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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46화 (46/166)

〈 46화 〉 특이한 마석

* * *

두 개 기사단을 열심히 돌려 레시아르 령을 뒤진 결과, 직할령에서만 네 개의 하이브를 더 발견해냈다.

봉신 영주들이 따로 찾아냈다고 알린 게 또 다섯 개.

저번에 지구라트 숲 지대에서 발견한 것까지 합하면 총 열 개가 된다.

수색은 그렇다고 쳐도 수천 마리에 달하는 마수의 섬멸은, 기사단의 마력회복 속도를 고려하면 온전히 그들에게만 일을 다 맡길 수도 없다.

덕분에 내가 눈썹 빠지도록 돌아다녀야 했다.

그 덕에 하이브 열 체의 마석을 다 모으긴 했지만 나도 진이 다 빠진다.

소파에 늘어지듯 몸을 누이고 가신들을 집무실로 불렀다.

부관참모 타라, 책사 이오시스, 친위대장 파샨과 부대장 하이덴, 마지막으로 대장장이 달반.

탁자 위에 던져둔 마석의 개수를 본 이오시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이 겨울 두 달 동안 계속 마수를 낳았다면 수만 마리의 마수 떼가 백작령을 뒤덮었겠군요.”

“그랬겠지. 일찍 찾아서 천만다행이야. 모르고 봄을 맞이했다면……. 으음?”

나야 운이 좋아서 일찍 하이브를 발견했지만, 다른 영지에서는?

올드완과 흑마를 탄 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란타 고원에서 말이야. 병무대신이 중앙의 기사단을 몰고 왔다는 건 하이브의 존재를 알았다는 거겠지?”

“예. 분명히 알았겠지요.”

“역시! 그럼 중앙에서 파티스 방위에는 손을 보탰다는 거고……. 그런데 우리 영지에는 왜 안 온 거야?”

“레시아르의 세가 커지는 걸 견제하기 위해서가 아닐는지요.”

이오시스의 말에, 타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반문했다.

“아무리 그래도 중앙에서 영주를 견제하기 위해서 마수를 방치했다는 겁니까?”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설마…….”

“아니. 이오시스 말이 일리가 있어.”

중앙은 늘 대영주의 탄생을 경계해왔다.

영지전에 관대한 것도 그런 취지고.

켈자르를 이기고 파티스의 기를 꺾었으니, 중앙의 입장에서는 슬슬 내가 거북해진 건가.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일단은 영지에 큰 피해가 없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지.

“우리가 찾은 하이브가 전부라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까 계속 기사단을 번갈아 가면서 정찰시키도록 해. 봉신들에게도 경계 태세 유지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백작님.”

하이브의 준동은 어느 정도 예방했으니 그 성과를 확인할 때다.

나는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서, 집무실 구석에 수그리고 있는 대장장이에게로 눈을 향했다.

“달반. 하이브의 마석 말이야. 그간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

“예. 백작님이 이만큼이나 많이 모아주셔서 하나를 깨뜨려 보았는데...”

달반은 비단 안감을 댄 나무상자를 올려 바쳤다.

열어보니 안에는 작은 유리알이 놓여 있었고, 그 유리알 위에 날벌레가 하나 얹혀 있다.

피를 잔뜩 빨아서 배가 볼록 나온 모기였다.

시체가 방금 잡은 것처럼 거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마력이군.”

모기의 크기는 손톱보다 작다. 피를 마셔서 볼록 나온 배는 손톱의 반 정도 크기나 될까.

그 조그마한 배 안에서 광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달반은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마석 안에 들어가 있을 때는 포착되지 않았던 마력입니다. 무슨 작용을 거쳤는지는 몰라도 마석이 오히려 이 모기 안의 마력을 숨기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럼 이 피는 도대체 누구의 피일까?”

가장 원론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달반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입을 다물었다.

타라나 이오시스도 딱히 짚이는 게 없는 듯 묵묵부답이다.

단서가 아무 것도 없으니 파격적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데.

손톱의 반도 안 되는 정도의 혈액에 저만한 마력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그건 고대 신화 속의 존재일 수도 있다.

마룡과 맞서 싸웠다는 성인과 성녀, 반신, 혹은 그 이상의 존재.

아니면 반대로 마룡이나 그 수하의 피일 수도 있지.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갈랐다는 그 전설적인 힘의 일부가 내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욕심이 들었다.

“달반. 이걸 이용할 수는 없을까?”

“송구합니다만, 이만한 물건을 제가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제작 도중에 뭔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마도구나 영약을 만들어도 마력폭주를 일으키는 흉물이 될 수도 있으니...”

