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책사 이오시스의 비밀스러운 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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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노예경매가 열렸던 극장에서는 다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레시아르 백작이 직접 극본을 썼다는 연극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오시스는 이층에 적당히 빈 자리를 골라잡았다.
이미 여러 번 상영한 극이라 공석이 꽤 있었다.
그녀의 자리 주변에도 사람이 하나도 없이 텅텅 비었다.
우두커니 무대 위 배우들의 열연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옆자리에 앉는 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극이냐?”
약간 쉰, 지친 노인의 목소리.
이오시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도 그것이 자신의 조부이자 레시아르 백작가의 전 집사장 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속했던 것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늘그막에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있을 조부를 탓할 수는 없었다.
뮌은 전 레시아르 백작의 비자금을 경매에서 뿌려버린 탓에 그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미 아들에게 백작위를 넘겨줬다고는 해도, 그는 수십 년간 레시아르를 통치해온 지배자.
때문에 뮌은 노구를 이리저리 끌며 숨어 다녀야 했다.
이오시스는 권력의 무상함과 잔혹함을 되새기다가, 뒤늦게 조부의 말에 대답했다.
“켈자르 원정에 관한 영웅극이에요.”
“그걸 벌써 극으로 만들었다고?”
“진작 생각해두신 모양이죠. 백작님께서 어디 보통 인물이신가요.”
“하기는.”
이오시스의 조부, 뮌은 클클 소리 내어 웃었다.
현 레시아르 백작은 눈 뻔히 뜨고 살아있는 아버지로부터 백작위를 강제로 탈취한 인물이다.
늘 여자 치맛자락만 뒤지고 다니는 것 같아도 계략으로 치면 그보다 한 수 위.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 벌써 문화 분야로 손을 뻗고 있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다.
“레시아르의 원수! 아티아를 불태우고 아녀자들을 희롱한 켈자르! 그들을 내 손으로 벌하고야 말 것이다! 시조시여! 당신의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이 바이스 레시아르가 이 땅을 구원하게 하소서!”
마침 레시아르 백작을 분한 배우가 연극조로 웅장하게 대사를 읊었다.
드문드문 앉은 관객들은 극에 몰입했는지 허리를 앞으로 기울인 채 홀린 듯 무대를 바라보았다.
“부디, 부디 몸 성하게 다녀오세요. 각하. 제가 오직 생각하는 것은 각하의 안녕 뿐이랍니다.”
마티란 자작을 분한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레시아르 백작을 배웅했다.
저건 명백히 없던 사실이다.
하지만 감수성 예민한 귀부인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적시며 그 사실을 이미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뮌이 지그시 팔걸이를 눌렀다.
“연출에 마티란 자작이 끼어들었군.”
“요즘 그녀가 손대지 않는 일이 없죠.”
이오시스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레시아르 백작의 총애를 다투는 사람으로서, 작위도 있고 능력도 만만찮은 마티란 자작은 가장 껄끄럽고 싫은 상대였다.
출정 장면이 끝나고 막간(??).
약간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뮌이 다시 물었다.
“그래, 드디어백작께 안겼다고?”
“예. 할아버지.”
“태기(??)는 있었는고?”
“아뇨. 아직…….”
“아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
“알고 있어요.”
건강하고 마력이 풍부한 아이를 많이 낳아서 가문을 부흥시키는 것.
그건 모든 동혈 가문 여식들이 노리는 목표다.
하지만 이오시스에게 있어 레시아르 백작의 아이를 낳는 것은 더 절박한 목표였다.
레시아르 백작의 수하 사이에서는 일단 세 부류의 파벌이 있다.
첫 번째가 켈자르 원정 이전부터 레시아르 백작을 따르던 메이드장 세리야, 친위대장 파샨.
이 둘은 백작의 무조건적인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들의 신분이 낮고 친위대 백여 명을 제외하면 따로 세력이 없어서 파벌로서는 크게 존재감이 없다.
그 다음이 켈자르 원정 동안 레시아르 백작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 마티란 자작 루이사, 백여우 기사단장 오록스, 그의 딸인 부관참모 타라, 전직 보병대장 무산토.
쿠데타 도중에 신하로 예속한 부게른 남작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세력도 강하고 작위도 높아서 친(?) 백작파의 실질적인 핵심 파벌이다.
