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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57화 (57/166)

〈 57화 〉 추적

* * *

친위대원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새로 나온 하이브를 마구 찔러 죽였다.

동굴에 들어와서부터 당한 게 많아서 감정이 좀 쌓였던 모양이다.

그 사이 파샨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검을 내게로 들고 왔다.

“도련님. 이거 적여우 기사단원들이 쓰는 검입니다.”

“미장센 건가?”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요.”

“뭐, 맞겠지. 여기까지 다른 적여우 기사가 왔을 것 같지는 않고.”

나는 파샨에게서 검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서겠지만, 어쩐지 손잡이 부근이 뜨끈했다.

검을 설렁설렁 흔들면서 하이브의 모체를 빙 둘러보았다.

다시 봐도 역겹게 생기긴 했다.

심장 형상의 하이브도 역겹지만, 두뇌 형상을 한 하이브의 모체는 원초적인 불쾌감을 자극하는 데가 있다.

찬찬히 보다보니 좌뇌 쪽 부분이 거뭇한 게 눈에 띄었다.

안에 피멍이 든 것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무언가가 들어차있는 것도 같다.

“어디 한 번.”

검을 세워 그 윗부분을 푹 찔러보았다.

손잡이를 타고 전해지는 느낌은 말랑말랑한 젤리를 자르는 것 같은데.

거뭇한 형체를 에둘러서 커다랗게 썰어내자, 그 부분이 푸릉푸릉 휘청거리더니 앞으로 푹 떨어져서 분리되었다.

“커흐윽...!”

떨어진 하이브 모체 조각으로부터 헐벗은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충혈된 눈을 번쩍 떴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어서 괴물처럼 보였다.

“미장센.”

파샨이 그를 불렀지만, 미장센은 제 목을 쥐고 컥컥거리느라 바빴다.

그가 입을 벌려 연회색 파편들을 토해내기 시작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왜 이 자가 이런 괴물 안에...”

체닐린이 코를 막고 중얼거렸다.

분리된 하이브 모체의 조각을 신발로 밟아서 부스러뜨려 보았다.

곤약 같은 질감이다. 냄새도 아주 지독하다.

“제정신이 있으면이런 흉물에 스스로 기어들어가진 않았겠지.”

“그럼?”

“이게 삼킨 거야. 미장센을.”

되짚어보면 지구라트 숲지대에서도 하이브가 발견된 건 화전촌 안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하이브는 사람과 아주 먼 오지에서 발견되진 않았다.

하이브는 사람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추론컨데하이브는 사람을 양분 삼아 자라는 게 아닐까.

그 양분이 성장기에만 필요한 건지, 마수를 낳으려면 계속 필요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하이브는 그렇다치고.

하이브의 모체는 그냥 인간이 아니라 강한 인간을 양분으로 삼아서 자라는 거겠지.

마력을 보유한 기사 미장센은 딱 거기에 부합하는 양분이었고.

“구... 구해...”

미장센은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는지, 새파래진 입술을 달싹였다.

친위대원들이 그를 양쪽에서 치켜들어 세웠다.

“방금뭐라고 했나?”

“부디...”

“부디, 뭐?”

“오페이아 양을... 구해... 주십시오...”

“그걸 내게 부탁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둘이 손 붙잡고 나한테서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제 여자를 나한테 구해달라고 부탁한다니.

미장센도 부끄러운 건 아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를... 포기하겠습니다. 백작님. 제발, 제발 오페이아 양을... 구해만 주십시오.”

“그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나 해봐. 일단 여긴 왜 들어온 거야? 오페이아는 어딨고?”

미장센은 체념했는지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마레그 마을 언저리에서 추적자가 따라붙었다는 건 짐작했습니다.오페이아 양과 함께 추적망을 뚫기는 힘들 것 같아 여기 동굴로 들어왔고요. 마수들이 많다는 건 들었지만, 그래도 제가 기사니까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들어와 보니 어떻던가?”

“끔찍했습니다. 평생 살면서 볼 마수를 여기서 다 본 것 같더군요. 너무 많아서 맞서 싸울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죽을 기세로 검을 휘두르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오페이아 양이 누군가에게 잡힌 걸 봤는데...”

“누군가? 마수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족보행을 하는 마수도 있으니 제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겠지만... 얼핏 보기엔 사람 같았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 마수 소굴 안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렇지만 미장센의 말이 순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가 이제 와서 굳이 거짓을 고할 동기도 없다. 게다가 오페이아를 구해달라는 부탁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자 뭔가 착각했는지, 파샨이 시퍼런 칼날을 미장센의 목에 가져다 붙였다.

“없애버릴까요?”

