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마수 무리
* * *
“아둔한 존재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 드리는 수밖에.”
아마트리체 영애는 싸늘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까딱였다.
허공에 붙박여 있던 수십 개의 마력창이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져 날아갔다.
살벌하게 바람 가르는 소리가 지나가고, 이어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캐애액!”
“캐륵!”
맨 앞에서 달려오던 마수들이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하며 지면을 굴렀다.
그 뒤를 따라오던 마수들은 사체에 걸려 넘어지거나 굴렀다.
“적여우 기사단! 일제 투척!”
혼란이 벌어진 틈을 타, 기사들이 이차로 마력창을 투사했다.
제트리 단장이 먼저 거대한 장창을 던져 마수 세 놈을 한꺼번에 꿰뚫었고, 적여우 기사단원들은 그 뒤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마력창을 날렸다.
아마트리체 영애의 근위 기사들도 질세라 마수들을 저격하며 적들에게 더 큰 피해를 강요했다.
“쏴! 쏴! 우리가 이기고 있어! 계속 쏴!”
“자, 잠깐! 밀지 말라고!”
“다 죽여 버려!”
아카데미 생도들이 우왕좌왕 거리면서도 삼차로 마력창을 투사했다.
아까 본 레온과 파비앙, 아라브, 페지아가 눈에 띄었다.
그 위력은 아마트리체 영애의 일차 공격이나 기사들의 이차 공격에 비해 확연히 약했지만, 전방의 마수들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터라 생도들의 무질서한 공격도 치명타가 되었다.
“캐르륵! 캐륵!”
결국 진열을 뚫을 수 없다고 여긴 건지, 마수들은 옆으로 진로를 틀었다.
하지만 아마트리체 영애는 말에 올라 시계방향으로 크게 호를 그리면서 마력창을 쏘아붙였다.
아마트리체 영애의 휘하 병력은 그 수가 적지만 전원이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사정거리가 긴 마력창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넓은 범위의 적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결국 마수들은 진로를 계속 꺾다가 거대한 반원에 갇힌 꼴이 되어 버렸다.
“카르륵! 카륵! 카륵!”
몇몇 포악한 마수들이 발악하며 아마트리체 영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근위기사들이 나서기도 전에, 제트리 단장이 먼저 마수들에게 돌진했다.
판금갑옷과 그레이트 헬름으로 빈틈없이 몸을 감싼 제트리 단장은 거대한 벽과 같았다.
그는 마수들이 갑옷을 물어뜯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력 파동을 뿜어냈다.
쿠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뒤엎어지면서 마수들의 다리가 흙 속으로 푹 묻혔다.
그제야 겁먹은 마수들이 깨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망치려 했지만, 제트리 단장은 할버드를 휘둘러 놈들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했다.
살아남은 마수들은 결국 뒤로 돌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곧 오겠군.
나는 마수들이 가까이 접근하면 알리라고 하이덴에게 전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마음과 정욕을 비우고 검은 공간에서 오로지 불빛만을 떠올린다.
공허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걸 빙빙 돌려서 내 양 팔에 휘감고, 열기를 더해간다.
불은 불을 먹고 더 큰 불이 된다.
“백작님! 옵니다!”
하이덴이 다급하게 외쳤다.
서서히 눈을 뜨니,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무리의 마수 떼.
아마트리체 영애가 한 번 수를 줄여놨는데도 여전히 수천은 될 법했다.
그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껴안을 듯이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놈들에게 거대한 화염의 포옹을 선사한다.
쭉 펼친 양팔에서 불길이 일자로 쭉 뻗어 나온다.
두 팔을 안으로 끌어당기며 앞으로 합치자, 두 갈래 불길이 브이 자로 좁혀지며 마수들을 에워쌌다.
마수들은 좌우에서 밀어닥치는 불의 장벽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활로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무용한 시도일 뿐이다.
때는 늦가을.
바싹 마른 들풀에 불이 붙어, 지면에는 발 디딜 곳 하나 없고,
마침 바람도 순풍이다.
뜨겁고 매캐한 연기가 마수 무리 쪽으로 불어 닥치며 놈들의 기관지 안쪽까지 새까맣게 구워버렸다.
