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덕영주의 귀축성행기-66화 (66/166)

〈 66화 〉 면담

* * *

“늦으셨습니다.”

부관인 타라가 급히 내 셔츠를 벗기며 말했다.

“우리가 벌써 이런 사이던가? 아, 오해는 말아.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귀관의 마음을 내가 너무 오랫동안 모른 척 했나 봐.”

슬쩍 가슴을 향해 뻗는 손을 타라는 무심하게 피해냈다.

“가만히 계십시오. 백작님. 시간이 없습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단추를 끌러내며 말했다.

그 옆으로는 메이드 유리와 데이지가 좌우로 붙어서 내 몸에 향유를 발랐다. 다리 밑에서는 메이드장 세리야가 새로 맞춘 바짓단을 맞추고 있다.

마네킹이 되어버린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있나?”

“면담 일정이 밀려 있습니다. 적어도 귀빈들은 계승식 전에 만나보셔야 합니다. 백작님께서 직접 약속을 잡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씻을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불평을 하자 타라가 새하얀 백발을 쓸어 넘기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노려보는 건 아니지만 순백의 미인이 티 하나 없이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 나라도 약간은 기가 죽는다.

“어흠. 흠.”

“바로 어제까지 천천히 온천욕을 즐기다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누, 누구한테 들었어?”

“체닐린 양에게서요.”

“이게 감히...”

괴조 고타마가 생각보다 빨라서 아티아에 들어오기 전에 근처 마을에서 온천에 들어가긴 했다.

대충 씻고만 갈 생각이었는데 단신 거유 화리메에 장신 미녀 체닐린, 귀여운 파샨, 엉덩이 큰 이오시스까지 여자가 넷이나 있으니까 좀 즐기게 되긴 했지.

체닐린 이건 자기도 즐길 거 다 즐겨 놓고 일러바쳐?

속으로 징벌을 다짐하고 있는데, 타라는 내게 뻣뻣한 새 셔츠를 입히면서 목에 프릴까지 둘렀다.

“아니, 내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싫어도 하셔야 합니다. 레시아르의 신민들은 물론이고 주변 영주들까지 모두 백작님만을 바라볼 테니까요.”

뭔가 내게 삐진 것 같은데,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이쯤 되면 내 입안의 혀처럼 구는 마티란 자작이 도와줄 법도 한데.

마티란 자작은 창가에 놔둔 흔들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부채를 들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만 있었다.

출산 직전으로 크게 부풀어 오른 배에 올려둔 손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 있다.

“사랑스러운 나의 루이사. 그대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어서 얼굴을 가리고만 있는가?”

“마음에 안 든다니. 그럴 리가요.”

마티란 자작은 짧게 대꾸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 왜 이래?

“귀여운 아가씨를 데려오셨더군요.”

“화리메?뭐... 그렇지.”

“첩실로 삼으신다고.”

아차. 벌써 만났나.

그렇잖아도 자존심이 강한 두 여자가 서로 만났다면 충돌 없이 끝났을 리가 없다.

마티란 자작의 기분이 상한 걸 보면 승자는 화리메였나보다.

“아직 저도 첩실로 공인받질 못했는데... 역시 각하께서는 젊고 어린 여자가 더 좋으신 거죠?”

마티란 자작은 부채를 눈 끝까지 올려 흑흑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빈손으로는 과장스럽게 부푼 배를 쓸어 돌리는 게, 수작이 뻔하다.

자기를 임신시켜놓고 다른 여자를 첩실로 데려왔냐는 거겠지.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여기서 달래지 않으면 나중에 좀 귀찮아질 것 같다. 임신 중에 원한을 사면 평생 기억한다는 말도 있고.

나는 다닥다닥 붙어서 옷을 다듬고 있는 여자들을 끌다시피 어기적어기적 걸어가서 마티란 자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그대를 저버릴 리가 있나. 화리메는 필요가 있어서 데려온 거야. 그, 이번에 가져온 마석들 있잖아? 그걸 얻은 게 따지고 보면 다 화리메 덕이지. 그대에게도 넉넉하게 나눠줄 건데...”

“그런가요?”

이득으로 밀어붙이려고 했지만 마티란 자작은 샐쭉 눈을 흘기고 넘겼다.