마지막이 쿠데타 이후에 레시아르 백작 밑으로 복속하게 된 적여우 기사단장 제트리, 기돔 자작을 비롯한 전(?) 레시아르 백작의 우호세력이다.
이 자들은 상당한 자산을 경매대금 형식으로 헌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레시아르 백작에게 견제 당하고 있다.
줄을 잘못 댄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자신과 할아버지 뮌은 마지막 부류에 속하게 된다.
뮌이 전 주인을 저버리면서까지 비자금을 바쳤지만, 레시아르 백작은 딱히 그를 거두거나 비호해주지 않았다.
그의 손녀인 이오시스를 등용한 게 다였는데,그나마도 책사라는 애매한 위치에 두었으니 타라와는 비교되는 처우였다.
“이오야.이오시스, 내 손녀. 네가 이 땅에서 편히 살려면백작의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
바이스 레시아르는 혈육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다.
그 친부인 전 레시아르 백작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도 결국은 그가 친누이들을 팔아넘기듯이 중앙의 대신들에게 첩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고.
이오시스가 백작의 아이를 낳는다면 그의 총애가 한결 더해질 것은 자명한 이치고, 뮌도 그 아이의 외조부로서 용서를 구할 계기를 얻게 된다.
뮌과 이오시스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고. 책사로서 네 능력도 발휘를 해야겠지.”
“백작님께선 아직까지는 타라 부관을 더 신뢰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 여자는 성실하기는 하지만 그리 영리하진 못하다. 네가 충분히 누를 수 있을 것이야. 할애비도 머리를 빌려주마.”
무대에서 막이 또 한 번 바뀌어 레시아르 백작이 켈자르의 요새를 쳐부수는 장면이 재현되었다.
꽤나 정교하게 장치를 구성해서, 요새가 와르르 무너짐과 동시에 화려한 폭음이 울렸다.
객석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뮌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손녀와의 문답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중앙에서 내무대신이 내려왔다지? 그 작자가 무얼 노리고 왔더냐?”
“하이브의 마석이요. 할아버지도 소문은 들으셨겠죠?”
“그러믄. 마수를 낳는 마수의 마석……. 백작이 겨우내 모으셨다고. 내무대신이 직접 왔다면 빈 손으로 돌아가진 않았을 테고. 무엇을 대가로 그걸 주었는고?”
“백작님의 누이이신 이데트 님을 송환받았어요.”
“그래? 마석을 주고서 금혈 귀족을 얻었다면 이득을 봤구나. 하지만 내무대신 바리보예즈가 그리 호락호락한 자가 아닌데.”
“이건 극비인데, 이데트 님은 혼수상태에 빠져있어요.”
뮌은 화들짝 놀랐다.
“그래? 아니 어쩌다가 말이냐?”
“아마 독에 당하신 듯해요.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이라.”
뮌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무언가 짚이는 게 있으신가요?”
“중앙에서는 금혈귀족을 중독시킬 강독을 이미 만들어낸 것이야.”
“그렇겠지요.”
뮌은 고개는 돌리지 않고, 상체만 옆으로 기울여 이오시스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딱 십년 전 즈음해서 유독 대신들이 첩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였어. 이데트 레시아르는 물론이고, 첩으로 보내진 지방의 금혈귀족들이 다 실험대상이 되었겠지.”
“금혈을 실험대상으로 썼다고요?”
이오시스는 그런 발칙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뮌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을 어떻게 만들어냈겠는고?”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감히 고귀한 금혈을...”
피로 운명이 결정되는 경직된 사회 속에서 금혈은 지고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금혈을 돼지처럼 가둬두고 독을 실험했다는 말에, 이오시스는 경악했다.
하지만 뮌은 코웃음을 쳤다.
“이오야. 늘 그래왔듯 더 강한 자가 덜 강한 자를 착취한 것뿐이다.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지. 다만 금혈을 중독시킬 강독을 만들어냈다는 건 놀랍구나.”
“그래도 금혈 귀족들은 고귀하고 위대하신 분들이세요. 중앙에 끌려가신 분들은 예외적인 상황에 처해있었을 테니 예외로 친다면, 독이 큰 위협이 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손녀의 말에 뮌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독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이 강독이 더 위협적이게 된다. 작금의 금혈들은 독에 대처하는 법을 모른다. 식사를 가리는 법과 종을 경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중앙에서는 강독을 몇 방울 푼 것만으로 만 리 밖에서 손쉽게 지방 영주들을 독살할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지방의 영주들이 몰살되면 다키아 왕국 자체가 흔들릴 텐데.”