그을음이 잔뜩 섞인 연기는 마수들의 눈을 가려서 혼란을 더 가중시켰다.
놈들은 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할퀴고 물어뜯으면서 치고 박고 싸웠다.
“키에에엑!”
죽을 각오를 하고 불 사이로 뛰어드는 녀석들도 없지는 않았다.
개중에 운 좋은 놈들은 털을 바싹 태운 채나마 불길을 뚫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서로 활약할 기회를 노리던 친위대와 아카데미 생도들이 이때다 싶어 마구 마력창을 던져댔다.
“친위대! 일렬로! 투척!”
“생도 여러분! 서두르지 말고 한 번에 공격하는 거예요! 하나, 둘, 셋!”
하이덴과 캘럿이 각각 친위대원과 아카데미 생도를 지휘했다.
겨우 불지옥을 빠져나온 마수들은 촘촘하게 펼쳐진 화망을 뚫지 못했다.
놈들은 피를 뿌리면서 하나둘씩 죽어 나자빠졌다.
누가 봐도 아군의 승리는 확연했다.
오히려 싸움이 끝난 후에 불길을 잡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싶은 정도.
나는 천천히 마력을 거두었다.
아니, 그런데 연기 안쪽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카아아악!”
시꺼먼 연기 사이를 뚫고 커다란 형체가 튀어 나왔다.
사자의 머리, 들개의 몸통, 뱀의 꼬리.
세 마리 동물들이 기괴하게 서로 합쳐진 형태라 보기만 해도 역겹다.
“키마이드라!”
캘럿이 발작하듯 소리 질렀다.
“뭐야, 위험한 놈인가?”
“상위종 마수입니다! 도시 하나를 홀로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는 위험종인데...!”
“어디가 약점이지?”
“그것까진... 출현 기록도 워낙 옛날의 일이라...”
쓸모없구먼.
여하튼 상위종이라면 쉬운 상대는 아닐 게 분명한데.
약한 마수라면 이전에도 몇 번 상대해보긴 했지만 강한 마수는 이번이 처음이라 약간 긴장이 된다.
키마이드라는 사자 머리를 이리저리 뒤흔들어 갈기에 쌓인 검은 재를 떨쳐내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누런 안광이 살벌했다.
겁에 질린 아카데미 생도 몇이 저도 모르게 마력창을 쏘아냈다.
파파팍!
마력창이 몸통에 박히기는 했지만, 피가 터진 부위에서 징그럽게도 뱀이 돋아나서 꿈틀거렸다.
그 기괴한 모습에 생도들은 몸서리를 치면서도 마력창을 계속 던졌다.
몇 번 투창을 반복하니, 키마이드라의 피부 절반이 꿈틀거리는 뱀으로 뒤덮였다.
“그만두게 해. 마력창으로는 안 되겠어.”
“죄송합니다. 백작님.”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서 키마이드라를 지켜보았다.
놈도 내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알았는지, 어슬렁거리면서 내 주변을 살폈다.
사자머리가 까딱거릴 때마다 몸통을 뒤덮은 뱀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스산한 혓소리를 냈다.
키마이드라는 마력창을 그만큼 맞았음에도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기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화상을 입어도 회복할까?
그럼 공략하는 게 상당히 힘들어 질 텐데.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하이덴이 말릴 틈도 없이 말을 몰고 나갔다.
그는 키마이드라를 스쳐지나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하이얏!”
서걱.
마검이 한 번 번쩍 빛나더니, 키마이드라의 몸통을 뒤덮은 뱀 머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칼로 예리하게 잘려나간 단면에서 붉은 거품이 일었다.
“캬아아악!”
키마이드라는 성질이 나는지 흉포한 울음소리로 외치고는 하이덴에게 달려들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카이가 깜짝 놀라 화구를 던졌다.
다리를 노리고 던진 것 같았지만, 표적에서 상당히 빗나가서 하이덴이 잘라낸 단면에 불이 닿았다.
치익.
상한 고기를 태우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키마이드라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불이 닿은 곳에서는 살이 새로 나지 않았다.
그런 건가.
하이덴을 불러들이고서 화염검을 뽑았다.
키마이드라는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자기에게 고통을 안겨준 카이만 노려보고 있다.
