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47화 (47/166)

〈 47화 〉 불청객

* * *

한겨울 눈길을 뚫고 불청객이 찾아왔다.

내무대신 바리보예즈.

이마 절반에서 좌우로 가르마를 빗어 넘긴 느끼한 중년 사내.

버터를 통째로 구워먹을 것 같은 인상이지만 그를 감히 무시할 수는 없다.

내무대신이라는 직위와는 별개로, 그의 몸에서는 숨길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으니.

나보다는 못하지만 켈자르 가주 정도는 된다고 할까.

맞붙으면 이기기야 이기겠지만 단숨에 끝낼 수는 없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는 즉시, 바리보예즈의 뒤를 지키는 기사가 내 목을 노리겠지.

원형 투구의 바이저를 내려쓴 채 나를 주시하고 있는 기사.

중앙 대신들의 경호만을 담당하는 ‘강철의 손아귀’ 소속이다.

은혈의 순수 귀족들 중에서도 기재만을 선발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도구로 무장시킨, 다키아 왕국 최강의 기사들 중 하나다.

내 뒤에 선 파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수인 피가 짙은 파샨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이 기사는 매우 위험한 녀석이라고.

그렇지만 자신은 그런 기 싸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양, 바리보예즈는 생뚱맞은 소리부터 꺼냈다.

“논문을 심사하러 왔습니다만.”

논문이라... 논문?

키마이드라에 관한 거라면, 파크레 아카데미 교사인 캘럿이 논문 초안을 보내줘서 한두 번 읽어두긴 했다.

내가 처치한 키마이드라에 관한 논문을 적는 대신에 제1 저자를 내 이름으로 올리겠다고 했었지.

심사위원이 내게 찾아올 수도 있다고 했지만, 이리 일찍 올 리는 없고, 그 심사위원이 내무대신일 리는 더더욱 없다.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바리보예즈는 콧수염을 옆으로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뭐 그리 보십니까.레시아르 백작위의 계승식 방문 일정도 겸하여 제가 내려온 것이지요.”

“계승식까지는 한참 남았습니다만.”

“허허. 그럼 그때까지 좀 머물겠습니다.”

낯짝 두꺼운 놈.

그렇지 않아도 저 놈은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있는데.

그렇지만 내 기분이 나쁘다고 중앙의 대신을 그냥 쫓아낼 수는 없다.

일단은 저택 내에 빈 방을 내어주어 짐을 정리하라고 보내고, 가신들을 다시 소집했다.

이번엔 빠르게 의견을 모아야 하니 부관참모 타라와 책사 이오시스, 두 여자만 불렀다.

“저 놈이 온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하필 이 시기에 찾아왔다면 역시 레시아르 령에 하이브가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병무대신처럼 하이브를 토벌하러?”

타라가 즉답하자, 이오시스가 말을 받았다.

“타라 부관. 중앙에서 레시아르를 견제하려 한다면 내무대신이 그렇게 레시아르 가에 관대하게 대해줄 이유가 없지 않나요. 따로노리는 목적이 있어서 왔겠죠.”

“그럼... 아, 하이브의마석이군요!”

“정확히는 그 마석 안에 있는 벌레, 더 정확히는 그 벌레의 배 안에 든 피를 노리는 거겠죠. 이렇게 일찍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우리가 알아낸 걸 중앙에서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겠네요. 아니, 우리가 모르는 것까지 저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맞겠고요.”

"역시 중앙은..."

이오시스와 타라, 둘이 서로 주고받으며 답을 도출해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대략 일치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내무대신이 고관이라고는 하지만, 여기 레시아르 령에서 백작님께 막무가내로 마석을 요구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태도를 결정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걸로 되겠어?"

"당장은 우리쪽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혹시 그 쪽에서 먼저 도발을 해올지 모르니까 사용인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 정도가 가능한 일일까요."

“그래. 그럼 이오시스 말대로 두고 보도록 하자고.”

중앙 놈들도 하이브의 마석이 아쉽긴 한 모양이다.

내무대신이 몸이 달아올라서 여기까지 내려올 정도니까.

그게 보물은 보물인가 본데.

아쉬운 사람이 먼저 우물을 팔 테니, 내무대신이 제스쳐를 취할 때까지는 관망하면 된다.

그렇게 정하고 가신들을 내보내려는데, 메이드장 세리야가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백작님!”

“왜 불러.”

“체닐린 양이 내무대신의 호위와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씨발.

주의를 주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었다.

급히 몸을 일으켜서 방을 뛰쳐나갔다.

저택 현관.

계단이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이층으로 이어지는 곳.

촛불 백 개가 모두 켜진 샹들리에 밑에서 메이드복을 입은 체닐린이 힘겹게 검무를 추고 있었다.