“어허. 정말 왜 이래. 화리메야 그냥 여자일 뿐이고. 루이사 그대는 내 공신이 아닌가 말이야.”

“저를 더 아끼신다고요?”

“그럼!”

“정말이지요?”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 한 적이 있던가?”

최대한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마티란 자작은 부채를 코끝에 착 붙이고 눈꺼풀을 깜빡이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각하께선 공언을 하신 적이 없는 걸요. 그런데 각하께서 첫 번째로 첩실 삼으신 것도 바로 저였지요?”

“어... 뭐...”

“그랬지요?”

“그런... 그런 걸로 할까?”

그제야 마티란 자작은 부채를 내리고 휘영청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띠웠다.

거짓울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태도를 뒤집어서 여우처럼 웃는 걸 보니 허탈하긴 하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야 내 여자들 중에서 마티란 자작만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으니까 실세 행세를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새로 들어온 화리메는 방계라곤 해도 명문 백작가 출신이고, 게다가 마법사다.

마티란 자작으로서는 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지금 입지를 다져두지 않으면 더 밀리게 될 거란 초조감도 있을 테고.

지금 마티란 자작에게 확약해버리면 나중에 화리메에게는 따로 또 쪼이긴 하겠지만... 그런 귀찮은 건 나중의 나에게 전부 떠넘기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옷매무새 정리가 끝났다.

메이드장 세리야가 안경알을 빛내며 최종정리를 마쳤다.

“백작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고마워, 세리야.”

다른 여자들에게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남기고, 메이드의 안내에 따라 저택을 나가 정원으로 향했다.

눈이 녹고 땅이 질퍽해질 계절이라 경관이 더러워질 법도 한데, 열심히 정리를 했는지 정원은 환절기에도 아름답기만 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가 등을 돌리고 아티아 시내 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 희끗희끗 새치가 나긴 했지만 체격이 워낙 좋아 누가 보아도 노인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이 나를 보고는 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턱이 각지고 눈썹은 송충이처럼 굵다. 젊었을 적에는 한 성깔 했을 것 같지만 세월에 덧붙여진 약간의 주름과 볼 패임이 그를 진중하게 보이게 한다.

“파티스트롬 공작 각하. 레시아르 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초대해줘서 고맙소. 레시아르 백작.”

나와 그는 거의 동시에 손을 뻗어 악수를 나누었다.

예순을 넘겼다고 들었는데,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악력은 만만치 않다. 마력도 평균적인 금혈 귀족보다는 약간 많은 편.

그가 일곱 가지 속성에 적성이 있어 마법사가 되었다면 우리 레시아르 령은 상당히 골치가 아팠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놓았다.

상대에 대해서 평가 내린 건 나뿐이 아닌지, 파티스트롬 공작도 꽤 놀라워하다가 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부란타 고원에서는 딸아이가 신세를 졌네.”

“아마트리체 영애 말씀이시군요. 공작님을 닮아서 그런지 결단력이 있고 현명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없었더라도 마수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겁니다.”

공작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백작께서 딸아이를 추켜 세움이 지나치군. 여하튼 레시아르 백작위를 적법하게 승계한 것을 축하하네.”

파티스트롬 공작은 호기롭게 내 승계를 인정했다.

인근 영주끼리 정통성에 괜한 트집을 잡는 것도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영지전을 거치며 레시아르 령의 우위가 확고해진 마당이니.

그래도 나름대로 호의를 보인 것이긴 하니까 나는 짧게 목례하여 감사를 표했다.

“그건 그렇고. 딸아이가 백작에게 관심을 보이더군.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면서?”

나를 떠보는 파티스트롬 공작의 얼굴에는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얼굴과 동시에 기회를 살피는 영주의 얼굴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음. 아마트리체 영애는 지성도 있고 출신과 성품 모두 괜찮으며 무엇보다 미인이었지만, 내 자유로운 성생활을 인정해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어물쩍 넘어가기로 했다.

“글쎄. 언제 기회가 닿으면 다시 만날 일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래서 내 데려왔지.”

“예?”

“리체. 들어오렴.”

공작이 손짓하자, 분수대 뒤편에서 아마트리체 영애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이전에 봤을 때는 백금발을 당고머리로 올려 땋았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머리를 길게 풀어서 내렸다.