마력탈진보다 무서운 게 마력폭주다.

안 그래도 마력량이 광대한 내가 저 엄청난 마력까지 집어삼킨 후에 폭주하면 아티아는 그날로 반토막이 나겠지.

아쉽지만 제대로 제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쟁여두기로 했다.

“창고에 따로 잘 보관해두도록 해. 언젠가는 쓸 날이 오겠지.”

“예. 안전하게 장치해서 놔두도록 하겠습니다.”

돈 벌고 나서는 좀 쉴 줄 알았는데 마수 때문에 힘들게 돌아다녔다.

이젠 정말 좀 쉬어야겠다.

#

식사를 마치고 햇볕을 쬐면서 거닐고 있는데, 정원 한쪽 구석에서 검을 부딪는 소리가 났다.

“뭐야. 침입자인가?”

“아뇨. 이 시간이면 체닐린하고 그 노예... 프란다였나? 그 둘이 대련하고 있을 거예요.”

파샨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대답했다.

“맞아. 프렌다 교육을 체닐린에게 맡겼었지? 그럼 구경이나 해볼까.”

장미꽃밭 뒤편.

메이드복을 입은 체닐린과, 가죽 갑옷을 받쳐 입은 프렌다가 검을 맞대고 서 있었다.

체구 차이가 엄청 나서 체닐린은 살짝 허리를 굽혀야 했다.

멀찍이서 보면 완전히 어른과 애의 싸움이다.

하지만 프렌다의 검격은 꽤나 날카로웠다.

프렌다는 한 번 검을 튕겨서 거리를 벌린 후, 두 손으로 검을 꼭 붙잡고 체닐린의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날을 치켜들었다.

진검이라 보는 내가 다 살 떨리는데.

그래도 전 기사단장까지 했던 체닐린에게는 역시 미치지 못했다.

체닐린은 한 손을 등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 프렌다의 검격을 받아 슬쩍 흘렸다.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지 마라. 너는 약해. 네가 이용해야 하는 건 네 힘이 아니라 상대의 힘이다.”

체닐린이 그럴 듯한 말을 했다.

나한테 좆발린 년이 그런 말을 하냐, 하고 놀려주고 싶지만.

제자 앞에서 스승의 권위를 밟아버리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

체닐린은 프렌다와 검을 맞대는 게 즐거운지,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임시 제자인 프렌다도 마찬가지.

토모가 떠나고 나서는 죽상만 짓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표정에 활기가 남아 있다.

나는 가만히 프렌다와 체닐린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검은 어깨와 손목으로 휘두르는 거라고 얘기했을 텐데!”

“네엣!”

“이번엔 다리가 너무 놀고 있어! 계속 움직이면서 검에 변초를 섞어야 한다니까!”

“넷!”

잠시 후, 대련이 끝났다.

체닐린이 팔을 크게 휘둘러서 슬쩍 내보인 약점을 프렌다가 성급하게 찔러 들어온 것이다.

체닐린은 손쉽게 프렌다의 공격을 쳐내고는 손잡이로 프렌다의 정수리를 톡 쳤다.

“여기!”

“하흑!”

프렌다는 귀여운 비명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수고...”

“수고했어.”

체닐린의 말을 자르듯이 끼어들면서, 프렌다를 왼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프렌다를 안아 올린 채로 내 입술에 검지를 톡톡 치자, 프렌다는 훈육된 대로 내게 입술을 맞췄다.

체닐린은 경멸스럽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프렌다를 내려주고, 체닐린에게 고갯짓을 했다.

“프렌다는 들어가서 쉬고, 체닐린은 나랑 산책이나 좀 하자고.”

“으음...”

잠시 서로 말 없이 정원을 걸었다.

꽃은 이미 다 지고, 상록수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옷을 두껍게 입어도 추워서 오래는 못 나와 있겠다.

어느 정도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이제 나를 위해서 일할 때도 되지 않았어?”

“... 너는 내 원수다. 지금 이렇게 지내고 있어도, 그걸 잊지는 않아.”

“현실을 보자는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메이드복이나 입고 청소나 하면서 지낼 거야?”

치마 자락을 훌쩍 들어 올리자, 체닐린은 얼굴을 붉히면서 급히 치마를 내렸다.

“자꾸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니까!”

“방금 말이야. 좀 즐거워 보이던데.”

“그게 무슨!”

치마 들치는 장난 얘기가 아니라, 프렌다와 대련을 할 때의 얘기다.

체닐린은 그 때 분명히 웃고 있었다.

“역시 검을 잡는 게 천직인 거 아니야?”

체닐린은 허리춤에 찬 검을 꽉 쥐었다.