상대는 바리보예즈의 호위, ‘강철의 손아귀’의 기사

그는 체닐린의 검격을 차분하게 받아넘기면서 간간이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로 마력은 쓰지 않고, 순수하게 검으로만 승부하고 있다는 건가.

하지만 검술로라도 체닐린이 밀리고 있다는 건 예상 외였다.

체닐린은 길쭉한 전신을 이용해서 힘껏 검을 내려치고 있지만, 적 기사는 손목을 몇 번 뒤집는 것만으로 체닐린의 검을 튕겨내면서 바로 공세로 전환했다.

부욱!

무겁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내게도 살벌하게 느껴진다.

“하악...!”

체닐린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검격을 겨우 피했다.

팔랑팔랑한 메이드복의 프릴이 검 끝에 말려서 형편없이 찢어졌다.

강철의 손아귀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전 기사단장까지 했던 여자를 이렇게 몰아붙일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역시 중앙의 저력은 강대하다는 건가.

벽에 바싹 붙어서 떨고 있는 메이드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백작님! 내, 내무대신 님이 체닐린 씨를 조롱했습니다. 메이드가 감히 건방지게 칼을 차고다니냐면서요. 체닐린 씨가 무시하고 가려니까, 이 여자가 켈자르의 메이드인지, 레시아르의 메이드인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했어요.”

바리보예즈와 체닐린은 서로 구면이었나.

하긴. 내무대신이 켈자르의 기사단장을 알고 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여하튼 내무대신이란 작자가 단순히 체닐린을 놀려먹으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거고.

격장지계군.

체닐린의 잘못은 그 주인인 나의 잘못.

호의로 묵게 한 손님의 일행에게 검을 겨누었으니, 나는 내무대신에게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게 된 거다.

바리보예즈가 노리는 건 하이브의 마석일 게 뻔하고, 아마교섭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이딴 수를 낸 내무대신도 내무대신이지만, 적의 꾀에 넘어간 체닐린도 잘못이 크다.

나중에 시간 잡아서 존나게 두들겨 패야겠다. 물론 자지로.

“제가 끼어들어서라도 그만두게 할까요?”

상급자로서 책임감을 느끼는지, 세리야가 비장하게 물었다.

저 살벌한 검투에 끼어들면 세리야의 팔 한쪽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저쪽도 핏값을 치러야 하니까 체닐린의 무례는 상쇄된다는 건데...

세리야는 아마 그것까지 고려하고 메이드장으로서 책임을 지려는 거겠지만, 나는이따위 장난에 그녀를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다.

“그러지 마. 일단은 결판이 날 때까지 지켜보자.”

체닐린이 검을 뽑은 이상, 어차피 엎질러진 물.

이기기라도 해야 체면이라도 덜 상하지.

사과할 때 사과하더라도 이기고 사과하는 게 낫다.

바리보예즈는 맞은편 계단 난관에 기대어 지그시 웃고 있었다.

저 쪽은 저 쪽 나름대로 당연히 자기 기사가 이길 거라고 자신하는 모습이다.

내게 무례를 저지르게 하는 것에 더해 망신까지 줄 생각인 것 같은데.

이겨라, 체닐린.

지면 진짜 죽는 거야. 물론 자지로.

내 사념이 통했는지 체닐린은 한 번 몸을 부르르 떨더니,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적 기사는 갑자기 빨라진 체닐린의 연격을 피하느라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섰다.

“후욱.”

기사는 한 번 숨을 고르고는 공세에 나섰다.

쨍!

검을 사선으로 그어서 체닐린의 검을 세게 후려치자, 체닐린은 크게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기사는 우측으로 돌며 다시 한 번 검을 그었다.

오른손잡이인 체닐린에게 있어 사각인 좌측으로 들어오는 공격.

“으흑!”

체닐린은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혀 검을 피했다.

하지만 공세는 이미 적에게 넘어갔다.

기사는 쉴 새 없이 검격을 날렸고, 체닐린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장부터가 너무 차이나니까 어쩔 수가 없긴 하다.

결국 대세가 적 기사 쪽으로 기울고, 그의 검이 체닐린의 배를 찢기 직전.

프렌다가 위층에서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떨어졌다.

메이드복 치마가 넓게 쫙 펴지는 게, 한 떨기 낙화(花)를 보는 것 같다.

그녀가 손에 쥔 검이 팽이처럼 돌아가며 몇 번이고 적 기사의 어깨와 배, 다리를 내려쳤다.

갑주가 뚫리지는 않았지만, 길게 흠집이 났다.

바이저 너머로도 적 기사가 당황한 게 다 보였다.

나도 놀랐다.

프렌다에게 검의 재능이 있다고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프렌다는 포니테일로 묶은 분홍머리를 어지럽게 흔들어대면서 검을 휘둘렀고, 제자의 가세에 체닐린도 힘을 내서 기사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걸로 세가 뒤집혔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간신히 싸움을 이어나갈 정도는 된다고 할까.

