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65화 (65/166)

〈 65화 〉 귀환

* * *

이미 한 번 당했던 일이라 얼 탈 필요도 없었다.

정신이 드는 대로 퍼뜩 눈을 떠 상황을 살폈다.

내 밑에 깔려 있던 아르토는 온데간데없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도 보이질 않고, 황금의 도시도 사라졌다.

“... 동굴이잖아.”

“정말 돌아왔어!”

나와 화리메의 말이 동시에 겹쳤다.

우리는 서로를 보곤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다시 돌아왔다고 적으로 싸우기엔 삼일 동안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렇다고 또 친하게 지내자니 어쩐지 민망했다.

쿠르릉...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암반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어 침묵을 깼다.

그렇잖아도 동굴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낙석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암벽에는 거미줄 같이 금이 가 있다.

당장이라도 동굴 전체가 무너질 기세였다.

멀지 않은 곳에 새까맣게 탄 발목 하나가 툭 놓여 있었다. 반쯤 녹아내린 가죽 구두를 보아 추측하자면 바리보예즈겠지.

시체도 남기지 않고 죽었군. 꼴 좋아.

침을 탁 뱉고 주변을 계속 살핀다. 강철의 손아귀 소속 기사들도 충격의 여파에 직격해서 몸이 산산조각 난 듯하고...

내 부하들은 어딨지?

쿠르르릉...!

천둥이 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바로 위 천장이 쩌적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작은 자갈이 어깨와 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리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굴이 무너지겠어! 일단 나가자!”

“잠깐만.”

파샨과 체닐린을 버리고 갈 순 없다.

하지만 동굴이 군데군데 무너져 있어서 그녀들이 어디 묻혀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폭발에 휘말려서 죽은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은 고개를 털어 흩어버리고서 화리메에게 도움을 청했다.

“좀 도와줘.”

“뭘?”

“네 암석 마법으로 붕괴를 막을 순 없어?”

“이 큰 동굴을 다? 불가능해.”

“그럼 여기 바위 좀 들어봐.”

“그 정도라면.”

화리메는 선선히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하나씩 바위를 들쳐보았다.

“여긴, 없고. 저기 한 번 들어봐.”

“으으응...!”

“아니네. 그럼 저기.”

“끙...!”

“저기다! 저기 들어!”

“이번엔 진짜지?”

“진짜야! 얼른!”

찍어본 건데 정말로 맞았다.

그녀들은 바위 벽 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위로 낙석이 쌓여 있었지만 절묘하게도 각도가 비껴 나가서 몸을 직격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친위대원들이 쓰러져 있다.

코에 손가락을 대어보았지만, 숨이 나오는 기색이 없다.

애초에 마력이 많지 않은 친위대원으로서는 폭발을 버티기 힘들었겠지.

그래도 쓰러진 자세를 보건데 폭발하던 순간 내 쪽으로 달려왔던 것 같다. 이들이 대신 막아준 덕분에 파샨과 체닐린은 영향을 덜 받은 것 같고.

나는 친위대원들의 신분패를 챙기고서 파샨과 체닐린에게 다가갔다.

화리메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그 여자들, 살아있어?”

“그래.”

미약하기는 하지만 숨을 쉬고 있다.

체닐린이야 전 기사단장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파샨은 정말 잘 버텨주었다.

“흣차.”

키가 큰 체닐린은 어깨에 걸치고, 체구가 작은 파샨은 가슴 앞으로 둥글게 말아서 안아 들었다.

“... 가자!”

나와 화리메는 출구를 찾아 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동굴의 붕괴는 점차로 더 가속화되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오면서 무슨 충격파가 발생했기 때문이겠지. 원리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따질 건 아니다.

쿠르릉!

또 한 번 머리 위로 낙석이 쏟아져 내렸다.

"히얍!"

화리메가 팔을 휘저어 낙석을 반대편으로 날려버렸다.

갈림길.

쭉 뻗은 통로와 바위가 잔뜩 쌓여 막힌 통로가 드러났다.

"어, 어디로 가지?"

"저쪽으로 가자!"

"막혀 있잖아?"

"저기가 지름길이잖아. 네 마법으로 어떻게 좀 해 봐."

"참내."

화리메는 기막혀 하면서도 암석 마법을 활용해서 막힌 길을 뚫고 낙석을 치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수들이 뛰어나왔다.

"캬릉!"

"수그려!"

"꺗!"

마력창을 쏘아 마수들을 너덜너덜한 고깃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피와 살점이 동굴 벽에 붙어 축 늘어졌다.

"우욱."

"토할 시간 없어. 빨리 움직여!"

화리메의 궁둥이를 한 번 걷어차 주고, 먼저 앞장서서 달렸다.

바닥을 박차고 달릴 때마다 앞뒤로 업힌 파샨과 체닐린이 흔들거리는 게 신경 쓰이긴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

두 여자를 들쳐 업으며 바쁘게 발을 놀렸다.

"낙석이야! 멈춰!"

