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황금의 인간
* * *
급히 도시로 뛰어 내려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만 해도 좋았다.
성인처럼 후광을 내뿜고 있는 황금의 인간들은 모두 예외 없이 아름답고 선해보였다.
이들은 황금이란 이름에 걸맞게 금발금안은 물론이고 피부색까지 황금처럼 빛났다.
원래 세계에서 황금색 피부를 가졌다고 하면 상당히 이상했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태양빛 자체가 황금색이라 그런지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암실에서 빨간색이 튀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
하지만 아무리 예쁘고 잘생기면 뭐하나.
그들은 우리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저기요. 안 들립니까?"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 봐도,
"안 들리냐고."
이마에 손가락을 콕콕 찔러도,
“야. 야!”
소리를 지르며 꼬장을 피워도 그들은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불결한 걸 눈에 담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거 상당히 열 받네.
“조화롭고 현명한 자들이라면서? 이렇게 사람을 개무시해도 되는 거야?”
화리메에게 한 마디 톡 쏘자, 화리메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 도시에 들어왔을 때... 벌거벗고 있어서... 좀 그렇게 보였을지도?”
“옷이 없는데 어떡하냐고. 그래도 지금은 천이라도 걸치고 있잖아.”
“... 몰라, 나도.”
지들이 그렇게 잘났어?
나는 레시아르 백작이고, 화리메도 방계이긴 하지만 마법 명문 아우럼 가의 여식인데.
우릴 바퀴벌레 취급한다 이거지?
그럼 어디 한 번 해 보자고.
가만히 도로 한 켠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살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쩍번쩍 빛나는 인간들이라 계속 보고 있자니 약간 주눅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얼굴만 보면 화가 스르륵 풀린다.
헤벌쭉 풀어지려는 인상을 다잡고 오가는 여자들을 노려봤다. 남자들이야 내 알바 아니고.
예쁜 여자 다음에 예쁜 여자, 그 다음에는 진짜 예쁜 여자.
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개중에는 특출나게 예쁜 여자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런 여자들은 하나 같이 이마나 뺨에 한 줄로 금칠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뭐하려는 거야?”
화리메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래도 무시하나 한 번 보자고.”
여자들을 몇 명 보내고 나서, 왼쪽 뺨에 가로로 한 줄 금칠을 한 여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다리가 길고 늘씬한데다가 엉덩이가 튼실하다. 어쩐지 남미를 떠올리게 하는 건강한 미인이다.
마침 걸어오는 방향도 이쪽이겠다.
잠시 기다리다가, 먹잇감을 낚아채는 뱀처럼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노리는 건 허벅지 윗부분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엉덩이.
순산형 엉덩이에 내 손이 겹쳐지려고 한 순간.
탁.
여자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계속 걸어 나갔다.
“와... 손 맵네.”
“뭐하는 거야!”
화리메가 빽 소리치며 내 등에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우유통이 뭉개진다.
“잠깐만. 기다려 봐. 넌 나중에 또 해줄 테니까.”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오!”
화리메가 엉겨 붙어 머리를 쥐어뜯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황금의 여자들을 노렸다.
탁.
철썩.
휙.
짜악!
하지만 여자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내 마수를 손쉽게 쳐냈다.
손등이 얼얼해질 지경이다.
내가 이렇게 당한다고?
황금의 여자들은 젖먹이 적부터 무술이라도 배우나?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신체능력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거다.
"에이씨. 텄네. 텄어."
화끈해진 손등을 털며 방금 지나간 여자의 뒷태를 훑었다.
허리가 모래시계처럼 얇은 여자였는데.
“어쩔 수 없지. 황금의 여자랑 한 번 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그럴 생각이었어?!”
“뭐 먹을 거라도 좀 구하자고.”
여자도 여자지만, 뱃가죽이 허리에 붙을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일단은 배부터 채우고 나서 다시 도전해야지.
화리메와 나는 흩어져서 음식을 구걸하기로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뭐 좀 얻었냐?”
“아니…….”
“나도 똑같아. 이 새끼들 진짜 우릴 없는 사람 취급하네.”