취향 차이긴 하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백금발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거 같긴 하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마트리체 영애.”

“그간 잘 지내셨나요, 백작님?”

아마트리체 영애는 살며시 웃으며 자신의 손등에 닿는 버드키스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살이 좀 빠지셨네요.”

“영애도 아다시피 이번 겨울에 마수들이 워낙 횡행을 해서 말이오.”

“백작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어쩌겠소. 내 사람들을 지키려면 어깨에 지워진 책임은 감당해내야지.”

오페이아를 쫓아서 영지 절반을 종주한 일은 굳이 얘기할 건 없지. 아마트리체 영애의 눈빛이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애써 턱을 올리며 자부심 있게 대답해줬다.

“아. 약속했던 대로 차관을 가지고 왔어요.”

“그것 참, 반가운 일이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에 쓰실지 여쭈어도 될까요?”

“결례랄 것까지야. 일단은 도로를 내려고 생각 중이오. 항구도시까지 도로를 부설하여 일거리를 만들고, 싼 값에 곡물을 들여오면 내 백성들의 굶주림이 덜어지겠지.”

“다른 귀족들이었다면 저택을 증축하거나 미녀들을 들일 텐데. 역시 백작님은 대단하세요.”

아마트리체 영애는 싱긋 웃었다. 약간 찔리긴 한다.

미녀야 당연히 들이는 거니까 말 안 한 건데.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에 공작이 끼어들었다.

“선남선녀가 그렇게 정답게 지내니 보기 좋군. 허허.”

“아버님도 참.”

“빈 말이 아니다. 리체. 네가 레시아르 백작 옆에 서니 내 근심이 싹 사라지는 듯 하구나.”

이거 아예 대놓고 제 딸을 밀어준다.

파티스 공작 입장에서는 갑자기 지역의 패자로 급부상한 레시아르 령과 어떻게든 우호를 유지하고 싶을 테니. 거기에 나 정도면 꽤나 괜찮은 사윗감이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붙이려고 하면 거절하는 것도 어려운데. 싹둑 쳐내면 원한을 사게 되니까.

그럼 어차피 꺼내려던 화두가 있으니까…….

나는 시답잖은 결혼 화제 따위는 밀어버릴 수 있는 폭탄을 터뜨리기로 했다.

“공작님.”

“왜 그러신가. 백작?”

“하이브, 아니, 네스트에 대해 아십니까?”

딸 앞에서 실없이 웃던 파티스트롬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작. 그건 어떻게…….”

“공작님보다 제가 먼저 알았을 겁니다. 아마 더 자세히 알 테구요.”

화리메를 첩실로 받아들이며 취한 이득 중 하나가 바로 중앙의 의도를 캐물을 수 있었다는 거다.

그녀는 나와 한 배를 탄 입장이 되었으니, 중앙이 지방으로 하이브를 뿌린 이유를 순순히 설명해주었다

그 중앙에 협조한 아우럼 백작가의 목적까지 털어놓진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레시아르 령에서 살다보면 친정의 비사를 밝힐 날이 언젠간 올 거다.

“아니. 그 이전에 이것부터 물어야겠군요. 이번 겨울에 창궐한 마수 무리 때문에 파티스 공국에 피해가 얼마나 났습니까?”

“백작. 그건 말해주기 곤란하네.”

“공국의 기밀을 캐내려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도…….”

“그럼 저부터 얘기하지요. 레시아르 령은 조기에 네스트를 발견하고 기사단을 총동원하였음에도 중형 마을 세 개와 소형 촌 스무 개 이상을 잃었습니다.”

겨울 길을 오가던 상인들이 마수에 잡아먹히면서 발생한 손해는 더 크다.

물류가 끊기면서 생필품 물가가 오르고, 주도인 아티아에까지 아사자가 생겨났다. 일단 구호품을 풀긴 했지만 행정으로 경제를 부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이만하면 주변 영지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대처를 잘 해냈다고 자부한다. 초동 대처에 늦은 영주들은 앉은 자리에서 피를 줄줄 흘릴 수밖에 없겠지.

