불꽃이 튀어나왔다.
카이는 그걸 살짝 쥐어서, 공을 던지듯 마수를 향해 투척했다.
마수는 직선으로 달려오다가 불꽃을 머리에 맞고 사나운 비명 소리를 냈다.
하지만 놈은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배, 백작님! 저거!”
“한 방에 못 잡을 거 같으면 머리가 아니라 다리를 노려.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벌지.”
나는 핑거스냅으로 카이가 낸 정도의 불꽃을 만들어내서 마수에게 쏘았다.
“캐갱! 캥!”
달려오던 마수는 다리에 불꽃을 맞고는 구슬프게 울며 데구루루 굴렀다.
한 번 더 중지와 엄지를 튕겨서 불꽃을 만들어 내고, 이번에는 마수의 벌려진 주둥아리 속으로 불꽃을 쏙 집어넣었다.
“캐루루...! 캐루루!”
마수는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며 방방 뛰다가 이내 쓰러졌다.
벌어진 주둥아리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왔다.
“와아…….”
카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제일 중요한 건 마력의 크기지만, 같은 크기의 마력이라도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명심해.”
“네. 명심할게요.”
카이와 나를 본 하이덴이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쿠데타 이후로는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꼬마 녀석이 내 관심을 받고 있으니 성급해지는 건가.
윗사람의 총애를 다투는 건 남녀구분이 없긴 하다.
좀 더 말을 달리자, 또 들개형 마수가 하나 나타났다.
다만 방금 전의 녀석들보다는 체구가 훨씬 작았다. 불도그 정도나 될까.
“백작님. 이번엔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하이덴이 급히 말했다.
마력이 없으니 어떻게 싸울지 좀 걱정이 되긴 한데. 나서지 말라고 하기도 뭐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내가 마법으로 엄호하면 되니, 그러라고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이덴은 검을 뽑아들었다.
검면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데, 그 안에서 은근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도구, 마검이었다.
가격이 꽤 나갈 텐데, 이제 막 친위대장이 된 하이덴이 구하기에는 쉽지 않은 물건이다.
대장장이 달반에게 받은 건가?
“카오! 카오옹!”
“이럇!”
마수가 달려들자, 하이덴은 놈을 똑바로 마주하여 말을 달렸다.
불도그 같은 녀석이 펄쩍 뛰어오르며 허벅지를 노렸지만, 하이덴은 아래로 호를 긋듯이 검을 휘둘렀다.
마수의 이빨은 하이덴의 허벅지를 찢지 못했고, 하이덴의 검격은 마수의 목을 스쳤다.
놈의 목 아래에 반달 모양의 상처가 길게 나면서 검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꿰에엑!”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마수는 등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며 풀밭 위에 흔적을 남기는 게, 도망쳐도 오래는 못 살 게 분명하다.
하이덴은 그 뒤를 느긋하게 쫓았다.
하지만 너무 늑장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휘익.
팡!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수의 몸이 길쭉하고 불투명한 물체에 꿰였다.
마력창이었다.
마수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즉사했다.
비스듬하게 무너진 바위가 시야를 가린 저지대 쪽에서 소년 두 명이 올라왔다.
나이대는 하이덴과 비슷한 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파비앙! 잘했어. 벌써 두 마리째야”
“다음번은 레온 형이야. 어……. 누가 있는데?”
소년들과 하이덴의 시선이 서로 부딪혔다.
그 나이 대 남자애들이 그렇듯이, 눈동자에서 호승심이 마구 불 튀었다.
적갈색머리 소년이 먼저 말했다.
“내가 잡았어.”
하이덴은 검을 빼든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잡았어.”
금발머리 남자가 끼어들었다.
“파비앙이 마력창을 쏴서 마무리했어. 봤잖아?”
“그 전에 내가 이미 치명상을 입혀놨거든.”
“이게 정말...!”
적갈색 머리 소년, 파비앙이라 불린 녀석이 불끈하면서 다가서려다, 내가 있는 쪽을 보고는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나와 아마트리체 영애가 기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세력 있는 귀족의 행차였다.
잠시 싸움이 멈춘 사이에, 오솔길을 따라 소년소녀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남자들은 셔츠에 조끼와 외투를, 여자들은 재킷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를 입었다.
교복이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제복이다.
수는 다해서 오륙십 명 정도 되는 듯했다.
내 시선을 따라간 이오시스가 설명했다.
“아카데미 생도들이네요. 이 근처면 파크레 아카데미겠군요.”
“유명한 곳인가?”
“근방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하지만... 은혈 귀족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려한다면 지역보다는 왕도로 유학 가는 걸 선호하니, 파크레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거의 다가 동혈이나 수혈 출신입니다.”