손을 대려고 하면 따끔하게 응징하지만, 그렇지 않는 한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목을 부여잡고 죽어가는 시늉을 내도, 곡소리를 내며 징징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야 성인 남자라서 모른 척 하나 했는데, 화리메도 똑같다니.
이건 그냥 황금의 인간들이 더럽게 오만해서 우릴 같은 인간 취급 안 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런 모욕감은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은데.
“흐흐흐...”
“뭐, 뭐야? 왜 갑자기 웃고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불안한데...”
“어디 이렇게 해도 무시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도로 맞은편에 오층 정도 높이의 아담한 탑.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안에 물건들이 적치되어 있는 걸 보면 창고 같기도 하고.
여하튼 안에 사람이 없는 건 확실하다.
황금의 인간이 가지는 존재감은 육감을 저릿하게 만들 수준이라 도무지 착각할 수가 없으니까.
나는 그 탑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사막을 헤매는 동안 변변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어서 마력은 간당간당하다.
하지만 무시당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런 경험은 전생에서 겪은 것만으로 차고 넘친다.
마력을 끌어모아 울분을 풀어내듯 화염을 발사했다.
탑을 향해 불길이 넘실거리며 쏟아진다.
나를 없는 것처럼 무시하던 황금의 인간들은 그제야 내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공포나 경외의 감정이 아닌, 한심함 또는 귀찮음이 담겨있었다.
개중에 이마에 금칠을 한 여자가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레리아. 토. 아스마라토.”
탑을 휘감으려던 불길이 하늘 위로 확 치솟았다.
갑자기 속이 진탕이 된 것 같아 헛구역질이 나온다.
“윽...!”
“아그라. 루토. 마이토.”
화염은 완전히 내 통제를 벗어나서 여자의 손가락이 겨누는 대로 허공만 빙빙 돌다가 창공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여자는 열기까지 하늘 위로 높이 날려버리고선 나를 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잠시 모여들었던 황금의 인간들도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두 흩어졌다.
“우욱...!”
복부를 찌르는 통증에 허리가 절로 굽혀졌다.
무릎을 쥐고 구역질을 해보지만, 나오는 건 전혀 없다. 오히려 기침을 할수록 속이 더 심하게 뒤집어지는 느낌이다.
이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그 여자가 정확히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내 마력회로를 베베 꼬아버린 건 분명하다.
이러다가 정말 죽겠다 싶은데, 누군가가 탁탁 등을 두들겨주었다.
신기하게도 꼬였던 마력회로가 풀리면서 통증이 누그러들었다.
그 거만한 황금의 인간들일리는 없고. 화리메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리메한테 위로를 받을 줄이야. 눈물이 핑 돈다.
이제부턴 좀 잘 대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 어?”
고개를 들어보니, 화리메는 저 쪽에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돌려 내 등을 두들기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다.
여자. 황금의 여자다.
이마에 가로 한 줄, 세로 한 줄로 십자가 모양의 금칠을 했고, 왼쪽 뺨에는 세로 세 줄의 금문양을 새겨 넣었다.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서 금 문신이 가장 많다. 그리고 얼굴도 제일 예쁘다.
맑은 눈에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
턱선은 갸름하고 목도 얇아서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후광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성녀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여자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다른 황금의 인간들과는 다른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덥석.
손을 뻗어 그 여자의 팔뚝을 잡았다.
놀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오히려 내 손등을 콕콕 찔러보다가 손을 맞잡았다.
보드라운 살결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리지만, 냉정한 이성으로 생각하기에 이건 남자를 대한다기보다는 희한한 동물을 만지는 투다.
"뷰지."
대뜸 아무 단어나 뱉어보았다.
여자는 놀라지도, 딱히 무언가를 알아들은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만 갸웃했다.
말은 역시 통하지 않는 듯하고.
그래도 갑자기 입을 열면 보통은 놀랄 텐데.
황금의 인간들은 무심한 건지, 아니면 그냥 겁이 없는 건지 모르겠네.
저 신체능력에 저만한 마력이라면 겁을 먹을 상대도 없겠지만.
“뷰지?”
여자는 조심스레 내가 한 말을 흉내 냈다.
소통하려는 의지는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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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다른 황금의 인간들과 달리 상냥했다.