파티스트롬 공작도 예외는 아닌지,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수확철이 되어야 알겠지만, 금년에는 세수의 일 할이 줄어들지도 모르네. 겨울이라 병력을 움직이기 힘들었던 게 뼈아팠어. 뒤늦게 눈길을 뚫고 군을 보내면 그 곳에는 이미 시체만 남겨져 있었지.”

“피해가 만만치 않군요.”

“백작이 솔직하게 밝혀주니 나도 그에 화답한 걸세. 이 사정이 밖으로 퍼져서는 안 돼.”

“그야 물론이지요.”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마 병무대신이 중앙의 기사단을 이끌고 마수들을 막아주었기에 손해가 이만한 걸로 그친 걸세.”

나는 잠시 그의 말을 멈추었다.

“병무대신 올드완 말이지요. 저도 그 자를 부란타 고원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마수들을 제거해주는 대가로, 공작님은 병무대신에게 무얼 주었습니까?”

나는 내무대신 바리보예즈에게 하이브의 마석을 주었다. 그건 내가 하이브에 관해 미리 알고, 그 끔찍한 흉물들을 사냥해놓았기 때문이고.

정보가 부족했던 파티스 공작은 더한 예물을 바쳐야 했을 거다.

공작은 말을 해도 될지 잠시 망설이다가, 어차피 더 숨겨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세 개 도시의 이년간 징세, 징병권을...”

“과하게 주셨군요.”

“어찌하겠나? 병무대신이 없었더라면 공국은 더 힘들어졌을 게야.”

“마수들이 창궐한 게 병무대신, 그러니까, 중앙의 탓이었다면. 그래도 그만한 보상을 주셨을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공작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나는 공작의 시종을 흘낏 보았다. 공작은 단박에 시종과 호위기사들을 모두 물렸다.

“딸아이는... 함께 들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허면 이제 얘기해주게.”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서부터 얘기하도록 하죠.”

나는 이오시스에게 들은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하여 공작에게 요약해주었다.

국왕과 영주의 이해는 항상 충돌한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은 이 시대의 주의(??)이고, 그것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왕과 영주는 서로 웃으면서도 호시탐탐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노린다.

물론 중앙의 힘은 강대하지만, 모든 지방 영주들이 일치단결하면 그들을 전부 억압할 수는 없다.

결국 중앙와 지방의 힘겨루기가 거대한 전쟁으로까지 번지는 일은 잘 없다.

중앙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영지전을 유도하여 영주들 간의 힘을 빼놓거나, 실체도 없는 반란을 꾸며내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도다.

“백작.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과 이번 겨울의 일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폰세르크 국왕이 영지전이나 가장 반란 따위에 싫증이 났으니 문제가 생긴 거지요.”

“그 말은?”

“국왕이 더 교묘하고 간사한 술책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우리 지방 영주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요.”

그는 아우럼 백작가로부터 태양의 인간들의 피가 든 마석을 공급 받아 마더 하이브를 만들어냈다.

마더 하이브가 낳은 하이브는 다시 인간의 혈육을 흡수하여 마수를 낳는다.

마수는 인간들을 사냥하여 마더 하이브나 하이브에게 바치고, 그걸 흡수한 하이브는 더 많은 괴물을 양산해낸다.

기하급수적으로 마수가 늘어나 왕국의 방위에 해를 끼칠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적당한 시기에 중앙에서 기사단을 파견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중앙의 도움을 받은 지방 영주들은 큰 이권을 내놓아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다.

중앙으로선 큰 지출 없이 영주들의 힘을 빼놓으면서 자신의 힘은 늘릴 수 있는 교묘한 책략이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중앙의 자작극에 영주들이 놀아난 것이다.

“... 쉬이 믿을 순 없군. 폰세르크 국왕 폐하께선 그리 성정이 잔인한 분이 아니야. 내가 그 분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왔네.”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럼 한 가지 여쭙지요. 이번 겨울, 공작께서 병무대신을 청하여 부른 것입니까, 아니면 병무대신이 스스로 기사단을 이끌고 온 것입니까?”

“병무대신이 직접 왔지만...”

“너무 시기적절하게 원군이 왔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공작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내무대신 바리보예즈는 내 논문심사를 빙자하여 레시아르 령으로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병무대신 올드완도 나름의 핑계를 대고 파티스 공국으로 찾아갔겠지만, 그 핑계가 뭐든 간에 마수 떼가 갑자기 등장한 후에 강력한 병력이 방문하였다는 건 너무나도 공교롭다.