내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말갈기를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기다리자, 생도들 사이에서 인솔자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내게로 다가왔다.
“고귀하신 분들. 저는 파크레 아카데미의 교사, 캘럿 휘트그람이라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귀하신 분들의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흑청색 머리칼을 뒤로 바싹 묶어서 넘긴 지적인 인상의 여자였다.
하지만 깔끔해 보이는 인상은 교묘하게 위장된 것이었다.
잘 살펴보면 눈 밑에 다크서클을 백분으로 덮고, 부르튼 입술도 립스틱을 몇 번이나 덧칠해서 숨긴 걸 알 수 있었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여교사인가.
저쪽에 모여서 참새 무리처럼 수다를 떨어대는 육십 명의 학생들을 보니, 나도 벌써 골이 아팠다.
안 그래도 고생하는 것 같아 가급적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반갑군. 나는 레시아르 백작이다. 여기 레이디는 파티스트롬 가의 아마트리체 영애시고.”
캘럿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귀하신 분들을 미처 몰라봐 죄송합니다. 캘럿 휘트그람이 레시아르 백작님과 파티스트롬 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저기 저 애들이 내 부하와 사냥감을 다투었는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백작님. 어린 아이들이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의욕이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부디, 부디 은혜를 베푸시어 자비롭게 봐주시면…….”
캘럿은 머리가 어깨 사이로 푹 묻힐 정도로 숙였다.
“대단한 다툼도 아니었고. 애들 싸움에 어른들이 끼는 것도 뭐하니. 당사자끼리 해결하도록 하지.”
“자비로우신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캘럿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까 그 소년 둘을 내 앞으로 데려왔다.
하이덴도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어떡하지?”
“기사님이 가지세요. 파비앙. 그렇게 하자.”
“알았어.”
소년들은 아까에 비해 완전히 기가 꺾여서, 하이덴에게 마수의 시체를 내밀었다.
하이덴은 멋쩍은지 턱을 긁다가 나를 바라봤다.
“받아라. 받을 때는 받아야 한다.”
“예. 백작님…….”
“다만 받은 만큼의 자비를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오시스에게 지갑을 받아서 은화를 몇 개씩 레온과 파비앙에게 던져주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은화를 받고는 내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건 안 쓰고 가보로 삼을게요!”
“유리 누나한테 자랑하자!”
유리?
가만 보니 두 소년들의 눈매가 약간 유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유리라는 이름이 흔하기는 하지만, 이 나이 대에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학생이라면...
“유리의 동생들인가?”
“아...! 예! 백작님!”
레온과 파비앙은 내가 저들을 어찌 아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제 누나가 메이드로 들어갔다는 건 알아도, 내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건가.
하긴. 남동생한테 구질구질하게 그런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것도 이상하지.
“유리는 내가 아끼는 여자다. 유리가 너희들 이야기를 많이 했지.”
“여,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백작님!”
어디서 주워들은 인사를 하는 녀석들.
유리의 동생이라 조금 친근감도 생기고, 아까 먼 거리에서 마수를 저격해 꿰뚫어낸 걸 보면 실력도 괜찮아 보인다.
친위대원에 마력병이 부족하니, 미리 낙점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것도 인연인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레시아르 백작가로 찾아와라. 중히 써주마.”
“예! 백작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레온과 파비앙은 싱글벙글하며 인사하고 돌아갔다.
소년들을 보내고 나서, 캘럿에게 물었다.
“내가 안 될 일을 한 건 아니겠지?”
“안 될 일이라 하시면... 어떤...”
“아카데미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 말이야. 졸업 후에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없나? 레온과 파비안을 내가 미리 뽑아가도 문제없는지를 묻는 거네.”
“그런 거라면 전혀 문제없으십니다. 졸업 후 복무규정은 제국에는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다키아 왕국에서는 아마 있는 곳이 없을 겁니다.”
“그래.”
“아카데미 졸업 후 진로는 다양한데, 대개는 마력병으로서 귀족 가의 사병이 되거나, 학식을 쌓아 가신을 노리기도 합니다. 용병이나 마수사냥꾼이 되는 경우도 흔하고, 왕도 아카데미로 진학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습니다. 작은 마을에 내려가면 촌장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마력을 가진 사람은 촌에서도 환영을 받으니까요.”
왕도 아카데미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방의 아카데미는 직업학교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래서 아마트리체 영애가 자기 학벌에 자부심이 있었던 거구나.
캘럿은 선생이라 그런지 설명을 능숙하게 해서,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물어보게 됐다.
“레온과 파비앙을 보니까 생도들에게 마수를 사냥시키는 것 같던데, 아카데미 수업에 그런 게 있나?”