“힘은 휘두르지 않아도 가진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언제든 독살될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오만한 지방 영주들도 중앙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럼... 내무대신이 이데트 님을 보내신 것은...”
“경고겠지. 중앙에서 이미 금혈을 중독 시킬 강독을 만들었다는. 모르긴 몰라도 다른 영주들도 강독에 절여진 제 형제누이들을 받았을 것이다.”
이오시스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뮌의 말은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고, 군데군데 논리적인 비약이 있기는 했지만 나름대로의 통찰력이 있는 발상이었다.
뮌은 한 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하이브의 마석. 아마도 그게 강독의 재료지 않겠느냐?”
“어째서요?”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중앙에서 강독을 개발하고 또 하이브의 마석을 찾아다닌다는 게 너무나도 공교롭다. 내 살아보니 보통 이렇게 의심스러운 일이 겹칠 때는 서로 관계가 있더구나.”
그 또한 논리 없는 비약이었지만 이오시스는 계략과 음모가 난무하는 귀족가에서 집사장으로 평생을 살아온 뮌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마력폭주를 일으킬 만큼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닌 하이브의 마석.
금혈귀족의 강대한 마력을 꼬고 비틀만큼의 강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게 재료로 딱 알맞을 테니.
뮌은 이오시스가 생각에 빠진 틈을 타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중앙에서는 십년 전부터 하이브의 마석으로 강독을 연구하였을 텐데, 갑자기 지방 영지에 이렇게 하이브가 늘어난 것은 어째서겠는고?”
“음……. 힌트를 하나만 주세요.”
“클클클. 알았다, 요 녀석아. 하이브는 마수를 낳는 마수지. 이러면 알겠는고?”
알쏭달쏭한 힌트였다.
힌트라고 하기엔 이미 이오시스가 잘 알고 있어서 정보가 되지 않는 사실이었고.
이오시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뮌의 발언으로부터 한 가지 문장을 연상해냈다.
“그렇다면 하이브를 낳는 하이브도 있을 수 있다는... 건가요?"
"옳아, 옳아."
"그럼 갑자기 근방에 이렇게 하이브가 늘어났다는 건,하이브의 모체가 풀려난 거군요! 스스로도망쳐 나온 건지, 누군가의 계략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역시 내 손녀구나. 맞다. 적어도 이 할애비는 그리 생각한다. 중앙이 지금껏 숨겼던 강독의 존재를 드러낸 것도, 아마 그것과 연관이 있겠지.”
이오시스는 파티스 공국에서 만난 병무대신 올드완이 하이브의 모체를 찾는 게 아닐지 짐작했다.
고작 하이브를 찾는 거라면 기사단을 내려 보내는 걸로도 충분했을 테니.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정보였다.
“당장백작님께 알려드리는 게...”
“지금 알려드리면 그저 정보를 드릴 뿐이다. 해결하려면 결국 다른 자들과 공을 나눠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
뮌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건넸다.
이오시스가 엉겁결에 받고 나서 살펴보니, 그건 열쇠였다.
“파벤 포목상 옆, 붉은색으로 벽을 칠한 집에 비밀창고를 지어 놨다. 지도와 금화, 인명록, 그리고 쓸 만한 물건들을 숨겨놨으니 네가 이용하도록 해라.”
“할아버지는요?”
“전 주인께서 나를 바싹 쫓고 있다. 오늘도 미행을 겨우 따돌렸어. 백작께서 나를 용서하고 보호해주시기 전까지는 레시아르 령을 떠나 있으려고 한다. 어디로 가려는지는 묻지 말아라.”
“예……. 몸 조심하세요, 할아버지.”
“이오,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다.하이브의 모체를 찾아라. 강독의 비밀은 아마 거기 있을 것이다. 해독제까지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거기까지는 온전히 네 힘으로 찾아내야 네 공이 된다. 네가 그렇게 공을 쌓아야 이 할애비가 편히 몸이라도 눕히고 살겠구나. 어이휴.”
뮌은 길게 말한 것이 힘에 부치는지 좌석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다가 일어섰다.
“먼저 가보마. 너는 극이 마치면 나오도록 해라.”
“예. 할아버지.”
이오시스는 고개인사를 하고 손바닥에 놓인 열쇠를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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