“증거는... 증거는 있나?”

그렇게 묻는 파티스트롬 공작은 이미 증거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공작께서 지금 흘리시는 그 분루(??)가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파티스트롬 공작은 급히 눈물을 닦고는 분개하여 소리쳤다.

“백작의 말이 더없이 옳아! 이 눈물이 증거가 아니면 뭐가 증거란 말인가!”

“맞습니다.”

“내 이 나이까지 왕국의 성벽으로 북방을 지켜왔건만,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나를 속여!”

아마트리체 영애가 공작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버님. 레시아르 백작께서 보고 계세요.”

“이런... 미안하군. 백작. 못 보일 꼴을 보였어.”

“괜찮습니다. 저도 똑같이 중앙에 속은 영주로서 공작님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작은 잠시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다가 물었다.

“하지만 내게 이런 걸 다 알려주는 이유가 뭔가?”

“저희가 공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지요.”

내 말에 파티스트롬 공작의 얼굴이 조금 피었다.

중앙에 대항하여 지방의 영주들이 힘을 합친 사례는 당장 이 다키아 왕국의 역사책만 뒤적여도 수백 건은 나온다.

그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중앙의 쥐새끼들이 이 파티스트롬 공작을 속이고 달아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냥 넘어간다면 중앙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저희들을 속이고 탈취하고 끝내는 삼키려 들 겁니다.”

“혹시생각해둔 수라도 있나?”

“일단 저희 쪽에서 중앙을 먼저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

다행히 파티스트롬 공작은 분노에 눈이 멀어 세력을 오판하지는 않는 듯했다.

중앙과 지방, 그것도 서북방 일부의 세력 차이는 여실하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적을 우리가 잘 아는 지역으로 끌어들여 싸우는 것뿐이다.

“다행히 중앙은 저 멀리 있고, 우리는 원하는대로 전선을 형성할 수 있으니, 아군의 세를 늘리고, 적의 세를 줄이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손뼉을 쳤다.

“중앙에 아첨하는 쥐새끼들을 먼저 속아내자는 거군.”

“예. 친중앙 성향의 영주들에게 무차별 영지전을 개시할 겁니다.”

“잠깐, 혹시 그럼 이번 계승식에서...?”

“예. 모여든 영주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할 겁니다. 중앙이냐, 우리냐. 중립이란 있을 수 없으니 한쪽을 고르라고. 선택은 자유지만, 만약 중앙을 고른다면 레시아르의 마법사와 일전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하하하하! 대단하군! 대단해!”

파티스트롬 공작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내무대신 바리보예즈가 간접적으로나마 내 손에 죽은 이상, 중앙과의 한 판은 피할 수 없다.

놈들은 바리보예즈가 레시아르 령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배후자로 나를 지목할 테니.

그렇다고 나만 당할 순 없잖아?

판을 불려서 다키아 왕국 서북방의 영주들을 모두 규합해야 승산이 올라간다.

“승산.승산은 있다고 보나?”

“영지전에서는 질래야 질 수가 없습니다. 관건은 중앙에서 언제, 얼마만큼의 규모로 개입해오느냐인데... 사견으론 제국도 배후에 있으니만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제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우리야 수 틀리면 제국에 의탁하겠다고 하면 되니까.”

공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국에 의탁할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지만, 그런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앙에서는 우리를 너무 핍박할 수는 없게 된다.

“중앙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중앙의 죄는 피와 금으로 갚아야 합니다. 피와 금으로!”

“피와 금으로~!”

한참 말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도다다다 달려와서 내 다리를 퍽 쳤다. 아니. 다리를 끌어안았다.

조그마한 정수리가 내려다보인다. 깜찍한 노란색 드레스.

아이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자, 또랑또랑한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깨끗한 은발도.

“히아신스. 뛰면 안 된다고 했잖니.”

뒤에서 모성이 담긴 상냥한 음성이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은회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내린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리안 부인.

켈자르 백작의 며느리이자, 차기 영주 유구라드의 아내.

정숙한 여자지만 내게는 두 다리를 벌려 씨앗을 태내에 받은 여자.

파티스트롬 공작에 이어 두 번째 귀빈으로,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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