“힉...”
카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내 뒤로 숨었다.
“캬아아악!”
키마이드라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나는 화염검을 앞으로 쭉 뻗어서, 물결치는 검면으로부터 불길을 뽑아냈다.
일자로 방출된 불줄기가 키마이드라의 사자머리부터 들개의 몸통, 뱀의 꼬리까지를 전부 휘감았다.
하지만 키마이드라는 화르륵 불타오르면서도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놈이 들개의 발로 땅을 박찰 때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키마이드라는 금세 내 코앞까지 달려와 입을 벌렸다. 이대로 내 머리통을 씹어 부술 기세였다.
호위병들이 급히 막아서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화염 공격이 아니면 놈을 회복시켜 줄 뿐이니까.
“카악...!”
크게 벌어진 키마이드라의 입 안으로, 카이가 잽싸게 화구를 던져 넣었다.
키마이드라는 발작하듯 위로 펄쩍 튀어올랐다.
그 틈을 노리고, 녀석의 목 아래에서부터 위로, 화염검을 깊숙이 꽂아 넣었다.
“케윽...!”
목에 검에 꿰인 채로도 무섭게 나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내는 키마이드라.
나도 놈을 마주하여 노려보면서 화염검을 통해 녀석의 체내에 화염을 불어넣는다.
불길이 마수의 혈관을 타고 사지 말단과 심장, 허파까지 침투한다.
키마이드라는 벌린 입으로 내 머리통을 씹을 것처럼 몇 번이고 턱을 움직이려 했지만, 몸 안은 이미 숯덩이가 되어버린 상태.
녀석은 주둥이에서 검은 연기만 풀풀 내뿜다가 어느 순간 화악 불타올랐다.
화염은 나의 영역.
불은 나를 태울 수 없다.
나는 화염검을 녀석의 목에 꽂아 넣은 채로 불길에 휩싸여, 키마이드라가 재가 되기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검은 재로 변해버린 사체 속에서 주먹만 한 마석이 빛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상당한 마력이 맴돌고 있었다.
달반에게 주면 좋은 마도구를 만들어주겠지.
따로 잘 챙겨두라고 명하고 돌아서는데, 캘럿이 흥분한 얼굴로 말을 붙였다.
“백작님.상위종을 단신으로 사냥하신 위업,경하 드립니다. 그,키마이드라는 불이 약점이었군요.”
이걸 지금까지 몰랐나 싶긴 한데.
불을 다루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수와 싸우면서 불을 피울 일은 없었겠지.
“중앙의 학계도 놀라게 할 대발견입니다. 저, 혹시... 백작님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걸 논문으로 써도 될까요? 물론 백작님의 존함도 공동, 아니, 제1저자로 넣을 겁니다!”
캘럿은 피곤해보이던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물었다.
나로서도 이득이 되는 일이니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캘럿은 희희낙락해서 몇 번이나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다.
캘럿은 내가 단신으로 키마이드라를 잡았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 혼자 잡은 건 아니지.
“카이. 너도 잘 했다.”
카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카이는 전투의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메이드를 불러 카이에게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게 하고, 나도 와인 한 잔을 따라 마셨다.
하이덴이 알아서 친위대원들을 부려 잔불을 잡고, 들개 마수들의 마석을 줍게 했다.
사체가 바싹 타버려서 마석을 회수하기는 오히려 편할 거다.
“백작님! 이겼어요! 이겼다구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마트리체 영애가 말을 몰고 왔다.
저쪽의 전장도 정리가 끝난 모양이다.
아마트리체 영애는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서는 그대로 달려와서 나를 꽉 껴안았다.
커다란 가슴이 꾹 눌리면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오.”
“아... 그게...! 죄송해요!”
아마트리체 영애는 얼굴을 붉히면서 포옹을 풀었다.
그래서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는 기색이었다.
규중 아가씨가 첫 출전에서 수천 마리 마수 떼를 상대로 승리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대단했어요, 백작님! 멀리서도 그 화염이 몰아치는 게... 고대 신화를 보는 것 같았다구요! 마수들을 불태우고! 괴물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내 입장에서는 정말 별 게 아니라서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랬더니 아마트리체 영애는 뭘 착각한 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마력을 너무 많이 쓰신 건 아닌지…….”