“그건…….”

“어차피 알잖아. 켈자르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제 네가 검을 잡으려면 레시아르, 나를 위해 검을 잡아야해.”

“으으…….”

“친위대로 들어와.”

“흥. 친위대장, 그 계집애 밑으로 들어가라고?”

체닐린은 콧방귀를 뀌면서 파샨을 노려보았다.

파샨이 아직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자기를 사로잡는 데에 파샨이 공을 세웠으니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것보다는 은혈 귀족인 자신이 수혈인 파샨에게 머리를 굽힌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친위대 부대장인 하이엔도 평민 출신이었고.

체닐린을 친위대에 들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파샨도 지지 않고 체닐린을 노려보면서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는 걸 보면, 억지로 친위대 안에 들였다가는 둘이 싸움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럼 호위기사는 어때?”

“음…….”

이 말에는 좀 혹하는지 체닐린은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을 보였다.

“잘 생각해 봐.”

강요한다고 없는 충성심이 생기진 않을 테고. 시간을 좀 주기로 했다.

체닐린은 정원에 남겨두고, 파샨만 데리고 저택 안에 들어갔다.

메이드 데이지가 따끈하게 젖은 물수건을 가져다주어서, 그걸로 얼굴과 손을 닦고 벽난로 앞에 앉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가끔 울렸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파샨을 허벅지 위에 앉힌 채로 멍하니 불만 바라보았다.

따끈따끈하고 부들부들한 게 기분 좋다.

파샨은 내 위에 앉은 채로 북슬북슬한 여우꼬리를 앞으로 잡아당겨서 불에 말렸다.

“그러다 타겠다.”

“다 안 타게 말리는 방법이 있거든요.”

“요게 건방져.”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꽉 끌어안자, 파샨은 숨이 막히는지 바동거렸다.

“도, 도련님! 숨 막혀요! 숨 막힌다니까요!”

어림도 없지.

파샨을 팔과 다리로 조인 채로 카펫 위를 굴렀다.

켁켁 소리를 내던 파샨은 어느새 킬킬 웃고 있었다.

뒤에서 가만히 시중을 들던 메이드들은 주인의 추태를 애써 모른 척 해주었다.

한 번 더 굴러서 정자세를 잡은 후에, 다시 벽난로 앞에 앉았다.

파샨은 아까처럼 꼬리를 앞으로 말고 내 위에 앉았다.

나도 손을 앞으로 뻗어서 파샨의 꼬리를 만지다가 말을 건넸다.

“파샨.”

“네?”

“속상하진 않아?”

“뭐가요?”

“체닐린. 전직 기사단장이긴 해도 어쨌거나 지금은 메이드 신세인데. 네 앞에서 꼬장 부렸잖아.”

“저는 신경 안 씁니다! 여우 수인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나요.”

파샨은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도련님 말대로 줄을 잘 서서 기사 작위도 받고, 친위대장이라는 것도 해보는 건데.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아!”

“그래. 내 덕인 거 알면 됐다.”

“이히히히히…….”

파샨은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웃다가 좀 시무룩한 투로 말했다.

“그래도 가끔 생각할 때는 있는데... 내가 좀만 더 힘이 셌으면 다들 그렇게 무시는 안 할 텐데 하고요.”

내가 모르는 고충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긴. 조그마한 여우 수인이 기사단 부단장을 하려면 욕도 어지간히 들어먹었겠지.

이젠 공신에 친위대장 직위까지 더해졌으니, 앞에서는 굽실거려도 뒤에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테고.

“네가 고생이 많긴 하다.”

“그럼... 도련님. 저 그거 하나만 먹어보면 안 돼요?”

“뭐?”

“하이브 마석이요.”

“그게 무슨 떡인 줄 알아? 막 먹게?”

“마력이 엄청 들어있다고…….”

“절대 안 돼.”

일부러 센 어조로 엄포를 놓았다.

“마석을 주워 먹는 대로 강해졌으면 세상에 약한 놈이 없겠다. 그거 다 마기를 빼고 마력만 추출해서 영약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하이브의 마석, 그건 달반도 못 다뤄서 쟁여두기만 했어. 그거 막 먹으려다가 잘못하면 마력폭주 와서 죽을 수도 있다.”

“네에…….”

“절대 안 먹겠다고 맹세해.”

“안 먹을게요.”

“맹세하라니까.”

“저 파샨은 도련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하이브의 마석을 먹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힝…….”

맹세를 시키고서도 불안해서, 달반을 시켜서 하이브의 마석을 꽁꽁 감춰두도록 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마석을 노린 것은 파샨이 아닌 다른 놈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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