“무섭게 왜 그러냐. 그냥 친위대 몇 붙여서 동굴 밖으로 내보내. 가는 길에 아까 해치운 하이브 마석도 다 줍고.”

“알겠습니다! 얘들아! 움직여!”

미장센은 건장한 친위대원들 사이에 끼어서 질질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백작님!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부디 오페이아 양을!”

“소리 안 질러도 돼. 오페이아는 구한다. 이제 내 여자니까.”

“그건...”

“제 여자도 지키지 못하는 남자에겐 뭐라 할 자격이 없다.”

미장센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친위대원들이 그를 끌고 온 길을 되돌아 나갔다.

“아. 잠깐.”

내 말에 친위대원들이 멈추었다.

미장센은 은근히 희망이 담긴 눈동자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물어볼 건 단 한 가지 뿐이다.

“오페이아와 했나?”

“무슨 말씀이신지.”

“오페이아가 처녀냐 이 말이야.”

“그게... 중요합니까?”

“아주 중요하지.”

미장센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고는 대답했다.

“예. 그녀는 순결한 처녀입니다. 저와 그녀는 혼전순결을 서약했으니까요. 제국에 도착하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려 했는데…….”

“요새 보기 드물게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군. 좋아. 다시 데려가.”

흡족한 표정으로 미장센을 돌려보내고 나니, 파샨이 불쑥 다가와서 물었다.

“도련님. 뒷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도련님을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죽이진 않더라도 벌을 줘야하는 거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죄랄 게 근무지이탈 밖에 더 있나? 그리고 젊은 혈기에 실수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역시 도련님! 배포가 크십니다!”

“암암. 적당한 창관에라도 보내서 동정 딱지 떼어주면 정신 차릴 거야. 영창 며칠 보내고 대신 용돈이나 두둑하게 챙겨줘.”

"도련님의 자비에 미장센도 눈물 흘리면서 감동할 겁니다!"

체닐린은 나와 파샨을 번갈아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야. 가슴 만져달라고?”

“…….”

“아니면 저거 마석이나 캐와.”

체닐린은 헤집어진 옷자락을 추스르고는 화풀이하듯 검을 마구 휘둘렀다.

하이브의 모체는 체닐린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잠시 후 그녀가 가져온 마석은 하이브의 마석보다 종잡아 열 배는 더 컸다.

그 속에는 무당벌레 같은 게 들어있었는데, 마석이 마력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안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이번에 외유를 나온 보람이 있었다.

거기에 하이브의 마석까지 수십 개는 얻었으니.

멀리까지 나오느라 좀 귀찮긴 했지만 어마어마하게 남는 장사를 했다.

“일단 이 마석은 잘 갈무리해서 챙겨놔.”

“제가 넣어 놓을까요, 도련님?”

“그러는 게 낫겠다.”

파샨에게 하이브 모체의 마석을 맡기고서 동굴을 계속 걸었다.

하이브 모체가 있는 곳이 심부라고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더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켕!.. 깨갱!”

“깜짝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마수를 엉겁결에 터뜨려 죽인 것도 여러 번이었다.

별 위협이야 안 되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니까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게 짜증난다.

“그냥 전부 다 부숴버릴까.”

“그게 무슨?!”

“귀찮게 빙빙 돌 거 없이 일자로 뚫어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다가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내 알 바야?”

“당연히 알아야지!”

체닐린을 적당히 놀려먹으면서 기분이라도 풀고 있는데, 통로 저편에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뭐가 있을지는 감도 안 잡히지만 어쩌면 이 답답한 상황을 풀 단서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급히 그리로 달려갔다.

도착한 곳, 동굴 벽 중앙 부분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서 통로와 별도로 방이 뚫려 있었다.

불빛은 거기서 나왔다.

안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자, 꺄악하고 새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에는 등불과 탁자, 침구가 놓여서 어느 정도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꾸며졌는데, 남자는 하나도 없고 여자만 가득했다.

대략 잡아서 스무 명 정도인가.

옷이 좀 지저분하고 얼굴에 흙이 묻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들 반반하게 생겼다.

그 중에는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살짝 위로 올라간 눈초리.

매력적이던 긴 생머리는 도주생활 중에도 자르지 않고 유지해온 모양이다.

“찾았다.”

"아..."

나를 담은 오페이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걸 앙앙거리는 소리로 바꿔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파샨이 다가와서 까치발을 딛고 속삭였다.

“좀 이상합니다. 도련님.”

“뭐가?”

“여자들이 뭔가를 무서워하고 있는 거 같아요.”

“당연히 무섭겠지. 낯선 남자가 불쑥 나타났는데.”

“그런 게 아니라... 뭔가를 미리 알고 무서워하고 있는, 그런 느낌인데...”

헛소리 같긴 하지만 파샨은 은근히 감이 좋은 편이다.