그녀는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걸로 대충 턱을 닦고 대답했다.
“별 거 아니오. 이 정도야 가뿐하지.”
허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허언만은 아니었다.
켈자르 원정에서는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구워버렸는데. 최약체 하위종인 들개형 마수 따위야 만 단위로 몰려와도 무섭지 않다.
다른 마을에 피해가 갈까봐 그게 걱정이었지, 질 걸 걱정하진 않았다.
키마이드라도 내게 상성으로 밀리는 녀석이라 상대하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으으으음. 여기, 하나도 안 닦였어요. 줘 보세요.”
“어어…….”
아마트리체 영애는 내게서 손수건을 빼앗고는, 직접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톡톡, 두들기듯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는 게 은근히 기분이 좋다.
아마트리체 영애도 꽤 움직이느라 땀이 났는데, 향수와 섞여서 달착지근한 여자 냄새가 났다.
잠시 아마트리체 영애와 담소를 나누며 쉬고 있는데, 저 멀리 고원 한복판에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또 마수인가?”
“아닙니다. 깃발이 보입니다. 저건... 중앙의 기사단입니다!”
거리가 좁혀지자,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흑색 말을 타고 있고흉갑에는 푸른색 원형 방패와 붉은색 장검이 그려져 있었다.
켈자르나 우리 레시아르의 기사들도 뒤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왕도의 기사들은 차원이 달랐다.
기세가 잘 벼린 날 같았다.
그들은 우리로부터 일, 이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열 기 정도의 기사들만이 따로 빠져나와 내 앞까지 달려왔다.
맨 앞에 선 것은 늙은 소나무를 연상케 하는 노인이었다.
말을 달리면서도 어깨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허리는 곧게 펴졌다.
“병무대신 올드완 님이시네요. 왕도에서 한 번 뵈었는데.”
아마트리체 영애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올드완과 나와의 접점은 그다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어릴 적에 저 사내가 아티아에 잠깐 들렀던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줄을 대려다가 실패하고, 다른 대신들에게 누이들을 보냈었지.
저 인간은 그때도 노인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대로네.
“레시아르의 도련님... 아니, 이제는 백작님이시군. 안녕하시오?”
올드완은 뻣뻣하게 허리를 편 채로 인사를 건넸다.
아니꼽긴 하지만, 중앙의 대신들은 위계에 따라 공, 후작에 준한다.
병무대신 올드완이라면 거의 공작 취급을 받는 인물이니.
나는 목례로 답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병무대신님.”
"마수들은... 백작께서 정리하신 듯 하군. 고생하셨소."
"고생이랄 것까지 있겠습니까. 고작 이 정도 무리에."
올드완은 슬쩍 웃고는 물었다.
“그래. 백작께는 별 것 아닌 무리였겠지.백작위 계승식은 언제요?”
“내년 봄이 다 가기 전에는 열겁니다.”
“노구가 쇠진하여 직접 참석하기는 힘들겠고, 대신 예물을 보내겠소.”
“마음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이번 일은 함구하여 주시오.”
중앙에서 숨기려 하나?
하지만 마수 수천 마리가 떼로 움직이는 사건은 숨기려고 한다고 쉽게 숨겨지는 게 아니다.
올드완은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소. 정무대신이 그걸 원하는데. 나는 의지가 없는 검일 뿐이오.”
“알겠습니다. 이 일에 관해 적어도 제 입이 열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소. 그럼 이만.”
올드완은 아마트리체 영애에게는 눈인사만 하고 떠나갔다.
서두르는 걸 보면, 마수 무리가 이게 다가 아닌 모양이다.
큰 일 없이 유지되던 다키아 왕국의 방위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나는 그걸 머릿속에 잘 적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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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마트리체 영애가 마수들에게서 구해낸 촌마을.
죽을 각오를 했던 농민들이 살려줘서 감사하다며, 겨우내 먹을 양식까지 풀어서 잔치를 준비했다.
치즈를 올린 감자구이에, 허브소스를 바른 직화 양고기, 자두와 체리를 넣어 달콤하게 끓인 스프와 새로 구워낸 따끈따끈한 밀빵.