"네 마법으로 치워! 그대로 주파한다!"

"에잇...!"

바위가 굴러 떨어지든 말든 멈추지 않고 달렸다.

화리메는 바쁘게 손가락을 휘저으며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낙석들을 전부 치워냈다.

"저 앞에 빛이 보인다!"

"어디, 아! 정말!"

"위에 낙석!"

"아...! 정말...!"

"쉬지 말고 달려! 저 앞이야!"

"헥... 헥..."

화리메와 서로 도우면서 동굴 입구를 빠져나온 순간.

쾅! 쿠르르릉!

동굴은 결국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우리는 한 발 차이로 간신히 동굴을 벗어났다.

“하아. 하아. 하아.”

화리메는 땅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지만,나는 안전하겠다 싶은 구간까지 계속 달렸다.

"가, 같이 가!"

화리메도 헉헉거리며 따라왔다.

등 뒤로 바위가 무너지고 구르고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꽤 멀리까지 바위조각이 튀어 오르며 날아왔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되겠지.

동굴 입구로부터 이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적당히 양지 바른 평지가 있었다.

나는 땅을 고르고서 그 위에 파샨과 체닐린을 차례대로 눕혔다. 둘은 파리한 안색으로 눈을 딱 감고 있었다.

어쩐지 혼수상태에 빠진 이데트 누이를 연상케 했다.

나는 우선 파샨의 소담한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미약한 맥박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력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있다.

외상보다도 내상이 더 심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땀을 닦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 부드러운 게 만져져서 돌려 보았더니, 아르토의 옷가지였다. 그녀를 벗길 때 슬쩍 내 허리에 감아두었는데, 내가 돌아오면서 같이 딸려온 것 같다.

치마 허리자락에는 호리병이 매어져 있고 안쪽 주머니에는 황금빛 사과도 들어 있었다.

“그게 뭐야?”

화리메가 관심을 보였다.

“아르토가 갖고 있던 물건. 나랑 같이 전이된 거 같은데.”

“거기서 아르토 님의 기운이 느껴져.”

"그런 건 어떻게 아냐?"

"말단이긴 하지만 황금 마법을 익혀뒀으니까. 아르토 님은 황금의 인간이었고."

“음…….”

아르토는 내 마력이 뒤틀렸을 때 그걸 손 한 번 대서 치료해냈다.

그녀가 들고 다니던 음식도 뭔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해봐서 손해볼 건 없다.

나는 파샨과 체닐린에게 호리병 안에 든 꿀술을 손가락에 적셔서 입 안에 넣어 흘렸다.

그렇게 꿀술을 절반 정도 비우고 나서, 사과는 잘게 씹어서 입으로 넘겨주었다.

“우...”

꿀술과 달리 사과는 고체라 그런지 파샨이 자꾸 뱉으려고 해서 먹이는 게 힘들었다.

가능한 잘게 씹어서 죽처럼 만들어 다시 파샨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 꼴깍.”

드디어 먹었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옆에 털썩 앉았다. 화리메도 곁에 붙어 앉았다.

그녀는 딱히 파샨이나 체닐린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내가 여기 있으니 같이 있는다는 식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일단은 아티아로 돌아가서 계승식부터 올려야지. 넌?”

“넌? 너어언?”

화리메는 화를 내며 내 허벅지를 주먹으로 탁탁 때렸다.

“임신했을 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넌 어떡할 거냐고? 그래! 난 어떡할까! 응? 배가 불러오든 말든 본가로 돌아가서, 레시아르 백작한테 강간당했다고 일러바칠까? 응?”

“아야. 야, 그냥 물어본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당황스러웠지만 자연스럽게 원래 다 생각해두었다는 식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뻔뻔하게 나가자 화리메는 주먹을 풀었다.

"어떡할 건데, 그럼?"

“당연히 내가 데려가야지.”

“아티아로?”

“그래. 가서, 첩실로 맞이할게. 이해하지?”

“... 흥.”

화리메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아무리 마법 명문 아우럼 가 출신 마법사라도 방계를 정실로 들일 수는 없다. 그럼 레시아르 백작가의 격이 떨어지게 되니까.

그건 그녀도 잘 알고 있겠지.

여하튼 그녀와 나는 좋건 싫건 한 배를 탄 몸이 되었다.

처녀를 잃은 여자는 사교계에 나설 수 없으니 화리메는 내게 의지할 수 밖에 없고.

나도 내무대신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면 화리메를 내 편으로 만들든지, 죽이든지 해야 한다.죽이는 것보다는 아군으로 만드는 게 낫지.

어찌됐든 거유 마법사를 첩실로 들이는 건 명백히 이득이다.

아우럼 백작가에서 견제구를 던지긴 할 테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화리메는 활용도가 높은 암석의 마법사니까. 게다가 황금의 도시에 다녀오면서 황금 마법도 익혔고.

그 외 하이브의 마석들도 상당히 챙겨뒀으니, 시간을 들이긴 했어도 이번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목표였던 오페이아의 처녀도 땄고.