“동계 기말 시험입니다. 현장에 나와, 퇴치한 마수의 수에 따라 등수를 매겨서 성적을 내는데, 졸업생을 등용하는 귀족 분들은 이 성적을 보는 경우가 많아서 생도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합니다. 가끔 너무 과열되어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렇게 기를 쓰고 마수를 노리던 거였군.”
“예.”
다른 아카데미 생도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바위 사이사이를 뒤지며 마수를 찾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마력병을 좀 늘리려고 했는데.
레온과 파비앙 외에도 쓸 만한 녀석들이 있으면 미리 눈도장 찍어두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아마트리체 영애에게 양해를 구하고, 생도들 사이로 천천히 말을 내몰았다.
캘럿은 빠져나갈 기회를 놓쳐서 울상이 된 채 엉거주춤 내 뒤를 따랐다.
“저 자, 턱수염이 구레나룻까지 이어진 자는 이름이 뭔가?”
“아... 아라브입니다. 입학한지 2년이 된 생도로, 마력량이 많고 연상속도가 빠른 우수한 인재입니다.”
아라브는 나의 시선을 받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마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정겨운 친구들이 갑자기 힘을 내어 모조리 근처의 마수를 사냥해버려, 사냥감이 없는 상태.
그는 어쩔 수 없이 바위 아래의 작은 나무를 향해 마력창을 쏘았다.
쾅!
마력창을 맞은 나무가 우지끈, 반으로 뚝 갈라졌다.
“실력이 좋군.”
아라브의 어깨가 쭉 올라갔다.
“하지만 자연을 보호해야지, 저렇게 나무를 막 부수면 쓰나.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인성이 글러먹으면 쓰기가 좀 그래.”
아라브의 어깨가 쭉 내려갔다.
재밌네.
이게 성좌가 된 기분인가.
“저기 붉은 머리 여자는?”
“페지아입니다.”
‘레시아르의 탕아’가 가슴이 큰 페지아를 주시합니다.
페지아는 내 시선을 받고는 어깨를 꿈틀거렸다.
애써 신경 안 쓰는 척 걷는 것 같은데,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고 있어서 더 어색하다.
“캬아악!”
때마침 바위 위에서 들개 마수 하나가 페지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페지아는 갑자기 기름칠이라도 된 듯, 부드럽게 왼 팔을 들어 마수의 이빨을 막았다.
가만 보니 팔뚝에 긴 타원형 방패가 묶여져 있었다.
페지아는 그대로 왼쪽 팔꿈치를 지면에 내리찍듯이 해서 마수를 옆으로 깔아뭉갰다.
“꿰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낸 마수는 페지아의 몸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지만, 페지아는 체중을 실어서 마수를 짓누르면서 마수의 입에 방패를 단단히 물렸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마수의 날카로운 발톱을 피하면서 녀석을 눌러 제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케오옥! 케옥!”
“흐읍! 죽어랏!”
페지아는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어서 짧은 마력창을 형성해내고는, 그걸 그대로 마수의 머리 위로 내리꽂았다.
마수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바로 절명했다.
“재밌게 싸우는군.”
“선천적으로 보유한 마력량이 부족한 아이들은 저런 식으로 체술로 싸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마력을 이용합니다.”
강력하다고는 못하겠지만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지방 아카데미라도 마력병의 훈련에는 나름대로 체계가 잡힌 듯했다.
페지아에게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로 칭찬을 한 번 해주고서, 계속 생도들을 구경하며 거닐었다.
다들 내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환상의 똥꼬쇼를 펼치고 있었다.
몰이사냥을 하며 협업심을 드러내는 팀도 있었고,
숨어있는 마수에게 역으로 은신하여 다가가 멱을 따버리는 녀석도 있었다.
마력량을 과시하듯 마력창과 마력 방어막을 번갈아 가며 쓰는 생도도 꽤 있었는데.
“극천의 마탄난무!”
뚱뚱한 남자애가 마수 하나를 향해 마력창을 열개쯤 연사하다가 풀썩 쓰러졌다.
“마력탈진이다!”
“캘럿 선생님을 불러!”
저건 병신이군.
생도들의 추태를 즐기면서 말을 몰고 있지만, 조금 위화감이 든다.
육십 명 정도 되는 생도들이 계속 마수를 사냥하고 있는데, 이거 아무리 그래도 마수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이런 녀석들이 평소에도 뛰어다닌다면 근처의 촌마을들은 진작에 쑥대밭이 됐을 거다.
“백작님. 지면이 울리고 있습니다.”
제트리 단장이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서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뭐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고원 쪽에서 무언가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게 뭐든 간에 일단은 빠르게 이동해서 확인해야 한다는 데에 나와 아마트리체 영애의 의견이 일치했다.