촌마을에서 내놓으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텐데.
정성이 갸륵하기도 하고, 굳이 짜게 굴 필요도 없어서 금화를 몇 개 쥐여 주었다.
촌장은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렸다.
전직 악사라는 촌부가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꺼내 줄을 퉁기자, 처녀들이 춤추고 부인들이 노래를 불렀다.
빠르게 훑어봤지만 굳이 취하고 싶을 정도의 여자는 없었다.
마력을 꽤 쓰기도 했고, 파티스 공국은 이제 적성국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우방국이라고 하기도 그런, 애매한 사이기도 했고.
미미하게 차오른 성욕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여자들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면서 농담이나 주고받고 있는데, 아마트리체 영애가 다가왔다.
그녀를 본 여자들은 우르르 자리를 비켜섰다.
“이번 일의 조력, 감사드립니다. 레시아르 백작님.”
아마트리체 영애는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올리면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작위가 없다고는 해도 공작가의 고명딸인 금혈 귀족인데.
이건 그녀를 상당히 낮추는 자세였다.
먼저 이렇게 굽히는데, 여기서 더 생색을 내는 건 역효과일 테고.
나는 겸손하게 받기로 했다.
“차관을 받는 조건대로 이행했을 뿐이오. 아마트리체 영애께서 그리 감사하실 것은 없소.”
“하지만 레시아르 백작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부란타 고원의 농토가 황폐화됐을 거예요.”
“조금 피해가 커졌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파티스 공작과 올드완 병무대신이 제때에 대처했으리라고 믿소.”
아마트리체 영애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무례한 말일 수도 있는데, 레시아르 백작님은 종잡기가 너무 힘든 분이시네요.”
“그렇소?”
“네.”
무슨 말을 더 할 것 같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아마트리체 영애는 그냥 입을 다물고 웃기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웃고는 잠시 쭈뼛거리다가 한 마디를 더했다.
“부란타 고원은 밀이 많이 나는 중요한 산지니까... 이번 일로아버지도, 큰오빠도 모두 백작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 할 거예요. 백작님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저택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아마트리체 영애는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귀찮았는데 언제 또 거기까지 가나.
나는 돌려서 거절하기로 했다.
“감사한 제안이나, 마음만 받겠소. 올봄에 열릴 계승식을 준비해야 해서 일정이 밀려있소.”
“아. 그렇군요. 계승식, 계승식이 있었죠? 그럼 계승식 때 찾아뵐게요.”
아마트리체 영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내게 호감을 좀 가지게 된 모양인데, 나는 좀 시큰둥했다.
공작가 고명딸은 먹고 버릴 수도 없다.
한 번 취하기라도 하면 꼼짝 없이 붙잡혀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여자보다 열 살은 어린 히아신스가 신붓감 후보로 있는데 굳이 아마트리체 영애와 혼약을 맺을 이유는 없지.
그래도 미인은 미인인지라 술자리는 즐거웠다.
아마트리체 영애의 호감 어린 수작을 적당히 받아주면서 놀았다.
와인을 몇 잔 주고 받는 사이에 금세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졌다.
"하아암... 아, 죄송해요."
그녀는 마력을 많이 써서 피곤한지, 하품을 삼키다가 민망하게 웃었다.
"피곤하시겠소. 이만 들어가 주무시오."
"그래야겠어요. 먼저 일어나서 죄송하지만, 그럼 내일 뵐게요. 백작님."
아마트리체 영애는 인사를 올리고는 촌장이 내어준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더 술자리를 이어가며 제트리 단장과 적여우 기사단원들에게 술잔을 돌렸다.
그래도 한 번 같이 싸웠다고 사이가 꽤나 좁혀진 느낌이 들었다.
시끌벅적하게 놀다가,하나둘씩 고개를 꾸벅거릴 때가 되어서야 자리를 파하고 다들 쉬도록 돌려보냈다.
나는 제일 큰 집을 하나 빌려 들어갔다.
안은 미리 청소가 되어서 깔끔했다.
이제 막 잠에 들려는데, 호위병이 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주무십니까?”
“뭔가?”
“마을의 처녀들이 백작님을 모시려고 찾아왔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