가슴을 만지려고 하면 손을 쳐내는 건 똑같았지만, 그 외에는 내가 해달라는 걸 선선히 해주었다.
물도 가져다주었고, 이상하게 생긴 빵도 나눠줬다. 둘 다 맛은 아주 괜찮았다.
뭣보다도 여자는 우리와 소통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마이그라? 비... 비이토?"
화리메야 여자에게서 황금의 인간들이 쓰는 말을 배우려고 기를 썼지만, 나는 반대로 여자에게 내가 쓰는 말을 가르쳤다.
배우는 거? 귀찮아.
해줘.
다행히 여자는 학습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아니, 가히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어를 말하는 방법으로 가르치니 여자는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띄엄띄엄 회화가 가능해졌다.
"너, 여자."
"나. 여자?"
"화리메, 여자."
"화리메. 여자. 나, 여자? 나, 아르토."
오. 한 번에 성별과 이름을 구분했어. 자기 이름이 아르토라는 거겠지?
"너, 아르토. 나, 바이스."
"너, 바이스. 여자, 아니다."
"나. 바이스. 여자, 아니다. 남자."
말을 마치고 바지를 벗어서 자지를 보여주자 여자, 아니, 아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바이스, 남자."
익숙한 걸 보니 처녀는 아닌가.
갑자기 아르토에 대한 호감도가 쭉 내려간다.
지금 언어교환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계승식이 코앞인데. 얼른 레시아르 령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처녀도 아닌 아르토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가 봐."
"가 봐?"
"꺼지라고. 그러니까... 여기, 너, 없다."
"아. 알았다. 바이스도 꺼져."
아르토는 아쉬운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돌아갔다.
내가 잘못 알려준 거긴 한데, 은근히 화나네.
나는 아르토를 보내고 나서 화리메와 함께 도시를 뒤졌다.
도시는 생각처럼 넓지는 않았다.
피라미드나 신전 같이 거대한 건축물을 별개로 친다면 거주 구역은 몇 시간이면 다 돌 수준이었다.사람 수도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고.
하지만 도시를 뽈뽈거리면서 알아낸 사실은 그게 다였다.
우리가 왜 여기로 끌려들어온 건지, 다시 돌아갈 방법은 뭔지, 하다못해 단서가 될 하이브의 마석을 얻을 수 있을지도 전혀 모르겠다.
“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뭔가가 떠오르긴 했다.
팔짱을 끼고 곰곰이 따지고 있자니, 화리메가 다가와 가슴을 밀어대며 물었다.
“왜 그래?”
“하이브의 마석이 황금의 인간이 흘린 피를 담은 거라고 했지?”
“응.”
“그럼 우리가 여기로 끌려 들어온 게 황금의 인간의 피에 의한 거고... 다시 나가기 위해선...”
“황금의 인간이 흘린 피가 필요하다?”
“바로 그거야.”
“정신 나갔어?”
화리메는 허리에 손을 얹고 쫑알쫑알 떠들어 댔다.
"아르토 님이 구해주지 않으셨으면 죽을 뻔 했잖아, 너. 그런데 황금의 인간들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드냐구?”
"방심해서 그래. 계획을 잘 짜서 노리면 돼."
"꿈도 꾸지 마. 이 분들은 조화롭고고귀하신 분들이야. 확신도 없으면서 일단 찔러보겠다는 건 절대 안 돼!”
황금 마법을 대대로 승계하는 아우럼 백작가 출신이라 그런지 화리메는 황금의 인간에게서 피를 빼낸다는 생각이 불경하게 느껴졌나 보다.
이런 찬밥 신세를 당하고 있어도 그렇게 느낀단 말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나는 화리메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기며 황금의 인간이 가진 피를 얻을 방법을 고민했다.
신체능력도, 마력도 모두 뛰어난 황금의 인간을 그냥 제압해서 피를 뽑는 건 어려울 테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쪽이 오히려 크게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꽤 길게 고민했지만 역시 처음에 떠올린 방법이 제일 나아 보였다.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단 한 명의 황금의 인간.
아르토의 통수를 얼얼하게 치고서 피를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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