손에 땀을 쥐고 싸움을 지켜보는데, 세리야가 맞은편 층계를 가리켰다.

“백작님. 저 뒤를 보세요.”

“어... 어?”

바리보예즈 뒤에 희끗한 형체가 보였다.

베티아였다.

어느새 그 자리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베티아는 다소곳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작은 바늘 같은 게 끼워져 있었다.

마력이 있었다면 마력감지에 걸렸겠지만 베티아는 마력이 없는 평민.

그러니 그녀의 기척을 먼저 감지해낸 건 마력을 단련한 바리보예즈가 아니라, 육체를 단련한 강철의 손아귀 기사였다.

호위대상 뒤에 왠 여자가 나타나니 마음이 다급해졌는지, 그의 손에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마력까지 동원해서 싸우기 시작하면 저택도 난장판이 될 테고 서로 피를 볼 테니, 덮을 수가 없게 된다.

그건 나도 바라지 않고 아마 바리보예즈도 바라는 바는 아니겠지.

두 손으로 크게 박수를 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 대련은 거기까지로 합시다.”

내 말에 체닐린이 홱 고개를 돌려서 노려보다가 물러났고, 적 기사도 검을 거두었다.

프렌다는 체닐린 옆에 찰싹 붙었다.

바리보예즈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제야 자기 뒤에 선 베티아를 발견하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언제...어허, 허허. 거참…….”

이렇게 되면 바리보예즈에게도 떠들고 다닐 수 없는 수치가 된다.

결과만 따지고 보면 메이드 셋에게 자신과 호위기사가 농락당한 셈이니.

내 무례를 따지고 들려면 자신의 수치가 엮이게 되니 격장지계도 무위로 돌아갔고.

이만하면 선방했다 싶어,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제가 준비한 대련은 어떠셨습니까. 볼만했지요?”

“그렇지요. 대련... 덕분에 잘 견식했습니다.”

바리보예즈는 살벌한 검투를 대련한 셈 치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차라도 한 잔 하시죠.”

“크흠... 그럽시다.”

우리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도발이 무위로 끝나자 심기불편한지, 바리보예즈는 콧수염을 비비 꼬면서 논문 얘기를 대뜸 꺼냈다.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더군요. 기록에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키마이드라가 갑자기 출현했고, 그 약점까지 밝혀냈다고. 그런 논문을 적으신 제1저자가 레시아르 백작이시라. 아카데미에는 다니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논문 대필은 공공연한 일이다.

게다가 논문 심사 운운은 방문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고.

바리보예즈도 괜한 견제구를 던져보는 것일 테지.

"제가 원래 글을 좀 씁니다."

내가 당당하게 받아 넘기자, 바리보예즈도 바로 말을 돌렸다.

“그 마석을 봐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거 없지요.”

키마이드라는 상위종 마수였지만 하이브는 아니다.

거기서 얻은 마석도 꽤 큰 마석이긴 했지만 벌레가 든 마석은 아니다.

마침 그 마석은 응접실에 장식 삼아 보관하고 있어서, 바로 내주었다.

바리보예즈는 마석을 조금씩 돌려가면서 살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상당한 마력이 느껴지는 마석이군요.”

“상위종 마수의 마석이니까요.”

“혹시 이보다 더 큰 마력을 가진 마석을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게 키마이드라 논문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하하하하! 없지요! 물론 키마이드라와는 관련이 없지요!”

바리보예즈는 호탕한 척 웃으며 콧수염을 쓸었다.

“하지만백작께선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바리보예즈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협상을 하자고 말한다면 나도 뭉그적거릴 생각은 없다.

부지런히 영지를 돌아다닌 덕에 하이브 마석을 열 개는 가지고 있다.

병무대신에게 마석을 뜯겼을 파티스나, 아직 전쟁의 피해를 회복 중이라 경황이 없을 켈자르보다는 훨씬 많은 수일 거라 자신한다.

이것도 당장 쓸 수 있다면 전부 가지겠지만, 어차피 묵혀둘 거라면 몇 개 정도는 교섭의 재료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이브의 마석을 얻기 위해 내 영지까지 행차하신 내무대신 바리보예즈.

당신은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다리를 꼬고 대답을 요구하자, 바리보예즈는 허허 웃고는 입을 열었다.

“이데트 레시아르.”

갑자기 나온 친누이의 이름에, 무릎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바리보예즈는 내 반응을 즐기면서 콧수염을 반대로 비비 꼬았다.

“전 레시아르 백작께서 나와 가약을 맺어준 것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워낙에 친정을 그리워하다가 심병을 얻은 듯하여... 이번 기회에 친가로 다시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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