일단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여자들 중에서 오페이아를 빼고 제일 예쁜 여자를 지목했다.

“거기, 너. 아니. 너 말고, 적갈색 머리카락. 너 말이야. 이리 와 봐.”

여자는 오들오들 떨며 다가왔다.

“사, 사, 살려주세요. 나으리. 저는 더럽고 말라서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 여기는 통통해 보이는데?”

엉덩이를 콱 쥐어서 내 쪽으로 달라붙게 하자, 여자는 기겁하면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저, 저는 벼, 병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입을 크게 열어서 뺨을 베어 무는 시늉을 했다.

“히이익!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오!”

여자는 내게서 멀어지려고 허둥지둥거렸다.

둥근 뺨에는 땀이 말라서 소금기처럼 굳어져 있었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예쁜 여자라서 그런지 그렇게 비위가 상하진 않는다.

볼을 오물오물 깨물다가 놓아주자, 여자는 얼굴에 잇자국이 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안 드세요?”

“내가 마수냐? 사람을 왜 먹어?다른 쪽으로 먹을 수는 있어도.”

동그란 엉덩이를 툭툭 치자 여자는 오히려 안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나리는... 그 작자들과는 다른... 분이신거죠?”

“누구랑 헷갈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으흑!”

여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그게... 으흐흐흑...”

“아니. 울지 말고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다독여주었다.

그 덕분인지 여자는 훌쩍훌쩍 콧물을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희를 여기로 납치해온 작자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도적 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둬만 두고... 손도 안 대고 해서... 안심했더니... 어느 날부터 저희들 중에 한 명씩 골라서 데려가는데... 간 사람이 돌아온 적이 없어서... 그래서 저희들끼리는... 끌려 간 사람은... 마수 먹이로 던져지는 게 아닌지... 으흐흑!”

여자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중언부언이긴 하지만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만하다.

누군가가 여자를 잡아다가 하나씩 하이브에게 먹였던 것 같다.

그럼 내 가설이 맞았군.

하이브는 사람을 양분 삼아 마수를 생산해내는 거야.

생각지 못 했던 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하이브에게 먹이를 던져준다는 건데.

도대체 누가 뭘 위해서 이런 짓을 꾸미는 거지?

“그, 그건 저도...”

“그렇겠지.”

나는 여자의 젖가슴을 적당히 주무르다가 풀어주었다.

여자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내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가 다른 여자들 사이로 숨었다.

그래봐야 눈도장을 딱 찍어 놨으니까 내 마수를 벗어날 순 없다.

음. 그래도 일단은 먼저 눈도장 찍어둔 여자부터 취해야지.

“오페이아.”

“... 예. 백작님.”

오페이아는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나왔다.

나는 내 것을 취하듯 거침없이 그녀의 젖가슴에 손을 뻗었다.

모양 좋은 가슴이 내 손길에 일그러지면서 폭신폭신한 감촉을 남겼다.

시골마을을 뱅뱅 돌면서 쌓였던 피로가 사르르 녹는 것 같다.

오페이아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아양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뭐가?”

“미천한 종이 백작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아둔하게 달아난 죄를 지었으니...”

몇 번이고 수청 요구를 거절하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좀 우습기도 하다.

오페이아는 내 비웃음에도 오히려 자기 가슴을 만지기 좋게 어깨를 쭉 폈다.

탱글탱글한 가슴이 내 손아귀에 착 들어왔다.

"반성하라시면 반성하겠습니다. 벌을 내리시겠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바치겠습니다. 그러니부디...”

“부디, 뭐?”

“기사 미장센을 구해주세요.”

이런 부탁을 하려고 아양을 떨었던 건가.

연인이 꼭 똑같은 말을 하는군.

묘한 감정에 젖어서 오페이아의 가슴을 쥐락펴락하고 있자니,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제가 끌려오기 전에 똑똑히 봤어요. 그는 살아있었어요. 지금도이 저주받은 동굴 어딘가에 그가 살아있을 거예요. 백작님. 저를 원하셨지요? 저를 백작님께 바치겠습니다.청컨대... 부디, 그를 구해주세요.”

“그대를 바치겠다고?"

"예. 저를 바치겠나이다."

오페이아는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몸을 붙이며 말했다.

진한 여자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옷을 하나씩 벗은 다음 옷 자락을 가슴 위에 잡아 쥔 채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미장센이 이미 동굴 밖으로 나갔단 사실은,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미장센은 구해졌고. 그녀의 소망은 성취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미장센의 일은 걱정 말도록. 그는 무탈히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오페이아는 옷자락을 잡은 손을 놓았다.

스르륵 옷감이 내려가고,흰 나신이 어두운 등불에 비추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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