화리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길 십분 여.

“... 콜록.”

파샨이 기침을 하더니 눈꺼풀을 부르르 떨었다.

손을 쥐고 손등을 비벼 따뜻하게 해주었더니, 곧 파샨은 가늘게 눈을 떴다.

“도련... 님...”

“파샨!”

“괘... 괜찮으세여...?”

“난 당연히 괜찮지. 봐, 이 탄탄한 몸을.”

뒤이어 체닐린도 눈을 떴다.

“적... 적들은...?”

“괜찮아. 내가 다 해치웠어.”

“그런가... 호위된 자로서... 송구하군...”

체닐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체닐린보다 내가 강하고.

친위대원들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파샨과 체닐린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는 그녀들을 토닥이고 남은 꿀술을 조금 더 먹였다. 냄새가 워낙 좋아서 나도 한 입 마시고 싶긴 했지만 꾹 참았다.

파샨과 체닐린은 호리병을 기울여 조금씩 꿀술을 마시고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상처를 회복하려면 푹 자고 많이 먹는 게 최고지.

나는 두어 모금 정도 남은 호리병을 기울이려다가, 문뜩 이데트 누이를 떠올리고는 그대로 허리춤에 매달았다. 마력이 꼬였던 파샨과 체닐린에게 효과가 있었으니.이데트 누이에게도 효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남은 꿀술은 잘 갈무리해서 가져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계승식 일정이 걱정인데.

황금의 도시에서 보낸 시간이 삼 일이나 되니까... 여기서부터 아티아까지 돌아가는 길을 셈해보면 아슬아슬할지도 모르겠다.

파샨과 체닐린을 두고 갈 수도 없으니 행로는 더 늦춰질 수도 있고.

“곧 있으면 해가 질 거야.”

화리메가 서쪽으로 져가는 태양을 가리켰다.

일단은 오늘 묵을 곳부터 구해야겠다.

내일부터 마차라도 구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석양에 의지해 짐을 정리하고 길을 잡으려는데,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무언가가 저녁 해를 가리고 있었다.

"끼루룩­ 끼루루룩­"

갈매기 울음소리.

우리 위를 빙빙 돌며 활공하고 있는 건 꽤 거대한 비행체, 아마도 새였다.

“마수인가?”

“이 쪽으로 오고 있어!”

“준비해. 화리메.”

화리메는 두 손을 삼각형 모양으로 모아 번쩍이는 황금방패를 만들어냈다.

어둑해지던 주위가 단숨에 환하게 밝아지면서 괴조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는 검은데 배는 하얗고, 커다란 날개 밑에는 가로로 청록색의 줄이 두 개나 나 있다. 크기는 밑에서 가늠하기 어렵지만 성인 남자 열 명 정도는 거뜬히 태울 정도다.

“신호하면 바로 공격해.”

“알았어!”

“공격하지 마세요!”

마수 위에서 누군가가 급히 소리쳤다.

괴조가 날개를 펄럭이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화리메가 어떡하면 좋겠냐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글쎄. 일단은 두고 볼까.

크기는 크지만 저 괴조 한 마리가 마법사 둘을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잠시 기다리자, 괴조가 날개를 아래로 연신 흔들어대며 천천히 지면에 내려앉았다.

놈은 꽤 온순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괴조의 목 위에서 누군가가 풀쩍 뛰어내렸다.

집사 뮌의 길게 쭉 찢어진 눈가를 쏙 빼닮은 여자.

이오시스였다.

"백작님. 가신 이오시스가 인사 올립니다."

“뭐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오페이아와 기사 미장센이 알려왔어요.”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특하군. 돌아가면 오페이아에게는 상을 줘야겠다.

“그런데 이 새는 뭐야?”

“백작님이 진상 받으신 예물인데, 기억 안 나세요?”

“글쎄…….”

“디간트 상단의 게오르그가 바친 고타마입니다.”

상단에서 예물을 바칠 때 말인가. 그때는 카린의 말 보지를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커다란 알을 하나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주먹코가 괜찮은 선물을 해줬군.

“잘 됐어. 이걸 타고 가면 계승식에 늦지는 않겠네."

"말보다 열 배는 빠르니 고타마를 타시면 늦어도 모레 중에는 아티아에 도착하실 거예요."

이오시스를 적당히 칭찬해주고 이 예물을 바친 사내에 대해 물었다.

"그 자는 어떻게 지내나?”

“백작님께 예물을 거부당했다는 소문이 돌고나서부터는 아무도 디간트 상단의 어음을 받질 않아줘서...”

이오시스는 말을 흐렸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줘. 그렇다고 또 너무 밀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고타마를 올라탔다.

놈은 순한 눈동자를 하고서 부리로 파샨과 체닐린, 화리메를 차례대로 제 등 위에 올렸다.

우리는 석양을 등진 채 거대한 괴조를 타고서 아티아로 돌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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