캘럿은 그다지 끼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고위 귀족 둘의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고원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널린 바위들 사이로 오솔길을 열심히 올라가 시야가 탁 트인 고원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까마득하게 많은 수의 마수 무리였다.
“저건, 대체…….”
아마트리체 영애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수천 마리는 족히 될 들개형 마수들이 쐐기 모양으로 모여서 작은 촌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륙 중부에, 산도 강도 오지도 아닌 고원에 이만한 수의 마수 무리가 횡행하고 있다니.
이건 대방벽이 뚫린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고원을 벗어나기 위해 오솔길, 우리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들개 마수들의 주력에 비해서는 너무 느렸다.
머잖아 따라잡힐 게 분명해 보였다.
더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파티스 공국에서 차관을 받기로 한 조건은 마수 퇴치.
돈 받은 값은 해줘야 한다.
“아마트리체 양. 정신 차리시오.”
“아... 네, 네엣!”
“마력운용은 어느 정도 연습했을 거라고 믿소.”
“기본 소양 정도는…….”
“그거면 충분하오.”
금혈 귀족은 존재만으로 전략 병기다.
방대한 마력량을 이용해 마력창을 연사하기만 해도 전장을 바꿀 수 있으니.
“저 마수들이 향하는 마을에서 일단은 몰아내야 할 텐데... 근처에 또 다른 마을이 있소?”
“이 주변은 농토가 비옥해서 촌이 아주 많습니다.”
아마트리체 영애의 근위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밀어내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군.
“놈들의 수가 많으니 여기서 밀어내기만 한다면 뿔뿔이 흩어져 다른 촌을 급습할 거요. 여기서 최대한 포위하여 섬멸해야 하오.”
포위섬멸진을 짜야 한다 이 말이다.
아마트리체 영애는 회의적으로 물었다.
“저희는 삼백 명도 안 되고, 마수 떼는 오천 마리가 넘어 보이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한지 아닌지는 해봐야 알겠지. 하지만 여기서 넋 놓고 있는 대도, 되는 일은 없을 거요.”
“알겠어요. 그럼해보죠.”
“좋아, 아마트리체 양은 좌측으로 돌아서 마을사람들의 뒤를 막아서시오.”
“백작님은요?”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우측으로 돌아 마수의 후방을 치겠소.”
“그럼 저 혼자...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내 도움 없이 혼자 정면을 막기는 부담스러운지, 아마트리체 영애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할 수 있소. 그대의 핏줄에 흐르는 황금을 믿으시오.”
나는 아마트리체 영애의 자부심을 자극했다.
파티스트롬 가의 여식으로 금혈 귀족이자, 왕도의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재라면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아마트리체 영애는 잠시 입술을 씹다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네. 파티스트롬 가의 여식으로서, 영지에 침입한 마수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어요.”
“좋은 기세요. 여기 제트리 단장과 기사들을 붙여주겠소. 아주 믿음직스러운 기사 중의 기사들이지.단장, 아마트리체 영애를 지켜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마트리체 영애. 마수들의 진로를 앞서 마을을 막아서되, 결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오.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새어나가는 녀석이 없도록 하시오.”
아마트리체 영애가 움직이는 모루, 내가 회전하는 망치가 된다.
“저, 백작님... 저희는...”
캘럿이 목을 움츠린 채 다가와 물었다.
“생도들을 절반씩 나눠서 아마트리체 영애와 내가 지휘하겠다.”
“레시아르 백작님. 정말 죄송하지만 제게는 생도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그대의 의무지.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그대의 학생들 중에다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겠... 습니다.”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캘럿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마수 무리는 빠르게 마을을 향해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아마트리체 영애. 이제 가보시오.무운을 비오.”
“고마워요, 레시아르 백작님. 잠시 뒤에 다시 뵙도록 하죠.”
아마트리체 영애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계속 마차만 타던 모습만 보고는 좀 불안했는데 승마를 배우긴 한 모양인지 말 다루는 솜씨가 꽤나 능숙하다.
그녀의 근위기사들과 제트리 단장을 비롯한 적여우 기사 이십 기, 그리고 파크레 아카데미 생도 서른 명이 그녀 뒤를 쫓았다.
그들은 이쪽으로 도망쳐오는 마을사람과 엇갈려서 아슬아슬하게 마수 무리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여기는 파티스 공국의 영지, 너희 같은 더러운 존재들이 허용받지 못하는 곳이다!”
그 말에 마수들이 멈출 리는 없고.
성질 더러운 마수 몇 놈들이 누런 침을 줄줄 흘리며 아마트리체 영애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뛰어들었다.
아마트리체 영애는 흰색 실크 장갑을 벗어던지고는, 마력창 수십 개를 동시에 허공에 띄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